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인 문제를, 겪는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성경의 답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내용이다.
예수는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고,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 대한 설명과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방법을 우리가 보고 느끼고 만지고 경험케 하신다는 사실에 히브리서가 초점을 두고 있다.
우리가 가지는 자신의 어떤 한계들, 미흡함에 대한 우리의 체념을 극복시키는데 초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인 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어떤 체념 속에 있다.
우리에게 어떤 신앙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본적으로 지금 일어난 어떤 위기의 하나를 해결하고 지금 있는 어떤 장애물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 답이 될 수 없고, ■인생살이 전체에 대한 어떤 가치, 나에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 속에서 제한 속에 만들어 지는 무한한 명예를 확인해야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신자라는 이름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거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렇다. 그럴 수 있다. 그래야 된다'가 《성육신》이다.
■성육신이 답이다
성육신. 신이 시간과 공간에 잡혀 들어왔으나 역사를 인류의 운명을 바꿔버린다
무한이 유한 속에 들어온 것도 신기하고, 그 한계 속에서 인간의 손에 잡혀 배반과 수모와 채찍과 죽음을 당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기쁨으로 지으신, 우리의 찬송을 목적하는 우리의 인생이, 어느자리에도 부족할 것이 없다는 증언, 이것이 성육신인 것이다.
즉, 우리가 예수의 성육신을 따라 걷는 길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자존심 우월감을 버리고 사는 것이 곧 무한한 명예로 사는 삶이다.
이것을 우리가 우리의 생애에 누구와 비교하여 늘 불만인, 우리 자신만이 아는 풀 수 없는 어떤 마음 깊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알고, 믿고 - 믿고라는 말은 이런 때는 사기를 치는 것 같다. 믿음이란 바로 그런 도약이니까 -
'그렇다. 내가 예수에게서 봤다' 이것이 우리 모두를 넘을 수 없는 산을 넘게 하고 건너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하는 일이라는 걸, 그리고 그렇게 가는 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위대한 신비라는 것을 아는 것이 우리 각각의 제한된, 우리가 거부하는 지금의 현실이다.
거기를 못넘어오고 이런 죽어서 천국가는 찬송가만 부르고, 그리고 무슨 다른 대책이 없어서 무릎꿇고 기도하는 것으로 그냥 자책하고 자조하고 타협하고 돌아가는 것으로 체념해 버린 인생을, 성경이 딱 도전하는 것이다.
도전을 받겠는가? 좋은 말로 할 때 받아야 한다.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그냥 타협하고 사는 건 손해이기 때문이다. 하루의, 하루만큼의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것은 비극인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손해이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3)
■모든 인간은 예수 안에서 지어진다.
이때 `예수 안에서`라는 것은 말하자면 `우리가 누구의 자식이다` 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안에서', 그 예수가 창조며 그 창조는 그의 어떤 어떤 품성을 물려받은 존재로 우리가 창조됐다`고 얘기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그 예수의 영광과 충만은 아버지의 영광인데, 그 영광이 육체로 오셔서 '우리가, 우리가 그렇다' 라고 증언을 하는거다.
■`인간이란 이런 존재다`를 처음보는 거다. '인간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인간이란, 이런 것이구나`를 처음보는 거다.
역사적 사건, 실존으로 예수님이 증언을 하시는 것이다. 이제 보이실 뿐 아니라, 이제 걸으신다. 우여곡절을 걸으신다. 오해와 증오의 대상이 되고, 그 길을 말없이, 당시 권세자들에 의해서 척결된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다를 잠잠케 하시고, 문둥병자를 고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척결된다. 그 능력으로 그 모두를 감수하는 그런 일들이 마치 드라마의 한 광경같아서 바람이 많이 분다든가, 비가 억수로 오는 것에 불과하지, 그것이 무슨 이 드라마를, 그 안에 있는 주인공을 무슨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극적 효과를, 내용을 더 두드러지게 하는 외에 나머지는 할 게 없다.
그것이 성경이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구원이란 죄 안짓는 것이 아니라, 반대편 영광으로 가는 문제인 것이다
죄란 그런 의미에서 도덕적 문제가 아니고,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 영광의 문제였던 것이다.
죄란, 그 영광에 못 미치는 것이요, 영광을 비켜간 것이요, 영광이 왜곡되는 것이다.
■예수가 오심으로써 비로소 영광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고, 허락이 되었고, 살 수 있게 되었다.
공포의 반대말은 사랑이다.
정직은 거짓말하지 않는 것에 불과하지 않다.
정직은 그럼 뭐냐? 정직은 영광으로 가는 거다. 좋은 말하는 것, 반가운 사람이 되는 것, 기쁨을 드러내는 것, 이게 정직이다. 사뭇 비교가 다르다.
