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예수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에 대하여 가장 그 분명한 핵심 - 약속된 내일에 의해 오늘 어떻게 살 지를 결정한다

nazunzaro 2020. 9. 18. 11:58
1.
하나님 없이 살면 결국 세상이란, 인생이란 행운과 불운의 무슨 이해할 수 없는 혼합입니다. 잘된 것도 같고 억울한 것도 같고, 잘된 게 잘된 게 아니고 잘못된 게 손해가 아닌, 앞일을 예측할 수 없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게 허망한 것입니다.
잘되도 허망하고 잘못되면 더 허망한 것이 인생이죠.
두렵죠. 체념을 하게 됩니다. '죽으면 그만이지..' 그러나 죽는 날까지가 문제죠. 그러니 각종 신을 섬기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손 없는 날`이라는 거 정하는 것 아시죠? 이사를 가도, 혼인을 해도, 손톱에 메니큐어를 칠해도, 아, 모든 것이 무섭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만일 삶이라는 것이 허망한 것이며, 미래가 없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삶의 무슨 덕목이 필요하겠습니까?
허망한 것이라면, 무슨 노력이 필요하겠습니까? 무엇 땜에 정직하며, 무엇 땜에 성실하며, 무엇 땜에 참겠습니까? 인생이 다만 허망한 것이라면 말이죠.
우리 동양사상은 대표적으로 윤회죠. 인생은 공전하는 겁니다. 죽고 다시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고 하는 데, 기껏 보상이, 잘 하면 내세에 좋게 태어난다는 거죠. 좋은 조건으로. 잘못 살면 무슨 짐승이 된다는 거죠.
그런 거를 만들어낸 가장 큰 이유는 인생 자체의 연속성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든 감수해야 됐던 우리 옛 선조들이 이렇게라도 한 인생을 참고 살도록 만든 것이죠. 자폭하지 않도록 만든 것이 윤회설이죠.

2.
여기에 기독교가 들어가면 탁 달라집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영원한 직선적인 지향점이 있다》라고 복음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다만 공전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닌, 《우리를 만든 신의 의지와 목적에 의한 결국이 있다》 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가보실까요;
'...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7~12)
《역사는 우연에 의해서 조작되는 것이 아니고, 인격자인 하나님에 의하여 계획되며 진행되며 완성된다》고 얘기합니다.
《인격이 없는, 의지가 없는, 지식과 도덕이 없는 하나의 법칙에 조정당하고 있지 않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3.
우리가 아는 법칙들, '지성이면 감천이다' 이것도 법칙이죠. '심는대로 거둔다' 《이런 법칙은 하나님이라는 인격자의 공의로우심과 성실하심에 대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법칙으로 우리를 요구하시는 분은, 그 법칙을 전부로 쓰시는 분이 아니라, 그 법칙을 만드신 정의로우신 만큼 은혜와 용서가 있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가 가지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법칙을 제시하여 우리가 순종하냐 아니 하냐를 보는 정도를 넘어,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의 열심을 다하여 우리의 인생과 세계와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이다, 역사를 주도하시는 분이다》, 이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인 것입니다.

4.
그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얘기냐 하면, 그러면 오늘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을우연 속에 있다고 여기면, 내일을 살려면 오늘은 내일을 준비해야 됩니다. 오늘 확보해야 됩니다. 그죠?
오늘이 내일을 준비해야 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은 내일이 있기 때문에 오늘을 내일에 의해서 결정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쉽지 않죠.
마태복음 6장;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 6:33-34)
앞에 쭉 무슨 얘기가 나왔죠?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위하여 걱정하지 마라, 생존을 위하여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오늘 걱정하는 건 뭐죠?
내일도 살아 있기 위하여 확보하는 겁니다.
뭘 확보? 식량을 확보하고, 지위를 확보하고, 관계를 확보하는 거죠.
내일이 오늘에 달려있는 거죠.
>> 물질중심주의 가치관? 세속적 가치관? 불신앙? 과학주의, 자연주의?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은 뭐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다,에요.
너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어 《우리에게 어떤 목적을 갖고 있고》, 《어떤 결과를 지금 진행하고 있는지 아니까, 그 선의 연장선에서 오늘을 살아라》 그러는 겁니다.
>> 신앙적, 하나님이 다 주신다. 게을러도 좋다는 말이 아니라. 관점이 물질이 아니고 다만 법칙이나 자연주의가 아닌, 가치중심, 인격/성품 중심

