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고난으로 증명하셨다
- 새 사람으로 사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우리의 소원 또 열정 같은 것 위에 더 많은 경우와 인생이라는 시간에 걸쳐서 하나님이 이 일을 완성하신다.
신앙 현실에서 일어나는 곤혹스러움, 소원대로 되지 않는 것,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들은 무엇일까?
- 신앙생활은 지혜와 수준과 지위가 달라지는 거다. 이렇게 나아가는 거다, 돌짝밭임에에도 불구하고, 가시떨기가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생명과 약속이 들어와 있다, 이걸 갖고 싸우는 거다.
열 번 해서 한 번 이길까 말까 해서, 열 번에서 두 번 이기고, 세 번 이기고 하고 이렇게 자라 올라가는 것이다.
- 천국은 마지막에 임할 때 심판으로 임할 거다. 그게 심판으로 임한다는 뜻은, 세상은 발전해서 천국이 되지 않는다. 천국은 예수님 오는 날까지 옛날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과 똑같은 일을 반복해서 모든 믿는 자를 괴롭힐 것이다.
그런데 그게 우리에게 손해가 아니고 유익이라고,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여기가 놀랍다.
- 인간이 인간답게 구는 것, 미워하고 저주하고 폭력을 쓰고 보복하고 하는 것 말고,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 사랑하는 남녀의 관계에서나, 부모와 자식의 관계나, 친한 친구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 같이, 반갑고 기쁘고 승부를 떠나 있고, 상대가 있는 것만으로 나는 그 아래에 들어가도 좋고, 이런 것이 정직이다.
- 죽음을 통해서만 부활이라는 것으로 우리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우리를 그 길로 부른다.
- 예수께서 그 시험을 이긴다. 조롱과 핍박을 이겼더니 평탄해지더라가 아니라, 이긴 게 뭐였나? 이긴 게 십자가였다.
-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고난과 형통이라는 이 개념들을 홀딱 뒤집는 것이다. 인간의 위대함은 위기 속에서 만들어진다.
위기 때 잘난 척하고 한번 나선다는 말이 아니라 위기 때 위대함이 만들어진다. 도망갈 데가 없는 위기 때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그 사람에게 중요한 과정이 된다.
매일 그런 일이 우리에게 있다. 거기서 큰다. 자신이 질 수 밖에 없다는 걸 안다. 지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느 날 훌륭해진다.
- 어디 가서 할 말 없는 것, 그러면 좋은 청취자가 돼라. 상대방 말에 '그래, 그래' 그걸 하라.
- 우리 다 각자 인생 속에 얼마나 많은 훈련이 있는가! 하나님이 열심히 일하시는데 거기서 안 크면 어디서 클건가? 우린 매일 커야 된다. '때가 되면' 성경에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다. '때가 차매' 우리가 큰다.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큰다.
- 인간의 인간됨, 위대함, 아름다움, 그 명예로움, 그 무엇으로도 평가할 수 없고 치수를 잴 수 없는 이 지위에, 이 신분에, 이 운명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며 함께하시며 축복하시며 격려하시며 도전하신다.
- 악당이 있는 것이 일을 한다. 외적으로 환경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도 그렇다 이거다. 내 안에 일어나는 모든 유혹과 시험에 대하여 그것이 나를 언제나 도전하는 거다. 내 실력을 묻는 거다. 내가 기대하고 내가 가지는 꿈이 내가 아니라, 내가 반응하는 것만큼이 나이다. 그러니까 실력이 있으면 이걸 극복하기 위하여 자신을 볶아야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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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목사 / 사랑의교회 새벽부흥회 / 새 사람 / 2022.4.18.]
오늘 성경본문 에베소서 4장 24절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는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새 사람으로 사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서, 우리의 소원 또 열정 같은 것 위에, 더 많은 경우, 인생이라는 시간에 걸쳐서, 하나님이 이 일을 완성하신다 하는 사실을 오늘 함께 나누어 신앙 현실에서 일어나는 곤혹스러움, 그러니까 소원대로 되지 않는 것과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들은 무엇일까? 하는 문제에 대한 성경의 설명을 나누고자 한다.
마태복음 13장에 가면 잘 아는 씨 뿌리는 비유가 나온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천국을 설명하시는데 첫 번째 나오는 비유가 씨 뿌리는 비유이다.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고 더러는 돌짝밭에 떨어지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져서 다 결실하지 못한다. 마지막에 옥토에 떨어진 씨는 옥토가, 기름진 땅이 결실을 30배 60배 100배를 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이 비유는 굉장히 어렵다.
비유란 그 설명하기 어려운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해하기 좋은, 우리가 알 만한 일로 빗대어 그 내용을 설명하는 것을 비유라고 하는데, 제자들이 들어보니까 너무나 뻔한 말씀이더라 이거다.
우리에게도 뻔하지 않은가? 돌짝밭에 떨어져서 뿌리를 못 내리고 가시떨기에 떨어져서 자라나지 못하고 옥토에 떨어졌더니 많이 컸다. 너무나 쉽지 않은가? 제자들도 똑같이 반응한다. 주님, 그까짓 걸 뭘 비유까지 하세요? 그냥 말하면 우리가 왜 못 알아듣겠어요? '옥토가 되라, 그 쉬운 말을 왜 우리가 모르겠어요?'
●이게 이 비유의 핵심이다. 우리 너무 쉽게 간절함으로 '옥토가 되자'라는 구호를 외치고 소원을 가질 수 있지만 따지고 보면 이 비유는 옥토가 되라는 얘기는 전혀 아닌 것이다. 설마?
예수님께서 뭐라고 답하시느냐 하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오늘 이루어졌다.' 이사야는 선지자 소명을 이사야 6장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가 하늘에 하나님 앉아 계신 보좌를 보게 되고 음성을 듣게 된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소리에 이사야가 답한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랬더니 뭐라고 음성이 계속되느냐 하면 '가라. 가되 네 말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너를 봐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 여기 그걸 인용하신다; '이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 너희는 못 알아듣는다. 그러나 내가 왔다.' 이렇게 얘기하신다.
