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장에는 예수께서 이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그리고 나면 얼마든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응답해 주시겠노라 하는 약속이 들어 있다. 그러니까 이 기도는 매달리고 간절히 구하고 하면 받는 그런 문제를 더 지나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조건과 근거 속에서만, 거기서만 허락되는 기도라는 것을 기억해야 된다.
예수님이 죽어야 하고 그리고 부활하셔서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지 않는 한, 우리 죄인 된 인간들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바라고 소원하는 것들을 만족시키는 그런 차원으로는 이 기도는 허락되어 있지 않다, 그런 뜻이다.
물론 주께서는 우리의 곤고함이나 고통이나 애타는 기도들에 대하여 긍휼을 베푸시며 답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본격적인 본문은 아닌 것이다. 병이 낫게 해 달라, 지금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 하는 기도들에 하나님이 얼마든지 응답하시지만, 그것은 본격적인 내용은 아니다.
'학교 가서 공부하게 도시락을 싸 달라, 용돈을 달라, 차비를 달라,는 다 들어주지만, 이건 본격적인 본문은 아닌 것이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본격적인 공부를 해야 되듯이,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리고 부활, 그리고 그렇게 하시는 일로써만 성립되는 내용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된다. 하나님의 뜻은 `그가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인류를, 그 만드신 창조의 목적을 기어코 이루리라고, 배신한 거부한 스스로 죄를 자초하여 사망을 초래한 인생에 찾아오사,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전 과정을, 개입하시는 능력을, 그리고 《우리에게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는 그 과정》을 다 포함한 말씀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생애에,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이루신 것을 우리를 통하여 전 인류에게, 모든 족속에게 그 일을 우리 삶의 현장에 실현하겠다고 우리를 약속한다.
거기서 그 기도가 나오는 거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삶의 현장, 내가 만나는 이웃 앞에, 땅끝까지 모든 족속을 대상으로, 하나님이 지금 일하고 계신다. 내 기도를 들으신다. 나와 함께 일하신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인자되신 것을 통하여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신 하나님의 신비한 방법》이 우리를 충만케 하고 완성케 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동시에 이루는 일을 한다. 여기가 기도해야 되는 본문이다.
그러니 뭘 하지 말라고? 심판을 하지 말라. 우리가 `나는 믿었고 너는 안 믿었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가장 원색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이해이지만, 거기는 시작이다.
우리는 저주를 하러 보냄을 받았거나 정죄를 하러 보냄을 받지 않고, 우리가 아직 몰랐을 때,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주께서 오신 것같이, 내가 누군지 모르는 자들, 내가 하는 증언을 모르는 자들 앞에 그들을 구하기 위하여 보내진 하나님의 손길이다.
■그 일은 예수께서도 당신의 성육신을 호탕하게 웃으면서 쉽게 가지 못하고, 근심하시며 애통해 하시며 우시며 심지어 '내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라고 고백하는 길을 걸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비켜 주시옵소서'라는 갈등과 고통 속을 걸어가서 도달한 자리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누구를 정죄하고, 누가 잘못했고, 누가 나쁜 놈이라, 누가 적그리스도인가를 따지는데 시간 보내지 말고,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 살아야 한다. 적그리스도를 찾아 다니다가 자기 일은 못하는 거다. 우리의 현장이 어디인가?
우리의 가정, 여러분의 이웃, 거기가 현장이다. 지금 여기, 오늘 살아야 하는 인생을 밤낮 명분에 실어서 미래와 이상으로 끌고 가는 바람에 오늘을 못 사는 거다. 세계 복음화, 이게 뭐 오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오늘을 안 살게 된다. 언제 남북은 통일되나? 그건 통일부에 맡기고, 우리는 신자 노릇을 하라는거다. 오늘을 살라는거다.
■하루 종일 이 도전과 이 갈등과 이 시험 앞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근거와 증인과 약속과 우리 구주와 우리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 이 싸움을 이겨야 한다.
