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란 이름을 쓰면, 기독교 역사상 최고로 위대한 사도, 스승, 교사로 되어있지,
그가 얼마만큼 어려운 인생을 살았는가는 다 사실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베푸신 구원을 모든 인류에게 나누어 주시기 위하여 바울을 세웠다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 우리의 이해가 일치하지만,
하나님이 그 일을 어떤 방식으로 했느냐는 대부분의 경우 성경이 얘기하는 것과 성도들이 이해하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를 보입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행 9:15)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그들 앞에 세울 하나님의 종인데,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할 지 모를 것이다..'
여기서 모른다는 뜻은 무지하다는 뜻이 아니라, 설명할 방법이 없이 크다 라는 뜻이죠.
실제로 바울은 그 길을 갑니다. 죽음의 길을 걷는다는 거죠.
예수를 죽인 그 세상, 예수를 죽인 그 권력을 꺽기 위하여, 예수께서 죽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구원을 이루신 것같이, 그의 종들은 동일한 길을 걸어야 한다.
☆ 예수의 생명이 또한 너희에게 나타난 방법으로 하나님은 일하고 계신다. 이 말을 하는 거죠.
사도바울을 논함으로써 우리가 범하는 가장 큰 실수는 뭐냐?
사도 바울의 위대함을 얘기함으로써 지금 내가 그 길을 가는 것을 슬쩍 외면하는 것이죠. 외면말고 실제 바울이 가는 길을 걸어야 된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이고 바울을 괴롭힌 세상 속에 그 권력과 적대감을 아직 심판하시지 않은, 그러나 그 속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증거하신 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에서 바울을 위대하다고 평가하는 그 평에서 벌써 이미 도망가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호의를 받거나 이 세상을 납득시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세상은 그것 모른다. 그것은 어두운 데 빛이 비치라 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것이다." 천지창조 말이죠.
"한 영혼의 깊음 속에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찾아와 그를 구원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니라.
그것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 지는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것이요, 그 일을 위하여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앙고백을 세상 앞에서 감출 수 없다.
☆그리고 그 감출 수 없는 것으로 인하여 세상 앞에 우리는 매일 예수를 그리 하신 것같이, 사람들 앞에 우리의 목숨을 내놔야 되는 길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라"
이게 이 고린도후서 4장 이야기 입니다.
사도바울의 사도권을, 그가 하나님의 사자라는 것에 대해서 강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거기에 대한 답입니다;
"그렇지 않다 이 일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시려는 것에서는 우리가 다 이해를 못하고 있지만, 하나
우리가 이해 못하는 것 있다.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다른 방법으로 일하신다.
어떤 방법? 그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는 거죠. 어떤 식으로? 우리를 죽이기로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답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자리입니까? 하나님이 사도를 그렇게 쓰시더랍니다.
□중요한 이해죠. 그러나 교회사 내내 이 이해는 외면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자는 걸 다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문제를 면제시켜달라는 것이 제일 우선하는 기도 아니었던가요?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과감히 못하는 것 아닌가요?
누구의 책임인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 답을 주시지 않는가? 어떻게 하면 답을 주실 것인가? 이 문제에 매달리다가 나중에는 결국 체념하고 마는 거죠.
□하나님이 이 일을 라는 성경말씀은 아무리 읽어도 눈에 안 들어오거든요. 이상한 일이죠. 한 쪽 구석에 있는, 우리가 좋은 말씀은 들어오고 더 많이 있는 성경의 요구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 얘기들을 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바울이 세계 전도 여행을 출발했다,라고 팡파레를 울리는 일이 아니더라는 거죠.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 앞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설명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도 그 문제에 사실은 걸렸었다고 고린도후서 12장에서 그 문제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후 12:10)
어려운 고백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가지는 첫 번째 이유는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입니다.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기본적인 종교성이죠. 여기에 대해 하나님이 외면한다는 얘기는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우리를 복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이 소원들, 최소한의 소원들이 말 그대로 최소로 굳어집니다. 더 들어가는 것을 막죠.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더 깊은 경지를 막게 되죠.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 그의 영광의 찬송이라는 약속들로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어떤 어떤 편견이 되고 고집이 되죠.
그러나 하나님은 이 문제 대하여 타협하실 마음이 없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하는 얘기는 이겁니다. 사단의 가시를 빼달라고 그가 세 번 기도한 것은 자기 개인의 형통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장애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하신 대답은 달랐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였답니다.
