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같은 쉬운 어떤 방법론이 아니다. 이 고통을 면하게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고통을 감수하고 사는 거다. 나는 형통해. 아무 근심 없어 이건 잘못 알았던 신앙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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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_히브리서 2_06]
본문 히브리서 12장 1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자`에서 [허다한 증인들이란 앞에 있었던 11장에 나왔던 믿음의 사람들을 가르키는 것이다.
그냥 읽으면 저 위인들 같이 우리도 믿음을 지키고 훌륭한 신앙인이 되자, 당연히 그렇게 읽고 또 마땅하다. 그러나 11장 믿음을 설명해 나가면서 하나님이 자기가 창조한 세계와 인류를 우리의 범죄와 우리의 실패로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믿음의 중요한 증거였다는 걸 우리가 본다. 하나님이 실패한 인류를 그 창조의 목적으로 회복시키시고 승리하시겠다고 작정하신 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류의 역사였다.
아벨에서나 에녹에게서나 또 노아에게서나 아직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역사 때에도 하나님이 세상의 은혜와 구원의 손길을 펼쳤고 아브라함으로부터는 본격적으로 믿음이 보이게 공식화 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된다.
■그런데 그것은(믿음은) 우리가 봤다시피 우리가 생각하는 것같은 쉬운 어떤 방법론이 아니었다.
제가 만든 말로는 `믿음은 은혜로 시작해서 책임을 목적하는 거다` 이런 말을 했는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그 목적 속에 ■[우리의 자율적인 자발적인 반응을 목적하고 있어서]
믿음은 은혜이면서 책임이고 그러나 순서상 언제나 은혜를 전제하여 책임이 열매맺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이 가지는 이 시작과 결과 사이의 모호함과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보통 다 체념하게 된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체념이 오는 것은 은혜가 목적하는 책임을 하나님이 어떻게 만들어 내시는가 하는 그 과정과 방법을 오해하는 데에서부터 온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야 늙으면 다 체념할 수 밖에 없다. 체념을 잘해야 그냥 허허로워지는 것이고 좀 더 적극적인 마음을 가지면 분노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신자들에게는 그럴 수 없다. 허허롭게 슬쩍 외면할 수도 없고 분노할 이유도 없다.
■(신자된) 우리는 정말 정말 명예로워지고 영광의 자리로 가게 된다.
그 사실이 오늘 말하는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된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인 이 교회에서 지금 당하고 있는 현실적인 어려움과 그리고 ■교회사 내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있건 모든 교인들이 당하는 어려움은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본격화 된다.
예수를 믿기 전이라면 세상사에 자기를 맡기고 조화롭게 살면 되지만 예수를 믿고난 다음에는 그럴 수 없다.
신앙이라는 것이 나를 모든 생각과 판단과 책임에서 붙잡고 있다. 그래서 그럴 수 없는데,
■신앙만으로 살 수 없는 것이 현실인 것이 또한 진실이라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매우 마음이 흔들리고 혼란스럽고 그리고 자책과 또 타협이 또 겹쳐지고 반복되는 인생인 것이다.
거기를 이제 `하나님이 창조와 인류를 놓아두거나 외면하지 않으셨다`에서 우리는 그 간섭과 적극적인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예수와 십자가를 갖고 있다.
그런데 그래봤자 예수 모르는 사람들이나 또 적극적으로 사나운 사람들이나 또 예수를 믿고 약속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나 인생이 고달프기는 마찬가지라는 데에서 우리는 무슨 답을 가지는거냐? 어떻게 신앙을 유지해야 되느냐? 라는 이해를 히브리서는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 앞에 있는 이 구름같은 허다한 증인들은 무얼 증언하고 있을까? ■하나님의 개입을 증언한다. 하나님의 개입은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우리를 납득시키는 방법으로는 여기에 나열되어 있지 않다.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1) 욥은 자기가 알고 있는 한 가장 완벽한 인생을 산다. 그는 도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그리고 양심에 대해서도 그리고 신앙에 있어서도 흠이 없다.그러나 그는 고통을 받는다. 그러니 욥은 죽어난다.
