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 02 / 열왕기상 3:3-15 / 2021.08.08]
-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은 어떤 보상과 연결이 잘 되지 않는다. 그것은 억울하고 그것은 당황스러운 길을 순종하는 걷는 것이다. 우리는 앞을 내다볼 수 없고 결과를 알 수 없는 지금 순종을 해야 된다
- 신앙생활은 억울한 게 정상이다. 억울한 거를 보복하고 보상을 받으려고 하면 솔로몬은 될 수 있지만, 다윗이 되지를 못한다
- 순교하러 들어가는 그런 결심, 감동으로 물결치는 그런 황홀이 아니라, 답이 없는 데를 제 발로 걸어 들어가야 되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이다. 열왕기가 보여주고 싶은 얘기다
- 우리의 생애도 이 귀한 영광과 복의 자리로 인도하기 위하여 오늘 울어야 하고, 오늘 끝장일 것 같은 길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그렇게 얘기한다. 여기가 믿음이다. 여기가 순종이다
- 예수 안에 있는 영광의 자녀같아야 한다. 세상을 이기고, 자신을 이기고, 인생을 이기고, 그리고 진정한 영광과 승리의 자리에 나아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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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열왕기의 전체 장, 열왕기상 1장에서 22장, 열왕기하 1장에서 25장, 총 47장 중에, 2장에서 11장까지 10장에 걸쳐서 솔로몬이 소개된다. 그 성전과 그 부와 그 외교적 국방력, 모든 면에서 뛰어난 왕으로 소개되고 있다.
성전을 짓는 일이나 그가 부를 쌓는 일이나 국력을 확대하는 일들은 전부 다 우리의 소원과 일치하지만,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열왕기를 기록한 후손들, 바벨론의 포로 속에서 자기네 나라 역사를 쓰는 후손들에게는 솔로몬의 부귀 영화가 탐탁할 리가 없다.
솔로몬을 흠 잡을 필요가 없다 할지라도, 그게 무슨 소용이냐 하는 현실 때문에 솔로몬의 치적이 여기 이렇게 길게 어찌 보면 너무나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지만, 그 소개마다 다 어떤 원한과 원망이 묻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끝에도 열왕기는 그 왕들의 치적을, 다윗의 길을 따랐다, 여로보함의 길을 따랐다 이렇게 나누고 있지, 솔로몬의 길을 따랐다 이렇게는 소개하지 않는다. 그 솔로몬은 확실히 성경적으로 그 모범이 될 만한 왕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지불식 간에 솔로몬을 늘 부러워 한다. 그는 뭐 말할 수 없는 부자였다. 말할 수 없는 권세를 가지고 있고 게다가 또 지혜로운 왕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질문 앞에, 백성들을 가르칠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던 놀라운 왕이다.
그러나 이런 지혜는 그 후에 보면, 후손들이 귀감으로 삼을 어떤 모범적인 형태로 열매를 맺기보다, 우리가 좋아하는 정치 경제 국방 외교 이런 쪽으로 지혜가 그저 다 소모되고 마는 것을 본다.
아마도 솔로몬은 이런 변명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왕위 계승권에서 밀려 있었던 듯이 보인다.
우리는 열왕기를 시작하는 1장에서 다윗의 아들 아도니아가 스스로 왕을 천명하는 사건부터 만난다. 그는 다윗이 사랑한 아들이고 한 번도 꾸짖은 적이 없는 아들로 소개되고 있다. 그는 솔로몬보다 연배고 자기가 왕권을 이어받을 당연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당시의 최고의 실력자들인 제사장 아비아달과 군대장관 요압의 지원 속에 그가 왕 된 것을 국민들 앞에 선포했다.
그러나 다윗은 바세바와 나단의 충고를 듣고 급히 솔로몬을 왕위에 앉히게 된다. 그래서 솔로몬은 왕이 되자 가장 시급했던 것이 정적을 제거해야 됐었다. 그래서 요압도 죽여야 됐고 사울 왕가에 남아 있는 잔존 세력의 대표인 시므이도 죽여야 했고 아비아달 제사장은 고향으로 유폐를 시켜야만 했었다.
