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슬픔을 예레미야는 고스란히 가지게 되어서 눈물의 선지자가 된다.
예 9장 1절에 있는 바와 같이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이렇게 된다.
● 하나님의 분노에 하나님의 슬픔에 감히 일체화하는 공감 속에 있다
보통 선지자라고 하면 범죄한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 서서 저들의 죄를 공격하고 지적하고 심판을 경고하는 하나님의 큰 분노를 대변하는자로, 그래서 종종 자기를 그 분노의 대상인, 심판의 대상인 백성들과는 차별화 하는 그런 이해가 교회사 내내 있다.
그러니까, `나는 아니다! 나는 알고 있다, 너희는 모르고 있다, 너희는 벌받아 마땅하다, 내 말을 들어라, 내 말 안듣는 사람들은 다 죄인이다` 이렇게 구별하는 것이 선지자인 줄 알고 있는데,
●예레미야는 그 하나님의 분노,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동일한 죄를 지목하면서 하나님의 분노가 큰 공포로 들어나지 않고 눈물로 공감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가 궁극적으로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예레미야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예레미야는 이 꾸중을 받아야 하는 이스라엘이 회심할 실력이 없다는 현실을 공감한다.
우리가 몰라서 죄를 짓는 게 아니라, 알아도 짓고 잘하려고 해도 못나게 굴 수 있다는 것을 예레미야가 자신의 전 생애 전체를 걸쳐서 이 남왕국의 멸국을 지켜보면서 말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저들은 왜곡시켜서 복을 받기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복의 주인이라는 것을 놓치는 일에 대하여, 그 미련함과 거짓됨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자기가 그들 중에 하나로서 일체감을 가지고 이 눈물을 쏟아낸다.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이중고를 겪는 셈이다.
그런데 하나 더 간다.
우리 보통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신이 예수를 믿고 가진 기쁨과 소망 때문에 믿지 않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 그 혈육들에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더 가는 게 있다.
● 진리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이 복을 받기를 거절하는 죄인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무력감도 예레미야는 동시에 겪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결국 이 나라를 내치셔서 예레미아 8장 18절 이하에, 하나님이 좌정하고 계시는 시온 성전이 무너지고 하나님이 지명하여 영원토록 약속하신 다윗의 왕권이 무너지고, 시드기야가 두 눈이 뽑히고 잡혀가는 일을 보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예레미야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뭐 우리식으로 얘기하자면, 하나님을 달랠 수도 없고, 이스라엘 백성을 회심시킬 수도 없고, 그 사이에서 하나님의 분노도 이해가 되고, 이 못난 백성들에 대해서도 본인이 그 중의 하나라는 사실, 이들은 다 하나님을 몰랐어도 나는 하나님 편을 든다, 이렇게 물러날 수 없는, 구별할 수 없는 자신의 정체성, 책임, 또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어떤 공감된 그런 마음이 예레미야를 다만 울 수 밖에 없는 선지자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심은 너무 커서, 이사야 1장 같은 데서 봤다시피, 이사야가 그의 선지직을 수행할 때도 남왕국의 말기였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경고와 이스라엘 백성의 완악함 사이에서 이사야도 고통받았던 선지자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사야를 통하여 울부짖으셨다;
'하늘이여 들어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이렇게 된다. '내가 내 백성을 지었건만 저들은 나를 찾기를 거절한다 소는 그 외양간을 안다 그 구유를 안다 저들은 나를 모른다' 이렇게 이사야가 그 첫장을 열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마침내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고 알고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우리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이다.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이렇게 외쳐도 아무도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은 다만 우리의 현실적인 요구의 수준, 병이 낫고, 먹을 것이 풍성해지고, 하는 일들이 전부이고, 예수께서 아버지의 그 크신 뜻, 아버지 아들이라는 이런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지위, 우리에게 주신 창조의 놀라운 영광, 이런 것들을 회복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 아무도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충돌, 이 긴장과 갈등 속을 걸어 둘을 묶어 내신자. 예수께서 이 일을 하셨다.
그러나 이 일을 하기 전에, 이토록 오랜 기간동안 구약 역사 내내 그 이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갈등을, 이 긴장을, 이 화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욕심의 간극을 실컷 보여주셨다
●그러니까 이런 일들이 우리가 이제 와서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욕심에 대하여 원천봉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나름 대로의 소원과 욕심과 방법과 꾀를 내는 모든 것을 확인할 시간을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엎으시되, 우리에게 비교하고 생각하고 할 시간을 준다, 그게 모든 선지서이다.
