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그의 공생애를 마무리 하고, 십자가를 지기 전에 주는 십자가로 부활을 만들 나라, 《천국의 질서, 가치, 영광들》에 대한 가르침이다. 뜻밖에도 그 나라에 이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섬김》으로 대표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유념해서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그리하라`라고 이 섬김을 주께서 이제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심으로 만드는 나라의 《최고의 특징, 우선하는 질서》로 가르친다
그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그의 나라를 회복하였을 때 누가 최고의 공훈자가 되겠는가'라는 다툼을 할 때에도 이 가르침을 준다. `이 세상은 권력적 질서체계를 가지지만, 내 나라는 섬기는 질서를 가진다. 누구든지 윗자리에 가려거든 섬기는 자가 돼라` 이렇게 가르침으로써 우리가 기대하고 상상하는 것과 다른 나라를 제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생애 속에 여러가지 기적으로 구원자의 능력과 소망을 불러일으킨 예수께서 그 구원을, 그 기대를 어떤 의미에서 저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즉 `죽음에 굴복당하고 삼키워 지고 끝장나는 것같은 길로 이 일을 전복시키는가? 그리고 어떤 나라를 만들기에 그리하는가? 하는 일에 대한 아주 중요한 말들을 남겨놓는 셈이다.
우리는 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에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순종과 항복을 가지지만, 따지고 보면 이 섬김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에게 마음 깊은 저항을 가지게 된다. 섬긴다는 것은 당연히 낮아지는 것이고 굴복적인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것을 기뻐할 수가 없다.
게다가 이것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짐으로써 만든 나라이며, 주를 믿으면 받는 복으로서는, 또 믿음으로 가지는 여러가지 희생을 감수하고 받는 보상으로서는 우리의 기대와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에,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 그 저항이 있다.
이 일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졌던 본성적인 이해관계를 깨지 않고는 이 새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우리 모두가 인생을 살면서 예수를 믿으면서 가지는 보상이 《섬기는 것》이라는 데에 대한 저항이 정의사회구현이라는 말 속에 있었던 어떤 쓴 경험 때문에 (정의란 결국 권력자가 입에 달고있는 변명이지 실제는 할 수는 없다는) 우리의 체념이 우리 마음에 분노로 남아있다. 그런데 그 분노는 꺼내봤자 소용이 없고 꺼내봤자 더 손해를 보니까 그 분노가 어디로 가느냐 하면 침묵으로 간다.
그런데 바로 이 분노, 이 침묵이 성경에도 고스란히 나와서, 성경은 적나라하게 이 분노를 증언하고 있다.
우리가 침묵 속으로 빠지고 우리가 분노를 터뜨리는 이유는, 내가 분노를 터뜨릴 이유와 자격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다.
`나는 이런 대접을 받으면 안 돼. 나는 이것보다 나은 대접을 받아야 돼. 저 밖을 봐. 저 악당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순전히 악하게 사는 데도 저렇게 잘 사는데, 나는 적어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데 이게 뭐야?` 이렇게 터져 나와서 뭐가 깨지느냐 하면 침묵이 깨진다.
침묵이 깨질 때는 답을 얻고, 하나님의 기적을 맛보고 모든 것이 해결이 되어서 깨지는 것이 아니라, 참다 참다 못해서 더 이상 가슴에 담아 둘 수가 없어서 터져 나오더라 이거다. 나가다가 확 발길질을 하게 되더라 이거다.
나중에는 하나님께 조르기까지 한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것에 답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어떻게 답하셨냐 하면, 이 모든 분노와 이 모든 간절한 그 구걸에 《예수로 답하신다.》
예수는 말씀이라고 되어 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시는 거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도다`
말씀이란 대상이 있어야 되는 거다. 대상이.
우리의 간구와 우리의 분노와 우리의 심지어 욕지거리까지 하나님이 그걸 다 받으사 하신 답이 < 예수 >이다.
예수는 뭘 하셨는데? 우리의 분노를 깨뜨리는, 우리의 구걸에 만족을 주는 해결의 결과를 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처지에 따라 들어오신다.
우리의 분노, 우리의 어떤 조급함, 우리의 비천함, 우리가 가진 절망에 따라 들어오셔서 마치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래, 너 억울해. 그래, 나 같으면 못 참았겠다'
그렇게 따라 들어오시는 것으로 답을 한다.
우리가 겪는 일을 해소시키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감하고 체휼하고 우리의 삶의 그 억울함들에 같이 있는 것같이 들어와서 함께 당한다.》
우리의 심지어 《모욕과 꾸짖음을 하나님이 감수하는 것》이 예수님의 오심이다.