5.
내일의 내일의 내일의 끝이 종말이죠.
《종말은 뭐죠? 세상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뜻을 완성하시는 날》 아닙니까?
죄가 권세를 잡은 체제를 드디어 완전히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복음으로 주어지고 약속으로 주어진 것이 모든 것이 되는 세상으로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왜 미루어져 있다고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 부르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여기서 기를 이유와 내용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끝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 끝을 아는 자의 연속성 속에서 오늘은 내일에 의해서 결정되죠.
​>> 우리의 끝, 종말은 우리가, 우리 인격, 성품이 만들어지는 날, 완성이 되는 날. 하나님의 의지 사랑에 의해.

6.
내일을 확보하기 위하여 오늘을 살면, 우리는 세상의 힘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뭐라고 되어 있죠?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니라, 이렇게 나옵니다. 돈을 사랑한다는 건 뭐죠? 돈으로 되는 것을 사랑하는 겁니다. 돈으로 되는 것, 내일을 확보하기 위하여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무기이죠.

그러나 우리는 누구라고 되어 있죠?
로마서 14장 7절 이하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어떻게 묘사가 되어 있을까요?;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 14/7~8)
이게 무슨 뜻이예요?
《우리가 주의 것이랍니다. 주 예수 안에서 구체적으로 증명한, 약속을 시행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산다》 그겁니다.
>> 우리는 주의 것이다 = 주 예수로 보이신 하나님의 그 뜻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7.
우리의 불안, 우리의 공포는 어디에 있죠?
역사 내내 증명하는 것, 인간은 인간의 필요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이겁니다.
인간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만족할 도덕적 혹은 가치와 보람과 능력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부족하다, 이게 우리의 두려움이죠.
권력을 가지면 되는 것이 아니고, 이상을 가지면 되는 것이 아니라, 시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역사의 증언입니다. 누가 무서운 게 아니라, 자기가 무섭죠. 자기가.

책임을 지지 않은 상태에서 남을 비판할 때, 말은 하겠는데 짐을 지면 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역사의 증언입니다.
그게 무섭죠. 신을 안 가질 수 없죠. 자기를 믿을 수가 없으니까. 하다 못해 점이라도 쳐야죠. 화투패라도 떼어 봐야죠. 매일 매일 신문에 오늘의 운세라도 봐야죠. 오늘은 먼 곳에서 돕는 자가 나타나리라.. 먼 데가 어딜까? 그래서 전철을 타고 춘천을 갔다..
뭐, 불안하죠. 스스로의 한계를 다 아니까..

8.
우리는 여기에서 벗어난 자들입니다.
예수 안에서 증명된 것, 《죽음을 부활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자비, 능력, 성실, 우리를 향한 그의 진정성》을 이렇게 묶어서,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은 우리야말로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죠?

골로새서에서 하는 식으로 말씀을 하자면, '탐심은 우상숭배'(골 3:5)라고 지적합니다. 탐심은 자기욕심을 채우는 것이죠.우상은 다 자기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지금 아테네에서 하는 바울의 분노가 그것이죠. `너희의 욕심을 채우고 너희의 안심을 확보하기 위한 것 외에 이 신들은 할 것도 없고 할 수도 없다. 너희가 오죽하면 알지 못하는 신을 만들었겠냐?

9.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계시다, 그 분만이 주인이시고 그 분만이 진정한 평화와 안심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
그 예수는 《죽음을 부활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신실하심》의 살아있는 증거다.` 이게 아테네 설교인 것입니다.
>> 예수는 죽음을 부활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 능력 신실하심.
>>우리도 주를 좇아, 죽음을 부활로 바꾸는 은혜와 능력과 신실한 자녀가 되어야..