우리 현실에 가져다가 이 문제를 사용해서 이 성경의 말씀을 금방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다른 것 다 그만두고,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이웃과 세상 앞에 기독교 복음의 진정성을 위하여 그 복됨을 위하여, 최소한의 어떤 조건을 요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잘 되면 복음을 증거하는 데에도 유리하지 않겠는가,라는 건 우리의 정직하고 순진한 기대입니다.
여기에 나온 바와 같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나님의 답입니다.
그러니 알 수가 없죠. 교회가 어떤을 가져야 되고, 어떤 수준을 가져야 되는지, 각개인의 신자들이 어느만큼의 능력이 있어야 되는지 우리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현실적인 고통을 면하기 위하여 기도를 하고, 동시에 거기에 이 명분도 같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 저 하나만을 위해서 이 기도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이 꼴로 있는 것은 이웃사람들과 사회 앞에 제가 믿는 하나님도 동시에 오해받는 것입니다`
유효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답은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그것은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막막한 것일 수도 있고, 불안한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 한 발만 더 들어가시면, 우리의 성공과 실패, 우리의 유능과 무능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절대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입니다.
게다가 우리의 무능함이 우리가 쓸데없다는 뜻은 아니랍니다. 바울에게서 그랬던 것같이.
바울의 이 고백,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이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을 때에, 이 세상에서는 존재감을 찾을 수 없을 때 조차 우리가 대단히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죠? 약간 억지로 붙잡는 것 같으죠? 좀더 긍정적인 이 문제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 신앙에 더 큰 힘을 주는 성경의 약속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 아주 중요한 대목이죠. 베드로의 충성고백에 대하여 주께서 대단히 심히 꾸짖는 장면입니다.
주께서 죽으셔야겠다고 얘기하고 베드로가 목숨을 걸고 주를 지키겠다고 충성을 약속하는 바로 그 고백을 주께서 이렇게 호되게 비난하십니다; `사탄아~`라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입니다.
*****
그러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예수가 죽어야만 되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은 무엇일까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따르려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하는 건 무엇일까요? 십자가란 고통이며, 비난이며, 오해며, 수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신 것은 우리 모두 알다시피 단 하나의 이 조건 때문이랍니다. 우리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입니다. "사랑하사"
사랑이 뭐죠?
사랑은 강요가 아닙니다. 사랑은 가슴이 뜨거워져서 정열과 불길로 상대방을 사르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잘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로 그 얘기를 하죠;
'사랑은 천사의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사랑은 산을 옮기는 능력이 아니다. 사랑은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 아니다.'
사랑은 뭐냐? 우뢰와 같은 소리로 그렇게 선언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거다. 영어 표현으로 이렇게 되어 있죠; `Love is long suffering. 오랜 고통이다.'
그게 뭔지 여러분 아시죠?
부부 사이가 그거죠. 오랜 고통입니다. 자식 기르는 게 그렇죠. 오랜 고통입니다. 그게 뭐라고요? 그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가 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내 맘에 맞게 통제하거나 폭력으로써 조작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위하여 늘 조심합니다. 쩔쩔매죠. 오랜 고통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뭐라고요?
'오래 참고' 뒤이어 나오는 일들이 성경에 어떻게 반복적으로 동일한 얘기를 하는가 보십시오. 사랑은 온유하며, 성내지 않으며, 무례히 행치 않으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며,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가 졌지요. 졌지요. 아들을 주고 아들을 죽이기까지 지죠. 지지요. 그게 사랑이죠.
그러니 우리 보고 그러랍니다; "너 예수 믿고 내 자녀 됐냐?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그 날까지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기다리고 참고 계시다는 것 아느냐? 그러면 너 그 사랑에 동참하여 네가 참고, 네가 지라" 는 것입니다.
뭘 참아야 되죠?
우리가 가진 것을 힘으로 내어놓을 수 없고, 상대방을 붙잡아 '지금 답을 해라'라는 심판대 앞에 세울 수 없답니다. 우리가 지는 것 같죠. 우리가 잘못한 것 같고, 우리가 망하는 것 같죠.