그의 공생애 이고, 그의 십자가 이고, 그의 부활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물로 포도주를 만들 수고 있고, 바다를 잠잠케도 할 수 있고, 문둥병도 고치고 장님도 눈을 뜨게 하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시면서, 죽어야 한단 말인가?
하나님은 우리라는 존재와 우리가 겪는 우리의 한계와 우리의 못난 것에 공감하사, 동참하사, 《하나님이 우리를 섬긴다.》
우리를 존중하고 우리의 신성모독까지 감수하시는 것으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와 보라'를 다 받아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야 할 죽음과 멸망의 자리까지 가서 다 울타리를 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절망이나 분노나 배신이나 죽음이나 무엇으로 도망갈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과 승리를 이렇게 울타리를 치시는 것이다.
그 인생을 우리가 겪는다. 침묵을 깨신다. 소외를 해소시킨다; '내가 있다. 나한테 말해라. 네 분노를 네 슬픔을 네 원망을 네 절망을 나한테 말해라. 내가 다 받으마. 내가 네 하나님이다. 내가 네 아버지다. 너 오늘 슬퍼서 울었냐?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너한테 일어난 모든 일을 내가 다 좋게 만들어 주마. 너는 무럭무럭 자라라. 너는 깊고 심오한 위대한 존재가 돼라. 나와 함께 가자'
그것이 우리 인생인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며,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는 것 하나밖에 모른다, 그리고 그 길이 우리에게 고통스럽다는 것만 안다. 거기서 지지 마라'
그래서 섬김은 어떡하라는 건가?
《지라》는 거다.
"네가 이겨서 네 신앙에 종착지를 만들지 마라. 《네가 져야 되고, 네가 양보해야 되는 일들로 인생을 살아 내라》. 《그것이 너에게 영광이고 명예라는 것 잊지 마라.》
내가 앞서 갔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와 보라'를 내가 이겼다. 이 승리에 지지 마라"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열어야 되는 것이다.
어떻게? 섬김으로.
`안녕하셨어요? 힘드시죠? 건강은 어떠세요? 뭐 특별히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이런 얘기들을 해야 된다.
침묵과 소외와 분노를 넘어와라. 이게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이다
입은 닫고, 눈은 웃어야 된다. 그렇게 마스크를 썼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위대함》이라고,
우리만이 나누어줄 수 있는 걸 갖고 있다고, 우리는 세상의 소망이고 진리고 생명이고 힘이라고 스스로를 알아야 된다.
그래야 섬길 수가 있다.
굴복을 하는 것도, 아첨도 아닌, 그리고 변명도 고함도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그런 위대한 신자의 인생을 걷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기적의 삶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그리하라`라고 이 섬김을 주께서 이제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심으로 만드는 나라의 《최고의 특징, 우선하는 질서》로 가르친다
그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그의 나라를 회복하였을 때 누가 최고의 공훈자가 되겠는가'라는 다툼을 할 때에도 이 가르침을 준다. `이 세상은 권력적 질서체계를 가지지만, 내 나라는 섬기는 질서를 가진다. 누구든지 윗자리에 가려거든 섬기는 자가 돼라` 이렇게 가르침으로써 우리가 기대하고 상상하는 것과 다른 나라를 제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생애 속에 여러가지 기적으로 구원자의 능력과 소망을 불러일으킨 예수께서 그 구원을, 그 기대를 어떤 의미에서 저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즉 `죽음에 굴복당하고 삼키워 지고 끝장나는 것같은 길로 이 일을 전복시키는가? 그리고 어떤 나라를 만들기에 그리하는가? 하는 일에 대한 아주 중요한 말들을 남겨놓는 셈이다.
우리는 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에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순종과 항복을 가지지만, 따지고 보면 이 섬김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에게 마음 깊은 저항을 가지게 된다. 섬긴다는 것은 당연히 낮아지는 것이고 굴복적인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것을 기뻐할 수가 없다.
게다가 이것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짐으로써 만든 나라이며, 주를 믿으면 받는 복으로서는, 또 믿음으로 가지는 여러가지 희생을 감수하고 받는 보상으로서는 우리의 기대와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에,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 그 저항이 있다.
이 일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졌던 본성적인 이해관계를 깨지 않고는 이 새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우리 모두가 인생을 살면서 예수를 믿으면서 가지는 보상이 《섬기는 것》이라는 데에 대한 저항이 정의사회구현이라는 말 속에 있었던 어떤 쓴 경험 때문에 (정의란 결국 권력자가 입에 달고있는 변명이지 실제는 할 수는 없다는) 우리의 체념이 우리 마음에 분노로 남아있다. 그런데 그 분노는 꺼내봤자 소용이 없고 꺼내봤자 더 손해를 보니까 그 분노가 어디로 가느냐 하면 침묵으로 간다.
그런데 바로 이 분노, 이 침묵이 성경에도 고스란히 나와서, 성경은 적나라하게 이 분노를 증언하고 있다.