■화목하게 하는 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목, 그렇게 갈 것 없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일을 하라.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죽으셨다. 그 고난을 참으신다. 그 수치를 감수하셨다. 그 길을 가라. 그것이 기도이다.
"내 이름으로 내게 구하라 나를 믿으면 내가 하는 일을 너희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 그렇게 부름 받아 있다.
누구를 정죄하고 무엇을 잘라내어 내가 보전되는 길이 아니라, 나로 인하여 모두가 복을 받는 인생을 부여받고 있다. 그렇게 하라.
쉽지 않다. 이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히브리서 4장에서, '하늘에 있는 대제사장이 우리의 현실을 체휼 하신 분이다, 담대히 그 앞에 나아가 긍휼 자비 은혜를 구하라' 그렇게 말씀한다.
■쉽지 않다. 해야 된다. 이걸 하지 않으면 이 은혜를 구하는 이 일이 그저 다만 안심을 위한 기도에 불과하다.
적극적인 신자로서 살기 위하여 책임있게 살기 위하여 은혜를 구하라. `나는 중요한 존재다.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보냈다'를 잊지 않아야 이 책임을, 이 은혜를, 긍휼을 주 앞에 구할 수 있다.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게 하는 그런 기도를 하지 말라. 나 평안하고 생각할 필요없고 고민할 필요없는 인생을 주십시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나 우리 교회가 모두 공통되게 가장 상징적인 표식으로 가지는 십자가를 볼 자격이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열려 있고, 아니 매일 주어지고 있는 이 신자된 책임 명예 영광 기회를 살아내, 우리의 생애에 담겨지는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찬송이 어우러지는 그런 인생을 살아야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으로 《주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귀한 인생을 살게 하셨다.》 이를 감당해야 한다. 그 기쁨과 찬송을 우리의 입술로 고백하는 기적의 인생이 되어야 한다.
우리로 인하여 이 시대, 이 나라, 이 백성, 이 사회, 우리 가족이 복을 받게 해야 한다.
《주의 사랑을 입고 책임을 지고 명예와 영광의 인생을 살게 된 것을 기억하고 충성을 약쇠해야 한다》.
예수님이 죽어야 하고 그리고 부활하셔서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지 않는 한, 우리 죄인 된 인간들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바라고 소원하는 것들을 만족시키는 그런 차원으로는 이 기도는 허락되어 있지 않다, 그런 뜻이다.
물론 주께서는 우리의 곤고함이나 고통이나 애타는 기도들에 대하여 긍휼을 베푸시며 답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본격적인 본문은 아닌 것이다. 병이 낫게 해 달라, 지금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 하는 기도들에 하나님이 얼마든지 응답하시지만, 그것은 본격적인 내용은 아니다.
'학교 가서 공부하게 도시락을 싸 달라, 용돈을 달라, 차비를 달라,는 다 들어주지만, 이건 본격적인 본문은 아닌 것이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본격적인 공부를 해야 되듯이,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리고 부활, 그리고 그렇게 하시는 일로써만 성립되는 내용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된다. 하나님의 뜻은 `그가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인류를, 그 만드신 창조의 목적을 기어코 이루리라고, 배신한 거부한 스스로 죄를 자초하여 사망을 초래한 인생에 찾아오사,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전 과정을, 개입하시는 능력을, 그리고 《우리에게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는 그 과정》을 다 포함한 말씀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생애에,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이루신 것을 우리를 통하여 전 인류에게, 모든 족속에게 그 일을 우리 삶의 현장에 실현하겠다고 우리를 약속한다.
거기서 그 기도가 나오는 거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삶의 현장, 내가 만나는 이웃 앞에, 땅끝까지 모든 족속을 대상으로, 하나님이 지금 일하고 계신다. 내 기도를 들으신다. 나와 함께 일하신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인자되신 것을 통하여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신 하나님의 신비한 방법》이 우리를 충만케 하고 완성케 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동시에 이루는 일을 한다. 여기가 기도해야 되는 본문이다.
