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8:1-11)
회개는 잘못을 지워버리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다.
회개는 자기의 잘못을 알고, 예수 안에서 이제 할 수 있는 것, 즉《사랑을 할 수 있는 대로 가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회개를 하면 이젠 자기 책임이 끝난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이지, 긍정적으로는 아무것도 기대도 안하고 하지도 않는, 그래서 잘못을 지우는 것이 전부인, 그래서 더 낱낱이 더 실감나게만 있지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에 서있단 말이다.
그럼 뭐가 문제가 되느냐?
잘못을 안 하는 것이 전부라면 이렇게 오래 살려두는 게 벌이다. 예수 믿고 우리가 감격했을 때, 그때 데리고 가셔야 된다. 살아남게 하셨고 남은 인생살이에서 만족할만한 날은 없다. 우린 끊임없이 회개할 것밖에 없지, 제대로 된 인생은 살아보지 못한 그건 뭐냐 이거다.
■여러분의 회개와 기도와 믿음이 결국 `나는 이런 진심을 갖고 있고, 이런 소원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가 전부인 현실이 되는 바람에 지금은 뭘 해야 되는지, 지금은 무슨 책임과 무슨 기회 속에 있는지를 전혀 모른단 말이다.
■뭘 해야 되나?
평안을 찾아내야 되고, 정의를 실현해야 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명해야 되는 게 아니다.
주위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들을 굴복시키고 그들을 항복시켜라 그런 말씀 안 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내가 너를 세상에 보낸다. 너희는 세상의 이웃이 돼라. 너 가서 같이 있어라' 그 말이다.
우리 잘 아는 제자도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16장 24절)
■자기를 부인한다는 건 무언가?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이지만 메시아인 것을 권력으로, 문제의 해결로, 누가 맞는가로 자기 자신을 증명하지 않는다. 놀라운 일이다. 그냥 우리 중에 있다. 그는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며 그는 부활이고 생명이다. 그냥 그렇게 있다.
우리 보고 그렇게 살라고 그런다. `너희 인생을 그렇게 존재해라. 이웃을 섬겨라` 이거다.
제자들이 그에게 물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누가 제일 큰 상을 받겠습니까?'
"얘들아 너희가 오해하였도다. 세상에서는 잘난 놈이 대접을 받고 섬김을 받지만, 내 나라에서는 잘난 놈이 섬기는 나라다. 나는 섬기러 왔다. 난 죽으러 왔다"
서비스를 하라는 게 아니다. '이 하나님 모르는, 사랑을 모르는, 죄밖에 지을 수 없는, 기껏 최선을 다해 봤자 잘못을 안 하는 게 전부인, 그 속에 언제든지 터뜨릴 수 있는 죄와 분노와 비극이 들끓는 세상과 사람들 안에, 너는 내 제자로, 빛과 생명으로 조용히 가 있어라. 네 인생 동안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왜? 내가 너를 보냈으니까.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같이, 내가 너를 보냈으니까. 아버지가 나를 보내서 너희를 부른 것같이, 내가 너희를 보내 모든 인류를 부르겠다'
이게 우리의 인생인 것이다. 그게 현실인 것이다.
그러니 모든 우리의 기독교 신앙의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회개, 기도, 믿음이, 결국 오늘을 살 줄 모르니까 명분화 되고 간절함이 되고 순도의 문제가 가 되는거다.
`얼마나 절절한가? 얼마나 진심인가?`라고 색깔을 더 강하게 할 뿐이지, 실제로는 하루도 현실을 살지 못하는 거다.
오늘은 뭘 해야 되나?
그 속에, 거짓과 의심과 불안 속에 우리도 함께 있어야 되는 거다.
빌립보서 2장에서 빌립보 교회에 바울은 이렇게 신자들을 권면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리고 12절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를 우린 금방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진지하게 최선을 다해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아라'
물론 그렇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가지고 다시 해석을 하면, '네 인생은 늘 의심나는 속에 있을 것이다 그 구원을 책임있게 명예롭게 살아라. 그것은 책임 이상의 영광과 명예의 기회란다' 그런 말씀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안심과 평안이 오고 세상이 모두 다 합의하는 정의로운 사회가 될까?` 이런 얘기는 성경의 약속에 없다. 우리는 이 현실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맡겼는지를 아는 거다. 히라님은 세상을 심판하려고 벌을 주지 않는다. 구원하려고 벌을 준다.
그런 속에서 우리만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사 끌고 가시는 역사라는 걸 안다.
우리만 안다. 우리가 그 옆에서 증언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생명이 있다고. 우리에게는 구원이 있다고. 우리에게는 진정한 자랑이 있다고.
■말없이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사소한 일에서, '당신들은 뭘 믿는 거야? 당신들은 어떻게 이 모든 공포 속을 그렇게 잠잠히 살 수가 있는 거야?' 라고 묻게 만들어야 되는 것이다.
오늘 여기를 살지 못하면, 그리고 오늘 여기를 사는 것이 뚜렷하게 명예와 영광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면, 의심 속에 불안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늘 이렇게 모였을 때에만 멋있는 소리 하는, 그리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그런 이상한 신앙인생을 살게 되는 거다.
거기서 벗어 나야 한다. 현실을 직시하고, 하나님 일하시는 기적의 생애를 걷는 충성된 우리의 신앙과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인생은 복되다. 우리는 기적이다. 우리는 소망이다.
그리고 주께서 그것을 십자가에 다 묻으셨다.
그 여전한 불안과 근심 두려움 어두움 속에서, 우리가 빛이고 생명인 것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살아내는 그 충성과 인내와 승리가 있어야 한다.