거짓말과 정직의 차이를 보다시피,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이거다.
어디다 하나?
우리가 볼 때, 그걸 할 수 없는 자리,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모두가 폭력을 휘두르는 자리에서 우리만 그렇게 하지 않는거다.
■다른 인생을 살아라
그것은 명분도 아니고 강요도 아니다.
옷을 꺼내놓고 더러운 옷과 깨끗한 옷 중에 '이 깨끗한 옷 입어라' 하는 것은 강요가 아니다.
■그것은 명예이고 복이고 기쁨인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살게 되어있다.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는 사람, 폭력과 증오와 보복과 원망과 비열함 앞에서
마치 한 줄기 빛이 비치듯, 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햇볕같이 우린 다른 존재로 서있는 거다.
상대방이 그러면 회개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그걸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인 것이다.
■다른 존재, 다른 내용을, 시간과 공간 속에 내가 너를 보냈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얘기하는 것이다.
예수를 그렇게 보냈듯이, 우리는 말이 안되는 곳에 아무도 나를 몰라보고 아무도 나를 편들지 않고, 보상해주지 않는 곳에 하나님의 손길, 그 아들을 보내신 구원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리를 보내셨다고 그렇게 이해하지 않으면, 인생을 살 방법이 없다.
그것이 우리에게 힘이 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우리가 겪는 모든 것이 우리를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의 모든 기도가 원망일 수 밖에 없다.
성경에 분명한 목적은 이렇게 선언되어 있다;
'3 찬송 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3~6)
강요가 아니다. 방법론도 아니다. 위협도 아니다. 어떻게 그걸 확신하나?
우리기 아직 죄인되었을 때 예수께서 인간으로 찾아오신다. 굉장하다.
아무도 몰랐다. 우리 인생은 우리 이웃들 앞에서 그런 존재인 것이다. '이 사람은 뭐야? 왜 이래?'라는 그 머리에 우리가 벼락을 치는 것 같은 거다.
그게 보상이 되지 않는다. 예수를 결국 죽인 세상이니까. 아무리 잘해도 항복하지 않을 거다.
■그러나 인생은 우리가 이해하고 상상하는 것과 다른 존재와 사명이 있음을 알게 되는 그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 기쁨에 참여하는 명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 인생을 사는거다. 자랑할 것이 충만할 것이다.
이에 대한 성경의 답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내용이다.
예수는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고,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 대한 설명과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방법을 우리가 보고 느끼고 만지고 경험케 하신다는 사실에 히브리서가 초점을 두고 있다.
우리가 가지는 자신의 어떤 한계들, 미흡함에 대한 우리의 체념을 극복시키는데 초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인 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어떤 체념 속에 있다.
우리에게 어떤 신앙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본적으로 지금 일어난 어떤 위기의 하나를 해결하고 지금 있는 어떤 장애물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 답이 될 수 없고, ■인생살이 전체에 대한 어떤 가치, 나에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 속에서 제한 속에 만들어 지는 무한한 명예를 확인해야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신자라는 이름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거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렇다. 그럴 수 있다. 그래야 된다'가 《성육신》이다.
■성육신이 답이다
성육신. 신이 시간과 공간에 잡혀 들어왔으나 역사를 인류의 운명을 바꿔버린다
무한이 유한 속에 들어온 것도 신기하고, 그 한계 속에서 인간의 손에 잡혀 배반과 수모와 채찍과 죽음을 당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기쁨으로 지으신, 우리의 찬송을 목적하는 우리의 인생이, 어느자리에도 부족할 것이 없다는 증언, 이것이 성육신인 것이다.
즉, 우리가 예수의 성육신을 따라 걷는 길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자존심 우월감을 버리고 사는 것이 곧 무한한 명예로 사는 삶이다.
이것을 우리가 우리의 생애에 누구와 비교하여 늘 불만인, 우리 자신만이 아는 풀 수 없는 어떤 마음 깊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알고, 믿고 - 믿고라는 말은 이런 때는 사기를 치는 것 같다. 믿음이란 바로 그런 도약이니까 -
'그렇다. 내가 예수에게서 봤다' 이것이 우리 모두를 넘을 수 없는 산을 넘게 하고 건너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하는 일이라는 걸, 그리고 그렇게 가는 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위대한 신비라는 것을 아는 것이 우리 각각의 제한된, 우리가 거부하는 지금의 현실이다.
거기를 못넘어오고 이런 죽어서 천국가는 찬송가만 부르고, 그리고 무슨 다른 대책이 없어서 무릎꿇고 기도하는 것으로 그냥 자책하고 자조하고 타협하고 돌아가는 것으로 체념해 버린 인생을, 성경이 딱 도전하는 것이다.
