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모든 병을 고치시고 모든 죄를 사하시고 모든 슬픔을 물리치시고 기쁨과 영광과 승리를 주신다는 걸 믿는 것이다. 이 말의 어려운 점은 이것이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다
- 예수를 잘 믿으면 복을 받아야 된다라는 것은 그 복이 마음의 평안이거나 보이는 어떤 물리적이거나 세상적 가치의 성공이기보다, 시간 속에 녹아드는 한 인간의 경험과 그 마음 깊은 간절한 갈구들의 변화, 그리고 그 성취에 있다.
- 우리는 늘 겸손해야 되지만 그 겸손은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겸손과 덕목이 아니고, 깊이 하나님이 일하신다, 하나님을 앞서면 안된다라는 두려움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내가 실력이 없고 내가 할 말이 없을 때에도 동일하게 하나님은 일하신다라는 자신감으로 작용하라고 이 두려움을, 이 겸손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 사는 것이 고달픈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진지한 것이며 위대한 것이다
하나님이 오늘 하루만큼 나와 일하시고 내가 큰다라고 믿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 회개로 자신이 아직 완벽해지지 않은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지 말고 울고 다짐하고 한 걸음씩만 나가라
- 진심으로 얘기하거나 진리로 얘기할 때는 보통 무례하다. 정답을 얘기할 때는 보통 무례하다.
그때는 진심으로 하면 안 된다. 예의를 갖춰야 되고, 상대방의 고통에 참여해야 된다.
이 고통은 어떤 사건으로 인한 어떤 그때그때의 큰 고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 따뜻한 마음과 넉넉한 마음의 귀한 신앙생활이 우리의 일상과 만남에 충만해야 된다
(고린도후서 10:7-18)
예수를 믿으면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예수께서 모두를 부르고 있다는 걸 기억해라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모든 병을 고치시고 모든 죄를 사하시고 모든 슬픔을 물리치시고 기쁨과 영광과 승리를 주신다는 걸 믿는 것입니다.
◇이 말의 어려운 점은 이것이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실 때 예수께서 오실 때에 구약이라는 역사를 가지고 태어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먼저 부르시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시고 그 약속이 예수에게서 성취됩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어디서 나겠느냐? 하니까 `베들레헴이다` 이렇게들 다 알고 있었죠.
그리고 예수께서 오시고 삼십삼 년을 사시고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교회사가 이천 년이나 넘게 이어오면서, 시대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내는 거죠.
시간이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각 개인에서도 태어나고 자라나고 늙고 ,, 하는 과정 순서가 있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시는 일이 단번에 시간을 초월하여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일하듯이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다양한 그리고 각각에게 최선인 인생을 허락하셔서 그의 인생이 예수를 만나면 어떤 변화와 어떤 열매를 맺는가를 우리에게 정말 풍성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라는 말은 그렇게 간단한 얘기가 아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이 세상의 법칙 중에 가장 으뜸 되는 옳고 그른 것, 이기고 지는 것의 논리가 가장 강한 도전이 되고 늘 유혹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 믿으면 복을 받아야 된다라는 것은 그 복이 마음의 평안이거나 보이는 어떤 물리적이거나 세상적 가치의 성공이기보다, 시간 속에 녹아드는 한 인간의 경험과 그 마음 깊은 간절한 갈구들의 변화, 그리고 그 성취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다워지는 데에 많은 갈등과 곡예를 넘어야 되는 것이죠.■
지난 시간에 모세를 얘기하면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죽는 것이 그의 명예고 소명이고 당연한 영광이다라고 얘기한 것과 같이,
이 신약시대에서는 바울이 그렇거든요.
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내 형제 친척 골육 동족을 위해서라면, 즉 그들이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라면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 그렇게 말해요. 있을 수 없는 말이죠. `그리스도에서 끊어져도 된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정말 우리로서는 `그건 너무하지 않아?` 그런 생각이 들잖아요.
