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신년설교 / 박영선 목사 / 시편 23편 / 2015.01.04] ​

nazunzaro 2022. 2. 2. 18:12

● 억울하다. '너 억울해라. 널 억울하게 만든 사람도 그것으로 일을 할거고 넌 억울해서 유익을 얻을 거다' 내가 걸은 모든 길과 내 못난 모든것들로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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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설교 / 박영선 목사 / 시편 23편 / 2015.01.04.] ​

- 우리에게 일어나는 실패와 후회들이 운명을 결정하는 요소들이 아니고 부활로 나가는 길을 방해하는 조건들이 아니고,
그것들로 부활이 연결될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소감; 여기서 부활이란 죽음, 사망이라고 표현하는 헛되고 무가치한 삶에서부터
생명, 구원이라고 표현하는 진정한 가치, 의미, 영광이 있는 삶으로의 변환을 뜻한다)

- 나는 잘못했으나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이 회개이다.
(*내가 잘못을 뉘우치는 거로는 몇 번 반복하다가 결국 포기하고야 만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는 안되고 하나님의 의지로 포기하지 않게 되고 끝까지 자라고 성숙되어 간다)

- 우리도 그렇잖은가? 내가 걸은 모든 길들로, 나의 못난 모든 것들로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
(*나의 실패와 잘못들이 나를 세상적으론 손해보고 실패하고 망하게 하지만,
그러나 인격적으로는 삶의가치와 의미에 있어서는 망하게 하는게 아니라 겸손과 온유의 성숙으로 영광으로 가게 한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 내 질투를 받아라' 그러시는 거다.
우리는 억울하다. '너, 억울해라. 너를 억울하게 만든 사람도 그것으로 일을 할 것이고,
너는 억울해서 유익을 얻을 것이다' 그러는거다.
(*우리는 억울함까지도 기꺼이 감수하는 수준까지 이르러야 된다. 그 수준에까지 이르는게 하나님의 뜻이다)

-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일을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구체적인 개입이다.
(*우리가 다들 백해무익이라 여기는 실패, 질병, 고통, 낙오, 소외, 억울함, 가난, 결핍, 장애
그 모든 것들까지도 오두 하나님의 구체적인 신적 개입이다.
그것이 우리를 만들어가시는 신의 일하심의 지혜요, 방식이다)

- 못 견뎌서 울고, 비명을 지르고, 다 괜찮다. 그게 다 일을 하는 줄 알라. 그렇게 다 일을 한다.

- 너희에게 일어난 어떤 일도, 네가 가진 어떤 제한된 약점도 내가 너희에게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할 수 없다.
그것은 다 결국 기적이 되고 승리가 되고 영광이 될 것이다.

- 우리는 우리 인생을 나 혼자 살지 않고 이웃과 함께 산다. 그리고 그 이웃은 도움이 되는 이웃이 아니라
모두가 신경 쓰이는 이웃이다. 편한 이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없는 게 낫다. 없는게 제일 낫고,
있으면 이제 감수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게 일을 한다는 거다.
(*내 이웃은 늘 도무지 내 마음에 안들고 못마땅하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이웃을 감수하는 것이 일을 한다.
그게 나를 온유와 겸손의 사람으로 만든다)

- 우리가 어디서 겸손을 배우느냐 하면, 노력해서는 배우지 못한다. 자기가 못 났다는 것을
평생 반복해야 겸손을 배운다. 그래서 할 말이 없어진다.

- 우리는 어디서 인내를 배우나? 그건 가르쳐서 되지 않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견디는 거다.

- 그때 왜 그랬나? 그때는 실력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렇게 했다. 그래서 욕을 먹어야 한다.
욕을 먹어야 된다. 그것들이 일을 한다.

- 못 견뎌서 울고 비명을 지르고 다 괜찮다. 그게 다 일을 하는 줄 알라. 그렇게 다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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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23편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아멘

시편 23편은 다윗의 시이고 시편 전체에서 가장 사랑받는 시일 것이다.
이 시편을 읽으면 누구나 다 얼굴에 부드러운 또는 만족한 감사한 생각이 들게 되어 있다.
아마도 그의 말년의 작품일 거라 우리가 추측을 한다.
이 시의 아주 큰 특징은 원망과 회한이 없다.
그리고 무엇을 만회하려고 하거나 교훈을 줄 의도도 보이질 않는다.
이 시를 쓴 다윗의 경지가 보이고 그 성숙한 내용이 굉장히 부요하게 드러난다.
이것이 시편 23편의 가장 중요한 내용일 것이다.

