斷想

용서 관용 이런 추상적 말은 책임의 소재가 모호하다. 말로 할 수가 있으니까.. 말로 아니라 몸둥아리로 하라. 삶으로 하라.

nazunzaro 2020. 6. 21. 09:18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라는 예수의 그 말 한마디에
벤허가 칼을 내려놓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의 억울한 전반부 인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 없이는 이것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 선포의 내용이 구체화되지를 않는다.
밤낮 좋은 말에 불과해진다.

용서, 관용, 이런 추상적인 말.. 추상적이면 책임의 소재가 모호해 진다.
말로 할 수 있으니까.

말로 하지 말고 몸둥아리로 하라는 거다.
 
삶으로. 삶으로. 
삶에다 넣어 놓은 보배,
거기를 우리가 직접 걸어가야 되는 거다.

벤허가 그 모든 모진 인생을 걸어 십자가 앞에 가 그 용서의 뜻이 무엇인지를 체득하고, 자기 것으로 가지기로 한 것같이 말이다.
그렇게 성경은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