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냥 쉽게 일주일에 한번 주일을 지키라는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안식을, 만족을, 승리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기억하라는 말이다.
주일을 지키는게 하나의 규칙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중요한 하나의 상징이요, 기억해야 할 날로 지내라는 거다.
●우리 삶에 있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심, 진리, 영생, 운명에 관한 것이며 이에 관해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너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요구가, 방법론이거나 주문이거나 부적에 불과하지 않다고 성경은 지적하고 깨우친다.
우리 삶은, 기독신앙은 성경이 말하는 《그 진정한 영광의 자리》에 가는 과정이다.
우리의 욕심, 우리의 소원은 《하나님이 약속하는 영광이나 생명이나 가치있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우리는 늘 쉬운 길, 욕심내고 오늘 하루 살면 전부인 것같은 헛된 인생을 살면서,
그렇게도 부지런히 《하나님이 우리를 끌어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모든 기적들》을 헛되게 했다는게 성경의 지적이다.
성경은 말한다. 순종이라는 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조건이 아니라, 순종이란 그 땅에 들어갈 준비로서 하나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순종이 우리의 내용이 될려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우리의 어리석음, 게으름, 고집, 무지함과 거짓말이 반복되는지 성경이 증언한다.
'가나안은 자유민가 자유민이 가지는 권리를 책임질 그런 나라여야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죄악된 자리에서부터 구원함을 얻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고, 사망 아래 붙들려 다만 절망과 공포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었던 헛된 인생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노예의 자리에서,
내가 너를 꺼내서, 꺼내면 그 다음엔 만사형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인간답게 하는 과정》을 너희에게 내가 요구하는 것이란다.'
어떤 인간다운 인생?
기독신앙에서 확신, 믿음이라는 것은 고정된 하나의 명분으로, 주장으로 우리가 끝까지 잡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믿기 시작한 것이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순종함으로 인내를 가지고 믿음을 갖고 나아가야 된다.
우리는 여기를 놓친다. 그 시작이 그 결과와 비견할 수 있는가? 시작이 없으면 끝도 없다.
그러나 끝은 시작에서 가지는 어떤 감동이나 어떤 각오나 이런 것들로 그냥 결론이 손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것은 많은 시간, 많은 경험, 많은 후회, 많은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다.
왜 안식일이 문제가 되었다고? 안식을 지키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다 책임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결국을 운명을 책임지고 있는데, 왜 현실이 이렇게 고달프냐? 왜 우리가 기대하는 보상이 없느냐? 하는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안식일에도 짐을 갖고 들어오게 했다. 그들이 이해하는 복을 만들기 위해서. 그들이 이해하는 승리를 위해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너희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란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피는 백합화를 보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이런 주님의 말씀은 이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루를, 그저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하는 날로 알고 있고,
하나님 하시는 말씀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이다.
'위대해져라, 거룩해져라' 이렇게 크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 하루만큼 살아라. 한 날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이다.》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코로나 위기나, 정치적 사회적 세계적 어떤 시험과 도전들을 우리가 해결하고 안심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말하자면, 성전에 가서 우리가 행할 일을 다하면 하나님이 보상해주는 방법으로 생각하거나, 안식일에도 일을 해야 되는,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어떤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얘기한다, 뭘 하라고?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지니라'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욕심, 우리의 비난, 우리 고통을 감수하신다.
■☆우리의 병을 고치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만, 그게 답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소망과 약속을 확인해 주셨다. 그것을 이루신 것은 그의 죽음이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렇다'이다. 채찍에 맞고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이것을 지극함과, 어떤 도덕적 종교적 절절함으로 얼렁뚱땅 때우지 말고, 오늘 우리에게 하는 말이 그거다;
'내가 너희들의 몰이해와 너희들의 성마른 소원을 뚫고, 하나님의 구원이 이런 폭력과 무지와 너희들의 조급함을 극복하고 만들어낸 것처럼,
■☆너희의 생애 하루하루가 그 하루만큼씩 큰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네 욕심과 네 조급함을 내려놓고 내가 간 길을 기억하고 네 십자가를 지라'
☆어떤 십자가가 될 것 같은가? 모두가 손가락질을 한 길. 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남은 고치고 살리면서 너는 왜 죽느냐?`라는 손가락질을 감수하는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되는 것이다.