그러니 잘 생각해 보자. 길가나 돌짝밭이나 가시떨기밭이나 옥토 중에서 알아들은 밭은 어디인가? 알아들은 게 옥토이다. 그리고 '우리도 옥토가 되자' 그럴 땐 '알아듣자. 따르자'라고 하는 얘기인데, 뭐였나? 이 예언의 핵심, 이사야가 받은 소명, 예수의 성육신에서 나타난 역사적 사실, ★ 아무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 씨가,우리가 생각할 때는 길가에도 떨어지고 돌짝밭에도 떨어지고 가시떨기에도 떨어지고 옥토에도 떨어졌는데 '어디가 결실했겠냐?'라고 쉽게 듣지만, ●예수님의 비유는 아주 역설적으로 '누가 알아들었단 말이냐?' 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럼 그러면 '내가 왔다'는 뭐냐? '그러면 내가 왔다'는? 이 씨가 밭에 의해서 운명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이 씨가 밭의 운명을 좌우한다. 이 씨는 예수이다. 예수는 부활의 첫 열매이다.
이렇게 얘기해 보자. 물이 든 유리컵을 보고 '이것은 무엇인가?' 다 물이라고 그러는데 어떤 바보만 하나가 '유리컵이요' 그런다.
내가 접시에 포도를 담아서 이렇게 내밀면서 이게 뭡니까 그러면 다 '포도요' 그런다. '접시요' 그러지 않는다.
[그것을 담은 그릇]과 [그릇 안에 담긴 것]과에서 중요한 것은 담긴 것이다.
그러니까 이 씨뿌리는 비유의 핵심은 누가 만들었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담겼느냐 인데,
★옥토니까 담은 게 아니라 열매를 담은 데가 옥토가 되는 것이다. 돌짝밭에 열매가 나고 가시떨기에 열매가 난다고 얘기를 하고 그때 그것은 옥토라고 불린다,라고 얘기하는 것이 이 비유이다.
예수가 오셔서 죄인들의 친구가 된다. 돌짝밭에 떨어지신다. 가시떨기에 찾아오신다. 그들이 영접하지 않았다. 몰라봤다. 그러나 거기에 열매가 맺었고,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돌짝밭에서 열매를 맺었는데 내가 맺은 게 아니고
★예수가 이 열매를 맺자, '우리'라는 밭의 이름이 변한다는 사실을 놓친다.
꽃밭은 밭의 이름을 딴 것인가, 꽃의 이름을 딴 것인가? 꽃이다. 그렇다.
사과밭. 너무나 뻔하다. 사과밭. 누가 이름을 결정하나? 사과가.
그렇게 쉬운 걸 왜 여기에서만은 우리는 옥토 타령을 하게 된 건가?
여기가 비유를 해야만 했던 이유인 것이다.
★예수는 돌짝밭에 오시고, 예수는 가시떨기에 오셔서, 천만 뜻밖에도 이 문제는 두고두고 신자의 인생에 일을 한다.
우리는 이 문제를 로마서 7장에 가서 조금 더 깊이 따져보자.
옥토가 되려고 왔는데 나를 돌짝밭이라고 하는 목사님을 만났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심판이냐, 보자 이거다.
로마서 7장 18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오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사람은 예수 모르는 사람인가, 예수 믿은 사람인가? 둘 다이다.
예수를 모를 때도 인생에 죄에 대한 자책이 없는 사람은 없고, 희한하게도 우리 금방 대답한 것 같이 믿었는데도 이 죄책감은 해결이 되질 않는다.
★ 신앙 현실 중에 제일 괴로운 게 뭐냐? 소원이 있는데, 각오가 있는데, 고백이 있는데,
하나님이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권고한 사람이로다'가 나오고 해결책으로 누가 등장하는가?
그다음 구절에 나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이다.
예수가 답인 거다.
그런데 그 다음이 더 놀랍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앞에서 선을 원하지만 선을 행하지 못하고, 내 마음에 선이 이기지 못하고 악이 이기는 이 현실에 대한 절망을 주 앞에 고백했더니 주께서 오셔서 여기대로 "그리스도 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는 답을 받았는데, 뭐는 아직도 남아 있다?
●갈등은 남아있다. 아직도 악이 남아 있고,내가 원하는 선이 승리하지 못한다,라고 놀랍게 반복하고 있는 거다.
그러면 여기 예수 그리스도는, 그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필패할 수밖에 없었던 인생에서 《예수가 오셔서 주신 구원, 승리는 도대체 어떻게 작동하길래》 앞에 있었던 문제, 내 마음에서 악을 따르던 법을 지워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법만 사랑하고 기뻐하고 소원하는 대로 하나로 만들어 주시지 않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이해와 무슨 성경의 선언 이상으로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에 풀고 지나가야 된다. 8장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를 지어도 된다 그런 뜻이다. 말이 안된다. 죄를 지어도 된다고? 그럴 수 없다.
그런데 우리 로마서 5장에서 이미 했던 얘기가 뭐냐 하면, '예수가 오기 전에는 우리가 사망의 종노릇했다. 그러나 예수 이후에는 은혜가 왕 노릇한다' 그게 우리가 믿는 예수이다. 예수가 메시아이고 구원자이고 신자 된 운명의 다름이다.
그런데 여기서 죄와 사망의 법을 누가 이기냐 하면 생명과 성령의 법이 이김으로써, 말하자면 극단적으로 말하면 죄를 지어도 사망이라는 것이 만들어지지가 않는다는 뜻이다. 죄를 지어도 사망이 결과 되지 않는다.
이렇게 말을 해보자. '죄를 지어도 지옥 가지 않는다, 할렐루야!'
여기서 할렐루야라니 이건 너무하다.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는 거라면 뭐 때문에 죄를 남기십니까, 그렇게 물어야 된다.
'내가 좋은 믿음과 소원이 있는데 죄가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있고 나를 흔들고 나를 늘 거꾸러뜨리는데, 죄가 힘을 못쓴다면서 그건 왜 남겨두셨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여기에 비밀이 있다. 죄가 내 마음 속에서, 내 본성이, 아담의 DNA가 내 속에서, 죄의 소원을 가지고 나를 위협하고 위협한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나면 예수의 DNA가 내 안에서 거룩함과 생명과 진리로 나를 밀고 격려한다.
★주로 어디가 이긴다고? 우리 스스로가 답을 스스로에게 해보자. 죄가 더 많이 이기던가, 은혜가 더 많이 이기던가?