이 모세의 고백이나 이 바울의 고백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범위, 그 극치를 이해한 표현인 거죠.
그래서 가까운 제 친구 목사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우리 평생 같이 가는 거야.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같이 가는 거야?` 그랬더니 그러겠대요. `천국에도 같이 가는 거야.` 그랬더니 물론 그러겠대요. `지옥에도 같이 가는 거야.` 그랬더니 그건 안 가겠대요.
천국과 지옥이 이렇게 딱 나뉘어 있죠.
그러나 천국과 지옥은 끝에 가서는 나뉘어지지만, 우리 인생 속에서는 내가 천국 갔다가 지옥 갔다가 해요. 자식만 길러봐도 하루에 몇 번씩 지옥 갔다 오는 걸요.
뭐 고달파서만이 아니라, 분이 터지고 하나님이 정말 내 인생에 간섭하고 있는지 아닌지 원망스럽거든요.
이런 모든 일 중의 바울의 최고의 경험을 하죠.
바울의 고백은 종종 오해됩니다.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겼는데 내가 전에는 몰랐고 내가 핍박자였는데, 내가 긍휼을 입은 것은 그때는 내가 모르고 그랬기 때문이다`에서 우리는 `몰랐다` 그러면 고의성이 없다 그래서 죄가 좀 가벼워지는 거죠.
그러나 지금 바울이 하는 얘기는 모르면 선택도 못하는 겁니다.
`그때는 선택의 여지없이 그 길 밖에는 몰랐다`입니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되는데 이 걸 할까 저 걸 할까에서 나쁜 걸 고르는 게 아니라, 좋은 일과 나쁜 일 중에 나쁜 일 하나밖에는 아는 게 없고 그 속에 있어서 이 좋은 일에 대하여 예수와 이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모든 뜻과 권능과 부르심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다. 그런데 나를 불렀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은 이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잡아 가두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를 만나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께서 아냐니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이 `너는 이방과 임금들 앞에 복음의 일꾼으로 서야 되는데 너는 많은 환란과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는 이제 이 빌립보에서도 그랬고 고린도후서에서도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고 할례 받은 사람이요 베냐민 지파 사람이고 율법에 대하여 정통한 사람인데, 그를 이방에 보내죠.
자기가 배운 것 아무 쓸데없는 데 보내는데, 하나님께서 바울을 정작 사도로 쓰시려면 그를 처음부터 예수에서 제자를 만들거나 율법 갖고는 안되겠다라는 어떤 고민이 있거나 하게 만들어야 되는데 가장 율법에 충실하고 그래서 예수와 예수 믿는 자들을 배척해서 핍박하는 그의 생애의 전반부를 살게 하고 후반부를 복음의 사도로 부르죠.
우리는 그저 다만 놀랄 뿐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여기 디모데 후서 1장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입니다.
그러니 목회자 여러분 `저 사람은 절대 구원 못 받아` 그런 말은 하시면 안 됩니다. 그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건 주께 맡기시고 누가 정말 교회를 핍박하고 원수같이 놀면, 그저 하나님 앞에 기도하실지언정, 앞에 막아서서 뭐라고 하는 일로 우리가 해야 되는 진짜 사역, 부르고 그를 인도하고 그와 함께 울고 그와 함께 웃고 기다리고 격려하는 일에 매진하셔야 됩니다.
이게 고린도후서를 쓰는 사도바울의 마음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보통 얘기하는 어떤 논리나 규칙이나 어떤 기준이나 어떤 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애절한 사도바울의 마음, 예수께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간절한 마음을 보아내지 못하면 예수 믿는 것이 밤낮 이렇게 말싸움이 되고 맙니다.
예수를 믿는 건 내가 기적 속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안될 것 같은데서 일이 돼야 됩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같이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이천 년 교회 역사가 면면히 이어내려 오면서 오직 하나, 동일한 신앙고백 속에 이어옵니다!