`교회가 다 모여서 여의도에서 합심기도라도 하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육체적 어떤 답이 나오고, 세상을 놀래키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너희들이 안식일 하나 지키지 못하고 있다` 라는 지적인 것이다.
'너희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라. 그 다음은 내가 할 것이다. 너희는 나를 믿고, 나를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를 보낸 줄을 아는 그 믿음으로 너희가 해결 못할, 너희가 이해 못할 하루를 살아 내라.'
내가 십자가를 져야 된다. 베드로가 뭐라 그랬다가 욕을 먹었나 기억하라. `주여 이 일이 결단코 주께 일어날 수 없습니다`'사탄아 물러가라'. 기억하라.
그러니 이건 고함을 지른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확신과 가슴 뭉클한 감동이 필요한 게 아니라, ■☆믿음이 인내를 가져야 된다. 충성을 가져야 된다.
세상은 모르는, 그러나 우리는 알게 된, ■☆예수가 걸은 길을 우리가 걸으면,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것같이, 우리의 생애가 그 영광을 향하여 나아가고 나아가고, 나아가고..
그 결국에 이를 거라고, 우리가 믿고 있다고 우리가 우리에게 말하고,
우리가 우리의 생애에 그 길을 걷지 않는다면, 그러면 우리가 하는 말이나 우리의 삶은 다 거짓말이 되는 거다.
누가 알아주겠는가? 아무도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도 옆에 붙어있지도 못했다.
■☆우리가 박해를 즐거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진지한 하나님의 권능이고 지혜고, 우리를 향한, 우리에게 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영광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이 하루를 살아낼 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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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 앞에 부름을 받은 그날부터 영생의 삶을 살며, 영광의 삶을 살며, 권능의 생애에 들어섰다.
우리가 알지 못하면 어찌 증언할 수 있으며, 우리가 그 증언의 인생을 기쁨으로 살아내지 못한다면, 거기에 무슨 열매가 생기겠는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우리와 함께 일하심으로 세상 앞에 세우신 하나님의 약속과 영광을 위하여 충성하는 우리가 되어,
■☆모두가 절망하는 이 세상에서, 죽음이 전부라고 알고 있는 이 불쌍한 세상에서, 생명과 진리와 영광의 증인이 되는 그 복된 인생을 살아내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하루하루가 그 복으로 우리를 채우게 해야 된다
주일을 지키는게 하나의 규칙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중요한 하나의 상징이요, 기억해야 할 날로 지내라는 거다.
●우리 삶에 있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심, 진리, 영생, 운명에 관한 것이며 이에 관해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너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요구가, 방법론이거나 주문이거나 부적에 불과하지 않다고 성경은 지적하고 깨우친다.
우리 삶은, 기독신앙은 성경이 말하는 《그 진정한 영광의 자리》에 가는 과정이다.
우리의 욕심, 우리의 소원은 《하나님이 약속하는 영광이나 생명이나 가치있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우리는 늘 쉬운 길, 욕심내고 오늘 하루 살면 전부인 것같은 헛된 인생을 살면서,
그렇게도 부지런히 《하나님이 우리를 끌어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모든 기적들》을 헛되게 했다는게 성경의 지적이다.
성경은 말한다. 순종이라는 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조건이 아니라, 순종이란 그 땅에 들어갈 준비로서 하나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순종이 우리의 내용이 될려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우리의 어리석음, 게으름, 고집, 무지함과 거짓말이 반복되는지 성경이 증언한다.
'가나안은 자유민가 자유민이 가지는 권리를 책임질 그런 나라여야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죄악된 자리에서부터 구원함을 얻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고, 사망 아래 붙들려 다만 절망과 공포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었던 헛된 인생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노예의 자리에서,
내가 너를 꺼내서, 꺼내면 그 다음엔 만사형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인간답게 하는 과정》을 너희에게 내가 요구하는 것이란다.'
어떤 인간다운 인생?
기독신앙에서 확신, 믿음이라는 것은 고정된 하나의 명분으로, 주장으로 우리가 끝까지 잡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믿기 시작한 것이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순종함으로 인내를 가지고 믿음을 갖고 나아가야 된다.
우리는 여기를 놓친다. 그 시작이 그 결과와 비견할 수 있는가? 시작이 없으면 끝도 없다.
그러나 끝은 시작에서 가지는 어떤 감동이나 어떤 각오나 이런 것들로 그냥 결론이 손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것은 많은 시간, 많은 경험, 많은 후회, 많은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다.