구약을 읽어보면 그것이 역사라는 걸 사람들이 모르고 읽는다. 역사인 줄 모르고 읽는다는 건 이런 뜻이다; '이스라엘은 왜 광야에서도 말을 안듣고, 사사기 때도 그랬고, 열왕기 때도 왕이나 된 주제에 밤낮 바알이나 섬기고 있다가 포로가 되고나서 그렇게 기적적으로 돌아왔는데, 왜 또 예수는 안 믿어?'
●이렇게 우리는 모든 일들을 믿고 안믿고, 잘하고 못하고,라는 시간성이 없는, 언제나 잘잘못이라는 시간을 뛰어넘는, 초시간적 선택으로 책임으로만 몰고 간다.
이제 시간을 갖고 생각을 해 보자.
아브라함의 생애, 이삭의 생애, 야곱의 생애, 그리고 출애굽이라는 사건을 두고, 언제나 이스라엘을 꾸중한다.
`나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거기에 바로 뭐가 있나?
하나님의 계획과 일하심과 인간이 그 생각을 따라 잡을 수 없어서 가졌던 거절 의심 갈등 막막함 배신같은 것들이 어우러져 있잖은가.
●축적 된다. 누적이 된다. 아브라함도 충분하게 아브라함이 되는데 그의 생애가 다 걸리고, 야곱도 자기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데 전생애가 걸리고 그 와중에 별의별 선택을 다 해보고, 호세아식으로 얘기를 하면, 그는 얍복나루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붙잡고 울며 간구했다는 거다.
왜 울었나? 우는 게 뭔가?
●해결 할 수 없는 고통, 해결 할 수 없는 고난, 자신이 원하는 어떤 해결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자신의 무능과 현실, 하나님께 기대한 것이 보상받지 못하는 억울함, 이런 것들이 다 눈물이다. 그 얼울함이 내가 뭘 잘못해서, 하나님이 왜 나한테 각박하셔서, 라는 부분이 많이 있지만 본인은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기를 원하는가? 어떤 방법으로 주시려고 하는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시려고 하는가? 하는 것들이 이런 역사 속에서 그때 동일한 실패가 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가? 그 실패가 다음 세대에는 무슨 유산을 교훈을 남겼는가?' 이렇게 구약이 읽혀야, 예수께서 오셔서 예수가 하신 일이 역사 속에서 반복된 경험으로 인하여, 그리고 우리에게도 우리가 예수를 믿기전에 얼마든지 우리 맘대로 살았던, 여기 예레미아에도 늘 나오는 것같이,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찾고 나를 믿는다 하면서 나 없는 자들이 하는 것보다 더 심하게 구냐? 내 이름을 들먹여서 왜 세상사람들이 하는 대로 형제끼리 속이고, 잘한다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 외에 너희가 할 줄 아는게 뭐가 있냐?' 라는 지적을 받는 것이다.
●우리 밤낮 얘기하는 평안하고 형통하고 건강하고 배부르고 아쉬울 것 없는 것, 이것들로 하나님이 극도로 분노하신다.
내가 너희를 다만 이 아무 고통이 없고 아무 욕심이 없는 영광도 가치도 의미도 보람도 명예도 위대함도 다 내버리고 이것 하나면 돼요 이런 정도로 만족할 것 같으냐?
그게 북왕조가 앗수르에 멸망하는 이유요, 남왕조가 바벨론에 망하는 이유다.
그러니까 `앗수르에 팔릴 것입니다` 뭐라고 얘기하면서? `너희는 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냐? 왜?
애굽은 뭐였나? 타협하고 살 수 있는 곳이었다. 애굽이 하라는 것만 다하면 애굽은 정치 사회 교육 국방 경제를 다 책임져 줬다.
<쇼생크 탈출>에서 가석방 받은 레드가 뭘 두려워 했나? 책임지고 사는 걸 두려워 했다.
왜 감옥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하더라고? 거긴 모든 것이 안전하다. 도둑놈들 끼리 모여있어서 도둑질 하지도 못하고 강도끼리 모여있어서 서로 찌르지도 못하고 자유만 반납하면 거기는 가장 안전한 곳이다. 때가 되면 먹을 것도 주고 잠자리도 있고 누가 와서 소란을 피우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건 인간의 가치가 실현될 수 없는 곳이다. 여기가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진노하시는 부분이다.
그래서 북왕조를 앗수르에 내어주고, 남왕조를 바벨론에 내어주는 이유가 뭐라고?
사람답게 하나님이 창조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한 게 무엇인지, 너희가 부러워 하는 권력이 무엇인지,
앗수르에 가서 앗수르라는 나라를 보고, 바벨론에 가서 바벨론이라는 제국을 보고 배운다.
