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내가 믿는게 무언가를 인격 내면에만 가질게 아니라, 무엇을 가졌길래 이런 정황 속에선 어떤 식으로, 또다른 케이스에선 어떻게, 판단 분별 응대 반응하는가?라고 묻게 하라

nazunzaro 2020. 6. 22. 07:13
신앙이 좋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이 좋은 조건으로 인도하실거다 라는 생각은 꿈도 꾸지마라. 그런 건 없다.

이, 교회는, 신자들은 연약하기 짝이 없다. 어떻게 될지 모르고 어려운 일이 당연히 벌어질거다. 내가 가는 길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성령이 명하신다, 그러는 것이다.
교회는 또는 개인 신자는 다 구별된 존재지만, 세상 속에 던져져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된다. 말하자면 이렇게 선택해서 밀봉하여 어디 저장해 놓는 것이 아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냉동실에 무슨 숙성실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름을 받은 그 현실, 그 환경, 그 정황 거기에서 주께서 부르시는 날까지 거기서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해야 된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여기서 산 제물은 살아가는 제물이다. 살았냐 죽었냐, 싱싱하냐 부패했느냐가 아니라, 삶으로 드리는 제사. 삶으로..

삶이란 뭐냐? 신앙적인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생에게 요구된 실존을 사는 것. 지지고 볶는 것, 주어진 정황에 책임을 다하는 것.

주어진 정황이 뭐냐? 누구의 아내이거나 누구의 남편이거나 누구의 자식이거나 누구의 부모이며, 누구의 이웃이며 어느 나라에 속하며, 그 사회에 속해있는 그 그 책임을 살아가며 살아가는 것으로, 거기에 그 컨텍스트 속에서 텍스트를 증언을 해야 된다. 그 정황 속에서 이 우리가 가진 기독교 신앙의 본문을 구체적으로 구현해야 된다.

※ 말로가 아니요, 이상이 아니요, 소원이 아니요, 고함이 아니라,
그 사람이 동일한 정황과 동일한 요구와 짐 속에서 그것을, 우리가 가진 기독교 신앙이라는 내용으로, 한 인생을, 한 존재를, 어떻게 그 도전에 답하는가를 보이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실천이며 텍스트가 되는 거다. 본문이 되는 거다.

그것을 우리가 우리 삶 속에 어느 날에나 요구되는 도전과 위협과 시험과 그 한계 속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답하고 살아내지 못하면, 우리는 현실에 있지 않고 도망간 자가 된다.

바울이 교회를 놓고 가듯이, 그리고 자기에게 부른 길로 뛰어들어 가듯이, 교회와 모든 신자들이 그 시대에 요구되는 모든 도전 앞에, 현실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잠시도 도망가거나 잊거나 타협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이것이 왜 필요하나?
예수 믿고 하나님이 우리들을 불러다가 어디, 어디 비밀한 곳에 따로 격리시키고 보존하고 지켜준다면, 2절은 필요없는 얘기다.
2절의 필요는, 우리가 어디에 놓여져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가 너무나 분명한 말씀인 것이다.
※ 우리가 사는 자리. 우리 모든 신자들이 늘 거부하는 그 자리 거기서 오늘 너에게 주어진 도전,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이 문제를 끌어 안을래? 세상적으로 해결할래? 언제나 거기에 서있는 거다.

※ 믿고 감격이 있고, 열정이 생기고 항복이 생겨 이제 소원하게 된, 세상이 아니고 영원한 나라, 믿음과 의와 거룩과 승리와 고결함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듬뿍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놀라는 것, 문득 어느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그자리 그 모습 그대로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지 않는가? 나는 잘못 믿었을까? 그 동안에 가졌던 감동들은 다 거짓말 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의 믿음에 감동을 가졌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한 정황의 반전은 없다. 심지어 믿기로 결심한 나마저도 옛날과 달라진 것이 없다.
딱 하나만 달라졌다. 옛날엔 이견없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세상과 죄밖엔 몰랐는데 하나님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갈등이 생긴 것만 달라졌다.
※ 이렇게 살면 안된다를 아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 나를 보고 놀라는 나. 그것만 현실이다.

※ 기독교라는 신앙으로 정황을 바꾸는 일은 없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정황들은 우리가 소원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잘못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6장 이 중요한 말씀에 나온 것과 같다.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무슨 얘기를 하는거냐?
오늘 직면한 문제에 답하라. 해결하라가 아니라 오늘 너희에게 주어진 도전,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 문제를 끌어 안을래, 세상적으로 해결할래, 언제나 거기에 서 있는거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해라, 내일 일은 내일이 걱정할 것이다. 내일은 누가 쥐고 있나? 하나님이 쥐고 있다.

※ 오늘 하루 우리에게 닥친 모든 이들은 불행해서 생긴 일도 아니고, 잘못해서 생긴 일도 아니고, 우연히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창조와 부활의 권능으로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이다.
왜 하필 이런 일들을 이런 고난과 억울함과 원치 않는 일들을 주시는가? 거기서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드실 무슨 일이 있단다.