이 질문은 묘한 것이라서 신앙이 좋아지면 질수록 작은 죄가 크게 느껴진다. 그 초짜들은 모든 승부 세계에서 초짜들은 이긴 얘기만 하고 고수는 진 얘기만 한다. 그 한 번 진 게 그렇게 억울하고, 초짜들은 평생 한 번 이긴 게 최고의 자랑이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어디서 당황하게 되느냐 하면 자기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아야 되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실패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놀라게 되고, 그걸 줄여 나가야 되고, 그리고 줄여나갈 수 없으면 하나 남은 대안이 있다. 회개를 하는 수밖에 없는 거다. 그 회개가 우리에게 잘못을 지우는 것인 줄로만 알고 있다.
이기기 위한 회개여야 된다. '내가 넘어졌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나 일어날 겁니다." 이게 성경이 하는 얘기이다. '넌 아무리 잘못해도 결국 지옥에 못 간다.'
★그럼 어떡할 건가? 남은 건 하나이다. 잘하는 수밖에 없다. 어리석은 자는 시간을 끈다. 위대할 틈을 못 가지는 거다, 자기 인생에..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일찍 알아먹고 일찍 커서 위대한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죄라는 것이 믿지 않을 때에는 사망과 생명의 문제이고 지옥과 천국의 문제이지만, ★신자에게는 죄는 수치스러운 거다. 부끄러운 것이다. ★신앙생활의 승리라는 것은 명예요, 위대함이다.
이렇게 얘기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된다.
★'나는 너희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커야 된다' 그렇다. 애가 시험 잘못 보고 60점 이하로 맞고 오면 '사형!' 그러는 부모는 없다.
그런데 자식 입장에서 보면 지난번에 사형당한 게 나은 거다.
지난번에도 죽도록 두들겨 맞고 오늘도 죽도록 두들겨 맞고. '이렇게 사느니 일찍 죽자', 이걸 철이 없다 그러는 거다.
그렇다. 철이 없다 그런다. 철이 있다 없다는 뭔가? 지혜와 수준과 지위가 달라지는 거다.
신앙생활이 이렇게 나아가는 거다. 돌짝밭임에에도 불구하고, 가시떨기가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생명과 약속이 들어와 있다, 이걸 갖고 싸우는 거다. 열 번 해서 한 번 이길까 말까 해서, 열 번에서 두 번 이기고, 세 번 이기고 하고 이렇게 자라 올라가는 것이다.
그것이 로마서 12장에서 이렇게 소개된다. 로마서 12장 4절,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렇게 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정말 아멘인가? 이거 만만치 않은 거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그건 그럴 수 없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만만치 않다. 어떻게 그리 하느냐?
이것은 덕목이거나 신자의 어떤 신앙의 우월함을 나타내는, 그 능력으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뜻이다.
★그 원수가 너한테 유익하다는 거다.
천국은 마지막에 임할 때 심판으로 임할 거다. 그것이 심판으로 임한다는 것은 믿는 자들에게는 전혀 공포일 수 없는 것이다.
그게 심판으로 임한다는 뜻은, 세상은 발전해서 천국이 되지 않는다.
천국은 예수님 오는 날까지 옛날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과 똑같은 일을 반복해서 모든 믿는 자를 괴롭힐 것이다.
★그런데 그게 우리에게 손해가 아니고 유익이라고,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여기가 놀랍다.
악인을 처치하면 천국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거짓말을 안 하면 정직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정직은 긍정적인 것이어야 된다. 긍정적인 것이라 이거다.
★인간이 인간답게 구는 것, 미워하고 저주하고 폭력을 쓰고 보복하고 하는 것 말고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
사랑하는 남녀의 관계에서나, 부모와 자식의 관계나, 친한 친구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 같이,
★반갑고 기쁘고 승부를 떠나 있고, 상대가 있는 것만으로 나는 그 아래에 들어가도 좋고..
그 악당들을 물리치고 보복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 다워져야 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며,
말하자면 세상을 전부 선인들만 남게 하는 일이 우리한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빛이고 우리가 진리이고 생명인 것을 증언해야 되는 것이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그러니까 '선으로 악을 감동시키지 마라'이다.
'선으로 악을 감동시키는 것은 일종의 보복이다. '너는 미운 짓했지만 나는 안 그래' 이건 보복이다.
★내비두라. 악당이 악한 역할을 할 때 그것에 시험 받지 말고 너는 선한 역할을 해라, 이게 성경이 하는 얘기이다.
그들이 있고 없고가 너한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악당이 있는 것이 일을 한다.
외적으로 환경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도 그렇다 이거다.
★내 안에 일어나는 모든 유혹과 시험에 대하여 그것이 나를 언제나 도전하는 거다.
내 실력을 묻는 거다. 내가 기대하고 내가 가지는 꿈이 내가 아니라, 내가 반응하는 것만큼이 나이다.
그러니까 실력이 있으면 이걸 극복하기 위하여 자신을 볶아야 되는 것이다.
신앙의 길은 만만치 않은 이유가 다른 데 무슨 외적인 박해나 무슨 이웃의 어떤 어려움보다도 크게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이 길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 길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건 오늘 본문에서 본 바와 같이 에베서 4장 24절에 보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이다.
"하나님을 따라", 이 무시무시하다.
왜?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고난으로 증명하셨기 때문에. 그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로,
그리고 죽음을 통해서만 부활이라는 것으로 우리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우리를 그 길로 부른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예수 외에 구원받을 다른 이름이 없다' 이건 무서운 말이다.
이 같은 방법이 아닌 신앙의 길은 없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길로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인간의 완성, 구원의 영광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것 말고 다른 걸 말하는 건 다 구라다 이렇게 되는 거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보라, '너희는 나를 누구로 아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말은 다 좋다.
'난 죽어야 된다' 그러자 베드로가 당연한 반론을 제기했다. '당신이 메시아라고 내가 방금 고백을 하고 당신이 그걸 우리한테 확인시켜놓고서 죽겠다 그러면 앞뒤가 맞습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만일 위기가 오면 내가 목숨을 걸고 주를 지키겠습니다.'
뭐라고 꾸중을 듣는가? 절대 들어서는 안 되는 꾸중이 나오지 않는가? 뭐라 그랬나? '사탄아~'
거기서 거기서 '사탄아'가 나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그다음에 그 유명한, 우리 사랑의 교회가 앞세워 주장하는, 뭐가 나오나?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예수님이 한계 속에 오신다. 그가 십자가를 지신다. 그가 게세마네에서 했던 기도도 그거였다.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비켜 주십시오' 그는 이 고통과 조롱이라는 시험 앞에서 갈등하신다. 그러나 이기신다. 이겼더니 평탄해지더라가 아니라, 이긴 게 뭐였나? ★이긴 게 십자가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험을 이기면 면류관이 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가자고 하는 길을 통과해야 되는데, 그것이 만드는 것은, 앞에서 얘기한 거 같이, 용기라는 것이 ●고난이 없는 용기는 없다.