이 시를 교훈화 하거나 이 시를 가지고 자신을 점검하는 이런 일들은 사실은 다 부차적인 것이다.
이 시는 인생과 특별히 신앙 자체에 대한 풍성한 증언을 담고 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그 내용을 함께 나누어 우리의 인생과 신앙에 아주 큰 힘이 되기를 바란다.

빌립보서 3장으로 가면, 시편 23편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가 사도 바울의 증언을 필요로 한다.
빌립보서 3장 10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오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표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성경에 많은 구절들이 그렇듯이 우리가 성경에서 이런 고백들을, 그런 증언들을 대하면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그 이해로, 성경이 하고 싶은 말을 오히려 가로막을 때가 많이 있다.
지금 이 바울의 고백도 그 진정성이나 헌신, 각오 같은 어떤 장렬함 같은 것으로
이렇게 진정한 본문으로 들어가는 일을 방해받곤 한다.
바울의 이 고백은 매우 심오한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 그리고 그의 고난에 참여하고자 한다.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대단한 영광이고, 우리가 가지는 소망이며 자랑이며 힘이다.
그러나 부활로만 그가 쉽게 자신의 운명을, 혹은 자신의 어떤 안심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에 참여하기 위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
,라고 고백하는 부분은 쉽게 넘어가서는 아니된다.

바울이 고백하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 부활을 이룬 예수 그리스도의 걸으신 인생의 그 연결은,
사실은 연결할 수 없는 것을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인류가 이제껏 경험하는 것은 죽음이 최종 운명이다.
죽으면 다 끝이 난다. 부활이란 다시 사는 것이다. 우린 다시 산다는 것은 사실 없고, 출생은 있다.
모든 출생이 그리고 또는 모든 시작이 끝을 가지고 죽음으로 끝나고,만 알지 다시 산다는 것을 모른다. 다시 살려면 죽음으로 끝이 나지 않아야 된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부활을 얘기하면,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 또는 인생에서 알고 있는
모든 질서와 운명은 체제가 깨지는 것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면, 부활이 최종 권위라면, 죽음의 공포나 권세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도 살면서 가장 혼돈스러운 것은,
죽음이 여전히 권세를 가지고 있고, 삶 속에 공포가 언제나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울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으며, 모든 것을 알고 사는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혼란스럽고 두렵고 의심과 불안 속에 있는 것은 현실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름으로 이런 모든 것들을 우리는 해결하기를 원한다.
그러니까 성경이, '예수는 죽어서 부활을 이루었다'라고 묶는 부분을, 우리는 죽지 않고 부활로 가는
어떤 연속선을 만들고 싶다, 그런 얘기가 된다.

예수의 생애에서 우리가 보는 가장 놀라운 점은 그 모든 권세를 가지고, 죽은 자를 살리는 권세를 가지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눈먼 자를 고치며, 바다를 잠잠케 하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면서도,
배신을 당하고, 누명을 쓰고, 고통과 모욕 속에 죽었다,라는 이 묶을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사실 거의 대강 묶고 산다.

★그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 부활로 가는 길이라 그렇게 얘기하면 우린 믿지 않는다.
끊임없이 안심을 구한. 그리고 그 목적, 승리로 가는, 승리로 가는 당연한 과정을, 당연한 단계를, 전진을 확보하고 싶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얘기한다. 사도 바울이 하는 얘기는, 이걸 소리 높여 외치고, 주장을 하고,
믿으라고 강요를 하는 게 아니라, 그 신비를 알라고 그러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 이거다.
그래서 "난 내가 모든 것을 확보하고 있지도 않고 모든 조건이 구비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 안다"라고 얘기한다.
"나는 지나간 것은 잊어버린다." 그러니까 여기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의 연속성이 없대는 거다.

우리의 삶을 휘저어 놓는 모든 공포는 이거다. 우리가 끊임없이 실패를 한다는 사실이다.
옳지도 못하고, 옳아도 행하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를 늘 후회와 회개로 끌고 오고 있는데,
회개가 말하자면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렇게 하겠습니다'를 촉구하는 건지, 회개 자체가 일을 하는 건지 지금 묻고 있는 거다.
부활로 가야 되는데 부활 전이 그 어떤 승리, 어떤 충만, 어떤 전진에 의해서 도달하는 게 아니라고 얘기함으로써,
★우리에게 일어나는 실패와 후회들이 운명을 결정하는 요소들이 아니고, 부활로 나가는 길을 방해하는 조건들이 아니고, 그것들로 부활이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단 말이다.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거룩한 삶을 살고,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 이 세상에서 쓸모 있고 싶다.
근데 그렇게 안 해 주신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 사람은 몇 없다.
그렇게 한 사람은 한 번 해보고 죽어버려서, 영원히 잘한 걸로 된 사람 빼놓고, 인생 내내 괜찮아진 사람은 없다.
최선으로 잘한 사람이 감추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 다, 우리 모든 개인이 갖고 있는 것의 장점은 거의 없다. 약점만 있다.
왜? 장점으로도 못난 짓을 하니까. 장점이 있어 봤자 그걸로 못난 짓을 하는데는 당할 수가 없는 거다.

