하나님은 왜 아들을 보내셨는가? 그 아들은 왜 죽었는가? 에 대해서 그렇게 하는 데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우리가 따라 잡아야만 성경이 하는 가르침에 도달할 수 있다
빌립보서 2장에서, 그 방법이, 십자가에 죽는 방법이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서 아주 완벽하게 승복하신 증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느 한 인물을 평할 때 멀리서 그를 칭송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와 같이 살아보면 얼마나 골치 아팠겠는가? 그런 식으로 한 사람의 사실 평가는 측근에 의해서 일어나야 된다. 이게 하나님이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이유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증명을, 우리 동시대의 율법사들이 혹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들어서 폭력밖에 결과시키지 못한 것과 대비되어서, 자신들의 지위를 공포와 권력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과 대비되어서,
하나님은 그 아들이 기꺼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의 뜻을 온전히 승복하여 기쁜 마음으로 <그는 본체시나 하나님과 등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태로 인간으로 나타나사 죽기까지 복종하는 이 기꺼운 항복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증명하신다.
그 아들의 승복, 항복으로 자신을 증명하시는 하나님.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어 인류를 구원하기로 했을 때, 그의 구원이 아들의 항복이 있었던 것처럼,
신자들의 항복에 의해서, 모든 세대와 역사의 결국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동참으로 결과된다.
이걸 얘기하고 싶은 게 요한복음이다.
여기가 우리가 헷갈리는 부분이다. 왜 그가 창조주와 심판주로서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죽느냐 이거다.
죽음으로도 그 폭력을 감수하여, 창조와 심판에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영광의 하나님을 담아내는, 그것으로 이것을 훼손하지 못하는 그런 자리까지 예수님이 들어가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은 항복할 만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정말 다른 분이시다. 예수를 보라` 이렇게 된 것이다.
그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는 나를 따라오라' 이렇게 된 거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서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을 만들어내는 '이 놀라운 일에 네가 참여해라' 이렇게 요구하는거다.
에베소서 3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됐다. 그가 하는 말은 이거다; 이 일에 예수님이 그러신 것같이, 내가 복음을 들고 나갔을 때 저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온갖 험한 고난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다'
교회란 신비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여기는 권력을 가지지 않는다. 그저 믿음의 공동체이다. 힘을 가지지 않는데, 이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하나님이 일을 해서, 여기 있는 대로 말하자면,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었던 힘에 의한 승리, 힘에 의한 명분을 다 깨신다. 왜 깨냐고?
그것보다 큰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가장 강한 힘보다 사랑이 더 크기 때문에 그렇다.
사랑타령을 하면 사랑이 되는게 아니라, 힘으로 하는 문제를 우리가 극복해야 된다. 힘의 의한 손해를 보는 것으로 원망을 하면 안된다.
원망을 하지 마라가 아니라, 힘을 가져서 누구를 울려서 승리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치 않는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누구를 지옥에 보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니 이제 생각을 다시 해 보자. 끝에 이렇게 나온다. 에베소서 3장13절,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이게 영광이라고 한다. 이 고난이.
●하나님이, 이 세상이 겁내는 고난, 슬픔, 아픔, 절망, 죽음 앞에 나를 세워서, '그런 것들이 최고의 권력이지 않다'고 나를 쓰신다.
그것이 예수의 오신 이유이었고, 예수를 통하여 아들을 통하여 받으시려는 하나님에 대한 증언이었고,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들에게 영광과 기쁨이었고, 우리 인생에도 예수믿는 자들에게 최고의 명예다, 이렇게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뭘 넘어서야 되는지를 알아야 되는 거다. 힘의 논리, 승부의 논리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 당장 이 말이 생각이 날거다; `그럼 어떡하란 말이냐?`
그 `그럼 어떡하란 말이냐?`는 우리가 절벽 앞에 선 것 같다. 여기에 발을 내디디라고 하는 것이니까. 우리가 알고 있었던 모든 안심과 만족이라는 그 허구를, 그 기만을, 그 공포를 넘어서라고 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3장에 가면 사도바울은 고백한다.