그 많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많은 세상의 시험들, 폭력들, 배척들 속을 이 기독교가 지켜오는 이유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의 주인이시다. 그는 우리의 부활이다. 그는 우리의 영생이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내세가 있다. 승리가 있다, 이런 것들이 다 우리의 사역,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조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사는 것이나, 하나님의 종으로 책임 있는 사역을 하게 되는 건 모두가 그 근거는 방법론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에 대하여 어떤 마음, 어떤 뜻, 어떤 정성을 도입하셨는가에 대한 항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한테 설교를 어떻게 하면 잘하는가 물어오는 사람들이 좀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신 실력만큼 해` 그러죠. 자기는 실력이 없어서 밤낮 똑같은 소리만 한데요. `똑같은 소리 해, 아침밥 먹고 점심밥 먹고 그 밥에 그 나물 먹는 걸로 애가 자라는 거야, 걱정하지 마` '늘 후회가 돼요' `그 마음으로 올라가면 겸손하고 온유하고 그리고 위로 해` 그러죠.
`할 수 있는 것 해.` '설교하다가 앞 뒤가 안 맞는 때가 많은데 어떻게 해요?' `모르면 척 끝내고 내려와 그러면 하나님이 그걸 들은 사람들 마음을 뒤집어 놓으셔.` 이런 위로를 주면 금방 이런 반문이 옵니다.
'그럼 뭣 때문에 열심히 해요? 뭣 땜에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해야 돼요?'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게으름과 무책임한 것으로 우리를 끌고 가는 이 유혹을 이겨야 되는 거죠.■
● 우리가 최선을 다해도 내 실력이 영혼을 채우는 것이 아니며, 내가 실력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일을 포기하시지 않는다, 그것을 아는 것이 이 사도바울이 지금 고린도후서를 쓰는 이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종이 되면 그런 자신감을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세우셨으니 내가 무엇을 하든 내가 혼자가 아니다' 그런 자신감을 가지셔야 됩니다.
그것이 여기 바울에게서 보듯이, `내 인생의 전반부를 못나게 살게 하신 것은 후반부에 큰 일을 맡겼을 때 내가 오해하지 않게 하려고 그러셨다` 이게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겸손해야 되지만 그 겸손은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겸손과 덕목이 아니고, 이 깊은 하나님이 일하신다, 하나님을 앞서면 안된다 라는 두려움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동일하게 내가 실력이 없고 내가 할 말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일하신다라는 자신감으로 작용하라고 이 두려움을, 이 겸손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마음에 가지는 이 자세를 논할 때 우리를 괴롭히는 두 가지 개념이 있는데, 하나는 완벽하라는 것입니다.
완벽하라는 것은 최선을 끌어내는 동기부여로는 좋습니다마는 완벽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완벽을 지향하면 이런 부작용이 나옵니다. 비난과 정죄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누구를 비난하고 정죄하기 시작하거든 내가 잘하려고 하다가 잘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고 있구나 시험에 빠졌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주 얘기하지만 회개를 너무 많이 하지 마십시오. 회개로 때우지 마시라는 겁니다. 회개로 자신이 아직 완벽해지지 않은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지 마시고 ●울고 다짐하고 한 걸음씩만 나가십시오.
●사십일 금식기도해서 뭐가 다 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사십일 금식기도 하듯이 사셔야 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고달픈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진지한 것이며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하루만큼 나와 일하시고 내가 큰다,라고 믿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는 '진심'입니다. 진심.
진심이라는 말이 가지는 위험은 내 속을 속이지 않았다고 하면 책임이 다 되는 것같이 아는데, 보통 진심이라고도 하고 진리라고도 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말했어`
●■이 진심과 진리를 말하는 것을 뭘 경계해야 되냐 하면 당신이 스스로를 속이지 않았으면 정직한 것이고 진심이므로 책임을 다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얘기하거나 진리로 얘기할 때는 보통 무례합니다. 정답을 얘기할 때는 보통 무례합니다.
