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예수를 믿는 것은 만만치 않는 일이다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불만이다 너무 많이 기다려야 되고 그 과정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복된 것이다

nazunzaro 2020. 6. 14. 08:53
*하나님이 주신 약속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주시려고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과 역사의 주인이시다, 하는 얘기들을
쉬운 것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거죠. 보이는 것으로 이해하지 말고, 더 크게 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올바른 믿음과 이해를 가져라, 그걸 이해 못하면 너희 놀라고 망할 수 밖에 없다.  하박국서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똑같은 현실을 겪지 않나요? 우리가 사는 사회와 우리 시대가 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평화가 없으며, 억울하고 속이는 일들이 만연한 현실을 맡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우리가 우리보고 풀라고 그러면 어떻게 풀겠습니까? 불의한 자들을 몰아내고 악행하는 자들을 벌주고, 사회를 깨끗히 정화해야 되고 올바른 지도자를 세우고, 국민 모두가 법을 따르며, 질서를 지키며, 화해해야 된다. 옳은 말이죠? 그 얘기 한 겁니다.
일반 국민들, 일반 사회, 인류 보편적인 차원에서도 이 질문이 나오고 이 요구가 나오고 이 비명이 나오는데, 하물며 이스라엘 백성이었겠습니까?
우린 누구한테 해야 되나요? 대법원장에게 해야 되나요? 

그런데 이 답답함으로 인한 이스라엘 선지자의 호소에, 이 당연한 호소에 대하여 하나님은 답을 반대로 하십니다.

너희가 상상하지 못할 일이 생긴다, 너 내 백성 내 나라가 이렇게 혼란스럽고 부패한 것으로 놀랐냐? 더 놀라운 일을 볼 것이다. 누가 그런 일이 생길거라고 얘기하면, 너희는 '아무도 안 믿을 그럴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일을 내가 이제 할 것이다.
너희 국내가 혼란스럽고 법들을 지키지 않고 악이 만연하고 죽겠냐? 야, 그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다. 이제 밖에서 흉포한 침략자들이 올 것이다, 그들은 모든 나라를 사로잡고 굴복시키고 흉폭하게 다스릴 것이다. 남아나는 것이 없다..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이고 오게 된 셈이죠.

(하박국) 2장 1절 입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여기서 그는 악행을 저지르는 갈대아 사람들 입니다)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는 다 후자에 속하죠? 여기 나와 주일날 예배보러 오셨으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겁니다. 누가 득세합니까? 악인이 득세합니다.

그러니 처음에 하박국 선지자가 요구했던 건 뭐죠?
`다른 나라는 언급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하나님이 선택한 나라만은 정의가, 율법이, 평화가 시행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뭐라고 답했다고요?
`그렇지 않다. 더 놀라울 일도 볼 것이다`
여기에서 이제 하박국이 깊어지는 거죠.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나라가 이 이스라엘과 보이는 것으로 목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배우죠.

사도행전 13장의 바울의 설교의 요점은 뭐죠?
●`보이는 세상이 궁극적인 것 아니다` 그 얘기를 하는 것이죠.
우리 쉽게 내세적이고 종말적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종말론적이라는 것은 이 세상이 끝이 있다는 것인데, 끝이 있다는 것은 살다가 끝장이 난다는 것이 아니라,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가 그 목적을 이루실 것이다` 가 종말론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과정이라는 것이죠.
●우리는 그 종말론적이지 않고, 과정으로 되어있는 지금이 답이었으면 좋겠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의 시대를 소원하고 다윗의 시대를 회복하는 것이 메시아가 와서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같이, 《우리는 예수를 믿었으면, 지금 사는 우리 인생 속에서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그 약속을 이루시는 분인 줄 보이는 것으로 확인하고 싶죠.》

그러니까 우리는 다 하박국 같이 기도하게 된 겁니다.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저 사람들과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고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러니까 하는 얘기죠. `너희는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테인데, 너희는 다 믿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놀라고 또 놀라고 그리고 망해라`
그걸 하박국에게 그 얘기를 함으로써, ●《`네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이해의 어떤 껍질을 깨라. 하나님이 누군가를 민족신으로 국한하지 말며, 한 시대로 시간을 제한하지 마라, 내가 얼마나 큰 거를 할려고 하고 얼마나 큰 약속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라고 하박국을 깨우쳤듯이, 
지금 바울은 똑같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다윗의 약속,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의 회복과 성취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 앞에, 《`예수가 그 약속의 진정한 성취다`》 라고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고 우리의 인생을 사는 어떤 역사적 현장, 우리가 속한 시대, 우리가 사는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약속이 당연히 지금 실현되기를 바라죠. 그러나 하나님은 증거 밖에 주시지 않습니다.》

