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다보요22_저 ㄲㅌ들도 하나님이 긍휼함으로 완성시킬 것이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나는 믿는다,라는 관대함을 신앙의 크기로 담아내라

nazunzaro 2020. 5. 31. 07:16
우리는 반대자들을 꺽어 심판하는 것으로 자신을 확인하지, [그 반대와 적대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인생이 신앙인 것]을 자꾸 이 보복으로 놓치게 됩니다
[그, 적대를 감수하고 적극적으로 살아내야 할 신앙생활]은 없고, 잘못한 자들을 심판하고 분노만 하면 자기 책임이 다 된 것같이 생각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신앙생활이 가치가 없죠. 만족이 없죠. 분노하는 것으로 무슨 만족과 행복이 있겠습니까? 이 싸움이 큰 싸움이죠.
예수님은 결국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까지 갈 것 아닙니까? 그들마저 구원의 대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미 그전에 둘을 이분법으로 나눔으로써, 믿은 자와 믿지 않는 자로 편을 가르는 바람에, 그럼 뭐가 필요 없어지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어지죠.

그건 우리 모두에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난 믿었고, 쟤는 안 믿었대요`라고 자기 증명으로 자기를 만족시키려고 들면,
우리는 [십자가를 진 예수를 따라가는 인생]을 적극적으로, 우리의 권리와 책임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그 인생을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나는 옳고 쟤는 틀리는데, 왜 쟤는 편하게 살고 나는 왜 힘듭니까?`만 남죠. 그렇죠?

예수를 모르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하나님이 누구신가의 관계와 그 관계 속에서의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하면, 그는 사망이 운명인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워 지고, 인생이 인생다워 지는] 아무런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 문제에서 가장 심각한 인류 역사의 그 증거 된 가장 중요한 사상이 자연주의입니다. 자연주의라는 것은 `우리가 태어나서 살고 있는 이 정황, 이 환경, 원칙, 그 영역이 도대체 어떤 질서를 갖고 있느냐?`라는 데 대한 가장 대표적인 이해가 '자연주의'입니다. 자연주의라는 것은 우리가 자연에서 보는 질서입니다.
해는 동쪽에서 뜨고 여름은 덥고, 심는 대로 거두고 그리고 약육강식이고, 적자생존이고, 무한경쟁입니다. 그리고 죽어야 됩니다. 모든 것이 순환하는 것 같고,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자연주의는 당연히 허무주의로 귀결됩니다. 허무주의. 그 체념. 그 체념이 그래서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하고 반발하기도 합니다. 
`잘 살아 봤자 뭐해? 열심히 살아 봤자 뭐해? 정직해서 얻는 게 뭐야?`라는 분노가 일어나죠.
자폭, 그리고 아무에게나 하는 횡포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모두가 몸담고 살고 있는 그 원칙 속에 있는 자연입니다. 자연질서가 그렇습니다.

구원이란,  이 질서가 사망으로 끝나는 것을 막고, 거기에 영생을 담겠다 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실존주의가 가졌던 내 결정이라는 건 내가 아는 이해 한도와 능력 한도에서 밖에는 책임을 질 수가 없는데, 살아보니까 나는 이 우주 속에서 이 시간 속에서 너무나 아무것도 아니더라는 겁니다.
내가 분노해 봤자, 내가 잘해 봤자, 세상이 변하거나 누가 보상을 해주지 않더라. 이게 실존주의에서 심각한 딜레마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나요? 원망만 남죠.
둘 다 우리를 분노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이것이 우리한테는 자연스러운 심성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는데, 결론은 영생인데, 뜻밖에도 현실에서 보상을 못 받기는 똑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분노합니다. 분노해서 그 분노를 어떻게 하냐 하면, 아무 데나 폭력을 쓰는 분노가 아니라, 안 믿는 것들을 저주하는 거죠.
이번 코로나 사건도 `저 신천지 망한 것과..` 이렇게 가는 것은 그리 잘난 선언이 아닙니다.
그건 어차피 지금 심판을 받든 나중에 심판을 받든 우리는 그 관심은 없습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신자들이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누구의 책임도 아닌,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러나 아무도 답을 낼 수 없는 이런 위기와 공포 속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건 무슨 뜻이야? 어떤 일을 할 수 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뭐야?` 
정치 경제 사회에다 대고 답을 내라 그러시면 안되죠.
교회가 답을 해야죠. 교회가. 우리가 그 답을 최소한 추구해야죠.

왜 무슨 신앙생활이 이따위냐 이거죠.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린 위대한 걸 놓치고 있단 말이에요. 
위대한 걸 놓치고 치사한 걸로 신앙을 증명하니까, 우리 스스로가 힘이 없잖아요?
자기가 알잖아요. 자기가 스스로가 다 알잖아요. ●예수를 믿는 게 뭐 이렇게 이렇게 실력이 없을까요?
담대하다는 게, `난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라는 게 아녜요? 치사하게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분법을 훌쩍 넘어서죠. 우리가 모르는 것 많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크기, 하나님의 의미와 그 권능에 대하여 우리는 마음에 쉬운 분노, 쉬운 심판을 내려놓고, 두려움과 그 긍휼 하심에 대한 깊은 감격으로 말없이 우리의 인생을 살아내야 됩니다.
여기를 사는 것이 한국교회는 별로 소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리고 우리가 순종하지 아니하는 것을 용납하십니다. 바리새인들 욕할 게 없다고요.
우리는 지금 나쁘게 노는 놈들을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믿었으면, '나도 불순종하는 시간을 하나님이 허락하고 항복을 받아내셨고, 그리고 앞서 걷게 하셨다. ●저 말 안듣는 것들도 하나님이 긍휼함으로 완성시킬 것이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나는 믿는다`라는 관대함을 신앙의 크기로 담아내지 못하면, 우리는 아까 얘기한 자연주의와 실존주의에서 본 바와같은 이 체념, 이 실망이 가지는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면 예수는 믿었으나 분노는 동일한 분노가 되고 맙니다. 누가 잘되는 꼴을 볼 수가 없고, 내가 힘든 것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이 늘 억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하시는 일 너무 커서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가장 대표적 사건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고, 바울이 스데반 죽이는 겁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그때 우리가 하나님이었으면 바울 죽여버리지, 스데반 죽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바울 손으로 스데반 죽이게 하고, 바울로 대 사도로 삼아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일하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내 조건과 내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가지고, 십자가와 부활로 희망을 가지고 극복할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여러분에게 부디 충만하셔서 이번 코로나 사건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살아내야 할 여러분 인생 속에서 만나는
모든 시험과 위협 앞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게 무슨 뜻이야?`라고 자신에게 물으시고 답하시고 이겨내셔서, 
여러분 각각이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녀 된 명예와 기적을 누리시는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다시보는 요한복음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