우리가 침묵 속으로 빠지고 우리가 분노를 터뜨리는 이유는, 내가 분노를 터뜨릴 이유와 자격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다.
`나는 이런 대접을 받으면 안 돼. 나는 이것보다 나은 대접을 받아야 돼. 저 밖을 봐. 저 악당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순전히 악하게 사는 데도 저렇게 잘 사는데, 나는 적어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데 이게 뭐야?` 이렇게 터져 나와서 뭐가 깨지느냐 하면 침묵이 깨진다.
침묵이 깨질 때는 답을 얻고, 하나님의 기적을 맛보고 모든 것이 해결이 되어서 깨지는 것이 아니라, 참다 참다 못해서 더 이상 가슴에 담아 둘 수가 없어서 터져 나오더라 이거다. 나가다가 확 발길질을 하게 되더라 이거다.
나중에는 하나님께 조르기까지 한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것에 답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어떻게 답하셨냐 하면, 이 모든 분노와 이 모든 간절한 그 구걸에 《예수로 답하신다.》
예수는 말씀이라고 되어 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시는 거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도다`
말씀이란 대상이 있어야 되는 거다. 대상이.
우리의 간구와 우리의 분노와 우리의 심지어 욕지거리까지 하나님이 그걸 다 받으사 하신 답이 < 예수 >이다.
예수는 뭘 하셨는데? 우리의 분노를 깨뜨리는, 우리의 구걸에 만족을 주는 해결의 결과를 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처지에 따라 들어오신다.
우리의 분노, 우리의 어떤 조급함, 우리의 비천함, 우리가 가진 절망에 따라 들어오셔서 마치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래, 너 억울해. 그래, 나 같으면 못 참았겠다'
그렇게 따라 들어오시는 것으로 답을 한다.
우리가 겪는 일을 해소시키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감하고 체휼하고 우리의 삶의 그 억울함들에 같이 있는 것같이 들어와서 함께 당한다.》
우리의 심지어 《모욕과 꾸짖음을 하나님이 감수하는 것》이 예수님의 오심이다.
그의 공생애 이고, 그의 십자가 이고, 그의 부활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물로 포도주를 만들 수고 있고, 바다를 잠잠케도 할 수 있고, 문둥병도 고치고 장님도 눈을 뜨게 하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시면서, 죽어야 한단 말인가?
하나님은 우리라는 존재와 우리가 겪는 우리의 한계와 우리의 못난 것에 공감하사, 동참하사, 《하나님이 우리를 섬긴다.》
우리를 존중하고 우리의 신성모독까지 감수하시는 것으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와 보라'를 다 받아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야 할 죽음과 멸망의 자리까지 가서 다 울타리를 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절망이나 분노나 배신이나 죽음이나 무엇으로 도망갈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과 승리를 이렇게 울타리를 치시는 것이다.
그 인생을 우리가 겪는다. 침묵을 깨신다. 소외를 해소시킨다; '내가 있다. 나한테 말해라. 네 분노를 네 슬픔을 네 원망을 네 절망을 나한테 말해라. 내가 다 받으마. 내가 네 하나님이다. 내가 네 아버지다. 너 오늘 슬퍼서 울었냐?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너한테 일어난 모든 일을 내가 다 좋게 만들어 주마. 너는 무럭무럭 자라라. 너는 깊고 심오한 위대한 존재가 돼라. 나와 함께 가자'
그것이 우리 인생인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며,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는 것 하나밖에 모른다, 그리고 그 길이 우리에게 고통스럽다는 것만 안다. 거기서 지지 마라'
그래서 섬김은 어떡하라는 건가?
《지라》는 거다.
"네가 이겨서 네 신앙에 종착지를 만들지 마라. 《네가 져야 되고, 네가 양보해야 되는 일들로 인생을 살아 내라》. 《그것이 너에게 영광이고 명예라는 것 잊지 마라.》
내가 앞서 갔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와 보라'를 내가 이겼다. 이 승리에 지지 마라"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열어야 되는 것이다.
어떻게? 섬김으로.
`안녕하셨어요? 힘드시죠? 건강은 어떠세요? 뭐 특별히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이런 얘기들을 해야 된다.
침묵과 소외와 분노를 넘어와라. 이게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이다
입은 닫고, 눈은 웃어야 된다. 그렇게 마스크를 썼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위대함》이라고,
우리만이 나누어줄 수 있는 걸 갖고 있다고, 우리는 세상의 소망이고 진리고 생명이고 힘이라고 스스로를 알아야 된다.
그래야 섬길 수가 있다.
굴복을 하는 것도, 아첨도 아닌, 그리고 변명도 고함도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그런 위대한 신자의 인생을 걷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기적의 삶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