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일병 21_억울하지 않다. 힘이 들 뿐이다 내 모든 못난 것들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권능 지혜 반전을 내 생애에 담아내라

nazunzaro 2020. 6. 6. 13:31
도덕은 가장 최소한의 덕목인데 그것이 우리의 이해에 가장 굵은 줄기가 되어서 그리스도에게 가는 것을 방해하곤 한다.
도덕의 최고의 약점은 잘못을 안하는 것이다. 도덕은 영광을 만들거나 섬기거나 유익을 만드는 게 아니라, 흠이 없어지고 나쁜 짓을 안하는 선까지의 최소한의 규칙이다.

기독교복음이 증거 될 때에는 그것이 도덕성과 종교성으로가 아니라, 은혜라는 것으로 영향을 발한다. 은혜라는 것은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 생명, 소망 그리고 감사같은 것들이다.

도덕이 영향을 미칠 때는 도덕성을 지킨 사람이 돋보이기 위해서 그렇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공포 분위기가 조성된다.
진정한 복음이 전해질 때는 용서가 있고 웃음이 있다.
가장 지극한 종교성을 주장할 때도 예를 들면 기적을 논하거나 성령을 은사를 논할 때 조차도 그것이 잘못됐을 때는 거기에 공포가 있다.
공포가 있다는 말을 알 것이다.
한참 부흥시대에 성령의 은사가 많은 사람에게 나타났고, 방언이 그중에 가장 돋보이는 은사의 표적이었다. 방언을 하는 것은 대단히 놀랍고 귀한 은혜인 게 사실이지만, 우리는 방언을 하자, 방언을 못받은 사람을 비난하기 시작했었던 과거가 있었다. 언제나 똑같다.

●사도바울이 자기를 증명하는 일에, 자기가 복음의 일꾼이 맞다고 증명하는 일에 바울이 쓰는 방도는, '복음 안에는 용서가 있다. 구원이 있다. 회복이 있다. 거기에는 놀라운 기적과 은혜가 있다' 이런 소식들을 전했고, 그런 소식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의 , 공포와는 가장 거리가 먼 그런 사도의 행실을 수반했다.

신자는 무슨 일을 하든지 양보해야 되고, 그리고 청빈해야 되고, 모든 일에 완벽해야 되고 하는 것들로 여러분을 압박할 수 있는데, 그런 것은 다만 오해가 아니라, 또는 적대적 그 세력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가지는 보편적 이해의 척도 때문에 그렇다.

그것을 다 견딜 수는 없을 지 모른다. 그러나 특별히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서, 특별히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 이렇게까지 확대는 하지 말고, 누가 몰라서 그러는 거다, 잘 감당하는 거다, 여기 사도바울마저도 이렇게 아우성을 친 모두가 겪는 오해다, 이런 든든한 배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이 내용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중요하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그 대상에게 왜 이런 적대적인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모세가 애굽에서 태어날 수 없는데 태어나서 사십 세에 그의 백성을 위하여 분연히 일어났다가 실패하고 팔십 세에야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사십 년동안 지키고 이끌었었다 하는 얘기를 하는데, 같은 스데반의 설교 사도행전 7장 35절에 보면,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그런다. 그 대조가 나온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위인이 아니라, 사람들이 볼 때는 가장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보낸다》라는 것이 스데반의 설교에서 모세의 사역에 대한 설명이다.

그 얘기는 이렇게 뒤집으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된 내용들은 세상은 전혀 알아먹지 못한다, 세상에서는 그것이 가치있는 줄 모른다》라는 말과 동일한 표현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 앞에 세웠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반대한 것은 모세가 그때 바로와 대등하거나 견줄만한 어떤 세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듯이》,
이 고린도 교회에서도 바울에 대한 거부는 《바울이 어떤 정치적 사회적 어떤 면에서도 권력을 갖고 등장하지 않았고 또 그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저들을 자꾸 오해케 하고 있다,》라고 지적하는 셈이다.

