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ㅇ14_고난은 세상적차원에서 어려움,귀찮은것,힘든것으로 부정적평가로 끝낼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뜻을 펼치는 귀하고 놀라운 그의 지혜

nazunzaro 2020. 6. 7. 16:47
성경(고린도후서)을 보면`바울은 왜 [고난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사자로서 그의 사역에서 왜 [여러 어려움을 겪어야] 했는가?`하는 것을 깊이 생각을 해봐야 한다.
천지를 지으셨고 최종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의 종이라면 만사가 형통하고 모든 일이 이렇게 절대적인 권위로 그 결론과 결과와 항복을 받아내는 형통하고 놀라운 권력이 사용되어야 할텐데, 뜻밖에도 그는 [고난을 당하고] [없수이 여김을 받고] [외면을 받고] [오해를 받는] 이런 일이 왜 있는가?`

[복음 자체에 고난을 포함하고 있다.] 그 복음을 만드신 주인 예수님이 [고난으로] 이 복음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가볍게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세상적 차원에서 [어려움], [귀찮은 것], [힘든 것]으로 부정적 평가로 끝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뜻을 펼치시는데 있어서 고난이라는 방법이, 믿음이라는 방법과 같이, [귀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믿음이란 보통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심사하는 잣대로 쓰고, 척도로도 쓰고, 방법으로도 쓰는데, 성경이 얘기하는 [믿음이란],`하나님이 범죄한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예수를 보낼때 [새롭게 창조한 방법]이다`이렇게 이해해야 된다.

[믿음이란 은혜이고 권능이고 지혜이고 책임이다. 그것을 나눌 수가 없다. 그리고 이 많은 내용들이 그때그때마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 그 구원을 이루는데 어떻게 작용하는지도 사실은 순서가 다 일정하지도 않고, 그 조합이 그저 우리는 놀랍기만 하다.

그래서 지금 이 고린도후서를 쓰는 사도바울이 가진 이 심정, 본인이 충성을 다하고 열심을 갖고 사랑과 헌신으로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데, 고린도교회에 이런 [불만, 오해, 적지않은 수모를 받는 일]에 대하여, 사도바울이 자기를 변명해야 된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 적지않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고, 이해하기 싫은 일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역사가 고난 속에서, 지는 것같은 데서 어떻게 그 뜻을 이루시는가 하는 것을 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십자가 수난에서, 부활에서, 그리고 자신의 생애에서 나타난 것을 증언받는 것처럼,
여기 7장 8장 9장에서 사도바울이 갑자기 디도가 와서 고린도교회의 반응을 긍정적으로, 그리고 기대 이상의 회개와 후회를 전함으로써, 기쁘게 7장 8장 9장을 쓰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이 있고 이 있고 하고, 그리고 그들이 좋게 반응해서야 기쁨과 위로가 있고 하는 이 모든 과정을 사실은 싫어한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가지는 모든 신자들의 최고의 시험은 권위이다. 권위.
진리를 전하고 구원을 논하고 하나님의 뜻을 베푸는 귀한 직분을 권위로 이해해서, 여기에 조그만치의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반응에 대해서 매우 자존심 상해하고 그 책임을 전부 상대방한테다가 던져버리는 분노를 자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들 안에서 일을 이렇게 행하지 않았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자주 보는 예수님을 믿지않고 배척하고 결국 그를 죽인 대표적인 인물들, 바리새인마저도 예수님의 구원의 대상인 것이다.
저들의 잘못은, 예수가 없으면 인류가 진리와 생명에 있어서 아무런 답도 없고, 그리고 그저 다만 헛된 인생을 살고, 분노와 공포와 폭력과 절망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지, `저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그렇게 얘기하는 건 복음서의 초점이 아니다

복음서에서는 아다시피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도 예수님이 죽자, 다 실망하고 도망갔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참으로 신비한 말인 것이다.
우리가 믿는 것이 [책임]이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은혜]이기도 하고, [기적]이기도 한 것이 많은 내용이 조함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제 이 7, 8, 9장을 보면서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어떻게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 우리도 따라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를 들면 빌립보서 4장 같은 바울의 편지에서 이런 말씀이 나온다;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말씀을 우린 잘 알고 있고 큰 위로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쁨은 아무런 [어려움]도 생기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가장 대표적으로 예수께서 이제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다가오자, 복음서에서는 `주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하셨으므로~`라고 말하고, 또 임박한 십자가 사건 앞에서는 `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가 되었다` 이렇게 얘기하며 예수님의 [수난]을, 그리고 우리가 보자면 말이 안되는 그 [왜곡]과 그 [고통]과 그 [수치]를 성경은 [영광]이라고 얘기합니다.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의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예수께서 자기를 비우시고 종의 형체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아버지의 뜻을 지켜낸 그것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았다`고 풀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고, 우리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권력으로 우리 앞에 오시지 않고, 인간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마치 무릎을 꿇고 우리를 수종드는 것같이 하나님이 당신이 우리 하나님인 것을 증거하시고, 그 일을 기뻐하셨다고 증언한다.