부활의 아침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난다. 못 알아본다. 예수님이 묻는다. '무슨 일로 그렇게 재미있는 얘기를 하고 가느냐?' '아니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모른단 말이요?' '무슨 일이길래?' '우리는 그가 메시아인 줄 알았는데 그가 그만 죽고 말았지 뭡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 그러나?
●"이 밥통아, 이 대갈통들아, 그리스도가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들어간다고 얼마나 성경이 주장을 했느냐? 그렇게 말한다.
히브리서 5장 8절에서도 뭐라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 즉"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고난과 형통이라는 이 개념들을 홀딱 뒤집는 것이다.
인간의 위대함은 위기 속에서 만들어진다. 위기 때 이렇게 잘난 척하고 한번 나선다는 게 아니라 그때 만들어진다.
★도망갈 데가 없을 때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그 사람에게 중요한 과정이 된다. 매일 그런 일이 우리에게 있다.
하나님이 나한테는 왜 아무 관심이 없느냐고? 하나님은 매일 하신다. 모세가 뭐라 그러나?
80세에 하나님이 불러서 '모세야, 가서 내 백성을 구해라' 그러자 그가 한 질문이 이거다.
'지난 40년 동안 뭐 하고 계셨다가, 어디 가 계셨다가 이 늙다리한테 와서 이제 하자십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이게 무슨 뜻일 것 같은가? '나는 하나님이기를 중단하지 않는 자니라'이다.
'니가 잃어버린 40년이라고 생각한 그 40년이 내가 너를 단련시킨 날이다.' 그렇게 말하시는 거다.
그래서 모세는 멋있게 그 이스라엘 백성 데리고 40년 유랑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멋진 지도자가 된다. 그는 위대한 승자가 되는 것보다 자신이 이끌고 나온 백성의 실패와 함께 죽는 길로 자신의 생을 마감한다. 그래서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신다고 성경이 얘기하는 것이다.
우리의 매일은 뭔가? 가고 싶지 않은 직장을 매일 가야 되고, 돌아오고 싶지 않은 집으로 매일 돌아와야 된다. 성경 말씀을 할 때는 아멘이 없다가 현실에 오자 갑자기 우린 동지가 되었다. ^^ 집엔 왜 오기 싫으냐? 호랑이가 있다. ㅎ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시간을 끌어야 된다. 야단 맞을 시간을 줄여야 되니까. 새벽에 들어왔다 새벽에 나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거기서 큰다. 질 수 밖에 없다는 걸, 질 수 밖에 없다는 걸.. 그래서 어느 날 훌륭해진다. 어지간히 찌르면 피도 안 나오고 눈물도 안 나오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보통 결혼식을 하면 그 시작을 사랑의 결실이다 그렇게 말을 해 갖고 다 혼란스러워진다.
결혼식 그건 사랑이 시작하는 거다. 훈련소에 입소하는 것이다.
살아야 비로소 사랑의 실력이 붙기 시작한다. 사랑은 도망갈 수 없는 것이다.
도망갈 수 없는 것. 그건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의 작정인지 모른다.
혼자 살면 포기하면 그만이다. 나 혼자 하니까 투표할 필요가 없으니까..
둘이 살면 매번 반대이다, 매번. 나만 그런 건 아닐거다. 그리고 매번 내가 진다. 일 대 일인데 왜 내가 져야 되냐? 그거, 남편의 슬픈 운명이 있는 거다.
★거기서 뭐가 되냐? 하나님의 뜻, 그 사랑의 깊이, 무한한 기다리심, 상대가 잘 되기 위해선 내가 져도 좋다는, 수모를 감수하시는 하나님을 비로소 발견한다.
그리고 인간은 유명하고 능력 있고 어쩌고 그러면 다 이것만 못하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치는 다른 데는 다 공허하다. 유명세나 권력이나 지위나 그런 건 다 공허하다.
인간 스스로가 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만 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이다.
★어디 가서 할 말 없는 것, 그러면 좋은 청취자가 돼라. 상대방 말에 '그래~, 그래~' 그걸 하라.
모두 자기 얘기하기 바빠서, 남의 얘기를 숨 쉬는, 침 삼키는 동안에 딱 치고 들어오지 않는가? '나는 말이야~' 하고.
그러니까 내가 밥낮 가르쳐 준다. '이 사람이 얘기하던 중이야, 이 사람 얘기 끝난 다음에 들어와. 고무줄넘기 할 때도 노래 부를 때 맞춰 들어오는 거야.'
★우리 다 우리 인생 속에 얼마나 많은 훈련이 있는가!
하나님이 열심히 일하시는데 거기서 안 크면 어디서 클건가?
뭐 어디 가서 쇼를 할건가? 기름이라도 붓고 불이라도 붙일건가? 할 수 없는 것, 하고 있는데 반응은 없고.
★매일 커야 된다. '때가 되면..' 성경에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다. '때가 차매..' 우리가 큰다.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큰다.
언제 되면 그걸 아느냐? 손주를 낳으면 안다. 이건 뭐 백 프로 무조건 항복이다.
달라는 거 다 주고, 하자는 거 다 하고, 수염 뜯기고 안경 깨지고 오케이, 만사 오케이..
그것은 바보라서 하는 게 아니고 노력해서 당하는 게 전혀 아니다. 그 모두가 행복하다.
저 애가 글쎄 세 살 때 내 볼을 깨물어 뜯었지 뭐야' 이런 게 다 자랑이고 훈장이다. '여기 봐, 상처가 남아 있지?'
★인간의 인간됨, 위대함, 아름다움, 그 명예로움, 그 무엇으로도 평가할 수 없고, 치수를 잴 수 없는 이 지위에, 이 신분에, 이 운명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며 함께하시며 축복하시며 격려하시며 도전하신다는 사실로 우리의 인생을 복되고 승리하는 복이 있기를 바란다.///
(기도)
우리의 매일은 전쟁터이다
★그러나 그 전쟁은 이기고 지는 것보다 더 큰, 자라나는, 명예로운, 위대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자리인 것을 믿는다.