●그들이 섬기는 신이 기껏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그들이 얻은 바 권력이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
공포 사망 불안 의심 시샘 못난 것 외에 아무 것도 만들 여지가 없다. 실컷 보고 오게 된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의 타협에 함께 타협할 수 없다 너희와 싸우기 싫어서 미운 소리할 수 없어서 나 타협할 수 없다 나는 내가 만든 내가 목적한 너희를 만들고야 말겠다 내 눈에 피눈물이 나는 한이 있어도 나는 너와 네 소원과 네 잘못을 놔두고 그냥 웃을 수는 없다'
이게 역사이다. 역사.
기독교 역사까지 들먹일 것없이 서구 문명이 계몽주의로 마음껏 환상을 펼치던 때에 찾아온 것이 제일차세계대전이고, 제이차 대전이다
무식해서 죄를 지었다, 배고파서 죄를 지었다, 과학문명이 발달하여 이제는 배고플 이유도 없고, 싸울만큼 무지몽매할 필요없을때 교육, 경제, 과학, 의료 이런 것들이 천국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느닷없이 1914년 일차세계대전, 1941년 이차세계대전이 발발, 어쩌면 삼십년 만에 두번이나 세계대전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역사가 증언하는 것이다
''너희 스스로 일컷기를 '우리는 천국을 만들 수 없다 이것이 천국이다 이정도면 됐다' 라고 사는 것을 하나님이 두고보지 않으신다 너희는 이것보다 더 고급한, 더 영원한 더 영광된 약속 속에 만들어진 내 백성이다'' 세계에 대고 우주에 대고 역사에 대고 얘기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선지자의 눈물을 신앙인이 되면 다 가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피눈물을 가지지 않으면 신자된 인생을 걸을 수가 없고, 세상이 주는 조건과 환경에 의해서 일희일비하게 된다
우리 잘 안다. 눈물은 협박일 수 있다. 울면 진다. 운다는 건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난 최후의 공갈협박이 우는 거다. 울면 견딜 수가 없다, 우는 데 외면할 순 없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렇게 울지 않는다 예레미야 눈물의, 하나님의 눈물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거다; '이 역사에 일어나는, 너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무관심해진 너의 마음이여 깨어다오, 그 마음을 깨뜨리러 내가 왔노라`라는 것이다.
●인생에서 제일 무서운게 뭔데? 체념이다. 체념. 신앙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뭔데? 체념이다 타협이다 `이 정도로 됐어`
●우리 땅끝까지 가서 시작 안해도 된다
그러나 자기 인생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긴 역사와 신약시대의 기독교 역사와 아니 일반역사와 문학과 철학을 다 동원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전하시고 묻는 질문이라는 것을 깨우치지 않으면 우리는 늘 진다. 하루를, 예수가 대신 죽어 하나님의 영광과 영생으로 약속한 인생이라는 걸 놓치게 된다.
●□굉장하다. 나가서 큰소리 치라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소중히 살아야 된다.
하루가 다만 시간이 흘러가 버리는 것이 되지 않고, 문득문득 생각해야 된다. '오늘은 잘 살았는가? 신자 다웠는가? 앞으로 나가고 있는가?'
그래서 하나님이 울고 예레미야가 울고, 백성을 위하여 운다
이스라엘은 응답하지 않는다. 그 눈물은 언제쯤 소용이 됐을까? 잡혀가서 소용이 된다.
이 예레미야나 이사야나 언제 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치가 있게 되느냐 하면, 앗수르에 가서, 바벨론에 가서, `저들이 이스라엘을 삼킨 제국, 그들의 모시는 신이 어떻게 우리가 모시는 신인 여호와를 이겼는가?` 라는 궁금증에서 만나보게 된,
그들의 신과 제국이 아무런 가치도 생명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마침내 결국 그들은 자기 네들의 역사를 모으게 된다.
우리의 역사에 나타났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으며, 문제는 하나님이 힘이 없는 게 아니라, 우리가 신실하지 못했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회개했다' 이런 말로 너무 쉽게 넘어가지 말고, 이 모든 역사로 비교함으로써 그들은 포로가 되었으나 거기서 진정한 신앙을 회복하게 된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어디서나 가능하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우린 어떤가?
내 인생에서도 어려운 일을 깜짝 놀랄 일을 몇번 당했다 625라는 걸 당했으니까.
부산으로 피난와서 부산 언덕받이에 굴을 파고 담요 한장 분의 거적데기같이 달고 굴에서 잔 기억이 난다.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뭐 우리나라 어려운 위기 많았다.
그리고 이 코로나를 당했는데, 이건 대포 갖고도 해결이 안되고 돈 갖고도 해결이 안되고, 여기서는 뭐 미국이든 중국이든 아무 힘이 없더라. 새삼스럽지 않은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그동안 뭐가 있다고 생각했다가 깜짝 놀라서 깨어나야 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 인간에게 줄 수 있는 답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으로는 만들 수 없다 그러는 것 배우는 때 아닌가?
