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지혜 분별 고급한 인성 하나님의 영광된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것. 그래서 우리에겐 언제나 버거운 과정이 요구된다. 실패하고 아프게하고 지금 이렇게 답없는 재앙에..

nazunzaro 2021. 7. 17. 07:15
[예레미야_27 / 예레미야 44:24-30 / 2021.07.14.]

이스라엘의 역사와 선지서들은 읽기가 불편하다.
비극을 이야기하고, 역사적 실패를 얘기하고, 하나님의 저주와 징벌의 역사적 사실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마음에 불편하다.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은 희망에 찬 말이요, 선한 결과를 주시는 은혜와 축복의 말씀인 것이 모두의 기본적인 기대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여기에는, 성경이 얘기하고 싶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목적하시는 복과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대하는 복과의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늘 이 문제가 갈등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원하는 복은 소위 말하면, 하나님 없어도 잘살게 되는 것이다. 부탁을 할 필요도 없고 기도를 할 필요도 없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복이고, 그 일을 도와주시는 분이 하나님이기를 바랄 뿐인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인간에게 가지는 복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 자신이 그러하시듯이, 우리에게 지혜와 분별과 고급한 인성과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진정한 영광된 정체성이 만들어 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목적은 결국 언제나 우리 인간에게는 버거운 과정이 요구되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싫어한다. 쉽게 살고 쉬운 목적으로 만족하고 싶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타협, 우리의 비겁함에 대하여 놔두지 않고 늘 도전하신다.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가 가지는 귀한 메시지들이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서 있는 사명이기도 하다.

예레미야는 실패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희가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고 쉬운 결과와 쉬운 생애를 요구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결국 너희들의 자유를 빼앗고 너희를 종된 자리, 포로된 자리로 몰아가서 이제 불편한 현실, 절망앞에서 비로소 '인간이 뭐냐? 인생이 뭐냐? 하는 깊은 내면에 대한 성찰이 생길 것이다,라는 약속을, 도전을 선지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예레미야에서 대표적으로 보듯이 선지자들은 자기 백성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한다. 매일 겁이나 주고 저주나 퍼붓는 나쁜놈이요 함께 어려운 현실을 살면서 서로 위로는 하지 못할지언정 그런 흉악한 소리나 하느냐,라고 늘 배척했고 그 입술로 증거되는 하나님의 경고들을 거부하고 그리고 자기들의 살 길을 찾아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편헌 데로 편한 데로 도망가는 것이 전부인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애굽으로 가지말고 바벨론으로 잡혀가라 하는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둘에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굉장히 큰 차이가 있다.
■바벨론에 가는 것은, '이 모든 것을, 거기서 당해야 될 어떤 처절한 고난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벌이다'를 잊을 수 없는 것이고,
애굽은 피난처를 제공한 도망가서 어떤 안심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둘은 천지 차이가 날만큼 다른 선택인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원하는 어떤 결과물들 - 형통하고, 아쉬운 소리 할 필요없고, 고생이 없고 - 가 아니라, 《하나님이 너희에게 둔 목적은 굉장히 큰 것》이라서 《이런 벌을 받고 이런 혹독한 고난을 통하여서라도 그건 깨우쳐야 되고 그 목적지에 가야만 한다》라는 하나님의 의지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자리인 것이다.

애굽은 하나님의 뜻을 더이상 기대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의 한 핑계? 한 도피처로서 사용되는 것이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의지가 도전하고 우리를 깨우치는 그런 하나님과의 직면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벨론 포로에 가야 된다,라는 예레미야 선지를 통한 그 선포의 진정한 의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잘못한 죄값을 받으라고 하지 않는다. '너희가 추구하는 것, 너희가 목적하는 것들은 값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만들려고 하는 것은, 너희 전 인생에 걸쳐 너희의 모든 노력과 하나님의 지혜와 도전을 받아들여서 가야 하는, 험난한 그러나 지극히 영광스런 목적지이다' 라고 얘기하는 거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그 자유가 이스라엘 역사속에서는 실패로 돌아갔다. 자유가 무슨 실패를 했을까? 선택에 실패를 했다. 그 선택의 실패로 벌을 받고 있다.
쉽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선택의 자유를 주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끌고가서 이 험한 꼴을 당하지 않게 하실 수 없나요?라는 질문이 나오지만,
■진정한 영광에는 자유와 지혜로운 고급한 선택의 책임이 없이는 이 영광의 자리는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사건은 아버지의 깊은 뜻이었으며 예수의 순종이었다. 그것은 강요받은 자리가 아니라, 성자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기쁘심에 동참한 당신의 순종의 자리여서 ■그는 성육신의 모든 어려운 일들을 하나님의 영광, 아버지의 기쁨으로 이해하곤 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가지면 '내 맘대로 해도 되는거 아니냐?'라고 생각을 하고 있지, ■이 자유가 고급한 선택, 그 선택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영광의 자리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구약 역사 내내의 실패와 모든 선지자들을 통하여 지적한 것과 같은 그 실패를 우리의 인생과 현실에서 우리가 겪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셔서야 이 문제는 정답을 찾게 되고, 우리도 정답에 도달할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이다.
■자유는 우리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고, 《우리는 모든 선택을 조급함, 혼란, 불안, 위협 속에서 해야 된다.》
■ 우리가 하는 선택은, 이 고난을 면하는 데에 집중되고 있지, 우리에게 닥치고 있는 도전들이 무슨 시험인가를 꿰뚫어 보는 그런 분별과 그런 안목은 없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 생각해 보자. 모든 인류, 모든 사회에 이 격언이 있다. '옛말이 틀린 게 없지'라는 말이다. 살아본 사람들의 지혜다. 경험이다. 살아 봐야 안다. 자살이 부정적으로 정의되는 큰 이유는 죽고 싶은 그때 죽으면 안된다. 천수를 누려야 된다. 왜? 그 후, 지금 죽을 것 같은 것이 무엇을 만들어 내는 지를 볼 시간을 가져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실 은혜가 필요하다.

