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은 문제의 해법이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문제의 발견과 인식에 대단히 유용하다.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문제는 해답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역사는 의식이 없다. 마치 던져진 주사위처럼 굴러간다.
인생이 헛되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인생이 별거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인생은 눈 한 번 깜짝하면 끝난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은 이 진실을 외면한다. 애써 외면한다.
헛되다는 것을 어떻게든 감추어 자신의 욕망을 보상받으려고 한다.
하나님의 보편적 정의가 결실되지 않으면 인생은 허망하다. 방탕하고 무지하며 고집스럽다.
하나님의 보편적 정의가 고발하고 있다;
'너희가 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고서는 너희에게 아무런 가치도 자랑도 명예도 없다'
우리는 누군가를 비난하고 정죄하여 자기증명 하기에 바쁜 삶이 아닌,
하나님의 보편적 정의가 실현되는 복된 삶을 살도록 부름 받은 것이다.
헤밍웨이는 자기 소설을 통해 현실이 뭔지를 보여준다;
현실을 직시하라. 스스로 기만하지 마라.
네가 가진 기대와 소원이 아무리 낭만적이더라도 또 그것을 마무리 멋있게 치장한다고 해도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정신들 차려라. 쉽게 꿈꾸지 마라. 현실을 직시하라..
예수님은 문학이 고발하고 비극이 부르짖는, 인간의 실상이 끝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궁극적 운명과 지위는 너희가 소원하는 것보다 크다.'
신앙의 자리는 죽음에서부터 시작한다.
비극이 증언하는 인간의 실상을 신앙은 뚫고 넘어서는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환상일 뿐이라는 문학의 고발을 뛰어넘으신다.
철학은 문학이 가진 환상과 역사가 보여준 현실, 이 둘을 묶는다.
묶일 수 없는 둘을 묶어야 하는 철학의 주제는 살것인가 말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역사가 보여주는 현실을 보면 살 가치가 없어 보이지만,
문학의 환상을 근거로 하면 살 가치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늘 속고 속이는 우리의 현실에서 보듯,
내일은 좀 나으려나, 오늘보다 견디기 쉬우려나 하는 기대는 매번 좌절된다.
여기에 계속 속아 넘어가서는 안된다.
철학은 이 둘을 묶을 방법이 없다.
깊이 들어가 인류가 가진 모순과 해갈할 수 없는 갈증을 증언할 뿐이다.
재물을 가졌는데 왜 넉넉하지 못할까? 지위를 가졌는데 왜 넉넉하지 못할까?
재물을 가져도 행복하지 않고 권력을 누려도 행복하지 않다.
가져보면 알것이다. 이런 것들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영광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래도 한 번이라도 누려보고 나서 허무함을 맛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렇게 핑계 대지 말고 각자 자기의 삶을 살아내라.
우리의 지위와 조건과 현실은 서로 다르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차이가 없다.
그러니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 서라. 하나님은 모두가 충만하게 살 수 있는 삶을 허락하신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담긴 이 공정함과 성실함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인생은 원망과 불평만 하다가 끝이 난다.
각자 하나님 앞에 서라. 이 일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
대의, 이념, 사랑, 믿음 같은 추상적 관념으로 가지 말고 자기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살아가라.
나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있는가? 자신을 돌아보라. 속일 수 없다.
무엇이 우리를 공포로 몰아가며 무엇이 우리를 기만으로 내몰고 있는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8)
영생은 죽어서 얻는 것이 아니다. 지금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현재의 삶에서 영생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과 능력과 정의로 현실을 사는 것이다.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가? 원래 훌륭한 것은 어려운 자리에서 빛이 나는 법이다.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의 어려운 자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는 명예로운 기회이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보편적 정의가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깨달아 그분의 뜻을 따르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