상대방의 고통을 호소했는데, 무례하게 굽니다. `너 기도 안해서 그래` 이렇게 얘기하죠.
`왜 말을 그렇게 하냐?` `아 난 진심으로 한 거야` 그때는 진심으로 하면 안 됩니다.
●예의를 갖춰야 되고, 상대방의 고통에 참여하셔야 됩니다.
이 고통은 어떤 사건으로 인한 어떤 그때그때의 큰 고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은 사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고난의 인생을 살아야 하고 많은 위로가 필요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사할 때마다 이렇게 편을 드시는, 상대방의 그 노력과 분투를 인정하시는 그런 태도와 자세가 교육자에게는 물론 신자들 모두에게도 있어야 됩니다.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러나 완벽하지 못하는 걸로, 내가 왜 이러느냐는 걸로 속을 끓이는 것으로는 답이 안 나온다는 걸 아는 그런 《편을 들라》 말입니다.
`하나님 오늘은 제가 잘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잘 자고 내일은 더 잘하겠습니다. 이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하루만큼씩 하나님이 우리를 키우신다는 것을 믿는 그런 믿음을 사는 것,
그래서 하루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 우리에게 나이를 먹이듯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영성과 지혜와 안목과 감사를 만드신다고 믿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부분이 매우 약합니다. ●신앙이 좋으면 다 사납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서 손주를 보는 것 같은, ●따뜻한 마음과 넉넉한 마음의 귀한 신앙생활이 여러분의 일과 만남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분하고 억울한 상황에서 고린도 교우들을 향하여 `믿음의 형제들이여 함께 살고 함께 죽자`고 간절한 마음으로 손을 내미는 사도바울의 진심, 그의 신앙,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그 모습, 함께 부활하고 함께 하늘 보좌에 앉는 이 기독교 복음의 약속, 진정한 복의 위대함을 확인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서의 위대함과 승리가 있어야 한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기적을 행하신다고 믿는 하나님의 자녀 되어야 한다
(*일병20)
- 예수를 잘 믿으면 복을 받아야 된다라는 것은 그 복이 마음의 평안이거나 보이는 어떤 물리적이거나 세상적 가치의 성공이기보다, 시간 속에 녹아드는 한 인간의 경험과 그 마음 깊은 간절한 갈구들의 변화, 그리고 그 성취에 있다.
- 우리는 늘 겸손해야 되지만 그 겸손은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겸손과 덕목이 아니고, 깊이 하나님이 일하신다, 하나님을 앞서면 안된다라는 두려움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내가 실력이 없고 내가 할 말이 없을 때에도 동일하게 하나님은 일하신다라는 자신감으로 작용하라고 이 두려움을, 이 겸손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 사는 것이 고달픈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진지한 것이며 위대한 것이다
하나님이 오늘 하루만큼 나와 일하시고 내가 큰다라고 믿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 회개로 자신이 아직 완벽해지지 않은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지 말고 울고 다짐하고 한 걸음씩만 나가라
- 진심으로 얘기하거나 진리로 얘기할 때는 보통 무례하다. 정답을 얘기할 때는 보통 무례하다.
그때는 진심으로 하면 안 된다. 예의를 갖춰야 되고, 상대방의 고통에 참여해야 된다.
이 고통은 어떤 사건으로 인한 어떤 그때그때의 큰 고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 따뜻한 마음과 넉넉한 마음의 귀한 신앙생활이 우리의 일상과 만남에 충만해야 된다
(고린도후서 10:7-18)
예수를 믿으면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예수께서 모두를 부르고 있다는 걸 기억해라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모든 병을 고치시고 모든 죄를 사하시고 모든 슬픔을 물리치시고 기쁨과 영광과 승리를 주신다는 걸 믿는 것입니다.