우리는 다 시험교육을 시험으로 받았다. 그래서 경쟁하고 당락을 결정해야되는게 너무 많았기 때문에, 무엇을 알게 하고 인성을 키우는 것보다 아이 점수 매기는 일에 주력해서, 한국사람은 모두가 열심이니까, 이게 석차가 구별 안되서 결국 문제가 꼬고 꼬는 문제가 나왔다. 함정이라는 게 있어서 뻔한 질문에 뻔한 답은 의심을 하게 되어있다. 뻔한 문제에 뻔한 답은 의심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의심하고 산다.
그 의심이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는 당연히 이런 의심으로 되어있다.
내가 잘하면 정황이 바뀔 것이다, 내가 잘하면 보상이 있을 것이다, 내가 잘하면 형통할 것이다, 이런 우리의 생각이 그렇지 않은 현실을 만나서 하나님이 그랬을 리가 없고 이것은 뭔가 사단의 함정이다..?

※ 아니다. 하나님이 그리하시는 일이다.여러분의 억울한 일들을 말이다.
어떻게 그런 말을 단정할 수 있는가? 예수님이 그 길을 걸었으니까. 예수님이 바로 정확히 그 길을 걸었으니까.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모든 억울하고 모든 고통스러운, 모두가 외면하고 모두가 오해한 길을 말없이 걸으사,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다.

※그러니 우리는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이 세상은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체화하는 사실은 장소이다.
※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라는 하나의 인격과 내면 속에서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런 정황 속에서는 어떤 식으로 응답을 하며, 또 다른 케이스에서는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우리의 판단, 우리의 응대, 우리의 반응을 가지고,
무엇을 가졌길래 이런 분별과 이런 결정과 이런 응대를 하는가,라고 묻게 하라는 말이다.

※말로 하는거야 쉽다. 말로 하는 것 말고, 우리 자신의 안위와 명예와 안심이 담긴 문제들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큰 원칙, 즉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 거룩한 요구에 대하여 순종하여,
우리에게 준 도전들에 구체적으로 반응하는 실현, 구현을 우리의 인생으로 알고 있는가, 실천하고 있는가, 이렇게 묻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스스로 우리가 다 알고 있다고 믿고, 이만하면 우리의 신앙이라고 믿었던 것이 아직 다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세상은 다만 우리가 누구라는 걸 증언해야 되고 구체화 해야 되는 책임있는 장일 뿐만 아니라, 그 도전과 시험은 실제로 우리를 키운다.

모두가 절대 따라갈 수 없는 것, 나이. 나이란 뭐냐? 더 많은 경우를 당하는 것이다.
그 더 많은 경우가 한 사람을 깊이있게 만든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 것이다.
나이가 들고도 말이 많은 사람은 없다. 나이가 들면 대부분 입을 다문다. 왜? 그것은 정답이 없다 하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정답이 없다는 건 뭐냐?
※본인이 극복하지 않고 정답이라는 지식이나 정보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를 알게되는 거다.
옆에서 충고하고 뭐라고 그러는 거는 필요없이, 본인이 극복할 시간이 필요한 줄 알기에, 나이가 들면 침묵한다.
비난하는 침묵이 아니라, 기다린다. 기다려 준다.

※나이가 든 사람의 가치가 뭐냐? 기다릴 줄 아는 사람으로의 존재다. 나무가 기다려주겠나? 저 돌이 생각이 있겠나? 한 인격이 기다려주는 거다.
아무 소망도 없고 아무 능력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같은, 나이든 구겨진 얼굴이 말없이 따뜻이 쳐다보고 있는 것보다 더 큰 격려와 더큰 힘은 없다.

그렇게 성경이 요구하고 있다. 에베소서 4장에 가보라.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것은 이 명령을 받는 자가 어디에 든 건가? 자기의 욕심에 따라 사는 자들, 허망한 자들, 무지한 자들과 함께 있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무엇까지도 힘든 현실이냐 하면, 옛사람의 구습을 따르는 습관 속에 아직도 우리가 놓여 있다. 거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배운자로서, 우리가 가진 게 무엇인가, 부름을 받은 게 무엇인가를 싸워 내 실현해야 되는 것이다.

