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안심에 미혹된다. 모든 일에 안심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불안하고 걱정스럽고 조마조마하다.
이것이 현실이고 또한 정상이다. 만사가 괜찮을 수는 없다. 생각없이 사는 사람만 그럴 수 있다. 부부 생활이 내내 꿈결 같다고 한다면 오히려 비정상이다.
여기에 우리의 기대와 다른 성경의 관점이 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크게 다르다.
사람들은 사랑이 진심과 열정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건 사랑에 대한 오해이다. 상대방의 존재를 존중하는 일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의 나이, 지금의 사회, 또 지금 각자의 개인적 취향에 묶여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몇개 되지 않는 지금의 정황에 묶여 있다.
하나님이 그런 자리에 우리를 밀어 넣으셨다.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자리에 묶어 놓았다. 거기서 우리의 현실을 살아야 한다.
묶여서 살아가는 인생으로 하나님은 무얼 만드시는 걸까?
부부는 마치 이중창을 부르는 듀엣 같다. 독창은 이중창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혼자서는 화음을 만들지 못한다. 화음을 만들려면 둘이 다른 음을 내야 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것들이 굉장히 많다. 그러나 막연하고 답이 없으며, 또 우리를 곤란하게 하고 두렵게 하는 어떤 일도 하나님의 손 밖에 있는 것은 없다.
결정론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얼마나 큰 것인지,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예술적으로 개입하시는지에 대한 이해를 더 넓힐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정황에 묶여져 있는 것을 겁내지 마라.
우리는 이런 답답한 현실에 답하기 위해 진심, 각오 같은 비장한 단어들을 자꾸 동원한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 오히려 이런 현실이 하나님이 즐겨 일하시는 방법인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일을 이런 방법으로 이루길 좋아하신다고 한다. '아니, 그렇게 하시다니, 하나님은 가학적인 분인가?' 하고 묻고 만다면 생각이 짧은 것이다. 기독교를 우습게 아는 것이다
기독교가 죽음을 이기는 종교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결과, 승리 같은 단어로 쉽게 말할 것이 아니라, ●가장 무서운 죽음, 공포, 불안, 의심을 하나님이 어떻게 놀라운 영광으로 만들어 내시는가를 봐야 한다
성경에서 보고, 신앙의 선조들에게서 보고, 또 자기 자신에게서도 보아야 한다. 나 자신에게서 이 일이 확인되어야 한다
성경은 각 시대마다 '하나님이 지금 이렇게 일하고 계시다'라고 하는 선언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일을 하시기 위해 우리를 어떤 도전과 질문 앞에, 어떤 현실 앞에 세우는지 봐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로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담고, 심고, 완성하신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게 크게 원하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위협이 크고 심할수록 하나님의 일하심은 더 크게 나타날 것이다. 그 위협을 그대로 당하여 감수하는 것으로도 하나님의 일하심은 나타난다. 그것이 십자가이다
●어딘가에 붙들려 묶이는 것, 내가 선택하지
않았고 다 책임질 수도 없는 짐을 평생 지며
하고 싶은 것은 한번도 못해 보는 인생에 묶여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마음을 좀 놓으려고 기도했는데 기도하고 나면 더 불안하다. 하나님이 답을 안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쉽게 답을 하시지 않는다.
●믿음은 시간을 동반한다.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 갈 것인지를
말씀하시지 않고, 나는 거룩하다, 나는 다르다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신실하다, 나는 전능하다, 나는 자비롭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걱정 마라' 하고 말씀하신다.
사실 이보다 더 큰 약속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카드 한도액 따지듯 '내 행위가 선을 넘었나요, 안 넘었나요?'만 묻는다. '여기까지 해도 됩니까, 하지 말아야 됩니까?'만 관심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질문에 답하시지 않는다. '괜찮다. 카드 한번 더 써도 된다' 같은
답은 안 주신다. 대신 하나님은 '나는 네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끝나지 않는다' 하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묶인 자리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어려움 속에 일하신다.
세상은 어떻게 살든 죽음으로 끝난다. 헛된 것이다. 세상은 죽음 그 헛됨을 피할아무런 방도가 없기에 '잊고 살아라. 살아 있는 동안 해보고 싶은 거 더 해봐라' 하고 부추기면서 우리를 속인다.
우리는 세상에 아직 뭔가 남아 있다고 여길 때마다 세상에게 진다. 세상이 하라는 것을 하고 그것을 못하게 되면 하나님을 원망 한다.
세상의 위협 앞에서는 타협하고 세상이 주는 것을 못 받았다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걸 계속 반복하다가 결국 세상이 약속하는 것은 거짓말이요, 허망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날이 온다. 그때 우리는 운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은 너무나 놀랍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믿음을 요구하신다. 사랑과 믿음은 대등한 상대 끼리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굉장한 대접이다. 우리 마음 외에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네 마음을 다오. 나는 처음부터 너에게 나를 주었다, 예수를 주었다. 무엇이 겁나느냐?'
■인간은 언제 멋있는가? 인간성에 어떤 진전과 성숙이 있어야 한다.