우리는 예수도 그렇게 알았었습니다. 예수가 잘못했고, 예수가 틀렸고, 예수가 무력해서 죽었다고 역사는 그렇게 말을 했죠.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렇지 않게 예수를 압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세상의 것으로 판단하거나 보상받거나 증명을 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생을 예수를 믿는다는 이름으로 여러분의 존재와 운명을 이제 이해하게 되자,
여러분은 그 모든 것을 벗어나 새로운 기준 아래, 새로운 소망 아래서 여러분 자신을 이해하고, 여러분의 인생에 대하여 여러분 스스로가 명예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유능과 무능을 떠나서,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자랑과 오해를 떠나서 말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에서 사도바울의 역사적 증언입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있었던 것이 현실인 것같이, 진리인 것같이, 우리에게서, 사도바울이 걸었던 그 길이, 우리의 현실과 인생에, 그대로 중첩될 수 없다면, 재현될 수 없다면, 여러분들은 기독교가 아직 뭔지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해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억울할까요?
사랑한다는 것은 명예로운 일입니다. 위대한 일입니다. 그것과 바꿀 수 있는 가치는 없습니다. 무력해 보인다고요? 힘을 가지고 남을 강제하면 그게 잘 난 거라고요? 아닙니다.
모래시계에서 박태수가, 성경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기억하셔야.. ㅎㅎ, 자기 직속상관, 보스였던 박성범을 구치소로 찾아갑니다.
"태수야, 오랜만이구나. 요새 어떻게 지내냐?"
"형님 저는 강해지려고 합니다"
"태수야, 너 잘못 배웠구나. 너 강한 놈이 발 뻗고 자는 것 봤냐?"
성경에 없는 얘기에서도, 조폭 두목만 되어도 그 정도는 압니다. 어느 시대나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장 쉽게 걸려 넘어간 지점입니다. 예수를 믿는 진정한 힘을, 진정한 명예를 몰라서 늘 쩔쩔매고 비명을 지르고 도망갔던 지점입니다.
그리 하지 마십시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이 갖는 힘을 위대함을 여러분의 삶에 붙드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이 갖는 명예와 담대함과 기적을 사는 복된 여러분의 존재와 인생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예수를 믿는 문제는 세상 앞에서 우리의 목숨과 운명을 거는 싸움입니다. 그것은 이해관계거나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진정한 가치와 명예에 관한 문제입니다. 인간이 뭔지, 사는 게 뭔지, 무엇이 진정 소중한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예수 안에서 보이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을 받아내셨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누려야 됩니다. 아멘
(*다시보는 사도행전 19 /행13:1-3)
그가 얼마만큼 어려운 인생을 살았는가는 다 사실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베푸신 구원을 모든 인류에게 나누어 주시기 위하여 바울을 세웠다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 우리의 이해가 일치하지만,
하나님이 그 일을 어떤 방식으로 했느냐는 대부분의 경우 성경이 얘기하는 것과 성도들이 이해하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를 보입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행 9:15)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그들 앞에 세울 하나님의 종인데,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할 지 모를 것이다..'
여기서 모른다는 뜻은 무지하다는 뜻이 아니라, 설명할 방법이 없이 크다 라는 뜻이죠.
실제로 바울은 그 길을 갑니다. 죽음의 길을 걷는다는 거죠.
예수를 죽인 그 세상, 예수를 죽인 그 권력을 꺽기 위하여, 예수께서 죽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구원을 이루신 것같이, 그의 종들은 동일한 길을 걸어야 한다.
☆ 예수의 생명이 또한 너희에게 나타난 방법으로 하나님은 일하고 계신다. 이 말을 하는 거죠.
사도바울을 논함으로써 우리가 범하는 가장 큰 실수는 뭐냐?
사도 바울의 위대함을 얘기함으로써 지금 내가 그 길을 가는 것을 슬쩍 외면하는 것이죠. 외면말고 실제 바울이 가는 길을 걸어야 된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이고 바울을 괴롭힌 세상 속에 그 권력과 적대감을 아직 심판하시지 않은, 그러나 그 속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증거하신 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에서 바울을 위대하다고 평가하는 그 평에서 벌써 이미 도망가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호의를 받거나 이 세상을 납득시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세상은 그것 모른다. 그것은 어두운 데 빛이 비치라 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것이다." 천지창조 말이죠.
"한 영혼의 깊음 속에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찾아와 그를 구원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니라.
그것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 지는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것이요, 그 일을 위하여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앙고백을 세상 앞에서 감출 수 없다.
☆그리고 그 감출 수 없는 것으로 인하여 세상 앞에 우리는 매일 예수를 그리 하신 것같이, 사람들 앞에 우리의 목숨을 내놔야 되는 길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라"
이게 이 고린도후서 4장 이야기 입니다.