고린도후서 4장 5절에도 이렇게 나온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종이 됐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이렇게 주인과 그 밑에 있는 아랫사람, 그 열등한 비천한 신분, 이렇게 세상에서 그런 지위지만,
하나님 나라는 예수께서 친히 마지막 만찬 때 `우리를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혀주십시오`라는 두 사도의 부탁에 답하셨다.
`세상 나라에서는 윗사람이 앉아있고 아랫사람이 수종을 드는 법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랫사람이 앉고 윗사람이 수종드는 나라란다` 이렇게 설파하셨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이 고린도교회가 겪는 어떤 의심, 어떤 시험, [세상적인 잣대에 의해서 흔들리는 복음의 위대함에 대하여, 사도바울 자신이 맨먼저 그 목표가 되고 비난을 받고 공격을 받는데 있어서, 기쁘게 자기를 변명한다]
왜냐하면 그 변명은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요하고 고린도교회 교우들이 [믿음이라는 것으로 살아내야 할 인생의 진정한 핵심되는 내용이요 명예요 승리이기 때문에 그렇다.]
저들의 승리는 그것이 복음이 요구하는 것이요 진정한 내용이요 목표이기 때문에 그렇다.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전지전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내 마음은 언제나 평안하다 그런 뜻이 아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혔고 빌립보 교회에서 위로하는 방문자들이 찾아왔다. 아마 생필품들을 선물로 가져온 것 같다. 그렇게 잡혀있을 때는 치약 칫솔 바늘이런 것들이 급하다. 약간의 맛있는 음식들도 필요한 용돈도 다급한 필요였겠다. 그러나 바울의 기쁨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너희들이 오고 나를 돕는 일을 내가 기뻐하는 것은 너희가 나의 궁핍한 것을 도왔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그동안 너무나 여러 번 고생을 해서 궁핍한 일도 당하고 풍부한 때도 있었다`
언제 풍부했을까? 대접을 받은 때도 있었다. 그러나 더많은 경우는 늘 핍박을 받았다.
나중에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오듯이 돌에도 맞아줬고 세번 파선도 하고 일주야를 깊음 가운데서도 보내고 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런 일들이 자신에게 왜 괜찮은 일이냐 하면 `그것들로 내 복음을 막을 수 없다` 그런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야 된다. 핍박을 받아도 나는 굴하지 않는다 이런 절개, 각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세상 것으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세상 것을 빼앗는 것으로는 방해받지 않는다. 돌로 지은 집은 돌을 빼면 집이 없어지지만, 돌로 짓지 않은 집은 돌을 빼갈 수도 아니 빼갈 것이 없다` 그런 뜻이다.

`바울이 기뻐함은 너희가 드디어 주의 사랑에 동참하게 되어서 내가 기뻐한다` 그렇게 말한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생각할 것은 사도바울이 받는 과 또 그런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사도의 사역에도 불구하고, , 모두가 복음의 내용과 사역과 하나님의 일하심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를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것이다.

[형통하고 말 한마디 하면 모두가 다 항복하고, 하는 쉬운 길을 하나님이 왜 허락하시지 않는가] 하는 것은, 이제 더 살아보고, 현실에서 세상이 악한, 하나님과 복음을 반대하는 도전 속에서 깊이 깨우칠 내용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결국 승리하실 하나님의 뜻과 의지와 성실하심과 권능을 근거로 해서, [모든 어려움은 그저 잠시잠깐 오는 것이고, 잠시잠깐 피하거나 기다리면 되는 것으로 아는데, 그보다 훨씬 깊은 내용물로 들어온다.]
결정론이 되면 안 된다는 뜻이다.
결정론이란 결국 하나님이 다 승리하실 것이니까, 로마서 8 장식으로 얘기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는 이 말씀이 ,
결국 우리에게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런 갈등, 이런 핍박, 이런 절망같은 것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그냥 지나가기만 바라면 된다` 이렇게 결정론으로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이루시는 방법에, 이런, 고린도후서 1장 시작할 때 그랬죠, "형제들아 내가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하지 않노라.
힘에 지나도록 고난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내렸었다. 그리하여 뭘 다시 확인했다?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기로 했다" 그렇다.

●결정론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는 것을 지금 하나님이 일하시는 이 현실적인, 실제적인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권능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그걸 빼면, 십자가를 빼면, 복음은 그 내용이 매우 위축될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이 신학을 운운하려면 이런 부분을 포함하지 못하는 결정론을 갖고는 신학을 논할 수 없다. 그건 문학에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도 통과하지 못하고 신학을 논하는 것은 세상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드라마의 그 진정성에도 미치지 못하는 신학을 뭘로 논하겠는가?

다만 비난, 정죄, 판결에 불과하다고 생각을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이 지금 일하고 계시고 우리를 위해 함께 일하고 계심을 기억하여 [울고] 기도하고 [하루가 전부인 것 같은 올바른 믿음과 순종]이 여러분의 생애에 하나님이 일하시고 우리 안에 만드시는 위대한 것들을 누리시는 귀한 오늘의 말씀이기를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세우셨으니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이 우리의 부족 때문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더 당연하게 하나님께서 이 길을, 이 방법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기억케 하셔서 [우리가 약할 때] 강하고 [우리가 죽을 때] 거기에 부활 생명이 꽃핀다는 것을 기억하는 충성과 감사의 위대한 우리의 사역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일목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