그러니 여러분 하루하루를 살 때마다 여러분이 누군가 아시고 이 차이 - 내일을 확보하기 위하여 오늘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과 내일과 내일과의 끝을 아는 자로서 오늘을 살아 내야》 되는 것입니다.
그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멋지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 15:51~58)

왜 부활을 이렇게 설명을 할까요?
우리가 다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 다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이며 약속이며 그리고 능력일 것입니다.
우리는 죽고, 주님 다시 오시는 날, 하나님이 우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건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 그 과정을 거칠까요? 그냥 가면 안 될까요?》 그냥, 살아 있다가 때가 되면 하늘에서 이렇게 빛이 비취고 허공에 들려 올려져 그렇게 가면 멋있쟎아요?
그렇게 안 하시고, 모든 사람과 동일하게 묻히고 섭섭하고 슬프고 사별하는 아픔을 겪고 그리고 썩고.. 그리고 주님 다시 오시는 날, 변화된 몸으로 부활하게 하십니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과정》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최고가 이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죠.
죽음까지도 이겨내는 어떤 정성, 어떤 헌신, 어떤 믿음이 아니라,
그건 하나님이 약속하고 하나님이 주시고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이죠.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는 것,
우린 생명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닙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우리가 가지는 어떤 상상, 어떤 기대, 어떤 욕심의 끝보다 더한 것이라는 분명한 차이, 불연속을 보이는 거죠.
>> 왜 영생이 아니고 죽음과 부활의 과정이어야 하는가?
>> 우리 자아가 죽어야만 하나님의 생명 은혜 영광의 인격 성품 삶 존재가 될 수 있다.

10.
■그러니 그걸 내다 보고 오늘을 살아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집니다. 그러면 세상의 힘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 신자의 인생을 보십시오. 왔다 갔다 하죠. 그죠? 어떻게 다 믿음을 가지고 살겠어요? 그러니 왔다갔다 하죠. 보통 하는 것은, 형통함은 잊어먹고 급해지면 할 수 있는 것 다 하다가, 준비가 안된 거를 이제 하나님 앞에 들고 오는 겁니다. 늘 그러죠.

그게 저는 이 본문이라고 생각해요. 58절 다시 볼까요?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우리가 만들어 내는 건 그거예요. 안심, 간절함, 초조함, 걱정, 이게 아마 전부일 거예요 우리가 완전한 신앙이 아니듯이, 우린 완전히 세상사람은 아니죠.
'괜찮다' 그러시는 말씀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너 울어라, 너 후회해라, 너 왔다갔다 해라, 너 스스로에 대해서 죄책감 가져라, 그래 너 죽지마라' 그거예요.
'너 죽지마라, 너 포기하지 마라, 네가 네 운명과 네 인생를 모두 책임지는 것 아니다,
너 열심히 살아라, 너 열심히 살아라,, 네가 못 이긴다고 꼭 실패하는 것 아니다'

다시 읽을까요?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물론 이렇게 읽으면 쉬워요, '그러니 세상에 지지 마세요`. 매우 쉬워요. 쉽죠.
'늘 기도하세요' 아까 읽었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걱정하지 마세요' 이러면 쉬워요..

살아보니까 그렇지 않아요. 우린 그렇게 넉넉하지 않아요. 믿음 좋기는 어려워요.
괜찮아요. 괜찮다고 그러면 가서 정말 괜찮으면 안돼요. 무슨 뜻인지 알죠?
우리가 만드는 건 결국 죽음일 수 밖에 없는데, 거기서 승리를, 우리가 최선을 다한 것으로도 만들어 낼 수 없는 부활을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이 그 결국을, 그 약속을, 우리의 운명으로 예수 안에서 쥐고 계시니, 걱정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자책하지 마라,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는 살 수 있죠. 늘 언제 뭐 잘하래요? 못해도 좋아요, 그러나 주일에는 다시 나오세요. 그리고요, 고개 숙이고 기도하세요. 그리고요, 부끄러울 거예요. 그죠? 그래도 조금씩 나아질 거예요. 나이가 들면 확실이 나아져요. 점점점점 나이가 들고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체념하게 되는데, 신앙도 자기 모르게 커요. 커요.
왜요? 세상이 거짓된 걸 알아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22절 이하에 있는 이 성령의 열매가 이런 귀한 말씀으로 결론이 나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성령께서 열매 맺으실 거에요. 우리 혼자 하는 것 아니고.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갈5:24-26)

기억하세요. 신앙생활이란, 자책을 없애는 정도가 아니예요.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과 우리의 존재의 결국이 뭔지를 아는 거예요.
우리 잠시 사는 세상에서의 도전과 시험 앞에서 훈련받는 거예요. 훈련받는 것.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보이신 부활의 권능과 승리를 우리의 것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며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저는 그 수고를 뭐라고 정의했죠?
우리의 못난 것이, 우리의 실패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로다.'
아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