■ 이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지면서 모든 책임을 우리에게만 넘겨 주었다면, 스무살 넘기기 힘들 거다. 하나님이, 우리가 자유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를 계속 은혜 속에서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어쨌든 우리는 죽을 것같은 여러 번의 시간들을 넘어서서 기어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 그 과정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는 것같이, 그 혹독한 멸망이다. 이스라엘은 이 때 멸망해서 그리고는 부흥하지 못한다. 예수가 오시는 그때까지도 온전한 국가를 만들지 못하고 다윗왕권은 회복되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가 오시자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죽이고 그 나라는 멸망하여 지난 이천년동안 세계곳곳에 흩어져 나그네 인생을 어느곳에서나 핍박받는 족속으로 살아야 했다.
■그런 (혹독한)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고, 하나님이 이 일을, 우리의 피눈물을 감수하시면서 하나님이 이 일을 지속하고 있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고 성경이 증언하는거다.

예레미야는 여기까지 붙잡혀 가서 죽는다. 이것이 선지자의 소명이다. ■그는 억울하지 않는가? 그의 생애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이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말과 반대의 말을 해야 되었다. '너희는 속지 말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외치지 말라. 하나님은 너희의 행한 대로 갚을 것이지, 너희가 원하는 기대대로 갚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해야 되었던 선지자의 운명. 그는 매국노로 매도되고 그리고 감옥에 갇히고 끝에 가서 나라가 망하자, 그를 미워했던 모든 사람들 손에 붙잡혀 애굽으로 붙잡혀 와서 거기서도 지금 미운 소리 하는 거다. 그들은 자기들이 일월성신, 아스다롯, 해와 달과 별들의 신, 기후, 생산을 관장하는 아스다롯, 이 여신을 제대로 못 섬겨서 이 꼴을 당했다고 생각을 한다.

자연이 가지는 모든 조건 속에 우리가 서있고, 자연의 질서 속에 있지만, 성경은 그 모든 것이 하나의 환경이고,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후대에서 사니까, '왜 그때 그랬어?' 라고 쉽게 심판을 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아스다롯을 섬기며, 이런 자연질서에 무릎을 꿇는 것은 우리에게는 현실이다.
■ 이 현실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건 형편이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인 것일 수밖에 없고 분별에 속하는 것이고, 우리 기독교 용어로는 믿음에 속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한정으로 실패해야 되는 것이다. 세상 질서에, 세상의 평판에, 세상의 방법에 도움을 받고, 그리고 쓴 맛을 보고, 성공했으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하는 인생살이가 하나님이 의지를 갖고 우리에게 베푸시고 함께하시는 나날들이다,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구약을 읽어낼 방법이 없고, 오늘을 살아낼 방법이 없고 원망을 그칠 수가 없다.
■왜?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그냥 지나갈 날이 없다. 그 모든 것에 하나님이 일을 하고 있다, 그게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다.

■ 아무 징조도 없는데 뭘 하라는 말인가? 네 실력대로 해봐. 우리는 금방 세상 방법에 빠진다. 그러면 울어야 된다. 만사형통하지 않다. 한 사람이 위대해지고 철이 드는데 눈물 없는 데가 어디 있으며, 한숨 없는데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우리 신앙은 너무 쉽게, 너무 순진해서, 제대로 믿으면 고민할 필요가 없다,라는 데까지 온것 같다. ■그러지 않다. 믿음이 크면 도전도 더 크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인생 사는 동안 뭐를 하셨는가 보라. 우리의 모든 결정들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한번씩 돌아봐야 한다. 쉽게 살았던 때가 있다. 생각없이. 별다른 도전과 위험이 없으면 우린 생각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한번씩 우리가 생각하게 하셔야 된다. ■실패하게 하셔야 하고 아프게 하셔야 되고 지금같이 이렇게 답이 없는 재앙에 맞서야 된다. 이게 우리 어떻게 풀고 살아야 되는가가 아니라, 우린 누군가?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건 이런 때 어떻게 힘이 되는가? 우리보고 뭘 하래는 건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는가? 이런 인생 속에서도 무슨 유익이 있는가?