어디서 그런 기회가 가장 많이 생길까? 부부 생활 같은 데서 그런 기회가 많이 생긴다.
누구도 못 꺾는 고집을 상대가 꺾는다. 혼자서는 절대 받을 수 없는 훈련을 받는다.
감수하게 되어 마침내 경지에 이른다. 부부 생할에서 서로를 감수할 수 있는 실력이 생긴다면, 세상 속에서는 진정으로 명예로운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묶인 인생을 살 수 있게 되고
그 속에서 명예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정황, 조건들이 던지는 도전에 답하는 참된 인생을 살 수 있다
살아 보면 정직해서는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정직은 그 자체로 명예이다.
설득을 하거나 변명을 하거나 공감을 자아내는 것은 부차적인 일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하나님은 아셔' 이런 말도 할 필요가 없다.
정직한 것, 진실한 것은 그 자체가 명예이다.
누구를 용서하는 것, 누구의 말을 들어 주는 것, 다 명예로운 일이다.
●누구를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누가 더 하나님의 형상에 접근하는가의 싸움이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이방인보다 나을 게 뭐가 있느냐? 이방인들도 그렇게 하지 않느냐? 하늘 아버지 운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굉장한 말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일이다. 그러니 현실 속에서 진실하고 정직해야 한다.
쉽게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놔 두시지 않는다. 우리는 진실하고 성실해서 혼비백산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일이 이루어져 간다.
우리에게 모든 짐을 떠넘긴, 우리를 괴롭힌 자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실패한 그 자리가 하나님이 은혜를 담는 자리가 될 것이다 .
'져도 된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다. '져도 된다'는 '무책임 해도 된다'와 다른 것이다. 우리가 낸 열심과 진심이 이 세상에서는 보상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진다. 그걸 알아야 된다.
●우리가 겪는 현실, 지금 우리 모든 조건은 하나님이 일을 이루시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지혜이고 능력이다.
우리가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자책만 할 일이 아니다. 그 상황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현장이다.
사랑이라는 말이 이제 얼마나 진부한가? 그러나 연애를 할 때 상대방 입술에서 나오는 그 말은 전혀 진부하지 않다.
우리의 조건, 우리의 구체적 현실, 우리의 상황,우리의 능력에서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믿습니다. 그래서 저, 감수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와야 한다. 그렇게 모세 이야기, 다윗 이야기에 각자의 이야기를 이어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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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도 일하신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바이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믿음을 가지고 충성해야 한다.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명예로 아는 우리의 존재가 이 세상과 이웃 앞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거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현실이고 또한 정상이다. 만사가 괜찮을 수는 없다. 생각없이 사는 사람만 그럴 수 있다. 부부 생활이 내내 꿈결 같다고 한다면 오히려 비정상이다.
여기에 우리의 기대와 다른 성경의 관점이 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크게 다르다.
사람들은 사랑이 진심과 열정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건 사랑에 대한 오해이다. 상대방의 존재를 존중하는 일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의 나이, 지금의 사회, 또 지금 각자의 개인적 취향에 묶여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몇개 되지 않는 지금의 정황에 묶여 있다.
하나님이 그런 자리에 우리를 밀어 넣으셨다.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자리에 묶어 놓았다. 거기서 우리의 현실을 살아야 한다.
묶여서 살아가는 인생으로 하나님은 무얼 만드시는 걸까?
부부는 마치 이중창을 부르는 듀엣 같다. 독창은 이중창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혼자서는 화음을 만들지 못한다. 화음을 만들려면 둘이 다른 음을 내야 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것들이 굉장히 많다. 그러나 막연하고 답이 없으며, 또 우리를 곤란하게 하고 두렵게 하는 어떤 일도 하나님의 손 밖에 있는 것은 없다.
결정론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얼마나 큰 것인지,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예술적으로 개입하시는지에 대한 이해를 더 넓힐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정황에 묶여져 있는 것을 겁내지 마라.
우리는 이런 답답한 현실에 답하기 위해 진심, 각오 같은 비장한 단어들을 자꾸 동원한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 오히려 이런 현실이 하나님이 즐겨 일하시는 방법인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일을 이런 방법으로 이루길 좋아하신다고 한다. '아니, 그렇게 하시다니, 하나님은 가학적인 분인가?' 하고 묻고 만다면 생각이 짧은 것이다. 기독교를 우습게 아는 것이다
기독교가 죽음을 이기는 종교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결과, 승리 같은 단어로 쉽게 말할 것이 아니라, ●가장 무서운 죽음, 공포, 불안, 의심을 하나님이 어떻게 놀라운 영광으로 만들어 내시는가를 봐야 한다
성경에서 보고, 신앙의 선조들에게서 보고, 또 자기 자신에게서도 보아야 한다. 나 자신에게서 이 일이 확인되어야 한다
성경은 각 시대마다 '하나님이 지금 이렇게 일하고 계시다'라고 하는 선언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일을 하시기 위해 우리를 어떤 도전과 질문 앞에, 어떤 현실 앞에 세우는지 봐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로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담고, 심고, 완성하신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게 크게 원하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위협이 크고 심할수록 하나님의 일하심은 더 크게 나타날 것이다. 그 위협을 그대로 당하여 감수하는 것으로도 하나님의 일하심은 나타난다. 그것이 십자가이다
●어딘가에 붙들려 묶이는 것, 내가 선택하지
않았고 다 책임질 수도 없는 짐을 평생 지며
하고 싶은 것은 한번도 못해 보는 인생에 묶여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마음을 좀 놓으려고 기도했는데 기도하고 나면 더 불안하다. 하나님이 답을 안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쉽게 답을 하시지 않는다.