왜 안식일이 문제가 되었다고? 안식을 지키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다 책임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결국을 운명을 책임지고 있는데, 왜 현실이 이렇게 고달프냐? 왜 우리가 기대하는 보상이 없느냐? 하는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안식일에도 짐을 갖고 들어오게 했다. 그들이 이해하는 복을 만들기 위해서. 그들이 이해하는 승리를 위해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너희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란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피는 백합화를 보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이런 주님의 말씀은 이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루를, 그저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하는 날로 알고 있고,
하나님 하시는 말씀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이다.
'위대해져라, 거룩해져라' 이렇게 크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 하루만큼 살아라. 한 날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이다.》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코로나 위기나, 정치적 사회적 세계적 어떤 시험과 도전들을 우리가 해결하고 안심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말하자면, 성전에 가서 우리가 행할 일을 다하면 하나님이 보상해주는 방법으로 생각하거나, 안식일에도 일을 해야 되는,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어떤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얘기한다, 뭘 하라고?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지니라'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욕심, 우리의 비난, 우리 고통을 감수하신다.
■☆우리의 병을 고치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만, 그게 답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소망과 약속을 확인해 주셨다. 그것을 이루신 것은 그의 죽음이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렇다'이다. 채찍에 맞고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이것을 지극함과, 어떤 도덕적 종교적 절절함으로 얼렁뚱땅 때우지 말고, 오늘 우리에게 하는 말이 그거다;
'내가 너희들의 몰이해와 너희들의 성마른 소원을 뚫고, 하나님의 구원이 이런 폭력과 무지와 너희들의 조급함을 극복하고 만들어낸 것처럼,
■☆너희의 생애 하루하루가 그 하루만큼씩 큰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네 욕심과 네 조급함을 내려놓고 내가 간 길을 기억하고 네 십자가를 지라'
☆어떤 십자가가 될 것 같은가? 모두가 손가락질을 한 길. 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남은 고치고 살리면서 너는 왜 죽느냐?`라는 손가락질을 감수하는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되는 것이다.
`교회가 다 모여서 여의도에서 합심기도라도 하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육체적 어떤 답이 나오고, 세상을 놀래키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너희들이 안식일 하나 지키지 못하고 있다` 라는 지적인 것이다.
'너희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라. 그 다음은 내가 할 것이다. 너희는 나를 믿고, 나를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를 보낸 줄을 아는 그 믿음으로 너희가 해결 못할, 너희가 이해 못할 하루를 살아 내라.'
내가 십자가를 져야 된다. 베드로가 뭐라 그랬다가 욕을 먹었나 기억하라. `주여 이 일이 결단코 주께 일어날 수 없습니다`'사탄아 물러가라'. 기억하라.
그러니 이건 고함을 지른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확신과 가슴 뭉클한 감동이 필요한 게 아니라, ■☆믿음이 인내를 가져야 된다. 충성을 가져야 된다.
세상은 모르는, 그러나 우리는 알게 된, ■☆예수가 걸은 길을 우리가 걸으면,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것같이, 우리의 생애가 그 영광을 향하여 나아가고 나아가고, 나아가고..
그 결국에 이를 거라고, 우리가 믿고 있다고 우리가 우리에게 말하고,
우리가 우리의 생애에 그 길을 걷지 않는다면, 그러면 우리가 하는 말이나 우리의 삶은 다 거짓말이 되는 거다.
누가 알아주겠는가? 아무도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도 옆에 붙어있지도 못했다.
■☆우리가 박해를 즐거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진지한 하나님의 권능이고 지혜고, 우리를 향한, 우리에게 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영광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이 하루를 살아낼 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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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 앞에 부름을 받은 그날부터 영생의 삶을 살며, 영광의 삶을 살며, 권능의 생애에 들어섰다.
우리가 알지 못하면 어찌 증언할 수 있으며, 우리가 그 증언의 인생을 기쁨으로 살아내지 못한다면, 거기에 무슨 열매가 생기겠는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우리와 함께 일하심으로 세상 앞에 세우신 하나님의 약속과 영광을 위하여 충성하는 우리가 되어,
■☆모두가 절망하는 이 세상에서, 죽음이 전부라고 알고 있는 이 불쌍한 세상에서, 생명과 진리와 영광의 증인이 되는 그 복된 인생을 살아내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하루하루가 그 복으로 우리를 채우게 해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