◇이 말의 어려운 점은 이것이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실 때 예수께서 오실 때에 구약이라는 역사를 가지고 태어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먼저 부르시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시고 그 약속이 예수에게서 성취됩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어디서 나겠느냐? 하니까 `베들레헴이다` 이렇게들 다 알고 있었죠.
그리고 예수께서 오시고 삼십삼 년을 사시고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교회사가 이천 년이나 넘게 이어오면서, 시대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내는 거죠.
시간이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각 개인에서도 태어나고 자라나고 늙고 ,, 하는 과정 순서가 있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시는 일이 단번에 시간을 초월하여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일하듯이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다양한 그리고 각각에게 최선인 인생을 허락하셔서 그의 인생이 예수를 만나면 어떤 변화와 어떤 열매를 맺는가를 우리에게 정말 풍성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라는 말은 그렇게 간단한 얘기가 아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이 세상의 법칙 중에 가장 으뜸 되는 옳고 그른 것, 이기고 지는 것의 논리가 가장 강한 도전이 되고 늘 유혹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 믿으면 복을 받아야 된다라는 것은 그 복이 마음의 평안이거나 보이는 어떤 물리적이거나 세상적 가치의 성공이기보다, 시간 속에 녹아드는 한 인간의 경험과 그 마음 깊은 간절한 갈구들의 변화, 그리고 그 성취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다워지는 데에 많은 갈등과 곡예를 넘어야 되는 것이죠.■
지난 시간에 모세를 얘기하면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죽는 것이 그의 명예고 소명이고 당연한 영광이다라고 얘기한 것과 같이,
이 신약시대에서는 바울이 그렇거든요.
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내 형제 친척 골육 동족을 위해서라면, 즉 그들이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라면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 그렇게 말해요. 있을 수 없는 말이죠. `그리스도에서 끊어져도 된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정말 우리로서는 `그건 너무하지 않아?` 그런 생각이 들잖아요.
이 모세의 고백이나 이 바울의 고백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범위, 그 극치를 이해한 표현인 거죠.
그래서 가까운 제 친구 목사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우리 평생 같이 가는 거야.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같이 가는 거야?` 그랬더니 그러겠대요. `천국에도 같이 가는 거야.` 그랬더니 물론 그러겠대요. `지옥에도 같이 가는 거야.` 그랬더니 그건 안 가겠대요.
천국과 지옥이 이렇게 딱 나뉘어 있죠.
그러나 천국과 지옥은 끝에 가서는 나뉘어지지만, 우리 인생 속에서는 내가 천국 갔다가 지옥 갔다가 해요. 자식만 길러봐도 하루에 몇 번씩 지옥 갔다 오는 걸요.
뭐 고달파서만이 아니라, 분이 터지고 하나님이 정말 내 인생에 간섭하고 있는지 아닌지 원망스럽거든요.
이런 모든 일 중의 바울의 최고의 경험을 하죠.
바울의 고백은 종종 오해됩니다.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겼는데 내가 전에는 몰랐고 내가 핍박자였는데, 내가 긍휼을 입은 것은 그때는 내가 모르고 그랬기 때문이다`에서 우리는 `몰랐다` 그러면 고의성이 없다 그래서 죄가 좀 가벼워지는 거죠.
그러나 지금 바울이 하는 얘기는 모르면 선택도 못하는 겁니다.
`그때는 선택의 여지없이 그 길 밖에는 몰랐다`입니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되는데 이 걸 할까 저 걸 할까에서 나쁜 걸 고르는 게 아니라, 좋은 일과 나쁜 일 중에 나쁜 일 하나밖에는 아는 게 없고 그 속에 있어서 이 좋은 일에 대하여 예수와 이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모든 뜻과 권능과 부르심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다. 그런데 나를 불렀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은 이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잡아 가두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를 만나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께서 아냐니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이 `너는 이방과 임금들 앞에 복음의 일꾼으로 서야 되는데 너는 많은 환란과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는 이제 이 빌립보에서도 그랬고 고린도후서에서도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고 할례 받은 사람이요 베냐민 지파 사람이고 율법에 대하여 정통한 사람인데, 그를 이방에 보내죠.