'다시는 안 그래야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집어던진 다음이다.
와서 울고 회개하고 회개했으니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해보는 재도전의 시기가, 기회가
열리는 게 회개가 아니다.
그렇게 씻고 가고, 씻고 가고 하는 것들이 우리에게 뭘 만드느냐 하면 체념을 만든다.
회개라는 것이 묵혔던 때를 씻어내는 것 같이, 오래 두었던 어떤 새로운, 새로운 후회와 새로운 결심과
어떤 새로운 시도를 하게 하는 것 그게 회개가 아니다.
■회개는 훨씬 큰 것으로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지 않고 우리의 능력으로 만들어내지 않고,
하나님이 한다는 것을 우리의 실패와 자책 속에서 확인하는 것이 회개이다.
'저는 잘못했으나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이 회개이다.
아멘! 근데 아멘을 큰 소리로 할 수가 없다. 알고 있어야 된다. 그게 다윗의 시이다.

다윗은 고단한 인생을 산 사람이다.
다윗의 생애를 보라.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다윗 시대에는 아주 중요한 적대국이었다.
형들이 다 전쟁에 나갔는데 다윗은 어려서 양치기로 남아 있었다. 부모님이 형들 소식, 잘 있는지 확인해보고 오라
그래서 왔다. 왔다가 골리앗을 보고 벌벌 떠는 그 이스라엘 군사들을 보고 화가 났다.
그래서 물맷돌 다섯 개 들고 적장에게 나갔다. 만용을 부렸다. 철이 없어서 그게 뭔지 모르고 나갔다.
얼마든지 미워할 수 있다. '아, 그가 전능하신 여호와를 위하여 몸을 떨쳐 나갔다.' 얼마든지 옳다.
그러나 그 후에 그의 인생 행로를 보면 그 괜한 짓한 거다. 나라를 구했다. 당연히 구했다.
그러나 그 나라는 결국 망하는 나라이다. 그리고 그는 그걸로 영웅이 된다.
그리고 사울의 미움을 받아 쫓긴다. 적국으로 피난을 간다. 블레셋으로 피난을 가서
블레셋의 중요한 도읍 다섯 개 중에 하나인 가드, 거기에 방백, 그 군장 격이다.
아기스에게 피난처를 요청했는데, 그 백성들과 휘하의 군사들과 또 아기스 자신이 다윗을 믿을 수가 없다.
적국의 장군이었다. 자기네 나라의 최고의 장수를 죽인 적국의 영웅이다.
의심하고 처치하려고 한다. 미친 채 해서 호구를 벗어난다.
다윗이 물맷돌 다섯 개로 골리앗 죽여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성경에선 그 사건을 다시는 반복하지도 않는다.
잘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라고 얘기하는 거다.
그는 나중에 왕이 되고 그리고 자기 아들의 반란으로 인하여 피난을 간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하여 피난길에 어떤 언덕길을 밤에 맨발로 울며 걸었는데,
사울 왕가에 속했던 심의라는 사람이 나서서 그 피난가는 다윗과 일행을 향하여 저주를 퍼붓는다.
'망해라. 사울 왕과 그 가족에게 피를 흘린 자여, 망해라, 망해라' 돌을 던지고 티끌을 날리며 쫓아오며 저주를 퍼붓는다.
휘하의 장수들이 '가서 내가 죽이겠습니다.' '놔둬라.'
'하나님이 저주하신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 이 욕 잘 먹겠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기를 바란다'

그 모든 것이 뭘까?. 신앙이 좋다고? 아니다. 그는 고난을 아는 자인 것이다.
보복을 해봤자 얻는게 없다는 걸 아는 인생을 산 사람이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살면서 배우는 게 뭔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보상을 받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윗의 고백은 모두가 그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저가 나를 푸른 풀밭으로, 그리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겁낼 것이 없고,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풀고 내게 기름을 발라 잔이 넘치게 하는 하나님인 것을 안다.
이게 뭔가? 잘한 보상을 받았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걸은 모든 길들과 나의 못난 모든 것들로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를 안다.
무엇을 이룬 업적과 성취와 자랑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인생에서 일어난 모든 일과 자신의 한계를 가지고 하나님이 창조를 하셨더라'라고 깨닫는다.
이게 시편 23편이다.

