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사랑이 앞서는가? 정의가 앞서는가? 우리 생각에 어떠한가?
우린 둘을 타협시킬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이 하는 얘기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정의를 요구했다 이렇게 그의 사랑 속에 정의를 담을 수 있게 되는 거다.
●코로나 때문에 다 죽어나고 있다.
이건 왜 생겼냐? 이건 뭐냐? 하나님의 흔드심이다.
생각해 보라는 거다.
월트 브루그만의 저서 [ 다시 춤추기까지 ]에서 '다시 춤추기까지'라는 것은 바벨론 포로 중에 하나님께서 이 유다 백성들에게 준 약속, `너희가 다시 기쁨으로 내 앞에서 춤추는 날이 올 것이다, 성전을 재건할 것이다`라는 약속 때문에 그렇다면 과거에 왜 미리 그러시지 않고 이 험난한 역사의 과정을 요구하셨는가?
그 '다시'가 필요 없는 길보다 더 많은 것을 담는 것이기 때문에 필요했다라는 답을 찾아냈다.
●늘 과거로 돌아가서 '그때 이랬으면 괜찮았을 걸..' 그건 역사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 거다. '그게 너희한테 손해가 아니야.'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다.
●이 코로나는 우리 교인들과 불신자들 사이를 갈라놓는 어떤 잣대가 되지 않는다.
모든 인류를 향하여 하나님이 `너희 이렇게 살면 안 돼`라고 치시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된다.
세상사람들이 갈팡질팡하고 답을 찾지 못하는 데에서, 신자된 우리는 보다 깊은 이해; '하나님이 일하시매 손해 보는 것은 없다'를 아는 그런 담대함과 그런 믿음 정도는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문제가 해결돼`라는 건 우리도 모른다.
●톰 라이트는 [ 팬데믹과 하나님 ] 이라는 책에서 제일 먼저 이 얘기부터 한다; `이걸로 세상 사람들을 겁주지 마라.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겁주지 마라. 이건 뭔지 모른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미리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다. 그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다. 겁내지 마라. 슬퍼해라. 고민해라. 힘들어 해라. 그러나 겁먹을 필요는 없다.`
우리가 늘 겪는 현실이다.
우리의 울부짖음은 우리의 현실이다.
이 울부짖음을 어떻게 이기라 그랬는가? 그게 하박국 아닌가? 하박국이 뭐라 그랬나?
`이 백성들이 주를 버리고 이렇게 죄악을 일삼는데 하나님은 왜 가만히 계십니까?`
"내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 내가 바벨론을 일으켜서 이들을 다 정죄하고 심판할 것이다"
`아니, 하나님 그러면 의인들이 괜히 고생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악당들만 잡아 죽이시고 의인은 살려놔야 되지 않습니까?`
"아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
●고통을 면하거나 어려움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함께 겪어야 된다.
그게 의리 아닌가? 하나님이 온 세상과 역사와 인류를 향하여 가지신 뜻에 동참하는 최소한의 신자 된 의리 아닌가?
이렇게 나누어서만 자기의 신앙이 확인되는 그런 거지같은 신앙을 가지고 예수 믿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우리의 죄는 내 잘못 때문이 아니라 다른 모든 더 많은 사람들 때문에 내가 같은 고난에 빠지는 것을 내가 감수한다면, 그게 우리에게 명예로운 길 아닌가?
그게 예수의 십자가 아닌가?
예수의 십자가를 어떤 식으로 지겠다는 건가? 현실에서 져아 한다.
이렇게 마스크 쓰고 이렇게 거리 간격 두고 앉아서 가뜩이나 못 부르는 찬송을 마스크까지 끼고 무슨 수로 은혜를 끼치겠다는 건가? 그러나 다 은혜를 받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 꼴로 와서 앉는 그 믿음에 대하여 우리가 공감하는 것 아닌가? 이게 우리의 자랑이어야 한다.
왜 이런 것들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이라는 것이 늘 열려있다는 것을 우리는 누리지 못할까?
고생해야 한다. 언제 끝날지 모른다. 쉬운 답은 없다.
빨리 끝내주시기를 당연히 기도해야 된다;
'하나님이여 고난의 때를 줄여 주십시오. 그러나 믿음 지키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모든 인류에게 복이 되고 유익이 되고 찬송이 되고 우리에게 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그렇게 예레미야가 우는 거다. 우리 모두가 그 예레미야이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과 우리의 존재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예수로 말미암는 부활 생명의 기적의 증인 아닌가? 그 삶을 살아내는 우리 교우들 되어야 한다.
(기도)
하나님의 진정성과 그 권능과 그 크심을 인정한다.
우리가 제법 믿는다고, 이만하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정말 혼비백산하여 놀란다. 고통에 대해서 놀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정성에 대하여 놀란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만하면 됐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지금 일하심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와 그리고 우리를 향한 불변하는 사랑과 하나님의 애통과 눈물에 참여하는 우리 되어,
우리의 현실이 하나님의 기적 안에 있다고 증언하는 우리 각자의 삶과 인생이 되어야 한다. 아멘
(*예레미아 11)
우린 둘을 타협시킬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이 하는 얘기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정의를 요구했다 이렇게 그의 사랑 속에 정의를 담을 수 있게 되는 거다.