그것이 아마 솔로몬이 할 수 있는 변명일 것이다. 그는 나라가, 왕권이 든든해야겠다, 또 강대국들 사이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경제력과 군사력이 있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솔로몬은 신앙적인 모범은 세우지 못했지만, 대신 세상적인 인간의 욕심은 다 만끽한 사람으로 나오는데, 잠언에서나 전도서에서나 우리는 그의 후회를 듣는다. '모든 것이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하는 말을 듣는다.
그래서 우리가 솔로몬을 보면서 이 긴 솔로몬의 치적과 솔로몬 개인의 어떤 위대함, 그러나 아쉬움같은 것들이 뒤에 오는 왕들에게 말하자면 오해된 것 같다.
뒤에 오는 후손들은 모두가 다 솔로몬을 목표로 삼은 것 같다. 솔로몬 같은 영광, 솔로몬 같은 권력, 솔로몬 같은 어떤 명예를 뒤에서 다 따르게 되어 다윗의 뒤를 쫓는 자가 거의 없는 역사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 짚고 넘어가야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받아주시지 않았느냐? 그가 지혜를 구하자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시고 '네가 이것을 구했기 때문에 내가 부귀영화도 네게 주겠다' 라고 크게 축복하신 이가 하나님이시지 않냐?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솔로몬의 생애를 보고 나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모든 실패는 시초가 사울에게 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고 그는 제비 뽑아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된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폐위되는 일은 하나님을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아말렉을 쳐라. 진멸해라. 가축도 남기지 마라'를 듣지 않았다. 사무엘이 꾸짖는다; '왜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그가 '이것은 다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아낀 것입니다'라고 변명을 한다. 그때 이 벼락 같은 말이 떨어지지 않았는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불순종하는 것은 거짓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 됩니다' 라는 그 참 무서운 질타를 받는다.
그렇게, 말하자면 솔로몬의 지혜는 순종으로 가지 않고, 솔로몬의 지혜는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는 일에만 쓰인 것으로, 성경은 많은 핑계들 속에 그것이 감추어져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가 성전을 지은 일은 대단한 일이고 그 성전에 어떤 값진 거, 그 찬란함 같은 것 속에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는 뒤에 와서 알게 된다.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하는 이 장면에서도 3장 1절은 '솔로몬이 애굽의 왕 바로와 더불어 혼인 관계를 맺어 그의 딸을 맞이하고 다윗성에 데려다가 두고 자기의 왕궁과 여호와의 성전과 예루살렘 주위의 성의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니라'. 시작부터 그는 바로의 딸을 데려온다.
이유는 그때 국제 정세상 약소국인 이스라엘은 가장 강대한 전통적인 국가, 외면할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인 애굽과 어쨌든 화평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됐다.
그러니까 그의 지혜는 이상한 데로 쓰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럼 우리가 지혜를 가진다 하는 것과 순종한다는 것을 어떻게 결부시킬 수 있는가 하는 데가 이제 솔로몬이라는 왕을, 읽으면서 그의 역사를 보면서 이제 의문으로 그리고 도전으로 받아들여야 된다.
무엇이 순종이고 무엇이 지혜냐 하는 것이다. 순종은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거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럴 때, 그때 지혜는 현실성을 얘기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현실성. 하나님의 뜻을 명분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따라야 한다. 매일매일의 삶에 매일매일의 도전과 시험 앞에서 하나님을 순종해야 된다.
그러나 이 순종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서 우리가 당황하는게, 사사기의 역사와 열왕기의 역사에서 보여지듯이, 또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보여지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럴 수 없는, 미련한 그리고 잘못된 선택을 하고는 한다.
그 긴 역사동안 반복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편에 서곤 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한테 이제 우리한테도 쉽지 않은 긴장된 질문이어야 맞다.
하나님을 순종한다. 신앙생활을 한다. 그럼 지혜는 어떻게 쓰이느냐? 뭐가 순종이냐? 뭐가 지혜냐?