바울이 얘기하는 식으로 하자면 '나는 뒤에 것을 잊어버리겠다'이다.
일어난 모든 일을 조합하고 연결해서 논리적인 결과, 우리가 아는 원칙에 의한 보상을 받는 것과 다르다,
그것보다 크다고 얘기한다.
우리에게 이게 은혜가 되는가, 아니면 혼란스러운가?
당연히 혼란스러워야 된다.
★기독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된다. 성경이 내내 하나님을 어떤 원칙으로 얘기하지 않고,
성품으로 증언하는 이유를 알아야 된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를 사랑하는 너희 아버지라. 나는 내 영광을 우상에게 내주지 않을 것이다.
내가 어찌너희를 아드마 같이 수보임같이 놓겠느냐" 라는 말들을 알아야 된다.
★그의 의지와 우리를 향한 목적과 동원하시는 진심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계속 우리는 자신의 이해와 자신의 확인과 성경이 하는 얘기가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 모르고,
늘 이 둘을 묶지 못해서, 그저 늘 자기의 삶을 살지도, 자기가 읽는 성경을 이해하지도,
자기가 하는 기도가 무엇인지도, 그 보상이 어떤 식으로 나오는 지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난 것 중에 자랑할 만한 것이 뭐가 있는가? 고통스러운 것 뿐일 것이다.
그러나 그 끝이 부활이다. 예수 안에서 확인된, 입증된 역사이다.
아무도 이 운명에서 이 승리에서 도망갈 수도, 제외될 수도 없다.
그게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이다.

■그러니까 복음이다. 원칙이 아니다. 규칙이 아니다. 조건을 달고 있지 않다. '너희에게 일어난 어떤 일, 네가 가진 어떤 제한된 약점도 내가 너희에게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할 수 없다. 그것은 다 결국 기적이 되고 승리가 되고 영광이 될 것이다.'
이걸 다윗이 보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인생에서 지금 바울이 한 이 증언이 얼마나 큰가!

빌립보서 1장에 가 보자. 빌립보서 1장 20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느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데 무엇을 택해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곳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하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으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만만치 않은 말씀이다. 그는 감옥에 잡혀있다. 살지 죽을지 모른다. 택하라고 한다면 죽는 게 좋단다.
그건 뭐 우리 현실에서 늘 보는 거다.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나는 유일한 해답은 죽는 거다.
오래 사는 것만큼 고통스럽다. 저한테 와서 "건강하세요" 그렇게 말하지 마시라.
뭘 건강하래? 빨리 죽어야지. 누구나 아는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나, 선택할 수 있다면 살겠다." 이게 또 무슨 무서운 말인가?
'나, 살아서 너희에게 너희의 자랑이 되고 싶다.' 어떤 자랑?
'너희가 만드는 자랑이 나로 인하여 도움이 되게 하고 싶다.' 그런다.

어떤 도움? 우리는 우리 인생을 나 혼자 살지 않고 이웃과 함께 산다.
그리고 그 이웃은 도움이 되는 이웃이 아니라 신경 쓰이는 이웃이다, 모두가.
편한 이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없는 게 낫다. 없는게 제일 낫고, 있으면 이제 감수하는 수 밖에 없다.
★그게 일을 한다는 거다.

바울은 감옥에 갇혔는데 감옥에 갇히자 바울을 시기한 사람들이 열심을 내서 복음을 전파해서 유익하게 됐단다.
바울을 시기하는 것까지도 하나님이 부활로 승리로 만드실 수 있단다.
"그러니까 너 질투를 받아라" 그러는 거다.
억울하다. "억울해라. 너를 억울하게 만든 사람도 그것으로 일을 할 것이고, 너는 억울해서 유익을 얻을 것이다."

그게 창조주 하나님,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걸, 그걸 이해해야 된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일을 한다.
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구체적인 개입이다.
참새 한 마리가 아사리온에 팔리는 것까지도 하나님 허락 없이는, 우리 머리카락까지 다 세신 바 된,
그런 증언들은 왜 필요한 것인데?
우리의 삶을 살라. 거기 기적이 담기는 자리라는 걸 이해하라.
★어떻게 이해하나? 못 견뎌서 울고 비명을 지르고 다 괜찮다. 그게 다 일을 하는 줄 알라.
그렇게 다 일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을 살 수 없다.
인생을 살 수 없는 것,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다.
우리가 안심이 되고 우리가 자랑스러울 때만 살겠다고?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은 하나도 모르는 거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일하는지, 거기다 뭘 담는지, 하나도 모르는거다.