그러니 뭘 하지 말라고? 심판을 하지 말라. 우리가 `나는 믿었고 너는 안 믿었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가장 원색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이해이지만, 거기는 시작이다.
우리는 저주를 하러 보냄을 받았거나 정죄를 하러 보냄을 받지 않고, 우리가 아직 몰랐을 때,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주께서 오신 것같이, 내가 누군지 모르는 자들, 내가 하는 증언을 모르는 자들 앞에 그들을 구하기 위하여 보내진 하나님의 손길이다.
■그 일은 예수께서도 당신의 성육신을 호탕하게 웃으면서 쉽게 가지 못하고, 근심하시며 애통해 하시며 우시며 심지어 '내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라고 고백하는 길을 걸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비켜 주시옵소서'라는 갈등과 고통 속을 걸어가서 도달한 자리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누구를 정죄하고, 누가 잘못했고, 누가 나쁜 놈이라, 누가 적그리스도인가를 따지는데 시간 보내지 말고,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 살아야 한다. 적그리스도를 찾아 다니다가 자기 일은 못하는 거다. 우리의 현장이 어디인가?
우리의 가정, 여러분의 이웃, 거기가 현장이다. 지금 여기, 오늘 살아야 하는 인생을 밤낮 명분에 실어서 미래와 이상으로 끌고 가는 바람에 오늘을 못 사는 거다. 세계 복음화, 이게 뭐 오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오늘을 안 살게 된다. 언제 남북은 통일되나? 그건 통일부에 맡기고, 우리는 신자 노릇을 하라는거다. 오늘을 살라는거다.
■하루 종일 이 도전과 이 갈등과 이 시험 앞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근거와 증인과 약속과 우리 구주와 우리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 이 싸움을 이겨야 한다.
■화목하게 하는 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목, 그렇게 갈 것 없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일을 하라.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죽으셨다. 그 고난을 참으신다. 그 수치를 감수하셨다. 그 길을 가라. 그것이 기도이다.
"내 이름으로 내게 구하라 나를 믿으면 내가 하는 일을 너희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 그렇게 부름 받아 있다.
누구를 정죄하고 무엇을 잘라내어 내가 보전되는 길이 아니라, 나로 인하여 모두가 복을 받는 인생을 부여받고 있다. 그렇게 하라.
쉽지 않다. 이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히브리서 4장에서, '하늘에 있는 대제사장이 우리의 현실을 체휼 하신 분이다, 담대히 그 앞에 나아가 긍휼 자비 은혜를 구하라' 그렇게 말씀한다.
■쉽지 않다. 해야 된다. 이걸 하지 않으면 이 은혜를 구하는 이 일이 그저 다만 안심을 위한 기도에 불과하다.
적극적인 신자로서 살기 위하여 책임있게 살기 위하여 은혜를 구하라. `나는 중요한 존재다.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보냈다'를 잊지 않아야 이 책임을, 이 은혜를, 긍휼을 주 앞에 구할 수 있다.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게 하는 그런 기도를 하지 말라. 나 평안하고 생각할 필요없고 고민할 필요없는 인생을 주십시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나 우리 교회가 모두 공통되게 가장 상징적인 표식으로 가지는 십자가를 볼 자격이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열려 있고, 아니 매일 주어지고 있는 이 신자된 책임 명예 영광 기회를 살아내, 우리의 생애에 담겨지는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찬송이 어우러지는 그런 인생을 살아야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으로 《주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귀한 인생을 살게 하셨다.》 이를 감당해야 한다. 그 기쁨과 찬송을 우리의 입술로 고백하는 기적의 인생이 되어야 한다.
우리로 인하여 이 시대, 이 나라, 이 백성, 이 사회, 우리 가족이 복을 받게 해야 한다.
《주의 사랑을 입고 책임을 지고 명예와 영광의 인생을 살게 된 것을 기억하고 충성을 약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