이 지혜의 어려움, 이 순종의 무게는, 하박국 선지자가 바벨론의 위협 앞에, 이제 패망의 이 눈앞에 빤히 보이는 현실 앞에서 당시 권력자들과 사회적 지도자들이 불의를 행하고 강포하고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지 않고 사리사욕을 쫓는 일에 대하여 불만을 터뜨리는 데서부터 하박국 선지자의 중요한 메시지가 나온다.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내가 벌을 내릴 것이다. 이 악인들을 위하여 내가 갈데아 사람들을 일으켜서 다 잡아가고 다 죽이겠다.' 그러자 하바국이 당연한 질문을 했다. '아 잘못한 것들만 잡아가셔야지 나라를 뭉개버리시면 의인들,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은 공연한 벌을 받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시기를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이렇게 됐다.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어떤 보상과 연결이 잘 되지 않는다. 그것은 억울하고 그것은 당황스러운 길을 순종하는 걷는 것이다. 우리는 앞을 내다볼 수 없고 결과를 알 수 없는 지금 순종을 해야 된다.
지금,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선택의 여지 주변이나 과거의 경험을 돌아봐도 우리에게는 믿음을 지킬 만한 증거들이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언제나 시험은 그전에 왔던 것보다 하나 더 강도가 높아져서 오기 때문이다. 예전에 해결했던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계속 반복적으로 누적되어 우리를 괴롭힌다.
'그때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인가?' 거기를 알 수가 없다. 그 순종이 우리에게 너무나 어렵다.
고린도전서 2장에 가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냄을 받으면서 이런 놀라운 기록을 해놓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지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니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하고 힘이 떨어느니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이 무슨 뜻인 것 같은가? '난 그때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그때 무슨, 무슨 준비가 없었다. 나는 그냥 보내심을 받아서 갔을 뿐이다. 그리고 가서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갔다. 나에겐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믿음이고 이게 순종이다. 둘이 손을 잡는 현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억울하다.
■신앙생활은 억울한 게 정상이다. 억울한 거를 보복하고 보상을 받으려고 하면 솔로몬은 될 수 있지만 다윗이 되지를 못한다.
우리 지금 코로나 시대를 맞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되느냐? 모른다.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고 벌 주고 바벨론으로 끌어가실 때에 선지자 예레미아를 세워서 외친 말이 뭐냐 하면 '너희 곱게 항복하고 포로로 끌려가라. 이게 하나님의 뜻이다.' 모두가 기절하고 뒤집어졌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신을 섬기는 나라에게 항복을 하느냐? 싸우다 죽으면 죽었지.
'이게 하나님의 뜻이다. 너희 가라. 여기서 죽지 마라. 싸우다 죽지 마라' 그러는 거다. '포로가 일을 한다.'
포로가 싫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여기서 싸워서 여기서 결과를 보겠다, 이게 우리에게 오는 시험이다. 미래로 나갈 힘이 없어서, 지금, 오늘 끝장을 내자. 그래서 오늘 운명을 결판내자. 나 고민하기도 싫고 더 이상 화를 낼 마음도 없다. 하나님, 오늘 끝을 냅시다. 이걸 계속 반복해서 앞으로 가자는 거는 난 못하겠습니다.'
솔로몬은 뭘 하는 건가? 성전을 지어서 그는 그것으로 미래의 어떤 걱정들이나 어떤 그 긴장들을 이걸로 묻어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이거다. 이걸로 묻어버리고 싶었다.
한국 교회는 그 유명한 순교기와 부흥기를 거쳤다.
제일 놀라운 것은 순교가 최고였던 시대가 그냥 지나가버렸다. 왜? 순교의 기회가 끝났거든. 유명한 안희숙씨의 '죽으면 죽으리라'에서 안희숙씨의 그 모든 증언들이 뭔데? 나는 순교를 거부당한 죄인이야' 이게 그 간증의 기준이다. 순교가 최고이고,
하나님은 이러는 거다. 여기서 죽으면 거기, 거기서 책임이 끝난다. 살아있으면 책임이 계속 반복적으로 온다. '그거를 순종해' 이렇게 말하는 거다.
