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요구하는 신자들을 향한 보상,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목적하시는 결과물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이란 국가와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로 증명된 하나님의 통치와 성품에 순종하는 문제이다.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누구에겐가 내 짐을 떠넘기는 식인데, 가장 많이 떠넘기는 대상은 명분이다.
'이래서 되겠는가?'라고 얘기하는 것은 물론 옳다. 그러나 항상 그렇게 던지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신자된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각오하고 그렇게 믿음을 결정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바라는 형통한 환경에서도, 위기 상황에서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위기와 환란과 고통이 오면 당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을 짓밟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일을 주시기도 한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개인적인 현실로 들어와 보면, 개인 일상 현실에서 가장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짐을 져야 하는 자기 자리이다.
인생이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책임과 관계 속에 놓여 있는지 모른다. 나 하나 잘하고 있으면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 인하여 정말 사돈 팔촌의 이웃 때문에 내가 집을 빼앗기고, 내가 울어야 하고, 내가 불려나가야 하고 하는 일들이 현실이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화를 낸다. '넌 왜 태어났냐? 넌 왜 책임도 감당 못하고 남들에게 이 고생을 나누게 하느냐?'라고 화를 낸다. 이것은 다 신앙적 자세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오시어 우리에게 섬기고 죽으라고 요구하신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의 싸움은 형통하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되는데, 그 형통의 기준은 세상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우린 한번도 신앙인으로 살 틈이 없다. 불평하고 잊고, 불평하고 잊고 하는 것밖에 없다. 평안해지면 아무 생각없고, 어려워지면 불평하고, 그것은 이 세상에 사는 그 기준으로도 훌륭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어 목적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의 수준에는 비슷한 것도 안된다.
■우리는 도망 갈 데가 없다. 우리는 신앙인이 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나 이 문제를 이렇게 얘기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1-2)
우리를 부르신 우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에게 무엇을 목적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된다.
이스라엘은 노예되었던 자리에서 자유인으로 부르는 받는다. 무슨 노예? 죄의 노예로부터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의 자유인으로, 거룩한 사람으로 부름을 받는 것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영광스런 내용이다 그런 뜻이다.
그러나 성경이 계속 이스라엘 백성에게 꾸중하고 지적하듯이
■우리는 거룩에 대한 관심이 없다. 우리의 본성은 물질로 충분하다고 늘 스스로를 속이고 있고 거기에 타협한다.
그러나 우리의 수확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5:22-23)
■성령의 열매를 잘 보면 막 그렇게 기분내는 것이 아니다.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런 것들은 참 지긋지긋한 덕목들 이다. 하기 싫은 것들이다.
성령의 열매가 펄펄 뛰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앞의 것밖에 모르는 거다. 절반을 놓치고 있다. 고민하고, 괴로워 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감수해야 되는 것들이다. 이런 것이 없이 신앙을 논하는 것은 너무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문제들을 정치, 경제, 명분으로 떠넘길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놀라야 된다. 지금 같은 시절에 누가 나서서 '한국교회 여러분, 회개합시다' 그러면 얼마나 멋있는가? 그러나 이 외침을 가질려면 그러기 위하여, 끌어안고 가야 하는 한 개인의 신자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싸움을 먼저 해나가야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이란 국가와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로 증명된 하나님의 통치와 성품에 순종하는 문제이다.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누구에겐가 내 짐을 떠넘기는 식인데, 가장 많이 떠넘기는 대상은 명분이다.
'이래서 되겠는가?'라고 얘기하는 것은 물론 옳다. 그러나 항상 그렇게 던지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신자된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각오하고 그렇게 믿음을 결정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바라는 형통한 환경에서도, 위기 상황에서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위기와 환란과 고통이 오면 당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을 짓밟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일을 주시기도 한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개인적인 현실로 들어와 보면, 개인 일상 현실에서 가장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짐을 져야 하는 자기 자리이다.
인생이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책임과 관계 속에 놓여 있는지 모른다. 나 하나 잘하고 있으면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 인하여 정말 사돈 팔촌의 이웃 때문에 내가 집을 빼앗기고, 내가 울어야 하고, 내가 불려나가야 하고 하는 일들이 현실이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화를 낸다. '넌 왜 태어났냐? 넌 왜 책임도 감당 못하고 남들에게 이 고생을 나누게 하느냐?'라고 화를 낸다. 이것은 다 신앙적 자세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오시어 우리에게 섬기고 죽으라고 요구하신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의 싸움은 형통하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되는데, 그 형통의 기준은 세상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우린 한번도 신앙인으로 살 틈이 없다. 불평하고 잊고, 불평하고 잊고 하는 것밖에 없다. 평안해지면 아무 생각없고, 어려워지면 불평하고, 그것은 이 세상에 사는 그 기준으로도 훌륭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어 목적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의 수준에는 비슷한 것도 안된다.
■우리는 도망 갈 데가 없다. 우리는 신앙인이 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나 이 문제를 이렇게 얘기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1-2)
우리를 부르신 우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에게 무엇을 목적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된다.
이스라엘은 노예되었던 자리에서 자유인으로 부르는 받는다. 무슨 노예? 죄의 노예로부터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의 자유인으로, 거룩한 사람으로 부름을 받는 것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영광스런 내용이다 그런 뜻이다.
그러나 성경이 계속 이스라엘 백성에게 꾸중하고 지적하듯이
■우리는 거룩에 대한 관심이 없다. 우리의 본성은 물질로 충분하다고 늘 스스로를 속이고 있고 거기에 타협한다.
그러나 우리의 수확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5:22-23)
■성령의 열매를 잘 보면 막 그렇게 기분내는 것이 아니다.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런 것들은 참 지긋지긋한 덕목들 이다. 하기 싫은 것들이다.
성령의 열매가 펄펄 뛰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앞의 것밖에 모르는 거다. 절반을 놓치고 있다. 고민하고, 괴로워 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감수해야 되는 것들이다. 이런 것이 없이 신앙을 논하는 것은 너무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문제들을 정치, 경제, 명분으로 떠넘길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놀라야 된다. 지금 같은 시절에 누가 나서서 '한국교회 여러분, 회개합시다' 그러면 얼마나 멋있는가? 그러나 이 외침을 가질려면 그러기 위하여, 끌어안고 가야 하는 한 개인의 신자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싸움을 먼저 해나가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