자기가 배운 것 아무 쓸데없는 데 보내는데, 하나님께서 바울을 정작 사도로 쓰시려면 그를 처음부터 예수에서 제자를 만들거나 율법 갖고는 안되겠다라는 어떤 고민이 있거나 하게 만들어야 되는데 가장 율법에 충실하고 그래서 예수와 예수 믿는 자들을 배척해서 핍박하는 그의 생애의 전반부를 살게 하고 후반부를 복음의 사도로 부르죠.
우리는 그저 다만 놀랄 뿐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여기 디모데 후서 1장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입니다.
그러니 목회자 여러분 `저 사람은 절대 구원 못 받아` 그런 말은 하시면 안 됩니다. 그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건 주께 맡기시고 누가 정말 교회를 핍박하고 원수같이 놀면, 그저 하나님 앞에 기도하실지언정, 앞에 막아서서 뭐라고 하는 일로 우리가 해야 되는 진짜 사역, 부르고 그를 인도하고 그와 함께 울고 그와 함께 웃고 기다리고 격려하는 일에 매진하셔야 됩니다.
이게 고린도후서를 쓰는 사도바울의 마음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보통 얘기하는 어떤 논리나 규칙이나 어떤 기준이나 어떤 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애절한 사도바울의 마음, 예수께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간절한 마음을 보아내지 못하면 예수 믿는 것이 밤낮 이렇게 말싸움이 되고 맙니다.
예수를 믿는 건 내가 기적 속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안될 것 같은데서 일이 돼야 됩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같이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이천 년 교회 역사가 면면히 이어내려 오면서 오직 하나, 동일한 신앙고백 속에 이어옵니다!
그 많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많은 세상의 시험들, 폭력들, 배척들 속을 이 기독교가 지켜오는 이유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의 주인이시다. 그는 우리의 부활이다. 그는 우리의 영생이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내세가 있다. 승리가 있다, 이런 것들이 다 우리의 사역,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조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사는 것이나, 하나님의 종으로 책임 있는 사역을 하게 되는 건 모두가 그 근거는 방법론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에 대하여 어떤 마음, 어떤 뜻, 어떤 정성을 도입하셨는가에 대한 항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한테 설교를 어떻게 하면 잘하는가 물어오는 사람들이 좀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신 실력만큼 해` 그러죠. 자기는 실력이 없어서 밤낮 똑같은 소리만 한데요. `똑같은 소리 해, 아침밥 먹고 점심밥 먹고 그 밥에 그 나물 먹는 걸로 애가 자라는 거야, 걱정하지 마` '늘 후회가 돼요' `그 마음으로 올라가면 겸손하고 온유하고 그리고 위로 해` 그러죠.
`할 수 있는 것 해.` '설교하다가 앞 뒤가 안 맞는 때가 많은데 어떻게 해요?' `모르면 척 끝내고 내려와 그러면 하나님이 그걸 들은 사람들 마음을 뒤집어 놓으셔.` 이런 위로를 주면 금방 이런 반문이 옵니다.
'그럼 뭣 때문에 열심히 해요? 뭣 땜에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해야 돼요?'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게으름과 무책임한 것으로 우리를 끌고 가는 이 유혹을 이겨야 되는 거죠.■
● 우리가 최선을 다해도 내 실력이 영혼을 채우는 것이 아니며, 내가 실력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일을 포기하시지 않는다, 그것을 아는 것이 이 사도바울이 지금 고린도후서를 쓰는 이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종이 되면 그런 자신감을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세우셨으니 내가 무엇을 하든 내가 혼자가 아니다' 그런 자신감을 가지셔야 됩니다.