생각을 해보시라. 기독교가 뭔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뭔지?
그 시편 40편에 가면 이 다윗의 시 중에 유명한 시 중에 하나로, 그 놀라운 증언이 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며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때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이 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겨하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다. 기가 막힐 웅덩이, 나올 수 없는,
홀로 스스로 탈출할 수 없는 웅덩이에 빠졌는데
그를 끌어올려 탄탄한 반석위에 세우신다. 하나님의 구원의 기적이다.
그런데 이 구원의 기적은 무엇이냐 하면, 다윗의 이해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말하기를
"나는 제사와 예물을 바라지 않고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않는다" 라는 말로 표현되는 구원이란다.
'나는 보상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너희에게 자격을 요구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너희의 못난 것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를 내가 목적하는 자로 만드는 그런 하나님이다.'
라는 것이 그를 기가 막힐 웅동이에서 꺼내놓은 것이다.​
​그 우리의 모든 자책들이 기가 막힐 웅덩이다.

★우리가 어디서 겸손을 배우느냐 하면, 노력해서는 배우지 못한다.
자기가 못 났다는 것을 평생 반복해야 겸손을 배운다. 할 말이 없어진다.
어디서 인내를 배우나? 아, 그건 가르쳐서 되지 않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견디는 거다.

그때 왜 그랬나? 그때는 실력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렇게 했다.
그래서 욕을 먹어야 한다. 욕을 먹어야 된다. 그것들이 일을 한다.
​그것들로 무너뜨리는 것은 세상이 하는 거다.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것, 승리, 영광, 위험, 명예, 지식,
뭐든지, 아무리 갖다 대도 그거는 다, 결국은 하나님이 아닌 그 무엇은 다, 결국은 없어지고 그만이다. 망하고 그만이다.
한때 자랑이 있었을 뿐이다 한때 속임수에 불과하다.

하나님만 만들 수 있다. 그걸 왜 승리에 담지 않고 실패에다 담으시는가?
더 많이 담겨지기 때문이다. 더 많이 담겨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더 많이 담으시겠다고 하신다.

​우리는 담는 것보다 편안한게 더 좋은 것이고, 하나님은 그렇게 못하시겠다고 후벼 파신다.
우리는 거기가 싫은거다. 그렇지 않은가? 손 쉽게 말해주는 데를 찾아가고 싶다.
가시라. 쉽게 말하는데 가라. 쉽게 말하는 위안을 받으시라.
현실에 그것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살아 온 만큼 확인했을 거다.

그러니 기독교의 값을 알라. 다윗이 고백하는 시편 23편의 가치를 다시 확인하라, 그게 무슨 말인지.
참으로 그렇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무슨 외부에서 오는 위협이 아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자폭들이다.
염치가 없어서 못 살고, 부끄러워서 못 살고, 무서워서 못 살고, 의미가 없어서 못 살
모든 모든 자폭으로부터 의미와 가치와 답을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답을 얻을 데가 없다.
그리고 그것이 얻어지기까지 하나님이 죽지도 못하게 붙잡고 있다.
우리 모두의 현실이다.

'저건 왜 아직도 죽지 않나?' 스스로에게 '하나님은 왜 나를 데려가시지도 않나?'
아직 더 채우시겠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시편 23편의 뜻을 아는 날이 온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살아낼 수가 없다.
늘 눈치보고 쫓기고 삼키워진다. 죽은 듯이 살게 된다. 부끄러워하고 자책하느라고 아무것도 못한다.

그렇지 않다. 할 수 있는 만큼 하라.
할 수 있는 만큼 하라. 실패하라. 부끄러워 하라. 얼마나 많이 해야 되는지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얘기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래도 괜찮다, 하루에"
제가 붙인 거다, 하루에는. 하루에 일흔 번씩 일곱번이래도 괜찮다. 칠칠이 칠십칠.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다.
누구에게 도움이 되지 마라, 자신의 인생을 살라. 그래서 위대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기도)
참으로 버러지 같은 우리 인생을 하나님이 귀히 여기신다.
그리고 승리케 하게 하시겠다고 하신다. 영광을 담으시겠다고 하신다.
우리는 그저 감격할 뿐이다. 하루 하루 넘어지고 자빠지는 우리를
하나님이 수렁에서 건지사 반석 위에 두신 말씀이다.
이 말씀 의지하여
올 한해 신자답게 믿음을 가지고 우리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