■놀랍다. 뭐가 놀라우냐 하면 완벽을 기한 것으로 하나님이 만족하시지 않는다는 거다.
그러니까 기독교 인생을 잘잘못으로는 아무리 잘해도 만족이 없다는 거다. 여기가 어렵다.
욥은 어디로 가게 되는가? 우리가 아는 윤리, 우리가 아는 안심을 넘어서, 창조 저 위에 창조세계를 통치하는 창조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름을 받는다. 우리 인생이 그렇다.
->> (자기를 부인함과 무한한 용서, 포용의 존재로 부름받는다)
2) 요셉은 어떻게 되었나? 요셉은 기가 막히지 않은가? 형들이 자기를 미워해서 죽이려다가 죽이느니 팔아먹자 그래서 종으로 와서 열심히 성실히 종노릇 했다가 모함을 받아서 옥에 갖힌다. 험한 감옥이다. 그 발은 차꼬를 차고 그 몸은 쇠사슬에 매인다. 본인은 넋이 빠진다.
그리고 총리가 된다. 요셉은 자기인생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자기가 고난당할 때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못한다. 시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발이 차꼬를 차고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다'를 요셉에게 적용하면 안된다.
하나님이 그러신 거다. 요셉은 죽어났을 뿐이다.
■그래서 성경이 하고싶은 얘기는 뭘까? '네 고난이 너를 위대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에 동참하는 길이다'라고 얘기를 한다.
그러나 본인은 그 일을 당할 때, 그 일이 뭔지 몰랐다. 당연히 자기가 선택하지 않았고, 그는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난 억울하다. 난 불운하다.' 이것 외에 자신을 설명할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3) 나오미라는 여성이 있었다. 룻기에 나오는 룻의 시어머니다. 그의 인생. 기근을 만나서 고향을 떠났어야 됐고 떠나서 다 잃어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이 스스로의 이름을 나오미에서 마라라고 바꾼 이 여인이 나중에 손자를 안고 기쁨으로 찬송과 감사를 보낸다.
■왜 이런 일들을 구약성경은 기록하고 있을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 처지 현실 속에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거다. 우리가 만들지 않은 것, 기대하지 않은 것, 우리는 불만인 것, 원망일 수 밖에 없는 것으로.
4) 하나 더 나가면 더 기막힌 인생이 나온다. 라합. 라합은 여리고 성의 창녀였다. 이스라엘 정탐꾼이 왔을 때 그들을 살려준다. 왜 살려줬다고 생각하는가? 라합은 여리고에서는 불가촉천민인 것이다. 그는 여리고가 망하기를 바랄 수 밖에 없었다. 자기의 인생이 그 사회에서는 회복될 수 없었던 존재다. 그러니 자기가 사느냐 못 사느냐를 떠나서 이 성이 뒤집어지는 것 보고 싶다. 그렇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그는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서 여리고 성이 멸망할 때 구원을 받는다. 그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살몬이 라합을 부인으로 받고 그 후손에 다윗이 태어나고 다윗으로 지명된 상징화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 그 후에 나온다.
■이 모든 만들 수 없는 조건과 현실을 가지고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기적, 기쁨, 영광을 만든다.
5) 그 마지막 인물이 누구인가? 마리아이다.
마리아는 위에 있었던 모든 인물들 보다 더 말이 안된다. 낳을 수 없는 아기를 임신했고 자기가 만들지 않았는데 자기 몸에 갖고 있다.
이것이 우리 앞에 있는 허다한 증인들이다.
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그들은 세상적 판단에서 최악의 경우로 갔고 모든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아래인 하층, 희망없는 절망의 자리에 갔지만
■하나님은 기꺼이 거기다가 세상이 만들 수 없는 것을 담았다. 왜 그러셨을까?
■세상은 자기 욕심을 채우면 하나님을 안 찾기 때문이다.