그것이 여기 바울에게서 보듯이, `내 인생의 전반부를 못나게 살게 하신 것은 후반부에 큰 일을 맡겼을 때 내가 오해하지 않게 하려고 그러셨다` 이게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겸손해야 되지만 그 겸손은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겸손과 덕목이 아니고, 이 깊은 하나님이 일하신다, 하나님을 앞서면 안된다 라는 두려움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동일하게 내가 실력이 없고 내가 할 말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일하신다라는 자신감으로 작용하라고 이 두려움을, 이 겸손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마음에 가지는 이 자세를 논할 때 우리를 괴롭히는 두 가지 개념이 있는데, 하나는 완벽하라는 것입니다.
완벽하라는 것은 최선을 끌어내는 동기부여로는 좋습니다마는 완벽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완벽을 지향하면 이런 부작용이 나옵니다. 비난과 정죄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누구를 비난하고 정죄하기 시작하거든 내가 잘하려고 하다가 잘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고 있구나 시험에 빠졌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주 얘기하지만 회개를 너무 많이 하지 마십시오. 회개로 때우지 마시라는 겁니다. 회개로 자신이 아직 완벽해지지 않은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지 마시고 ●울고 다짐하고 한 걸음씩만 나가십시오.
●사십일 금식기도해서 뭐가 다 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사십일 금식기도 하듯이 사셔야 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고달픈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진지한 것이며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하루만큼 나와 일하시고 내가 큰다,라고 믿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는 '진심'입니다. 진심.
진심이라는 말이 가지는 위험은 내 속을 속이지 않았다고 하면 책임이 다 되는 것같이 아는데, 보통 진심이라고도 하고 진리라고도 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말했어`
●■이 진심과 진리를 말하는 것을 뭘 경계해야 되냐 하면 당신이 스스로를 속이지 않았으면 정직한 것이고 진심이므로 책임을 다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얘기하거나 진리로 얘기할 때는 보통 무례합니다. 정답을 얘기할 때는 보통 무례합니다.
상대방의 고통을 호소했는데, 무례하게 굽니다. `너 기도 안해서 그래` 이렇게 얘기하죠.
`왜 말을 그렇게 하냐?` `아 난 진심으로 한 거야` 그때는 진심으로 하면 안 됩니다.
●예의를 갖춰야 되고, 상대방의 고통에 참여하셔야 됩니다.
이 고통은 어떤 사건으로 인한 어떤 그때그때의 큰 고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은 사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고난의 인생을 살아야 하고 많은 위로가 필요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사할 때마다 이렇게 편을 드시는, 상대방의 그 노력과 분투를 인정하시는 그런 태도와 자세가 교육자에게는 물론 신자들 모두에게도 있어야 됩니다.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러나 완벽하지 못하는 걸로, 내가 왜 이러느냐는 걸로 속을 끓이는 것으로는 답이 안 나온다는 걸 아는 그런 《편을 들라》 말입니다.
`하나님 오늘은 제가 잘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잘 자고 내일은 더 잘하겠습니다. 이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하루만큼씩 하나님이 우리를 키우신다는 것을 믿는 그런 믿음을 사는 것,
그래서 하루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 우리에게 나이를 먹이듯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영성과 지혜와 안목과 감사를 만드신다고 믿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부분이 매우 약합니다. ●신앙이 좋으면 다 사납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서 손주를 보는 것 같은, ●따뜻한 마음과 넉넉한 마음의 귀한 신앙생활이 여러분의 일과 만남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분하고 억울한 상황에서 고린도 교우들을 향하여 `믿음의 형제들이여 함께 살고 함께 죽자`고 간절한 마음으로 손을 내미는 사도바울의 진심, 그의 신앙,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그 모습, 함께 부활하고 함께 하늘 보좌에 앉는 이 기독교 복음의 약속, 진정한 복의 위대함을 확인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서의 위대함과 승리가 있어야 한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기적을 행하신다고 믿는 하나님의 자녀 되어야 한다
(*일병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