기독교라는 실험이 하나님의 설명과 성경의 요구에 의하면, 세상과 문화 속에 대담하게 뛰어들어가는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예수께서 오신 것처럼, 모두의 비난과 관심 속에 죽으신 것처럼,
그렇게 숨어있지 않고 도망가 있지 않고 세상을 놔두고 다른 곳에 우리를 이주시키려고 하지 않고,
이 세상에 뛰어들어와 ' 하나님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라고
정면으로 뛰어들어오신 것이 기독교의 신앙이요, 구원이요, 믿음인 것이다.
교회와 개인이, 세상과 현실 속에 하나님이 힘차게 우리를 붙잡아 밀어넣었다는 거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늘 고통을 면하고 자존심을 세우는 것 이외에는 기독교 신앙을 갖다 쓸데가 없다. 살아 내지를 못한다.
살면서 자꾸 도망가고 도망가서 기도원 가고.. 앗 그 또 기도원에서 항의할텐데.. 가야한다. 특별한 기도와 시간이 필요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보충하고 성찰하고 새 힘을 가지게 위해서 각오해서 얼마든지 가야지.
가서 거기서 죽지말고 현실로 나오셔야지. 자기 자리로 돌아오기 위해서 기도하러 가는거다.
자기 자리를 살기 위하여 성경을 봐야지.
직장에 나가서 첫시간에 성경부터 펴서 읽지말고 첫시간에 손부터 씻고 팔소매를 걷어부치고 일을 해야지. 알아 듣나?
이걸로 때우지 말고, 기도하고 성경 본 것이 때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급유를 받아 달려야 된다. 걸어가야 되고 살아야 되는 것이다.
살아 내라. 우리의 자리는 하나님이 주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세운, 그리고 그가 우리를 복주시겠다는 모든 약속을 세우시는
구체적인 자리이다. 구체적인 조건이다. 구체적인 환경이다. 겁내지 마라.

고린도후서 4장에 가면, 그러니까 이런 성경의 기록들이 있다.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하려 함이라

이 보배는 그리스도를 아는 복음, 믿음이다. 질그릇을 가졌다는 건 우리의 육체를 가졌다는 뜻이기도 하고, 우리의 보잘 없는 삶에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진 피터슨은 후자로 번역을 한다. 우리의 평범한 삶에 이 보배를 가지고 있다. 우리 몸에 가지고 있다 해도 맞다. 보잘 것 없는 육체에 이 보배를 담고 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해할 거다.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 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이, 사람이 이중적으로 산다.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죽음에 넘겨진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정황이 어디인가?
예수를 죽인 그 세상이다. 그러니까 우리를 죽인다. 그리고 우리는 슈퍼맨으로 살지를 않는다. 초월적인 힘을 갖고 있지 않다. 믿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체찍에 맞으시고 죽으신 것같이 방불하게 우리도 죽음에 넘겨진다.

※ 그러나 그 속에 우리는 다른 것을 갖고 있는 자이다. 우리는 본문이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않고 어딜 버린 바되어도 거꾸러뜨림을 당하지 않고, 죽음을 짊어지고 있으나 예수의 생명이 몸에 나타나고 죽음에 넘겨지지만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는 존재이다. 사망 속에 있지만 생명을 전하고 있다.

이 이중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된다. 꿈꾸지 마라. 예수를 믿었더니 만사형통하고 말만 하면 열매를 맺고, 그건 필요하면 하나님이 언제든지 하실 수 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많은 표적을 보이셨는데, 세상과 정황을 바꾸기 위하여 기적을 동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표적을 보이신다.
당신이 무엇을 위해서 왔고, 무엇을 가지고 왔는가를 보이기 위해서 사용했지, 당신의 생애를 죽음을 피하는 것으로 그걸 쓰지 않아서, 나중에 그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이 뭐라고 희롱을 하나? 네가 다른 사람은 구원 하면서 너 자신은 왜 구원하지 못하느냐,가 중요한 희롱이 되었다. 기억하고 살아야 된다.

고린도후서 6장에는 동일한 내용을 이렇게 쓰고있다.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가지고 있으나)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어느 한 것으로 어느 한 것을 압도할려고 그러지 마라. 우리는 정황에 질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 있는 본문으로 이 정황을 장악하고 조작하고 부릴려고 하지 마세요. 왜? 그 정황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도전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야콥 부르크하르트라는 사람의 책에 이런 이념과 이상 또는 잘못된 신앙에 심취해서 현실과 삶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경고하는 중요한 표현이 있다.
- 인간의 삶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에 익숙해진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가혹한 지배를 통해 자기들의 열정을 통합하려는 승리자의 오만만 난무한다 -

기독교도 그럴 수 있다.
쉽다. 말이. "믿어! 기도해! 너 왜 인상쓰고 다녀? 하나님이 다 해 주신다 그랬잖아!"
누군 모르나? 누군 모르나. 그런데 현실이 그것 감상하고 즐길 틈이 없거든. 아는데 정신이 없다 넋이 빠진 사람 같다.
남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인생이 뭔지를 알라고.
예수를 믿는 게 뭔지,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고 어떻게 끌고 가는지를 알라.
남한테 오해받는 거 억울해하지 말고 늠름하게 살라.

(기도)
주께서 그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우리의 고난과 우리의 억울한 길을 걷겠습니다.
믿음 주시옵소서. 승리하는 그 날까지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다시 보는 사도행전 30 / 행 20:17-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