그것이 구약 내내 나오는 우상이다. 하나님이 우상에대해서 질색을 하는 이유는 '그렇게 타협하고 살지 마라. 우상이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라. 난 너희를 그렇게 목적하지 않았다.' 이것이 성경이 하고싶은 얘기다.
그러니 그들에게 담았던 이 많은 증거와 역사를 보았으니 '하나님이 이러셨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이삭의 생애와 야곱과 요셉과 그 후에 모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일, 우리를 위대하게 만드는 일을 하셨구나..' '너희 더욱더 적극적으로 너희 인생을 이해해라' 이거다.
어떻게 적극적으로 이해하나?
우리가 제일 많이 원하는 신앙적인 소원이 뭐냐 하면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이라는 '베랄드 시처'의 책의 가장 중요한 교훈을 아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이유는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나님이 이 길로 가라 그랬잖아요?` 그것 아닌가? 내 책임이 아니다. 그래서 죽어라 하고 기도한다. 책임 안 질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건 `너의 지금 인생을 걸어라`이다.
이 길이 맞습니까? 저 길이 맞습니까? `이 길이다` 라고 일러주면 그 길을 가야 된다.
어느 길도 가지 않고 '이 길이야'에서 멈춰서는 것이 무슨 순종이겠는가? 그런데 어느 길인지 모르는 걸 하나님이 끌고 가는 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분명한 한 길이 없다.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독특한, 그리고 우리가 모두 싫어하는 하나님의 선택이 있다. '왜 나를 요모양 요꼴로 이때 여기에 보냈습니까?'
"내가 널 복 주려고 그러는 거다" '이게 복이라고요? 웬수가 집안에 있습니다.'
어느 부모치고 자식이 천사라 그러는 부모가 어디있는가?
자기인생이 만족스러운 사람이 어디 있는가? 세상 사람들이야 불만할 때가 없을지 몰라도 우린 많다. '하나님 이게 뭡니까? 제가 얼마나 열성을 다하여 주 앞에 모든 것을 내놓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걸어라는 거다.
순종이란 뭐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인생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매일 한숨 쉬고 울고 그 길을 가라. 우리 앞에 있는 이 허다한 증인들이 다 울고불고 온 길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그 후 이삭을 바치는 사건에서 보면 '없는 데서 있게 할 수 있고 망한 것을 승리로 바꿀 수 있다` 이게 믿음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진 뜻이다.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당신의 권능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긴 시간을 두나? 이걸 배우라는 거다.
우리에게 시간을 줘서 순종이 그 길을 가야 되고. 믿음에서 우리의 몫인 책임은 어떻게 지는거냐?
거기에다 담는 하나님의 본문을 우리보고 증거하라고 한다.
■반응하라고 한다. 반응. 죽을 것같고 끝난 것같은 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반응을 가지라고 한다.
성경에는 이 반응에 대한 중요한 두 지침이 나온다.
《반응지침 I》
하나는 로마서 12장 이하에 있는,
■"너희 몸을 산제사로 드려라"이다. 거기서 산제사는 삶으로 드리는 제사다.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이 본문을 담는 하나의 컨텍스트로 삼으신다는 거다.
우리가 우리 인생에서 타협하고 포기하려는 것을 하나님이 막는다. 어떻게 막는다고? 끊임없이 도전하셔서 이거면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데서 끝나지 않아서 우리보고 이렇게 살라는 거다. '네 믿음만큼 해라.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해라.
내가 너희 못할 것 시키는 것 아니다. 완벽하거나 해결하라 그러지 않는다.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 악을 회개시키거나 악을 감동시키라고 되어있지 않다. 저 바보가 악역하고 있으면 너는 네가 선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걸 기억해라'
《반응지침 II》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나오는 사랑장의 요구같이.
●■사랑은 어떻게 하는 거라고? 첫 번째가 '사랑은 오래 참고'이다. '오래 참고'를 제가 의역됐다고 직역한 것 가르쳐 드렸다.