우리 각자 자기가 있는 자리에 걸맞는 인격의 실력과 내용을 하나님께서 충만히 채워주시기를 기도한다. 아멘//
- 새 사람으로 사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우리의 소원 또 열정 같은 것 위에 더 많은 경우와 인생이라는 시간에 걸쳐서 하나님이 이 일을 완성하신다.
신앙 현실에서 일어나는 곤혹스러움, 소원대로 되지 않는 것,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들은 무엇일까?
- 신앙생활은 지혜와 수준과 지위가 달라지는 거다. 이렇게 나아가는 거다, 돌짝밭임에에도 불구하고, 가시떨기가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생명과 약속이 들어와 있다, 이걸 갖고 싸우는 거다.
열 번 해서 한 번 이길까 말까 해서, 열 번에서 두 번 이기고, 세 번 이기고 하고 이렇게 자라 올라가는 것이다.
- 천국은 마지막에 임할 때 심판으로 임할 거다. 그게 심판으로 임한다는 뜻은, 세상은 발전해서 천국이 되지 않는다. 천국은 예수님 오는 날까지 옛날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과 똑같은 일을 반복해서 모든 믿는 자를 괴롭힐 것이다.
그런데 그게 우리에게 손해가 아니고 유익이라고,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여기가 놀랍다.
- 인간이 인간답게 구는 것, 미워하고 저주하고 폭력을 쓰고 보복하고 하는 것 말고,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 사랑하는 남녀의 관계에서나, 부모와 자식의 관계나, 친한 친구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 같이, 반갑고 기쁘고 승부를 떠나 있고, 상대가 있는 것만으로 나는 그 아래에 들어가도 좋고, 이런 것이 정직이다.
- 죽음을 통해서만 부활이라는 것으로 우리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우리를 그 길로 부른다.
- 예수께서 그 시험을 이긴다. 조롱과 핍박을 이겼더니 평탄해지더라가 아니라, 이긴 게 뭐였나? 이긴 게 십자가였다.
-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고난과 형통이라는 이 개념들을 홀딱 뒤집는 것이다. 인간의 위대함은 위기 속에서 만들어진다.
위기 때 잘난 척하고 한번 나선다는 말이 아니라 위기 때 위대함이 만들어진다. 도망갈 데가 없는 위기 때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그 사람에게 중요한 과정이 된다.
매일 그런 일이 우리에게 있다. 거기서 큰다. 자신이 질 수 밖에 없다는 걸 안다. 지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느 날 훌륭해진다.
- 어디 가서 할 말 없는 것, 그러면 좋은 청취자가 돼라. 상대방 말에 '그래, 그래' 그걸 하라.
- 우리 다 각자 인생 속에 얼마나 많은 훈련이 있는가! 하나님이 열심히 일하시는데 거기서 안 크면 어디서 클건가? 우린 매일 커야 된다. '때가 되면' 성경에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다. '때가 차매' 우리가 큰다.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큰다.
- 인간의 인간됨, 위대함, 아름다움, 그 명예로움, 그 무엇으로도 평가할 수 없고 치수를 잴 수 없는 이 지위에, 이 신분에, 이 운명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며 함께하시며 축복하시며 격려하시며 도전하신다.
- 악당이 있는 것이 일을 한다. 외적으로 환경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도 그렇다 이거다. 내 안에 일어나는 모든 유혹과 시험에 대하여 그것이 나를 언제나 도전하는 거다. 내 실력을 묻는 거다. 내가 기대하고 내가 가지는 꿈이 내가 아니라, 내가 반응하는 것만큼이 나이다. 그러니까 실력이 있으면 이걸 극복하기 위하여 자신을 볶아야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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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목사 / 사랑의교회 새벽부흥회 / 새 사람 / 2022.4.18.]
오늘 성경본문 에베소서 4장 24절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는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새 사람으로 사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서, 우리의 소원 또 열정 같은 것 위에, 더 많은 경우, 인생이라는 시간에 걸쳐서, 하나님이 이 일을 완성하신다 하는 사실을 오늘 함께 나누어 신앙 현실에서 일어나는 곤혹스러움, 그러니까 소원대로 되지 않는 것과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들은 무엇일까? 하는 문제에 대한 성경의 설명을 나누고자 한다.
마태복음 13장에 가면 잘 아는 씨 뿌리는 비유가 나온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천국을 설명하시는데 첫 번째 나오는 비유가 씨 뿌리는 비유이다.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고 더러는 돌짝밭에 떨어지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져서 다 결실하지 못한다. 마지막에 옥토에 떨어진 씨는 옥토가, 기름진 땅이 결실을 30배 60배 100배를 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이 비유는 굉장히 어렵다.
비유란 그 설명하기 어려운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해하기 좋은, 우리가 알 만한 일로 빗대어 그 내용을 설명하는 것을 비유라고 하는데, 제자들이 들어보니까 너무나 뻔한 말씀이더라 이거다.
우리에게도 뻔하지 않은가? 돌짝밭에 떨어져서 뿌리를 못 내리고 가시떨기에 떨어져서 자라나지 못하고 옥토에 떨어졌더니 많이 컸다. 너무나 쉽지 않은가? 제자들도 똑같이 반응한다. 주님, 그까짓 걸 뭘 비유까지 하세요? 그냥 말하면 우리가 왜 못 알아듣겠어요? '옥토가 되라, 그 쉬운 말을 왜 우리가 모르겠어요?'
●이게 이 비유의 핵심이다. 우리 너무 쉽게 간절함으로 '옥토가 되자'라는 구호를 외치고 소원을 가질 수 있지만 따지고 보면 이 비유는 옥토가 되라는 얘기는 전혀 아닌 것이다. 설마?
예수님께서 뭐라고 답하시느냐 하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오늘 이루어졌다.' 이사야는 선지자 소명을 이사야 6장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가 하늘에 하나님 앉아 계신 보좌를 보게 되고 음성을 듣게 된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소리에 이사야가 답한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랬더니 뭐라고 음성이 계속되느냐 하면 '가라. 가되 네 말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너를 봐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 여기 그걸 인용하신다; '이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 너희는 못 알아듣는다. 그러나 내가 왔다.' 이렇게 얘기하신다.