회개는 잘못을 지워버리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다.
회개는 자기의 잘못을 알고, 예수 안에서 이제 할 수 있는 것, 즉《사랑을 할 수 있는 대로 가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회개를 하면 이젠 자기 책임이 끝난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이지, 긍정적으로는 아무것도 기대도 안하고 하지도 않는, 그래서 잘못을 지우는 것이 전부인, 그래서 더 낱낱이 더 실감나게만 있지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에 서있단 말이다.
그럼 뭐가 문제가 되느냐?
잘못을 안 하는 것이 전부라면 이렇게 오래 살려두는 게 벌이다. 예수 믿고 우리가 감격했을 때, 그때 데리고 가셔야 된다. 살아남게 하셨고 남은 인생살이에서 만족할만한 날은 없다. 우린 끊임없이 회개할 것밖에 없지, 제대로 된 인생은 살아보지 못한 그건 뭐냐 이거다.
■여러분의 회개와 기도와 믿음이 결국 `나는 이런 진심을 갖고 있고, 이런 소원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가 전부인 현실이 되는 바람에 지금은 뭘 해야 되는지, 지금은 무슨 책임과 무슨 기회 속에 있는지를 전혀 모른단 말이다.
■뭘 해야 되나?
평안을 찾아내야 되고, 정의를 실현해야 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명해야 되는 게 아니다.
주위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들을 굴복시키고 그들을 항복시켜라 그런 말씀 안 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내가 너를 세상에 보낸다. 너희는 세상의 이웃이 돼라. 너 가서 같이 있어라' 그 말이다.
우리 잘 아는 제자도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16장 24절)
■자기를 부인한다는 건 무언가?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이지만 메시아인 것을 권력으로, 문제의 해결로, 누가 맞는가로 자기 자신을 증명하지 않는다. 놀라운 일이다. 그냥 우리 중에 있다. 그는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며 그는 부활이고 생명이다. 그냥 그렇게 있다.
우리 보고 그렇게 살라고 그런다. `너희 인생을 그렇게 존재해라. 이웃을 섬겨라` 이거다.
제자들이 그에게 물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누가 제일 큰 상을 받겠습니까?'
"얘들아 너희가 오해하였도다. 세상에서는 잘난 놈이 대접을 받고 섬김을 받지만, 내 나라에서는 잘난 놈이 섬기는 나라다. 나는 섬기러 왔다. 난 죽으러 왔다"
서비스를 하라는 게 아니다. '이 하나님 모르는, 사랑을 모르는, 죄밖에 지을 수 없는, 기껏 최선을 다해 봤자 잘못을 안 하는 게 전부인, 그 속에 언제든지 터뜨릴 수 있는 죄와 분노와 비극이 들끓는 세상과 사람들 안에, 너는 내 제자로, 빛과 생명으로 조용히 가 있어라. 네 인생 동안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왜? 내가 너를 보냈으니까.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같이, 내가 너를 보냈으니까. 아버지가 나를 보내서 너희를 부른 것같이, 내가 너희를 보내 모든 인류를 부르겠다'
이게 우리의 인생인 것이다. 그게 현실인 것이다.
그러니 모든 우리의 기독교 신앙의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회개, 기도, 믿음이, 결국 오늘을 살 줄 모르니까 명분화 되고 간절함이 되고 순도의 문제가 가 되는거다.
`얼마나 절절한가? 얼마나 진심인가?`라고 색깔을 더 강하게 할 뿐이지, 실제로는 하루도 현실을 살지 못하는 거다.
오늘은 뭘 해야 되나?
그 속에, 거짓과 의심과 불안 속에 우리도 함께 있어야 되는 거다.
빌립보서 2장에서 빌립보 교회에 바울은 이렇게 신자들을 권면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리고 12절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를 우린 금방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진지하게 최선을 다해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아라'
물론 그렇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가지고 다시 해석을 하면, '네 인생은 늘 의심나는 속에 있을 것이다 그 구원을 책임있게 명예롭게 살아라. 그것은 책임 이상의 영광과 명예의 기회란다' 그런 말씀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안심과 평안이 오고 세상이 모두 다 합의하는 정의로운 사회가 될까?` 이런 얘기는 성경의 약속에 없다. 우리는 이 현실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맡겼는지를 아는 거다. 히라님은 세상을 심판하려고 벌을 주지 않는다. 구원하려고 벌을 준다.
그런 속에서 우리만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사 끌고 가시는 역사라는 걸 안다.
우리만 안다. 우리가 그 옆에서 증언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생명이 있다고. 우리에게는 구원이 있다고. 우리에게는 진정한 자랑이 있다고.
■말없이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사소한 일에서, '당신들은 뭘 믿는 거야? 당신들은 어떻게 이 모든 공포 속을 그렇게 잠잠히 살 수가 있는 거야?' 라고 묻게 만들어야 되는 것이다.
오늘 여기를 살지 못하면, 그리고 오늘 여기를 사는 것이 뚜렷하게 명예와 영광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면, 의심 속에 불안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늘 이렇게 모였을 때에만 멋있는 소리 하는, 그리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그런 이상한 신앙인생을 살게 되는 거다.
거기서 벗어 나야 한다. 현실을 직시하고, 하나님 일하시는 기적의 생애를 걷는 충성된 우리의 신앙과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인생은 복되다. 우리는 기적이다. 우리는 소망이다.
그리고 주께서 그것을 십자가에 다 묻으셨다.
그 여전한 불안과 근심 두려움 어두움 속에서, 우리가 빛이고 생명인 것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살아내는 그 충성과 인내와 승리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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