안희숙씨는 살아남는 바람에, 좋은 마음이 아니라 억울한 마음으로 씀으로써 힘겨운 시대를 우리에게 증언했다. 그리고 부흥기가 왔다. 부흥시기를 기억하는가? 부흥사가 강단해서 기침만 해도 은혜를 받았던 때 기억나는가? 그때 더 이상 천국이 멀리 있지 않고 내 안에 있고 지금 여기에 있다, 그 감격이 우리 다 있다.
문제는, 거기가 끝이 아니라는 거다. 더 있더라는거다. 그 다음이 있더라는거다. 그 다음을 살아야 한다. 그 다음을. 그 다음을 살려면, 답 없는 길을, 그 앞의 그 감격과 만족이 답이 아닌 데를 가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내가 가졌던 감동은 거짓이란 말인가? 내가 가졌던 확신은? 왜 지금은 맥을 못 쓰는가? 누구 탓인가? 이게 신앙의 현실이요 오늘인 것이다.
거기에 바울이 그렇게 얘기하는 거다. '내 순종 내 믿음은, 하나님이 일하신다. 하나님이 결국 승리하신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지키고 그의 운명을 예수 안에서 확정하셨다,를 기억하고 나 사자 굴에 들어간다' 그러는 거다.
■순교하러 들어가는 그런 결심, 감동으로 물결치는 그런 황홀이 아니라, 답이 없는 데를 제 발로 걸어 들어가야 되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이다. 열왕기가 보여주고 싶은 얘기다.
왜 솔로몬이 부럽다고? 솔로몬이 결론이면 얼마나 좋은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잖은가? 걱정하지 않아도 그 길로, 성공과 자랑으로 나가는 도상에 서 있다는 것만큼 기쁠까? 그게 아니라면 어디를 가야 된다고? 무엇을 해야 되냐고? 고린도전서 2:1-5 말씀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함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배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이사야 64장의 예언을 여기 인용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방법으로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예수를 보내셨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그렇게 우리의 생애도 이 귀한 영광과 복의 자리로 인도하기 위하여 오늘 울어야 하고, 오늘 끝장일 것 같은 길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그렇게 얘기한다. 여기가 믿음이다. 여기가 순종이고.
순종이란? 자폭하지 않는 것이다. 지혜란? 십자가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권능이다. 하나님의 최고의 강력한 행동이시다.
이런 중요한 문제가 우리에게서 해결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밤낮 한탄하다가 세상이 끝난다. 비난하다가 변명하다가, 가장 부끄럽게, 도망가다가. 비겁해진다.
그러니까 솔로문에 대한 성경의 판정은 그것이다. 그는 비겁했다. 약삭빨랐다. 솔로몬을 꾸짖는다고 우리들 마음에 불쾌감이 생긴다면 우리는 아직도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를 모르는 거다.
솔로몬 잘하진 못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사 약속대로 복을 주셨으나 그는 후손들에게 아무런 교훈도 아무런 귀감도 아무런 모범도 영향력도 없고 만 것이다.
이후로 오는 모든 후손들이 남북 왕조로 찢어져.. 그 이유는 솔로몬 때문이었다. 남왕조 유다나 북왕조 이스라엘이나 서로 싸우고 그리고 이웃 나라들에 다 먹혀 그 찬란했던 성전은 훼파되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그런 파괴를 그때도 당하고 예수님 때에도 당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당신을 알게 하시고, 그의 이름으로 살게 하시는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의 운명을 알고 계시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준비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 드러나는 현실을 우리는 밤낮 부정하고 원망하다가 아무것도 아닌, 믿지 않는 것만도 못하는 신앙으로 사는 그런 실패를 우리가 반복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누가 강요할 수 없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생애와 현상을 돌아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으로 자신의 생애를 새롭게 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백성으로 부름을 받는다.
몸소 십자가를 지신, 몸소 죽음을 감수하고 거기서 부활하신 그 영광과 그 영생과 그 권능의 존재로 부름을 받는다.
우리가 쩔쩔 매는 것은 당연히 믿음이 부족한 탓일 것이다. 성경 말씀으로 함께 나누었으니 우리는 솔로몬같지 말고, 예수 안에 있는 영광의 자녀같아야 한다.
세상을 이기고, 자신을 이기고, 인생을 이기고, 그리고 진정한 영광과 승리의 자리에 나아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