도전을 받겠는가? 좋은 말로 할 때 받아야 한다.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그냥 타협하고 사는 건 손해이기 때문이다. 하루의, 하루만큼의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것은 비극인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손해이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3)
■모든 인간은 예수 안에서 지어진다.
이때 `예수 안에서`라는 것은 말하자면 `우리가 누구의 자식이다` 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안에서', 그 예수가 창조며 그 창조는 그의 어떤 어떤 품성을 물려받은 존재로 우리가 창조됐다`고 얘기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그 예수의 영광과 충만은 아버지의 영광인데, 그 영광이 육체로 오셔서 '우리가, 우리가 그렇다' 라고 증언을 하는거다.
■`인간이란 이런 존재다`를 처음보는 거다. '인간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인간이란, 이런 것이구나`를 처음보는 거다.
역사적 사건, 실존으로 예수님이 증언을 하시는 것이다. 이제 보이실 뿐 아니라, 이제 걸으신다. 우여곡절을 걸으신다. 오해와 증오의 대상이 되고, 그 길을 말없이, 당시 권세자들에 의해서 척결된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다를 잠잠케 하시고, 문둥병자를 고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척결된다. 그 능력으로 그 모두를 감수하는 그런 일들이 마치 드라마의 한 광경같아서 바람이 많이 분다든가, 비가 억수로 오는 것에 불과하지, 그것이 무슨 이 드라마를, 그 안에 있는 주인공을 무슨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극적 효과를, 내용을 더 두드러지게 하는 외에 나머지는 할 게 없다.
그것이 성경이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구원이란 죄 안짓는 것이 아니라, 반대편 영광으로 가는 문제인 것이다
죄란 그런 의미에서 도덕적 문제가 아니고,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 영광의 문제였던 것이다.
죄란, 그 영광에 못 미치는 것이요, 영광을 비켜간 것이요, 영광이 왜곡되는 것이다.
■예수가 오심으로써 비로소 영광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고, 허락이 되었고, 살 수 있게 되었다.
공포의 반대말은 사랑이다.
정직은 거짓말하지 않는 것에 불과하지 않다.
정직은 그럼 뭐냐? 정직은 영광으로 가는 거다. 좋은 말하는 것, 반가운 사람이 되는 것, 기쁨을 드러내는 것, 이게 정직이다. 사뭇 비교가 다르다.
거짓말과 정직의 차이를 보다시피,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이거다.
어디다 하나?
우리가 볼 때, 그걸 할 수 없는 자리,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모두가 폭력을 휘두르는 자리에서 우리만 그렇게 하지 않는거다.
■다른 인생을 살아라
그것은 명분도 아니고 강요도 아니다.
옷을 꺼내놓고 더러운 옷과 깨끗한 옷 중에 '이 깨끗한 옷 입어라' 하는 것은 강요가 아니다.
■그것은 명예이고 복이고 기쁨인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살게 되어있다.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는 사람, 폭력과 증오와 보복과 원망과 비열함 앞에서
마치 한 줄기 빛이 비치듯, 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햇볕같이 우린 다른 존재로 서있는 거다.
상대방이 그러면 회개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그걸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인 것이다.
■다른 존재, 다른 내용을, 시간과 공간 속에 내가 너를 보냈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얘기하는 것이다.
예수를 그렇게 보냈듯이, 우리는 말이 안되는 곳에 아무도 나를 몰라보고 아무도 나를 편들지 않고, 보상해주지 않는 곳에 하나님의 손길, 그 아들을 보내신 구원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리를 보내셨다고 그렇게 이해하지 않으면, 인생을 살 방법이 없다.
그것이 우리에게 힘이 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우리가 겪는 모든 것이 우리를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의 모든 기도가 원망일 수 밖에 없다.
성경에 분명한 목적은 이렇게 선언되어 있다;
'3 찬송 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3~6)
강요가 아니다. 방법론도 아니다. 위협도 아니다. 어떻게 그걸 확신하나?
우리기 아직 죄인되었을 때 예수께서 인간으로 찾아오신다. 굉장하다.
아무도 몰랐다. 우리 인생은 우리 이웃들 앞에서 그런 존재인 것이다. '이 사람은 뭐야? 왜 이래?'라는 그 머리에 우리가 벼락을 치는 것 같은 거다.
그게 보상이 되지 않는다. 예수를 결국 죽인 세상이니까. 아무리 잘해도 항복하지 않을 거다.
■그러나 인생은 우리가 이해하고 상상하는 것과 다른 존재와 사명이 있음을 알게 되는 그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 기쁨에 참여하는 명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 인생을 사는거다. 자랑할 것이 충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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