그러니 잘 생각해 보자. 길가나 돌짝밭이나 가시떨기밭이나 옥토 중에서 알아들은 밭은 어디인가? 알아들은 게 옥토이다. 그리고 '우리도 옥토가 되자' 그럴 땐 '알아듣자. 따르자'라고 하는 얘기인데, 뭐였나? 이 예언의 핵심, 이사야가 받은 소명, 예수의 성육신에서 나타난 역사적 사실, ★ 아무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 씨가,우리가 생각할 때는 길가에도 떨어지고 돌짝밭에도 떨어지고 가시떨기에도 떨어지고 옥토에도 떨어졌는데 '어디가 결실했겠냐?'라고 쉽게 듣지만, ●예수님의 비유는 아주 역설적으로 '누가 알아들었단 말이냐?' 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럼 그러면 '내가 왔다'는 뭐냐? '그러면 내가 왔다'는? 이 씨가 밭에 의해서 운명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이 씨가 밭의 운명을 좌우한다. 이 씨는 예수이다. 예수는 부활의 첫 열매이다.
이렇게 얘기해 보자. 물이 든 유리컵을 보고 '이것은 무엇인가?' 다 물이라고 그러는데 어떤 바보만 하나가 '유리컵이요' 그런다.
내가 접시에 포도를 담아서 이렇게 내밀면서 이게 뭡니까 그러면 다 '포도요' 그런다. '접시요' 그러지 않는다.
[그것을 담은 그릇]과 [그릇 안에 담긴 것]과에서 중요한 것은 담긴 것이다.
그러니까 이 씨뿌리는 비유의 핵심은 누가 만들었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담겼느냐 인데,
★옥토니까 담은 게 아니라 열매를 담은 데가 옥토가 되는 것이다. 돌짝밭에 열매가 나고 가시떨기에 열매가 난다고 얘기를 하고 그때 그것은 옥토라고 불린다,라고 얘기하는 것이 이 비유이다.
예수가 오셔서 죄인들의 친구가 된다. 돌짝밭에 떨어지신다. 가시떨기에 찾아오신다. 그들이 영접하지 않았다. 몰라봤다. 그러나 거기에 열매가 맺었고,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돌짝밭에서 열매를 맺었는데 내가 맺은 게 아니고
★예수가 이 열매를 맺자, '우리'라는 밭의 이름이 변한다는 사실을 놓친다.
꽃밭은 밭의 이름을 딴 것인가, 꽃의 이름을 딴 것인가? 꽃이다. 그렇다.
사과밭. 너무나 뻔하다. 사과밭. 누가 이름을 결정하나? 사과가.
그렇게 쉬운 걸 왜 여기에서만은 우리는 옥토 타령을 하게 된 건가?
여기가 비유를 해야만 했던 이유인 것이다.
★예수는 돌짝밭에 오시고, 예수는 가시떨기에 오셔서, 천만 뜻밖에도 이 문제는 두고두고 신자의 인생에 일을 한다.
우리는 이 문제를 로마서 7장에 가서 조금 더 깊이 따져보자.
옥토가 되려고 왔는데 나를 돌짝밭이라고 하는 목사님을 만났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심판이냐, 보자 이거다.
로마서 7장 18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오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사람은 예수 모르는 사람인가, 예수 믿은 사람인가? 둘 다이다.
예수를 모를 때도 인생에 죄에 대한 자책이 없는 사람은 없고, 희한하게도 우리 금방 대답한 것 같이 믿었는데도 이 죄책감은 해결이 되질 않는다.
★ 신앙 현실 중에 제일 괴로운 게 뭐냐? 소원이 있는데, 각오가 있는데, 고백이 있는데,
하나님이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권고한 사람이로다'가 나오고 해결책으로 누가 등장하는가?
그다음 구절에 나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이다.
예수가 답인 거다.
그런데 그 다음이 더 놀랍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앞에서 선을 원하지만 선을 행하지 못하고, 내 마음에 선이 이기지 못하고 악이 이기는 이 현실에 대한 절망을 주 앞에 고백했더니 주께서 오셔서 여기대로 "그리스도 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는 답을 받았는데, 뭐는 아직도 남아 있다?
●갈등은 남아있다. 아직도 악이 남아 있고,내가 원하는 선이 승리하지 못한다,라고 놀랍게 반복하고 있는 거다.
그러면 여기 예수 그리스도는, 그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필패할 수밖에 없었던 인생에서 《예수가 오셔서 주신 구원, 승리는 도대체 어떻게 작동하길래》 앞에 있었던 문제, 내 마음에서 악을 따르던 법을 지워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법만 사랑하고 기뻐하고 소원하는 대로 하나로 만들어 주시지 않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이해와 무슨 성경의 선언 이상으로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에 풀고 지나가야 된다. 8장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를 지어도 된다 그런 뜻이다. 말이 안된다. 죄를 지어도 된다고? 그럴 수 없다.
그런데 우리 로마서 5장에서 이미 했던 얘기가 뭐냐 하면, '예수가 오기 전에는 우리가 사망의 종노릇했다. 그러나 예수 이후에는 은혜가 왕 노릇한다' 그게 우리가 믿는 예수이다. 예수가 메시아이고 구원자이고 신자 된 운명의 다름이다.
그런데 여기서 죄와 사망의 법을 누가 이기냐 하면 생명과 성령의 법이 이김으로써, 말하자면 극단적으로 말하면 죄를 지어도 사망이라는 것이 만들어지지가 않는다는 뜻이다. 죄를 지어도 사망이 결과 되지 않는다.
이렇게 말을 해보자. '죄를 지어도 지옥 가지 않는다, 할렐루야!'
여기서 할렐루야라니 이건 너무하다.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는 거라면 뭐 때문에 죄를 남기십니까, 그렇게 물어야 된다.
'내가 좋은 믿음과 소원이 있는데 죄가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있고 나를 흔들고 나를 늘 거꾸러뜨리는데, 죄가 힘을 못쓴다면서 그건 왜 남겨두셨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여기에 비밀이 있다. 죄가 내 마음 속에서, 내 본성이, 아담의 DNA가 내 속에서, 죄의 소원을 가지고 나를 위협하고 위협한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나면 예수의 DNA가 내 안에서 거룩함과 생명과 진리로 나를 밀고 격려한다.
★주로 어디가 이긴다고? 우리 스스로가 답을 스스로에게 해보자. 죄가 더 많이 이기던가, 은혜가 더 많이 이기던가?