그렇게 당연히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따져야 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뭔가? 내 인생은 뭔가? 내 인생에 할 수 있는게 무어며, 내가 항복할 수 있는 내용은 어디서 오는가?
그게 성경이 하는 대답이 아닌가? 너희는 다 죄인이다,가 뭐였나?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 자다.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면 거기는 생명도 없고 거기는 기쁨도 없고 거기는 소망도 없다. 세상엔 다 있는데?
■ 그거는 세상이 말하는 기쁨과 승리와 자랑들은 다 거짓된 것이다. 그것은 시간을 속이고 나를 속이는 것들이지 거기에 진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그 속에서 그 둘을 비교해 볼 만큼 신앙이란 오랜 시간을 준다. 오랜 시간에 걸치 도전과 질문을 한다.

거기 이스라엘 역사가 있다. 시드기야는 애굽을 의지한다. 시드기야는 남왕조 유다의 마지막 왕이다. 그는 11년동안 유다의 왕노릇하는데, 시드기야왕 8년에 바벨론을 섬길 것을 배반하고 애굽을 의지해서 바벨론 왕이 쳐들어 와서 그 서을 18개월동안 에워싸고 결국 다 망하여 자식들이 죽고 시드기야 두 눈울 뽑고 잡아간다. 이런 실패의 이야기들은 우리 모두에게 너희는 그러지 마라라는 것이 다만 이런 정치적 군사적 차원에서의 질문이 아니라, 너희 인생의 진정한 복과 안심과 자랑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라고 끊임없이 묻는다.

■ 우리를 편안케 해 주는 것은 많다. 우리가 많이 기도하는 것들이 다 거기 속하는 거다. 이러이러한 것들이 있다면 내 인생은 결코 부복함이 없고, 내가 무슨 큰 욕심을 내겠대? 그저 자식 잘기르고 사는게 소박한 꿈이야.
하나님이 그렇게 소박한 꿈을 타협하시지 않겠다는데, 우리가 마치 더 많은 권리가 있는데 양보하는 것처럼, '나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아요. 저 욕심없어요.'

■하나님은 욕심이 있으시다고 한다. 근데 우리는 '저 욕심 안가질래요' 그렇게 얘기한다. 무슨 욕심? 하나님은 우리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과 신뢰를 나누자고 한다. 엄청나다. 그리고 이 세상을 다스리자고 하신다. 모든 예수믿는 자들에게 준 너무나 큰 약속이다. 명예이다, 영광이다.
우리는 나 하나 고단하지 않은 인생을 사는게 전부이고, 하나님은 하나님 되심으로 온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의 통치에 우리를 불러 우리를 그의 자녀, 상속자, 영광의 종으로 부르신다. 주께서는 그 일을 기꺼이 기쁘게, 명예롭게, 우리 모든 교회에 그 십자가를 달아 매듯이, 그 십자가에서 죽으신 고통과 조롱과 그 참혹함을 최고의 영광으로 반전시키셨다. 그 권면이, 그 도전이 이렇게 이스라엘 역사에 이렇게 확연하게 남왕조 약 400년에 걸치 긴 세월을 통하여 증거되고 있다.

■우리 지금 고단한 현실이다. 하나님이 이것으로 유익을 만든다고 선언하시고 약속하신다. 우리가 고단하다고 생각하고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너무나 얄팍하고 갑싼 복을 또는 영광을 상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현통과 평안이 올지라도 우리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지금 우리의 삶을 귀한 시간으로 삼아 불변하시는 하나님, 지금 일하시는 하나님, 나와 씨름하시는 하나님의 씨름 앞에 정직하게 대면하여, 복된 우리의 코로나 시대, 뒤돌아 볼때마다 '그때 나는 사람이 됐어, 그때 신앙이 컸어' 라고 말할 수 있는 귀한 현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하여 감사한다.
우리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시며 타협하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성실하심이 그저 늘 놀랍고 감사할 뿐이다.
값싸고 비겁한 자리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 날 은혜와 믿음과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주의 말씀이 하나도 땅에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실패로 끝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의 현실에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성도들의 삶의 기적을 우리가 먼저 증언하고 큰소리로 찬양하는 맨 앞줄에 선 성도들이 돼야 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