사도바울의 사도권을, 그가 하나님의 사자라는 것에 대해서 강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거기에 대한 답입니다;
"그렇지 않다 이 일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시려는 것에서는 우리가 다 이해를 못하고 있지만, 하나
우리가 이해 못하는 것 있다.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다른 방법으로 일하신다.
어떤 방법? 그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는 거죠. 어떤 식으로? 우리를 죽이기로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답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자리입니까? 하나님이 사도를 그렇게 쓰시더랍니다.
□중요한 이해죠. 그러나 교회사 내내 이 이해는 외면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자는 걸 다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문제를 면제시켜달라는 것이 제일 우선하는 기도 아니었던가요?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과감히 못하는 것 아닌가요?
누구의 책임인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 답을 주시지 않는가? 어떻게 하면 답을 주실 것인가? 이 문제에 매달리다가 나중에는 결국 체념하고 마는 거죠.
□하나님이 이 일을 라는 성경말씀은 아무리 읽어도 눈에 안 들어오거든요. 이상한 일이죠. 한 쪽 구석에 있는, 우리가 좋은 말씀은 들어오고 더 많이 있는 성경의 요구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 얘기들을 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바울이 세계 전도 여행을 출발했다,라고 팡파레를 울리는 일이 아니더라는 거죠.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 앞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설명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도 그 문제에 사실은 걸렸었다고 고린도후서 12장에서 그 문제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후 12:10)
어려운 고백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가지는 첫 번째 이유는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입니다.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기본적인 종교성이죠. 여기에 대해 하나님이 외면한다는 얘기는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우리를 복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이 소원들, 최소한의 소원들이 말 그대로 최소로 굳어집니다. 더 들어가는 것을 막죠.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더 깊은 경지를 막게 되죠.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 그의 영광의 찬송이라는 약속들로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어떤 어떤 편견이 되고 고집이 되죠.
그러나 하나님은 이 문제 대하여 타협하실 마음이 없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하는 얘기는 이겁니다. 사단의 가시를 빼달라고 그가 세 번 기도한 것은 자기 개인의 형통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장애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하신 대답은 달랐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였답니다.
우리 현실에 가져다가 이 문제를 사용해서 이 성경의 말씀을 금방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다른 것 다 그만두고,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이웃과 세상 앞에 기독교 복음의 진정성을 위하여 그 복됨을 위하여, 최소한의 어떤 조건을 요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잘 되면 복음을 증거하는 데에도 유리하지 않겠는가,라는 건 우리의 정직하고 순진한 기대입니다.
여기에 나온 바와 같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나님의 답입니다.
그러니 알 수가 없죠. 교회가 어떤을 가져야 되고, 어떤 수준을 가져야 되는지, 각개인의 신자들이 어느만큼의 능력이 있어야 되는지 우리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현실적인 고통을 면하기 위하여 기도를 하고, 동시에 거기에 이 명분도 같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 저 하나만을 위해서 이 기도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이 꼴로 있는 것은 이웃사람들과 사회 앞에 제가 믿는 하나님도 동시에 오해받는 것입니다`
유효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답은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그것은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막막한 것일 수도 있고, 불안한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 한 발만 더 들어가시면, 우리의 성공과 실패, 우리의 유능과 무능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절대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입니다.
게다가 우리의 무능함이 우리가 쓸데없다는 뜻은 아니랍니다. 바울에게서 그랬던 것같이.
바울의 이 고백,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이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을 때에, 이 세상에서는 존재감을 찾을 수 없을 때 조차 우리가 대단히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죠? 약간 억지로 붙잡는 것 같으죠? 좀더 긍정적인 이 문제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 신앙에 더 큰 힘을 주는 성경의 약속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 아주 중요한 대목이죠. 베드로의 충성고백에 대하여 주께서 대단히 심히 꾸짖는 장면입니다.
주께서 죽으셔야겠다고 얘기하고 베드로가 목숨을 걸고 주를 지키겠다고 충성을 약속하는 바로 그 고백을 주께서 이렇게 호되게 비난하십니다; `사탄아~`라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입니다.
*****
그러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예수가 죽어야만 되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은 무엇일까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따르려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하는 건 무엇일까요? 십자가란 고통이며, 비난이며, 오해며, 수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신 것은 우리 모두 알다시피 단 하나의 이 조건 때문이랍니다. 우리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입니다. "사랑하사"
사랑이 뭐죠?