그러니 여러분들 생각해 보라. 우리 제일 원하는 게 뭐냐 하면, 월급 안받고도 사는 거다. 치사하게 회사에서 생활비 받지 않고 생활비를 딴 데서 벌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 다 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렇게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생활비를 회사서 받아서 어쩔수 없이 견디는 때가 많은데, 그게 복이다.》
생활비를 회사 의존하지 않고 딴 데서 받으면 여러분은 벌써 그만 뒀을 거다. 안그런가?
우리 실력으로는 회사 일 못한다. 정말 거지같다. 상사 동료가 딴죽을 걸고 모욕을 준다. 《어떻게 견뎠냐고? 자식 키우려고 견뎠다. 훌륭한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세웠고, 이 이웃들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그건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니 뿔다구는 속으로 내고 겉으로 표현하지 마라. 고함은 아무리 질러봐야 아무 소용없고 화를 내면 다 수습해야 한다. 할 필요 없다. 그리고 다 잘하려고 하지 말고, 욕을 잘 먹으라.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웃으라. 그것이 가장 위대한 것이다》

모세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보라. 모세가 부름 받았을 때 얼마나 화가 났느냐 하면, 모세가 철들어서야 자기가 누구인지 안 것 아닌가?
자기가 히브리 민족인데 엄마가 자기를 버렸지 않았는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그게 하필 바로의 궁에서 바로의 딸이 자기를 기르는 바람에 왕자가 됐다. 그리고 그 민족성과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고민하다가 사십세에 드디어 자기 혈족을 위하여 분연이 일어났는데, 하나님이 그때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너무 당황해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미디안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사십 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게 정해진 기한이 아니고, 하루하루가 영원히 절망이고 끝장인 인생을 끝도 없이 살아야 했다. 거기서 난 아들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는데 '이방 나그네'라는 뜻이다. 우리 말에 가장 적당한 표현이 그게 '낙동강 오리알'이라는 뜻이다. 낙동강에서 오리가 알을 낳았는데 그냥 이게 강물에 떠내려가면 그건 끝장이다 그런 뜻이다. 얼마나 그가 절망했고 절망이 비통하고 원망이고 하던 세월까지 다 지나면 나중에 보면 그가 자식한테 할례도 주지 않았다.

그 모세를 부른다. 그러니까 모세가 화가 나서 얘기한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내가 내 백성이 고난당하는 것을 보았고, 내가 너를 보내어 내 백성을 구원하려고 한다"
`하나님, 그딴소리 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을 이렇게 하십니까? 이게 뭡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뭐라고 대답했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이 부분이 이 콘텍스트에 맞게 의역을 했다;
●"나는 하나님이기를 중단한 적이 없는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그 모세가 애를 태우다 못해 모든 감정과 울분마저도 다 사라져 버린, 그리고 정말 말 그대로 무념무상의 자리로 간, 원망과 모든 분노마저도 다 타버린 그 시간들이, 모세가 기억하기도 싫은 그 시간들이 하나님이 일한 시간이었다고 얘기한다.

바울은 역사적 배경, 역사적 증언들을 놓고 자기의 사역을 복음으로, 그리스도의 부르심으로, 그리고 자기 인생의 드라마틱한 반전으로 확인한다
스데반을 죽인 게 바울 아닌가? 스데반이 아까 결론이 뭐라고 그랬나?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바울이 이 설교에 못난 사람의 장본인으로 서 있다 그의 손에 스데반이 죽잖은가. 그리고 바울이 사도가 되잖은가. 얼마나 기가막힌 자신의 생애 속에서의 도망갈 수 없는, 변명할 수 없는, 뭐라고 뭐라고 항변할 수 없는 자신의 현실 아닌가?

그러니 바울은 이렇게 사도 된 자기의 책임, 정체성 그리고 이런 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이해하고, 고린도 교회 앞에 자기를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의 고달프심을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이해하시기 바란다.》
여러분들이 눈물이 주께서 흘리신 피라고.
"이 잔을 마시라.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새 언약의 피니라"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재창조와 구원의 역사에 주와 함께 부름 받아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위대한 반열에서 도망갈 생각이니 대강 넘어가려는 비겁한 생각에서 벗어나 위대한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억울하지 않다. 힘이 들뿐이다.》 우리는 믿음을 가저야 한다
주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담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못난 것들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와 반전을 우리가 우리의 생애에 담아내고 있다. 그 감격과 떨림으로 책임 있게 우리의 인생을 감당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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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나의 못난 것들로 일하신다. 내가 잘나가는 거로가 아니라. 내 못남으로 낮아짐과 내 온유 겸손으로 남 섬김과 용서로 하나님이 일하신다. 그게 곧 하나님의 임재요 일하심이다.

내 못남 실수, 내 보잘것 없음, 내 무력함이 나를 부인하고 겸손케 하고 온유케하고 남을 섬기게 용서하게 품게 만다. 이걸로 사는거, 이게 신앙생활이고 성령충만이다

(*일목-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