이 질문은 묘한 것이라서 신앙이 좋아지면 질수록 작은 죄가 크게 느껴진다. 그 초짜들은 모든 승부 세계에서 초짜들은 이긴 얘기만 하고 고수는 진 얘기만 한다. 그 한 번 진 게 그렇게 억울하고, 초짜들은 평생 한 번 이긴 게 최고의 자랑이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어디서 당황하게 되느냐 하면 자기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아야 되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실패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놀라게 되고, 그걸 줄여 나가야 되고, 그리고 줄여나갈 수 없으면 하나 남은 대안이 있다. 회개를 하는 수밖에 없는 거다. 그 회개가 우리에게 잘못을 지우는 것인 줄로만 알고 있다.
이기기 위한 회개여야 된다. '내가 넘어졌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나 일어날 겁니다." 이게 성경이 하는 얘기이다. '넌 아무리 잘못해도 결국 지옥에 못 간다.'
★그럼 어떡할 건가? 남은 건 하나이다. 잘하는 수밖에 없다. 어리석은 자는 시간을 끈다. 위대할 틈을 못 가지는 거다, 자기 인생에..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일찍 알아먹고 일찍 커서 위대한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죄라는 것이 믿지 않을 때에는 사망과 생명의 문제이고 지옥과 천국의 문제이지만, ★신자에게는 죄는 수치스러운 거다. 부끄러운 것이다. ★신앙생활의 승리라는 것은 명예요, 위대함이다.
이렇게 얘기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된다.
★'나는 너희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커야 된다' 그렇다. 애가 시험 잘못 보고 60점 이하로 맞고 오면 '사형!' 그러는 부모는 없다.
그런데 자식 입장에서 보면 지난번에 사형당한 게 나은 거다.
지난번에도 죽도록 두들겨 맞고 오늘도 죽도록 두들겨 맞고. '이렇게 사느니 일찍 죽자', 이걸 철이 없다 그러는 거다.
그렇다. 철이 없다 그런다. 철이 있다 없다는 뭔가? 지혜와 수준과 지위가 달라지는 거다.
신앙생활이 이렇게 나아가는 거다. 돌짝밭임에에도 불구하고, 가시떨기가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생명과 약속이 들어와 있다, 이걸 갖고 싸우는 거다. 열 번 해서 한 번 이길까 말까 해서, 열 번에서 두 번 이기고, 세 번 이기고 하고 이렇게 자라 올라가는 것이다.
그것이 로마서 12장에서 이렇게 소개된다. 로마서 12장 4절,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렇게 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정말 아멘인가? 이거 만만치 않은 거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그건 그럴 수 없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만만치 않다. 어떻게 그리 하느냐?
이것은 덕목이거나 신자의 어떤 신앙의 우월함을 나타내는, 그 능력으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뜻이다.
★그 원수가 너한테 유익하다는 거다.
천국은 마지막에 임할 때 심판으로 임할 거다. 그것이 심판으로 임한다는 것은 믿는 자들에게는 전혀 공포일 수 없는 것이다.
그게 심판으로 임한다는 뜻은, 세상은 발전해서 천국이 되지 않는다.
천국은 예수님 오는 날까지 옛날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과 똑같은 일을 반복해서 모든 믿는 자를 괴롭힐 것이다.
★그런데 그게 우리에게 손해가 아니고 유익이라고,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여기가 놀랍다.
악인을 처치하면 천국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거짓말을 안 하면 정직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정직은 긍정적인 것이어야 된다. 긍정적인 것이라 이거다.
★인간이 인간답게 구는 것, 미워하고 저주하고 폭력을 쓰고 보복하고 하는 것 말고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
사랑하는 남녀의 관계에서나, 부모와 자식의 관계나, 친한 친구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 같이,
★반갑고 기쁘고 승부를 떠나 있고, 상대가 있는 것만으로 나는 그 아래에 들어가도 좋고..
그 악당들을 물리치고 보복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 다워져야 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며,
말하자면 세상을 전부 선인들만 남게 하는 일이 우리한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빛이고 우리가 진리이고 생명인 것을 증언해야 되는 것이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그러니까 '선으로 악을 감동시키지 마라'이다.
'선으로 악을 감동시키는 것은 일종의 보복이다. '너는 미운 짓했지만 나는 안 그래' 이건 보복이다.
★내비두라. 악당이 악한 역할을 할 때 그것에 시험 받지 말고 너는 선한 역할을 해라, 이게 성경이 하는 얘기이다.
그들이 있고 없고가 너한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악당이 있는 것이 일을 한다.
외적으로 환경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도 그렇다 이거다.
★내 안에 일어나는 모든 유혹과 시험에 대하여 그것이 나를 언제나 도전하는 거다.
내 실력을 묻는 거다. 내가 기대하고 내가 가지는 꿈이 내가 아니라, 내가 반응하는 것만큼이 나이다.
그러니까 실력이 있으면 이걸 극복하기 위하여 자신을 볶아야 되는 것이다.
신앙의 길은 만만치 않은 이유가 다른 데 무슨 외적인 박해나 무슨 이웃의 어떤 어려움보다도 크게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이 길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 길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건 오늘 본문에서 본 바와 같이 에베서 4장 24절에 보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이다.
"하나님을 따라", 이 무시무시하다.
왜?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고난으로 증명하셨기 때문에. 그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로,
그리고 죽음을 통해서만 부활이라는 것으로 우리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우리를 그 길로 부른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예수 외에 구원받을 다른 이름이 없다' 이건 무서운 말이다.
이 같은 방법이 아닌 신앙의 길은 없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길로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인간의 완성, 구원의 영광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것 말고 다른 걸 말하는 건 다 구라다 이렇게 되는 거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보라, '너희는 나를 누구로 아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말은 다 좋다.
'난 죽어야 된다' 그러자 베드로가 당연한 반론을 제기했다. '당신이 메시아라고 내가 방금 고백을 하고 당신이 그걸 우리한테 확인시켜놓고서 죽겠다 그러면 앞뒤가 맞습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만일 위기가 오면 내가 목숨을 걸고 주를 지키겠습니다.'
뭐라고 꾸중을 듣는가? 절대 들어서는 안 되는 꾸중이 나오지 않는가? 뭐라 그랬나? '사탄아~'
거기서 거기서 '사탄아'가 나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그다음에 그 유명한, 우리 사랑의 교회가 앞세워 주장하는, 뭐가 나오나?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예수님이 한계 속에 오신다. 그가 십자가를 지신다. 그가 게세마네에서 했던 기도도 그거였다.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비켜 주십시오' 그는 이 고통과 조롱이라는 시험 앞에서 갈등하신다. 그러나 이기신다. 이겼더니 평탄해지더라가 아니라, 이긴 게 뭐였나? ★이긴 게 십자가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험을 이기면 면류관이 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가자고 하는 길을 통과해야 되는데, 그것이 만드는 것은, 앞에서 얘기한 거 같이, 용기라는 것이 ●고난이 없는 용기는 없다.