●코로나 때문에 다 죽어나고 있다.
이건 왜 생겼냐? 이건 뭐냐? 하나님의 흔드심이다.
생각해 보라는 거다.
월트 브루그만의 저서 [ 다시 춤추기까지 ]에서 '다시 춤추기까지'라는 것은 바벨론 포로 중에 하나님께서 이 유다 백성들에게 준 약속, `너희가 다시 기쁨으로 내 앞에서 춤추는 날이 올 것이다, 성전을 재건할 것이다`라는 약속 때문에 그렇다면 과거에 왜 미리 그러시지 않고 이 험난한 역사의 과정을 요구하셨는가?
그 '다시'가 필요 없는 길보다 더 많은 것을 담는 것이기 때문에 필요했다라는 답을 찾아냈다.
●늘 과거로 돌아가서 '그때 이랬으면 괜찮았을 걸..' 그건 역사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 거다. '그게 너희한테 손해가 아니야.'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다.
●이 코로나는 우리 교인들과 불신자들 사이를 갈라놓는 어떤 잣대가 되지 않는다.
모든 인류를 향하여 하나님이 `너희 이렇게 살면 안 돼`라고 치시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된다.
세상사람들이 갈팡질팡하고 답을 찾지 못하는 데에서, 신자된 우리는 보다 깊은 이해; '하나님이 일하시매 손해 보는 것은 없다'를 아는 그런 담대함과 그런 믿음 정도는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문제가 해결돼`라는 건 우리도 모른다.
●톰 라이트는 [ 팬데믹과 하나님 ] 이라는 책에서 제일 먼저 이 얘기부터 한다; `이걸로 세상 사람들을 겁주지 마라.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겁주지 마라. 이건 뭔지 모른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미리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다. 그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다. 겁내지 마라. 슬퍼해라. 고민해라. 힘들어 해라. 그러나 겁먹을 필요는 없다.`
우리가 늘 겪는 현실이다.
우리의 울부짖음은 우리의 현실이다.
이 울부짖음을 어떻게 이기라 그랬는가? 그게 하박국 아닌가? 하박국이 뭐라 그랬나?
`이 백성들이 주를 버리고 이렇게 죄악을 일삼는데 하나님은 왜 가만히 계십니까?`
"내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 내가 바벨론을 일으켜서 이들을 다 정죄하고 심판할 것이다"
`아니, 하나님 그러면 의인들이 괜히 고생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악당들만 잡아 죽이시고 의인은 살려놔야 되지 않습니까?`
"아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
●고통을 면하거나 어려움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함께 겪어야 된다.
그게 의리 아닌가? 하나님이 온 세상과 역사와 인류를 향하여 가지신 뜻에 동참하는 최소한의 신자 된 의리 아닌가?
이렇게 나누어서만 자기의 신앙이 확인되는 그런 거지같은 신앙을 가지고 예수 믿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우리의 죄는 내 잘못 때문이 아니라 다른 모든 더 많은 사람들 때문에 내가 같은 고난에 빠지는 것을 내가 감수한다면, 그게 우리에게 명예로운 길 아닌가?
그게 예수의 십자가 아닌가?
예수의 십자가를 어떤 식으로 지겠다는 건가? 현실에서 져아 한다.
이렇게 마스크 쓰고 이렇게 거리 간격 두고 앉아서 가뜩이나 못 부르는 찬송을 마스크까지 끼고 무슨 수로 은혜를 끼치겠다는 건가? 그러나 다 은혜를 받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 꼴로 와서 앉는 그 믿음에 대하여 우리가 공감하는 것 아닌가? 이게 우리의 자랑이어야 한다.
왜 이런 것들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이라는 것이 늘 열려있다는 것을 우리는 누리지 못할까?
고생해야 한다. 언제 끝날지 모른다. 쉬운 답은 없다.
빨리 끝내주시기를 당연히 기도해야 된다;
'하나님이여 고난의 때를 줄여 주십시오. 그러나 믿음 지키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모든 인류에게 복이 되고 유익이 되고 찬송이 되고 우리에게 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그렇게 예레미야가 우는 거다. 우리 모두가 그 예레미야이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과 우리의 존재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예수로 말미암는 부활 생명의 기적의 증인 아닌가? 그 삶을 살아내는 우리 교우들 되어야 한다.
(기도)
하나님의 진정성과 그 권능과 그 크심을 인정한다.
우리가 제법 믿는다고, 이만하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정말 혼비백산하여 놀란다. 고통에 대해서 놀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정성에 대하여 놀란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만하면 됐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지금 일하심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와 그리고 우리를 향한 불변하는 사랑과 하나님의 애통과 눈물에 참여하는 우리 되어,
우리의 현실이 하나님의 기적 안에 있다고 증언하는 우리 각자의 삶과 인생이 되어야 한다. 아멘
(*예레미아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