●믿음은 시간을 동반한다.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 갈 것인지를
말씀하시지 않고, 나는 거룩하다, 나는 다르다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신실하다, 나는 전능하다, 나는 자비롭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걱정 마라' 하고 말씀하신다.
사실 이보다 더 큰 약속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카드 한도액 따지듯 '내 행위가 선을 넘었나요, 안 넘었나요?'만 묻는다. '여기까지 해도 됩니까, 하지 말아야 됩니까?'만 관심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질문에 답하시지 않는다. '괜찮다. 카드 한번 더 써도 된다' 같은
답은 안 주신다. 대신 하나님은 '나는 네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끝나지 않는다' 하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묶인 자리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어려움 속에 일하신다.
세상은 어떻게 살든 죽음으로 끝난다. 헛된 것이다. 세상은 죽음 그 헛됨을 피할아무런 방도가 없기에 '잊고 살아라. 살아 있는 동안 해보고 싶은 거 더 해봐라' 하고 부추기면서 우리를 속인다.
우리는 세상에 아직 뭔가 남아 있다고 여길 때마다 세상에게 진다. 세상이 하라는 것을 하고 그것을 못하게 되면 하나님을 원망 한다.
세상의 위협 앞에서는 타협하고 세상이 주는 것을 못 받았다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걸 계속 반복하다가 결국 세상이 약속하는 것은 거짓말이요, 허망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날이 온다. 그때 우리는 운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은 너무나 놀랍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믿음을 요구하신다. 사랑과 믿음은 대등한 상대 끼리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굉장한 대접이다. 우리 마음 외에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네 마음을 다오. 나는 처음부터 너에게 나를 주었다, 예수를 주었다. 무엇이 겁나느냐?'
■인간은 언제 멋있는가? 인간성에 어떤 진전과 성숙이 있어야 한다.
어디서 그런 기회가 가장 많이 생길까? 부부 생활 같은 데서 그런 기회가 많이 생긴다.
누구도 못 꺾는 고집을 상대가 꺾는다. 혼자서는 절대 받을 수 없는 훈련을 받는다.
감수하게 되어 마침내 경지에 이른다. 부부 생할에서 서로를 감수할 수 있는 실력이 생긴다면, 세상 속에서는 진정으로 명예로운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묶인 인생을 살 수 있게 되고
그 속에서 명예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정황, 조건들이 던지는 도전에 답하는 참된 인생을 살 수 있다
살아 보면 정직해서는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정직은 그 자체로 명예이다.
설득을 하거나 변명을 하거나 공감을 자아내는 것은 부차적인 일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하나님은 아셔' 이런 말도 할 필요가 없다.
정직한 것, 진실한 것은 그 자체가 명예이다.
누구를 용서하는 것, 누구의 말을 들어 주는 것, 다 명예로운 일이다.
●누구를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누가 더 하나님의 형상에 접근하는가의 싸움이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이방인보다 나을 게 뭐가 있느냐? 이방인들도 그렇게 하지 않느냐? 하늘 아버지 운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굉장한 말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일이다. 그러니 현실 속에서 진실하고 정직해야 한다.
쉽게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놔 두시지 않는다. 우리는 진실하고 성실해서 혼비백산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일이 이루어져 간다.
우리에게 모든 짐을 떠넘긴, 우리를 괴롭힌 자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실패한 그 자리가 하나님이 은혜를 담는 자리가 될 것이다 .
'져도 된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다. '져도 된다'는 '무책임 해도 된다'와 다른 것이다. 우리가 낸 열심과 진심이 이 세상에서는 보상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진다. 그걸 알아야 된다.
●우리가 겪는 현실, 지금 우리 모든 조건은 하나님이 일을 이루시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지혜이고 능력이다.
우리가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자책만 할 일이 아니다. 그 상황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현장이다.
사랑이라는 말이 이제 얼마나 진부한가? 그러나 연애를 할 때 상대방 입술에서 나오는 그 말은 전혀 진부하지 않다.
우리의 조건, 우리의 구체적 현실, 우리의 상황,우리의 능력에서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믿습니다. 그래서 저, 감수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와야 한다. 그렇게 모세 이야기, 다윗 이야기에 각자의 이야기를 이어 가야 한다.
/////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도 일하신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바이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믿음을 가지고 충성해야 한다.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명예로 아는 우리의 존재가 이 세상과 이웃 앞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거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