Love is long suffering. 사랑은 오랜 고통. 고통스럽게 사는 거다. '이 고통을 면하게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고통을 감수하고 사는 거다.
뭣 때문에? 세상의 악함과 비참함과 그속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그 피해를 보는 것을 견뎌야 되기 때문에.
하나 더 가면 뭔가? 온유하고 성내지 않고 이기적이지 않고 무례히 행치않고.. 이렇게 발전(성숙)하는 거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이 고통과 절망 밖에 없는 세상에 보내어 우리가 빛이고 생명으로 쓰신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온 인류를 구하고 싶어하시는 뜻을 위해서 우리를 쓰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의 대상이며 동시에 그것을 이루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온통 죽음 뿐이다. 이것은 온통 눈물 뿐이다. '그래서 내가 너를 보냈다'이다.
외부에서 봉사와 구제를 위해서 한번 와서 잘난 척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동등한 위치와 조건, 같은 짐 속에 던져지는 것. 성육신 아닌가?
예수님이 그렇게 오셨는데 우리는 왜 벗어나려고 하나?
■●그 위대한 일을 우리한테도 `함께 하자` 그런다. 하나님이 우리보고 '같이 하자' 하신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자리까지 오는 것이다. '나는 형통해. 나는 아무 근심이 없어.' 이것은 우리가 잘못 알았던 신앙의 현실이다. 우리는 어느 경우도 쉽지 않다.
주께서 히브리서 5장 8절에서 봤던 것같이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 즉`이라는 영광에 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 귀한 것이다. 이 과정을 통과하지 않는 자는 없다.
12장에 그게 나온다. '어찌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훈련시키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훈련을 네가 못받고 있다면 너는 친자식이 아닌 탓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뭘 이루시려는지 우리는 모르니까
우리는 끝없는 원망 속에서 스스로의 체념을 정당화한다.
■우리의 신앙인생을 이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며 우리가 힘이 없어서도 아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랬다. 웃으라. 자기 몫을 하라. 우리의 시간과 장소와 경우를 헛되이 보내지 마라.
교회에서는 어쨌든 '우리야 한 교회에 모였으니까, 식구니까'라는 당연한 자신이 있어야 되지 않난가? 오늘날 교회가 힘을 잃은 가장 큰 이유는 뭐냐? 모두가 식구이고 가족이라는 것을 외면하고 있는 탓이다. 그것을 다른 이유로 갖다붙일 수 없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아는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아직 그렇게 발을 내미기가 힘들다면 보다 성숙한 신자들이 먼저 그리해야 옳다.
■그리하여 자신의 인생이, 자기라는 존재가 얼마나 귀한지, 내가 한번 웃는게 얼마나 큰 일인지, 내가 오늘 출석한 것이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이런 확인으로 이런 격려로 그런 실력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그저 와서 이렇게 앉았다가 인상쓰고 있다가 그리고 돌아가버리는 것으로는 실력이 생길 수가 없다.
■우리의 현실과 운명과 하나님 일하심의 위대함을 우리의 생애에 담아내서 스스로 기쁨과 자랑이 있는 인생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웃지 못하는 것이 믿음이 없기 때문이며, 우리가 나서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을 잊은 탓이다.
우리는 그저 편하고 욕 안먹고가 다인데,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너희 앞에 있는 이 허다한 이 증인들을 봐라.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담았나 봐라.
이제 너희는 그 뒤를 잇는 모든 것을 완결할 이 드라마의 해피엔딩을 만들어야 하는 주인공들이니 너희가 보고 배운 것들로 인하여 너희는 더욱 놀랍고 귀하고 그리고 자랑스럽게
너희 인생을 살아 하나님의 일하심을 완결해 다오`라는 요구 앞에 서는 인생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다시보는 히브리서_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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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면 생각을 안하게 되고, 생각을 안하면 시간을 그냥 놓아버리게 된다.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도전과 시험이 있는 곳, 그곳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우리를 향한 목적을 보이신다 (0) | 2021.1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