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무엇인가
1.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반응
믿음 혹은 신앙은 사물에 관한 것이나 사실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미음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우리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다.
'신앙이란 일차적으로 신념이라기보다는 신뢰이며 추상적인 지식이기보다는 인격적인 관계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여 믿음은 사실에 대한 확신이고 인격에 대한 신뢰인데, 성경 혹은 기독교 신앙에서의 믿음은 사실에 관한 것보다는 인격에 관한 신뢰 쪽이다.
이 인격에 관한 신뢰는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인 반응을 말한다.
그래서 믿음은 인격과 인격 사이에서만 만들어지는 관계이다.
인격과 기계의 사이에서는 믿음이라는 것이 생기지 않는다.
믿음이란 인격과 인격 사이에서만 가능한 관계임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믿음에 관한 설명이 제일 잘 되어 있는 곳으로 히브리서 11장을 찾는다.
히브리서는 곤경에 처한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쓴 책이다. 그중에서 11장은;
'예수를 믿는 신앙에서는 예수를 믿는 자가 자신의 신앙 때문에 고난을 감수해야 된다. 고난을 감수할 몫이 있다. 책임이 있다'는 쪽으로 믿음을 설명하고 있다.
즉 믿는 사이에서는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것이며,
하나님이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매어 다신 분인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인격의 관계에서 능력이나 이해 관계를 떠나서 하실 부분이 있고,
■믿음의 대상으로 부름을 받은 자는 그 상대방 인격 앞에 자신의 인격을 동원하여 져야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급 한 자리로 부름을 받았기에,
이제는 이 큰 영광의 은혜를 근거로 하여 하나님 앞에 내어놓아야 할 책임들을 감수해야 된다는 것이 히브리서 11 장에서의 믿음이다.
'여기 이 구약의 인물들이 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자의 책임을 감수했는가 봐라. 저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의 현실적인 고난을 극복하고 하나님 편을 들고 모든 고난을 감수했는가 봐라'는 것이다.
믿음을 놓고 객관적으로 설명을 하려는 책이 아니라 고난에 처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책임으로서의 믿음을 권유하고 있다. 믿음의 책임이 요구될 때는 믿음이 인격과 인격의 관계여서 그렇다는 것이 이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나기 때문에 바로 이런 시각에서 우리가 찾아보고 믿음에 돤한 이해를 돕는 필요한 근거로 삼는다.
히브리서 11장 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했다고 강조한다. 여기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표현에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는 표현과 함께 이 창조주가 인격자라는 뜻이 담겨 있다.
말이라는 것은 어느 인격에게 설명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을 하나의 법칙이나 하나의 힘으로, 인격이 없는 개념, 질서 등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특히 성령론을 논할 때 성령 하나님이 인격적 존재라는 것을 자꾸 놓치고 사물로 보거나 어떤 힘과 원칙으로 삼아서,
성령 하나님을 자꾸 조작해서, 성령의 무슨 은사를 받아내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이 갖는 뜻을 일차적으로 놓치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에 대한 정의가 나온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우리에게 믿음은 자기가 소원하고 자기가 기대하는 것에 대한 자기 암시이다. '될 줄로 믿습니다. 되기를 바랍니다. 됐으면 좋겠습니다'를 믿음으로 동원하는 것은 자기한테 암시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이 모든 결과를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본다.
하나님 안에 우리의 소원에 대한 답과 우리에게 일어나야 될 모든 복과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모든 거룩함과 의로움의 완성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자, 그의 백성이 된 자는 이미 그 안에서 다 본다.
바라는 것들과 보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그 분에게서 본다. 그 분이 다 하실 것이다.
■그래서 사실 확인아니 물질 확인이 아니고 인격 확인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것은
사실과 결과의 확인이 아니고 인격 안에서의 확인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을,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의 의지, 목적, 계획을) 제외해 놓고 나 혼자 갖는 열심이거나 소원이거나 본인만이 무슨 비법으로 갖는 종교적인 주술 행위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성경 욥기에서 욥이 전에는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 하면, 하나님을 질서, 힘, 무정한 법칙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격자가 아닌 것이다. '내가 선하게 살고
죄를 안 지으면 화를 당할 리가 없다' 이렇게 밖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의 신앙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관계와 인격적 신뢰가 아니라 잘잘못에 관한 기준이고 그것에 관한 뿐이다.
그래서 욥이 말한다: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이 등장하셔서 하시는 말씀은 이것이다;
'나는 무정한 법, 개념이 아니다. 나는 의지를 가지고 선과 의를 이루기 위하여 자연과 모든 생물의 인격에 개입하는 하나님이다.' 그것을 자연을 들어서 설명하는 것이다.
'네 인생에 있어서 나는 심판관이고 무정한 법칙이 아니라 너를 복되게 하기 위하여 네 인격과 네 인생에 개입하는 아버지이고, 인도자이고 복 주시는 하나님이다'
이것이 욥기의 결론이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빼놓고 믿음이라는 것을 따로 어떤 물건이나
마술같이 갖고 있으면 안된다. 우리의 모든 믿음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요,
하나님과 묶이는 것이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호흡하며 하나님과 대화하며,
밀고 당기고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믿음의 방향과 목적과 내용과 크기와 힘은 전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을 얼마나 아느냐, 얼마나 깊은 영적 교류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적 교류라고 하는 것이 어떤 신비로운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전 인격에 걸친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항복과 닮음을 얘기하는 것이다.
