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ㅅㅁ8_하나님이 왜 그 긴 시간, 우리가 자유를 잘못 선택해 죄에 빠지고, 사망을 초래하고, 비겁해지고 부끄러워지는 그 못난 인생을 주실까? 배우라는 것이다

nazunzaro 2020. 6. 9. 06:30
성경을 읽을 때 이것이 역사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역사적이라는 것은, 우리 개인 인생에서 보면 나이가 드는 것과 같이 `너다섯 살 때는 그럴 수 있지만 지금 스무 살이 되어서도 그러면 안된다`라고 말하는 것같이,
출애굽 후 광야 중에서 하필 가데스바냐에서 만큼은 하나님이, 말하자면, 앞으로 이렇게 길을 내시고 에스컬레이트를 태우시던기 무슨 엘리베이트에 태워가시든기 자동차를 태우시든가 안하고, 여기서는 책임을 묻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호수아가 데리고 들어간 백성들이 사사기에서 실패하는 긴 역사를 보게되는데, 그렇게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에 데려가는 것은 겉으로 보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 아닌 것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도착했지만, 계속 우상을 섬기죠. 그러니 하나님이 지금 이 가데스바냐의 사건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그들이 종되었던 애굽에서 해방을 얻고 넉넉한 삶을 살게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구원이 아니라, 구원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걸맞는 책임있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데에 핵심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약 내내 애스라엘 백성은 여러번 실패하죠. 사사기에서도 실패하고 사울 왕 때도 실패하고 솔로몬 이후에 남북왕조로 갈린 다음에는 각 왕마다 바알을 섬겨서 하나님 앞에 혼이 나고, 결국 북왕국은 앗수르에 멸망 당하고, 남왕국은 바벨론에 멸망 당합니다.

이런 모든 실패와 실수와 그 징벌들을 그저 반복되는 불순종이라고 시간적 배경, 정황적 배경없이 우리가 규칙같이 신앙의 아떤 방법같이 갖고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 인생에서도 생각해보면 우리가 은혜를 받은 때가 있고, 우리가 수치스럽고 미련하게 논 때가 있고, 마음에 상처가 있고 감격이 있고가 지나가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게 된 데에는 분명히 어떤 감격과 확인이 있었는데, 그게 평생 가나요?
평생 안갑니다.`그때는 그렇게 감격스러웠는데 지금은 왜 이럴까?` 그 감격이 평생을 먹여살리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고 더 나아가야 됩니다.

●우리 과거의 실패는 실패가 우리를 망치거나 우리를 끝장내지 않고, 그 실패 후를 또 살게 해서 평생 마음에 그 자책과 회한을 가지고 사는 것이 그냥 옛날을 지워버렸으면 좋겠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너무 가슴이 아파서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시간 속에서 다루고 계시다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자살이 큰 죄인 것이 이 때문이죠.
`네가 과거에 잘못한 것이 오늘 너한테 그때보다 잘 난 사람이 되게 살아라` 그렇게 요구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 가데스바냐에서 못 들어간 이 사건은 우리 히브리서 할 때 제가 중점적으로 다루었다시피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교훈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믿음은 이제 책임으로 드러납니다. 애굽을 나오는 열 가지 재앙으로 인한 구원과 홍해를 가르고 광야에서의 생활들은 다 은혜에 속한다면, 가데스바냐에서 저들의 실패가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은혜는 우리에게 책임을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책임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목적이죠.
우리는 히브리서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오늘. 오늘 순종해라. 오늘. 오늘은 모든 사람에게 오늘입니다.

`너희는 이 선조들의 실패를 기억하고 너희는 이 선조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마라`
그렇게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이죠.

이 선조들은 더 영광된 자리에 가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구원은 얻었으나 그저 방랑객으로 살다가 끝났습니다. 그 선조를 그 유산을 그 역사를 갖고있는 후손으로서는 `우리는 그러지 말자` 역사에서 배워야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일하시며 우리 선조들에게 함께 하신 것같이 하시되, 역사적으로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 선조들이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은 것과 꾸중받은 것 모두가 우리에게 역할을 해야 된다. 우리에게 유익이 되어야 한다`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책임을 물으려면 선택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택해놓고 책임을 물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늘 지키셨으니까 책임을 물을 것도 없지만,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시려면 우리에게 선택권을 줘야 합니다. 선택할 권리를 가지려면 자유를 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허락한 자유가 어떻게 잘못 쓰였는가를 실컷 볼 틈이 있습니다. 아담부터 그랬죠. 아담부터 그 자유를 잘못 사용했고, 인류가 잘못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 긴 사간, 우리가 자유를 잘못 선택하여 우리가 죄에 빠지고, 사망을 초래하고, 비겁해지고 부끄러워지는 그 못난 인생을 주실까요? 배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 하나님을 향한 적극적인 반응, 믿음과 사랑의 반응을 하는 그런 믿음으로 충만한 실력의 자리에 가도록 역사를 인생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왜 밤낮 못난 짓만 하고 살았을까? 나는 하나님께 소망이 있고 열심이 있으나 아무것도 가진 게 없구나 그렇게 자신을 돌아보지 말고,

겁이 나서 했던 신앙, 보상을 바라고 했던 신앙, 마지못해 했던 신앙에서,
적극적인 마음을 가지고, 내 조건 내 한계 내가 가진 것, 내가 속한 이 환경과 조건 속에서 난 하나님의 사람 하겠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는 것. 의와 진리와 평강, 섬기는 것, 용서하는 것, 기도하는 것, 이것은 아무 것으로도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복입니다. 업적을 쌓으라고 얘기하지 않고.

`너희에게 일어난 네 인생의 모든 과거가 지금 너를 하나님에 대하여 더 깊이 이해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목적하시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를 알기를 바란다.

●다만 보상을 위해서 기도하거나 다만 회개하는 걸 반복하지 말고, 철이 들어라.
하나님이 네게 준 자유, 네가 겪게 된 과거를 동원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광을 이제는 네가 붙잡고 그 책임있는 남은 여생을 살겠다, 그렇게 네 오늘을 살아다오. 웃고 감사하고 인내하고 용서하고 하나님 살아계시다고 그렇게 네 몸안에 담아내는 그런 하루하루가 돼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입니다.

`저 이스라엘은 왜 밤낮 틀려? 왜 밤낮 불순종이야?` 이렇게 넘어갈 일이 아니고,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역사들을 유산으로 받아 유익으로 구하고 더 나은 신앙의 높은 경지에 깊은 자리에 들어가는
우리는 지금의 나이의 자리에서야 갖게 되는 분별과 통찰과 아니, 그런 멋있는 말할 것 없이, 기쁨과 감사와 찬송과 인내와 순종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누구도 막을 수도 없고 더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얘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게 묻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보다 한걸음 더 나간 대답을 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바치나이다,
그렇게 고백하는 우리의 말년, 귀한 결실의 연배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소망회 8/ 민수기 14: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