사랑은 강요가 아닙니다. 사랑은 가슴이 뜨거워져서 정열과 불길로 상대방을 사르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잘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로 그 얘기를 하죠;
'사랑은 천사의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사랑은 산을 옮기는 능력이 아니다. 사랑은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 아니다.'
사랑은 뭐냐? 우뢰와 같은 소리로 그렇게 선언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거다. 영어 표현으로 이렇게 되어 있죠; `Love is long suffering. 오랜 고통이다.'
그게 뭔지 여러분 아시죠?
부부 사이가 그거죠. 오랜 고통입니다. 자식 기르는 게 그렇죠. 오랜 고통입니다. 그게 뭐라고요? 그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가 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내 맘에 맞게 통제하거나 폭력으로써 조작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위하여 늘 조심합니다. 쩔쩔매죠. 오랜 고통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뭐라고요?
'오래 참고' 뒤이어 나오는 일들이 성경에 어떻게 반복적으로 동일한 얘기를 하는가 보십시오. 사랑은 온유하며, 성내지 않으며, 무례히 행치 않으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며,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가 졌지요. 졌지요. 아들을 주고 아들을 죽이기까지 지죠. 지지요. 그게 사랑이죠.
그러니 우리 보고 그러랍니다; "너 예수 믿고 내 자녀 됐냐?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그 날까지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기다리고 참고 계시다는 것 아느냐? 그러면 너 그 사랑에 동참하여 네가 참고, 네가 지라" 는 것입니다.
뭘 참아야 되죠?
우리가 가진 것을 힘으로 내어놓을 수 없고, 상대방을 붙잡아 '지금 답을 해라'라는 심판대 앞에 세울 수 없답니다. 우리가 지는 것 같죠. 우리가 잘못한 것 같고, 우리가 망하는 것 같죠.
우리는 예수도 그렇게 알았었습니다. 예수가 잘못했고, 예수가 틀렸고, 예수가 무력해서 죽었다고 역사는 그렇게 말을 했죠.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렇지 않게 예수를 압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세상의 것으로 판단하거나 보상받거나 증명을 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생을 예수를 믿는다는 이름으로 여러분의 존재와 운명을 이제 이해하게 되자,
여러분은 그 모든 것을 벗어나 새로운 기준 아래, 새로운 소망 아래서 여러분 자신을 이해하고, 여러분의 인생에 대하여 여러분 스스로가 명예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유능과 무능을 떠나서,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자랑과 오해를 떠나서 말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에서 사도바울의 역사적 증언입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있었던 것이 현실인 것같이, 진리인 것같이, 우리에게서, 사도바울이 걸었던 그 길이, 우리의 현실과 인생에, 그대로 중첩될 수 없다면, 재현될 수 없다면, 여러분들은 기독교가 아직 뭔지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해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억울할까요?
사랑한다는 것은 명예로운 일입니다. 위대한 일입니다. 그것과 바꿀 수 있는 가치는 없습니다. 무력해 보인다고요? 힘을 가지고 남을 강제하면 그게 잘 난 거라고요? 아닙니다.
모래시계에서 박태수가, 성경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기억하셔야.. ㅎㅎ, 자기 직속상관, 보스였던 박성범을 구치소로 찾아갑니다.
"태수야, 오랜만이구나. 요새 어떻게 지내냐?"
"형님 저는 강해지려고 합니다"
"태수야, 너 잘못 배웠구나. 너 강한 놈이 발 뻗고 자는 것 봤냐?"
성경에 없는 얘기에서도, 조폭 두목만 되어도 그 정도는 압니다. 어느 시대나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장 쉽게 걸려 넘어간 지점입니다. 예수를 믿는 진정한 힘을, 진정한 명예를 몰라서 늘 쩔쩔매고 비명을 지르고 도망갔던 지점입니다.
그리 하지 마십시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이 갖는 힘을 위대함을 여러분의 삶에 붙드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이 갖는 명예와 담대함과 기적을 사는 복된 여러분의 존재와 인생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예수를 믿는 문제는 세상 앞에서 우리의 목숨과 운명을 거는 싸움입니다. 그것은 이해관계거나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진정한 가치와 명예에 관한 문제입니다. 인간이 뭔지, 사는 게 뭔지, 무엇이 진정 소중한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예수 안에서 보이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을 받아내셨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누려야 됩니다. 아멘
(*다시보는 사도행전 19 /행1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