다윗을 세워 하나님이 주실 약속하고 목적하는 나라를 이렇게 영광된 것이다 라는 증거를 주었을 지언정, 그것이 영원한 나라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다윗은 죽었죠. 우리 모두가 죽듯이 다윗도 죽고 말았고, 이스라엘도 망하고 말았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우리 모두에게 이 일은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과 그가 역사와 운명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일들은 늘 반복됩니다. 회개가 있고, 기도의 응답이 있고, 기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세상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라는 것은 《세상의 권력이 기독교가 되고 천국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시공간 보다 더 큰 말하자면, 영원한 나라라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훨씬 큰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약속의 어떤 구체적인 확인은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는 다윗과 대비될 뿐만 아니라 그래서 우리의 틀을 깰 뿐만 아니라, 그 실체가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에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증거입니다.
뭐죠? 부활입니다.
부활이란, 사망을 이기는 것이죠. 사망은 죄값입니다. 죄를 극복한 나라, 진정한 정의와 평화가 있는 나라, 사랑이 실현되는 나라, 예수로 증거가 되는 거죠.

다윗의 정치적 승리가 아니라, 죄에 대한 승리로써, '예수는 메시아다'라고 제시되는 거죠.

주변의 모든 나라를 정복하여 으뜸가는 나라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한 보이는 증거는 예표에 불과하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죠.
누구를 싸워 이겨 이긴 나라가 아니라, 죄를 극복한 나라, 하나님과의 나라가 완성된 나라, 그것이 사도바울의 설교입니다.

다윗에게 한 약속은 민족적인 약속이 아니랍니다.
여러나라를 부르는 열방을 부르는 약속이랍니다.
범위가 다르죠. 시간으로도 다릅니다. 영원한 약속입니다. 지금에 관한 약속보다 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이사야 55:1-11 참조)

●그러니 우리가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실이 다만 옳고 그르고, 응답받고 못받고의 싸움보다 더 크게, 하나님이 다윗에게 한 영원한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신 것처럼 하나님 쪽에서 가지는 성의와 신실하심과 능력과 자비와 긍휼에 의한 것이라면, 
이제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잘했다 못했다보다 더 크게, 우리의 부족함이나 못난 것이나, 실패 속에서까지, 예수로 말미암아 보인 약속의 나라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허락된 것처럼,
우리의 잘잘못이나 부족함이나 성공과 실패라는 조건을 넘는 우리의 한숨, 후회, 절망, 어리석음까지도 예수를 믿는다는 이름, 예수로 죽음을 극복케 하여 부활의 나라를 이루었다는 말 속에 가지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시는 일로 우리를 붙들어 예수라는 이름으로 허락한 나라에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다라는 믿음으로 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보다는 지금 일어나는 게 좋죠? 그때 가서 많이 받는 것보다 지금, 조금 싸게 지금 받으면 더 좋겠죠?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가 어렵습니다. 막 죽겠죠. 누구나 그렇습니다.

진지하게 현실을 사는 모든 이들에게 현실은 어렵습니다. 마음같이 되지 않고 법대로 되지 않고 상식대로 되지 않습니다. 사회가 그렇고 이웃이 그럴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그렇습니다.
살아보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신있는 사람은, 아이큐가 세자리 수만 되면 없습니다. 절망스럽죠.

●거기에 대하여 기독교가 말하는,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다윗의 영원한 약속의 후손이라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뭐라고 경고했다고요? '너희는 놀라고 또 놀라라 그리고 망해라'.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너희는 밤낮 놀라고 놀라고 망할 수 밖에 없다' 그런 경고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제가 살아본 인생은 성공하는 사람도 기절하는 인생이었습니다. 잠시 성공인 줄 알았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인생은 허망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보람은 다 지나오고 보니까 알겠습니다. 우리의 못난 것과 하자에도 불구하고 괜찮다는 사실입니다.
젏은 여러분들 한테는 약간 막막하게 들리셨을까요? 그래도 제가 어렸을 때부터 여기까지 이렇게 도망갈 수 없이 살아온 인생을 겪고 이 확인한 기독교 신앙의 증거입니다.

그러니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누구를 믿고 살 것인가? 세상을 믿고 살 것인가, 예수를 믿고 살 것인가?
한번 생각해 보시라는 오늘의 말씀이고, 여러분의 인생을 어떻게 누구를 근거로 이해하는 게 말이 되는가? 한번 기도해 보시는 오늘의 말씀이기를 바랍니다.

(기도)
예수를 믿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만입니다. 너무 많이 기다려야 되고 그 과정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된 것입니다.

우리를 자격으로 논하지 않으며 우리의 실패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복된 결과가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을 거의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복된 하나님의 약속이요 허락하신 구원입니다.

이 은혜를 우리 자손들에게도 주시옵소서. 현실이 어렵고 막막하고 세상이 무섭고 마구 어디에다 하소연해야될 지 모르는 우리 자식들에게 우리가 믿고 찾아오신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가 누구인지 알게 하셔서 하박국의 질문만이 아니라, 그의 마지막 찬송도 우리의 모든 고백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다시보는 사도행전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