부활의 아침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난다. 못 알아본다. 예수님이 묻는다. '무슨 일로 그렇게 재미있는 얘기를 하고 가느냐?' '아니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모른단 말이요?' '무슨 일이길래?' '우리는 그가 메시아인 줄 알았는데 그가 그만 죽고 말았지 뭡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 그러나?
●"이 밥통아, 이 대갈통들아, 그리스도가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들어간다고 얼마나 성경이 주장을 했느냐? 그렇게 말한다.
히브리서 5장 8절에서도 뭐라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 즉"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고난과 형통이라는 이 개념들을 홀딱 뒤집는 것이다.
인간의 위대함은 위기 속에서 만들어진다. 위기 때 이렇게 잘난 척하고 한번 나선다는 게 아니라 그때 만들어진다.
★도망갈 데가 없을 때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그 사람에게 중요한 과정이 된다. 매일 그런 일이 우리에게 있다.
하나님이 나한테는 왜 아무 관심이 없느냐고? 하나님은 매일 하신다. 모세가 뭐라 그러나?
80세에 하나님이 불러서 '모세야, 가서 내 백성을 구해라' 그러자 그가 한 질문이 이거다.
'지난 40년 동안 뭐 하고 계셨다가, 어디 가 계셨다가 이 늙다리한테 와서 이제 하자십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이게 무슨 뜻일 것 같은가? '나는 하나님이기를 중단하지 않는 자니라'이다.
'니가 잃어버린 40년이라고 생각한 그 40년이 내가 너를 단련시킨 날이다.' 그렇게 말하시는 거다.
그래서 모세는 멋있게 그 이스라엘 백성 데리고 40년 유랑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멋진 지도자가 된다. 그는 위대한 승자가 되는 것보다 자신이 이끌고 나온 백성의 실패와 함께 죽는 길로 자신의 생을 마감한다. 그래서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신다고 성경이 얘기하는 것이다.
우리의 매일은 뭔가? 가고 싶지 않은 직장을 매일 가야 되고, 돌아오고 싶지 않은 집으로 매일 돌아와야 된다. 성경 말씀을 할 때는 아멘이 없다가 현실에 오자 갑자기 우린 동지가 되었다. ^^ 집엔 왜 오기 싫으냐? 호랑이가 있다. ㅎ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시간을 끌어야 된다. 야단 맞을 시간을 줄여야 되니까. 새벽에 들어왔다 새벽에 나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거기서 큰다. 질 수 밖에 없다는 걸, 질 수 밖에 없다는 걸.. 그래서 어느 날 훌륭해진다. 어지간히 찌르면 피도 안 나오고 눈물도 안 나오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보통 결혼식을 하면 그 시작을 사랑의 결실이다 그렇게 말을 해 갖고 다 혼란스러워진다.
결혼식 그건 사랑이 시작하는 거다. 훈련소에 입소하는 것이다.
살아야 비로소 사랑의 실력이 붙기 시작한다. 사랑은 도망갈 수 없는 것이다.
도망갈 수 없는 것. 그건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의 작정인지 모른다.
혼자 살면 포기하면 그만이다. 나 혼자 하니까 투표할 필요가 없으니까..
둘이 살면 매번 반대이다, 매번. 나만 그런 건 아닐거다. 그리고 매번 내가 진다. 일 대 일인데 왜 내가 져야 되냐? 그거, 남편의 슬픈 운명이 있는 거다.
★거기서 뭐가 되냐? 하나님의 뜻, 그 사랑의 깊이, 무한한 기다리심, 상대가 잘 되기 위해선 내가 져도 좋다는, 수모를 감수하시는 하나님을 비로소 발견한다.
그리고 인간은 유명하고 능력 있고 어쩌고 그러면 다 이것만 못하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치는 다른 데는 다 공허하다. 유명세나 권력이나 지위나 그런 건 다 공허하다.
인간 스스로가 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만 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이다.
★어디 가서 할 말 없는 것, 그러면 좋은 청취자가 돼라. 상대방 말에 '그래~, 그래~' 그걸 하라.
모두 자기 얘기하기 바빠서, 남의 얘기를 숨 쉬는, 침 삼키는 동안에 딱 치고 들어오지 않는가? '나는 말이야~' 하고.
그러니까 내가 밥낮 가르쳐 준다. '이 사람이 얘기하던 중이야, 이 사람 얘기 끝난 다음에 들어와. 고무줄넘기 할 때도 노래 부를 때 맞춰 들어오는 거야.'
★우리 다 우리 인생 속에 얼마나 많은 훈련이 있는가!
하나님이 열심히 일하시는데 거기서 안 크면 어디서 클건가?
뭐 어디 가서 쇼를 할건가? 기름이라도 붓고 불이라도 붙일건가? 할 수 없는 것, 하고 있는데 반응은 없고.
★매일 커야 된다. '때가 되면..' 성경에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다. '때가 차매..' 우리가 큰다.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큰다.
언제 되면 그걸 아느냐? 손주를 낳으면 안다. 이건 뭐 백 프로 무조건 항복이다.
달라는 거 다 주고, 하자는 거 다 하고, 수염 뜯기고 안경 깨지고 오케이, 만사 오케이..
그것은 바보라서 하는 게 아니고 노력해서 당하는 게 전혀 아니다. 그 모두가 행복하다.
저 애가 글쎄 세 살 때 내 볼을 깨물어 뜯었지 뭐야' 이런 게 다 자랑이고 훈장이다. '여기 봐, 상처가 남아 있지?'
★인간의 인간됨, 위대함, 아름다움, 그 명예로움, 그 무엇으로도 평가할 수 없고, 치수를 잴 수 없는 이 지위에, 이 신분에, 이 운명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며 함께하시며 축복하시며 격려하시며 도전하신다는 사실로 우리의 인생을 복되고 승리하는 복이 있기를 바란다.///
(기도)
우리의 매일은 전쟁터이다
★그러나 그 전쟁은 이기고 지는 것보다 더 큰, 자라나는, 명예로운, 위대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자리인 것을 믿는다.
우리 각자 자기가 있는 자리에 걸맞는 인격의 실력과 내용을 하나님께서 충만히 채워주시기를 기도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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