1.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반응
믿음 혹은 신앙은 사물에 관한 것이나 사실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미음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우리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다.
'신앙이란 일차적으로 신념이라기보다는 신뢰이며 추상적인 지식이기보다는 인격적인 관계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여 믿음은 사실에 대한 확신이고 인격에 대한 신뢰인데, 성경 혹은 기독교 신앙에서의 믿음은 사실에 관한 것보다는 인격에 관한 신뢰 쪽이다.
이 인격에 관한 신뢰는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인 반응을 말한다.
그래서 믿음은 인격과 인격 사이에서만 만들어지는 관계이다.
인격과 기계의 사이에서는 믿음이라는 것이 생기지 않는다.
믿음이란 인격과 인격 사이에서만 가능한 관계임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믿음에 관한 설명이 제일 잘 되어 있는 곳으로 히브리서 11장을 찾는다.
히브리서는 곤경에 처한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쓴 책이다. 그중에서 11장은;
'예수를 믿는 신앙에서는 예수를 믿는 자가 자신의 신앙 때문에 고난을 감수해야 된다. 고난을 감수할 몫이 있다. 책임이 있다'는 쪽으로 믿음을 설명하고 있다.
즉 믿는 사이에서는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것이며,
하나님이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매어 다신 분인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인격의 관계에서 능력이나 이해 관계를 떠나서 하실 부분이 있고,
■믿음의 대상으로 부름을 받은 자는 그 상대방 인격 앞에 자신의 인격을 동원하여 져야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급 한 자리로 부름을 받았기에,
이제는 이 큰 영광의 은혜를 근거로 하여 하나님 앞에 내어놓아야 할 책임들을 감수해야 된다는 것이 히브리서 11 장에서의 믿음이다.
'여기 이 구약의 인물들이 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자의 책임을 감수했는가 봐라. 저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의 현실적인 고난을 극복하고 하나님 편을 들고 모든 고난을 감수했는가 봐라'는 것이다.
믿음을 놓고 객관적으로 설명을 하려는 책이 아니라 고난에 처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책임으로서의 믿음을 권유하고 있다. 믿음의 책임이 요구될 때는 믿음이 인격과 인격의 관계여서 그렇다는 것이 이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나기 때문에 바로 이런 시각에서 우리가 찾아보고 믿음에 돤한 이해를 돕는 필요한 근거로 삼는다.
히브리서 11장 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했다고 강조한다. 여기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표현에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는 표현과 함께 이 창조주가 인격자라는 뜻이 담겨 있다.
말이라는 것은 어느 인격에게 설명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을 하나의 법칙이나 하나의 힘으로, 인격이 없는 개념, 질서 등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특히 성령론을 논할 때 성령 하나님이 인격적 존재라는 것을 자꾸 놓치고 사물로 보거나 어떤 힘과 원칙으로 삼아서,
성령 하나님을 자꾸 조작해서, 성령의 무슨 은사를 받아내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이 갖는 뜻을 일차적으로 놓치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에 대한 정의가 나온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우리에게 믿음은 자기가 소원하고 자기가 기대하는 것에 대한 자기 암시이다. '될 줄로 믿습니다. 되기를 바랍니다. 됐으면 좋겠습니다'를 믿음으로 동원하는 것은 자기한테 암시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이 모든 결과를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본다.
하나님 안에 우리의 소원에 대한 답과 우리에게 일어나야 될 모든 복과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모든 거룩함과 의로움의 완성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자, 그의 백성이 된 자는 이미 그 안에서 다 본다.
바라는 것들과 보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그 분에게서 본다. 그 분이 다 하실 것이다.
■그래서 사실 확인아니 물질 확인이 아니고 인격 확인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것은
사실과 결과의 확인이 아니고 인격 안에서의 확인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을,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의 의지, 목적, 계획을) 제외해 놓고 나 혼자 갖는 열심이거나 소원이거나 본인만이 무슨 비법으로 갖는 종교적인 주술 행위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성경 욥기에서 욥이 전에는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 하면, 하나님을 질서, 힘, 무정한 법칙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격자가 아닌 것이다. '내가 선하게 살고
죄를 안 지으면 화를 당할 리가 없다' 이렇게 밖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의 신앙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관계와 인격적 신뢰가 아니라 잘잘못에 관한 기준이고 그것에 관한 뿐이다.
그래서 욥이 말한다: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이 등장하셔서 하시는 말씀은 이것이다;
'나는 무정한 법, 개념이 아니다. 나는 의지를 가지고 선과 의를 이루기 위하여 자연과 모든 생물의 인격에 개입하는 하나님이다.' 그것을 자연을 들어서 설명하는 것이다.
'네 인생에 있어서 나는 심판관이고 무정한 법칙이 아니라 너를 복되게 하기 위하여 네 인격과 네 인생에 개입하는 아버지이고, 인도자이고 복 주시는 하나님이다'
이것이 욥기의 결론이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빼놓고 믿음이라는 것을 따로 어떤 물건이나
마술같이 갖고 있으면 안된다. 우리의 모든 믿음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요,
하나님과 묶이는 것이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호흡하며 하나님과 대화하며,
밀고 당기고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믿음의 방향과 목적과 내용과 크기와 힘은 전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을 얼마나 아느냐, 얼마나 깊은 영적 교류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적 교류라고 하는 것이 어떤 신비로운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전 인격에 걸친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항복과 닮음을 얘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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