무슨 고백이냐 하면, 예수를 믿고 그 다음에 황홀경에 들어가거나 천국으로 불러가거나 더이상 이 현실에서 드러나는 여러 어려움과 죄악된 것과 관계없는 자리로 갈 것으로 기대가 되는데,
바울이 깨달은 것만 해도 내가 어찌하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에 동참하여 부활로 가는 그 과정을 받아들이는 이 고백은, 우리 조금 전에 얘기한 식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성육신을 이해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고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이 가장, 세상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고통 속에 들어가라고 한다.
왜 그러는가?
그런 깊이까지 들어가야 반전이 그만큼 올라온다.
다 살면서 경험했다시피, 형통하면 뇌가 녹이 슨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고민을 할 필요가 없게 살게 해 주세요` 그러는 것은 성육신을 거부하는 거다. 인간은 생각을 해야 되고 고통에 몸부림쳐야 고통이 주는 공포와 범위를 벗어난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한사람이 누구를 향하여 웃는다는 것은, 철이 없을 때 웃는 것하고 이런 경지에 들어간 웃음하고는 다른 거다.
다르다. 애들이 그런 모습을 가지면 안된다. 애들 때야 동심이 괜찮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난 진심이야' 그렇게 얘기하는 건 안된다. 그게 차라리 주름살로 나와야 된다. 그렇지 않은가?
●성경이 하는 얘기,`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어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증거하듯이,
예수가 증언한 것이 우리 것이 되게 하는 이 일에 우리가 부름을 받아,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과 진리와 승리를 담는 일에 우리가 부름을 받고 있다. 우리가 이 배역에 동참하고 있다`를 아는 것은 대단한 기쁨(Joy)이 되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그 연합, 긴밀한 그 관계는 지금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아버지께서 친히 그의 권세로 권력으로 창조와 심판의 주인으로 못하실 것이 없는 분이,
우리의 거부와 반대와 우리의 왜곡과 기만과 부패와 적대를 다 감수해야 하는 이 일을, 당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이 감수하는, 아버지에 대한 승복을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아들이 기꺼이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 고통의 적대적인 환경 현실 역사 속에 들어와 아버지의 기쁨을 나누는 것처럼,
그것을 아버지의 사랑이 생명으로 누려지는 기쁨 명예로 아는 것처럼, 우리에게 우리의 생애를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의 자리에 우리로 함께 와 하나가 되자 그러신다. 하나님은 우리 보고 신이 되자고 부르신다. 관계에서 그렇게 부른다. 사랑하는 일에서는 신과 인간이라는 차별이 깨진 자리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
● 그러니 우리의 존재가 가져야 할 정체성, 신분과 지위의 명예, 그리고 우리가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 오늘의 정황 거기서 뭘 봐야 되나?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고 타협하자는, 타협하지 않으면 너 죽여버리겠어.라는 죄와 악의 권세의 도전을 직면하는 거다. 그걸 뚫을 수 없으면 예수 믿는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모든 것이 해결되고 마는 것, 주문만 외우면 되고 마는 것, `나는 너보다 더많이 가졌어. 나는 재능도 힘도 너보다 우위에 있어` 라는 우열의 개념, 승부의 개념 외에 아무 것도 없다.
(나의 정체성은 뭔가, 내 현실 정황에서 난 뭘 봐야 하나?
죄와 악의 도전에 직면하여 그걸 뚫어야 한다. 모든 게 해결되고 더 많이 가지고, 힘도 우위이고 우월하고 이겨야만 한다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동물의 왕국, 짐승의 세상을 나는 섬김과 용서로, 온유와 겸손으로 뚫는 존재이다)
●하나님이 여기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거다. '그런 짐승의 세계, 동물의 왕국에서 벗어나라. 너는 내 자녀다. 위대한 인생을 영광된 존재가 되어라'
이렇게 매일매일 도전하신다. 한꺼번에 안된다. 시간 오래 걸린다. 35년이나 같이 하고도 표정이 변한 게 없다. 그러나 믿음을 잃지 않고 있다. 우리 다 같이 잃지 않고 있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경이롭다.
우리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끝까지 붙잡고 놓지 않으시는지,
두렵고 기이한 그 능력으로 도망가지 않겠다.
이 부끄러운 자신으로 인하여 절망하지 않겠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 바로 그 지극한 권능으로 우리 인생을 이기게 하실 줄 믿는다. 믿음을 지켜내게 한다.
*다보요1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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