그러니까 뭐 코로나 쯤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건 그건 경박한 의식 표현이다. 무섭고 두려워 해야 된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역병이다. 그러나 배우는 게 있더라는 거다.
우리 자신으로 돌아와서 예수를 믿는다는 게 뭔지,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었다는 게 뭔지,
우리에게 운명과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도전 앞에서 우리가 당황할 필요가 없고,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을 다시 생각할 기회가 됐다는 것만은 엄연한 현실이다.
역병을 물리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책임을 다 해야 하고
●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우리 각개인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 현존으로 살 책임이 있다는 걸 배운다.
얼마나 큰 일을 해야 할까? 멀리갈 것까지 없이 <이웃 앞에서>이다. 멀리까지갈 필요없는 이웃이다.
이웃이란 우리에게 정해준 어떤 구획이다.
우리가 살고 우리가 인사 나누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 믿는 사람은 뭔가 달라야 된다. 그 <뭔가>는 다만 도덕과 윤리 정도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어떤 영성 어떤 소망 어떤 기적 어떤 다름일 것이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일상과 우리가 지금 혹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모든 것의 일상 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결실되는 귀한 기회, 시간, 남은 생애에서의 우리의 책임이고 자랑이 되어야 한다.
지금은 마땅히 걱정을 해야할 때이다.
그러나 이 걱정이 운명과 인간된 가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일 뿐이다.
우리는 사망을 극복한 부활 신앙 속에 있고,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자녀로
빛과 진리와 생명의 존재로 살도록 책임지고 있다. 그 일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돌아보고 깨우치고 성령 충만하고 책임있는 인생을 스스로와 하나님의 은혜와 이 어두움으로 가득찬 세상 앞에7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내는 귀한 책임있는 기회와 결단과 여생이 되어야 한다
(*예레미야07강,예 8:18-9:6/2020.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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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제 와서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욕심에 대하여 원천봉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나름 대로의 소원과 욕심과 방법과 꾀를 내는 모든 것을 확인할 시간을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엎으시되, 우리에게 비교하고 생각하고 할 시간을 준다.
우리는 모든 일들을 믿고 안믿고, 잘하고 못하고,라는 시간성이 없는, 언제나 잘잘못이라는 시간을 뛰어넘는, 초시간적 선택으로 책임으로만 몰고 간다.
우리 밤낮 얘기하는 평안하고 형통하고 건강하고 배부르고 아쉬울 것 없는 것, 이것들로 하나님이 극도로 분노하신다.
내가 너희를 다만 이 아무 고통이 없고 아무 욕심이 없는 영광도 가치도 의미도 보람도 명예도 위대함도 다 내버리고 이것 하나면 돼요 이런 정도로 만족할 것 같으냐?
그게 북왕조가 앗수르에 멸망하는 이유요, 남왕조가 바벨론에 망하는 이유다.
해결 할 수 없는 고통, 해결 할 수 없는 고난, 자신이 원하는 어떤 해결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자신의 무능과 현실, 하나님께 기대한 것이 보상받지 못하는 억울함, 이런 것들이 다 눈물이다. 그 억울함이 내가 뭘 잘못해서, 하나님이 왜 나한테 각박하셔서, 라는 부분이 많이 있지만 본인은 깨닫지 못한다.
우리 밤낮 얘기하는 평안하고 형통하고 건강하고 배부르고 아쉬울 것 없는 것, 이것들로 하나님이 극도로 분노하신다.
그건 인간의 가치가 실현될 수 없는 곳이다. 여기가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진노하시는 부분이다.
자기 인생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긴 역사와 신약시대의 기독교 역사와 아니 일반역사와 문학과 철학을 다 동원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전하시고 묻는 질문이라는 것을 깨우치지 않으면 우리는 늘 진다. 하루를, 예수가 대신 죽어 하나님의 영광과 영생으로 약속한 인생이라는 걸 놓치게 된다.
굉장하다. 나가서 큰소리 치라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소중히 살아야 된다.
하루가 다만 시간이 흘러가 버리는 것이 되지 않고, 문득문득 생각해야 된다. '오늘은 잘 살았는가? 신자 다웠는가? 앞으로 나가고 있는가?'
얼마나 큰 일을 해야 할까? 멀리갈 것까지 없이 <이웃 앞에서>이다. 멀리까지갈 필요없는 이웃이다.
이웃이란 우리에게 정해준 어떤 구획이다.
우리가 살고 우리가 인사 나누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 믿는 사람은 뭔가 달라야 된다.
그 <뭔가>는 다만 도덕과 윤리 정도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어떤 영성 어떤 소망 어떤 기적 어떤 다름일 것이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일상과 우리가 지금 혹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모든 것의 일상 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결실되는 귀한 기회, 시간, 남은 생애에서의 우리의 책임이고 자랑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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