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하나님 없이 가졌던 생각 문화 모든 삶의 방법 생각을 지우고, 하나님의 통치와 성품에 참여하는, 그게 우리 몸 삶에 고민 분별 선택에서 우리가 그렇게 해야 되는 지위 실력 신분이 돼야 한다

nazunzaro 2020. 7. 11. 10:16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는 일을,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어떤 무력 공포 또는 폭력으로 사용하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내신 일로 인하여 온 세상이 떨게 이미 만들어 놨다고 성경(여호수아서)은 얘기한다.

그래서 생각해 보면, 성경 역사가 가지는 귀한 부분이, '하나님이 그동안 뭘 하셨는가? 왜 그렇게 하셨는가? 누구를 위하여 그렇게 하셨는가?'라고 할 때, 하나님이 창조세상을, 또 그의 형상으로 지은 우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역사내내 일하고 계셨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라도 증언하고 있다.

그 증언의 가장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는 예수가 죽은 자리이면서, 동시에 죽음이 못 박힌 자리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거기서 끝이 난다. 그 죽음에서부터 부활의 문이 열리기 때문에 죽음은 더 이상 우리에게 왕노릇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실상은, 온 세상은 십자가와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 앞에 떨고 있고 간담이 녹아있고 오직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 ->> 순종, 죽기까지의 섬김과 용서 온유 겸손하게 존재하는 우리의 그 선포에 온 죽음을 최고의 무기로 삼는 세상은 떨고 간담이 녹고 그게 허망함으로 판명되는걸 기다리고 있을뿐이다)

그래서 이 여호수아서의 가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꺼내어 이 안식의 땅에 들여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고, 이들을 보내신 하나님이 그들의 힘껏 해서 ■결과를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그들을 꺼낸 것과 같이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며 거기서 승리하리라고 말씀하셨다는 데에서 그 핵심을 놓치지 않아야 된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올 때는 애굽과 싸우지 않고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셨는데, 왜 가나안에서는 직접 싸워야 하는가?
물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저들의 간담이 녹았고, 그들을 능히 이길 것을 확신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가 뭔가? 왜 사람들에게 싸움을 시켜서.. 하나님이 애굽에서와 같이 직접 하셨더라면 실패가 없었을 텐데..라고 우리가 질문을 할 수 있다.

애굽에서 나오는 것은 전적인 은혜이다. 그리고 거기 애굽에서 구출하는 이유는 가나안에 보내기 위함이고, 그런 의미에서 가나안은 약속의 땅이며 안식의 장소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더 이렇게 크게 말하면, 천국을 의미한다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는 이 은혜가 우리의 책임으로 주어지는 곳이다.
여기가 은혜를 얘기할 때마다 그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는 내용인데, 하나님은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겠다 그렇게 로마서에서 잘 설명되어 있다. 예수를 믿으라 하는 것이 복음서에 공통된 증언이고 주장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은혜를 받으라는 말이며, 은혜를 주신 이유는 책임을 지는 명예와 성숙의 자리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가 가나안이다.

가나안 전쟁은 원주민을 쫓아내야 되는 것이다. 그들을 진멸한다는 것은 살육과 폭력과 전쟁의 그 이미지가 아니고,
■하나님 없는 곳에서 가졌던 생각, 문화, 모든 삶의 방법과 생각을 전부 지우고,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그리고 그것은 은혜로 주어졌지만, 우리가 우리 몸에, 삶에서, 우리의 고민에서, 분별에서, 선택에서 우리가 그렇게 해야 되는 궁극적인 우리의 그 지위, 실력, 신분의 자격 같은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가만히 앉아서 어디 배타고 가듯이 비행기 타고 가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다 실어 나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서 꺼내서 하나님의 통치에 우리로 동참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가지는 그 신령한 것, 그 기쁨과 감사와 헌신과 사랑과 충성과 인내와 성실 같은 것들을 우리라는 존재에 구체적인 구원의 천성으로, 부활의 본성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만들어 내는 데에 많은 시간과 과정과 경험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광야였던 것이고,
이제 그 약속의 땅에서 일을 완성하기 위한 전쟁이 필요해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켜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꺼내어 가나안 땅에 데려가는데 실패했다. 신명기에서 모세가 죽기 전에 하는 유언이, `너희는 약속의 땅에 올라가라. 내가 죽거든 너희는 약속의 땅에 가라. 그것은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곳이다. 담대히 믿음을 가지고 올라가라`
그것이 지금 여호수아에서 역사적으로 애굽을 나왔던, 그러나 가나안에를 들어가기를 거부해서 벌 받아 광야에서 죽고만 세대의 다음 세대, 그 후손들이 이제 여호수아를 앞세워, 동일한 명령, 자기의 부모세대에 가졌던 약속과 명령을 이어서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 명령이 이 새로운 세대로 인하여 약속의 땅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니 참 의미심장하고 감격스러운 것이 여호수아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게 이것이다. 은혜를 입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영광되고 영원한 약속을 받고 있는 사람들인데, 삶의 여러 도전과 시험과 유혹 앞에서 우리도 이 원망을 자주하게 됩니다. 예수 믿은 게 무슨 소용 있냐? 괜히 일찍 믿어서 고생만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이 거절했던 백성들은 그래서 광야를 맴돌다 죽고 그 자식들에 이르러서야 하나님의 약속은 구체적으로 가나안 땅에 실현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 같이 들어가서도 또 실패를 한.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하지 않는다. 그러니 배워야 한다. 우리 선조들의 실패에서 우리는 배워야 한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시험 앞에 있을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바라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 현실을 맞고 있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서 더이상 젊은이들 같이 어떤 상상과 꿈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이 왜 이러실까? 이 세상에는 우리의 답도 우리가 돌아갈 집도 없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 영원한 약속을 근거로 하여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 아닌가?

●우리 현실과 삶이 어렵다는 것은 우리 다 아는 일이다. 거기서 쉽게 원망하고 한탄하고 마음의 쓴소리하는 그런 선택하지 말고, 우리는 죽음이 우리를 방해할 수 없고 우리에게 겁을 줄 수 없고,
또 이 세상은 우리의 어떤 보상이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놀라운 약속 속에 살고 있는 우리가 처한 현실 속에서 그 빛을 발하는 그 믿음과 약속을 풍성하게 증언하는 기회로 책임으로 자랑으로 찬송하며 이겨내는 우리들 되어야 한다.

(기도)
우리는 코로나라는 보도 듣지도 못한 역병으로 인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꼼짝 못 하게 묶여 있지만, 이 속에도 하나님이 일하신다.
어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방해하거나 손해 보게 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이 속에서 일하시는 것은 저 요셉에게 걷게 하셨던 인생으로 표현되었던 '그 발이 차꼬를 차고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그렇게 요셉을 총리로 만드셨던 것같이 우리 생애에 하나님이 큰 기적이요 은혜가 될 것을 믿는다.
우리 마음에 인내와 충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이 가지는 명예로운 각자의 자리를 지켜야 된다. 아멘

(*소망회 2020.07.08 여호수아 2: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