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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석목사 / 요한복음 11:19-27 / 2022.01.09 ]

nazunzaro 2022. 1. 16. 08:32
[박병석목사 / 요한복음 11:19-27 / 2022.01.09 ]

●우리는 우리 인생을 통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점점 더 배워갈거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고난과 후회와 눈물이 함께할거다. 그럴수록 우리가 굳게 잡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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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세상 살기가 만만치가 않다. 그런 우리들에게 위로의 말씀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적은 글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주신다;
●​그것은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를 만드신 조물주 창조자가 아니라, 우리와 이제 하나가 되신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우리에게 깨달음과 자신감을 준다.

그것은 성경에 적혀 있는 것을 제대로 정확하게 그 의도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떤 학자도, 지혜자도, 재산가도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 즉 아버지의 말씀을 가장 잘 잘 이해할 수 있음은 우리가 바로 그분의 친자녀이기 때문이다.

설령 지금은 잘 이해를 못하고 때로는 내용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우리도 우리 자녀들을 통하여 또는 과거 우리 부모의 자식으로서, 부모의 말 뜻을 오해하거나 이해 못했던 상황들을 경험해 보았다.
우리는 다 안다. 나에게 있는 나의 어떤 본질적, 유전으로 물려받은 내 부모님의 모습, 내 아버지의 모습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결론적으로 우리 아버지가 하는 말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그러한 자신감,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오늘 요한복음 11장을 같이 살펴보자.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이다. 이 나사로 사건을 통해 제자들이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죽음에 대한 한계이다. 제자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나사로가 죽지 않았으면 조금의 가능성, 희망이라도 있지만, 이미 죽었는데 예수 우리 선생께서도 그 죽은 자를 가지고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

죽음은 인간에게는 끝이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뭐라 그럴까, 능력도 어떤 다른 방법도 획 책할 수 없다. '인간은 죽음 앞에 무기력하다' 라는 사실을 이 제자들이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거다.
마리아가 그 제자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거다. '왜 이제 오셨습니까? 이제 다 끝났습니다. 죽음 앞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휴, 뭐, 믿고 다시 산다고요? 그래요, 성경에 적혀진 대로 마지막 날 가서는 다 부활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지금은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 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마르다는 '인간이 죽었는데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아니 ,그러니 조금 일찍 오셨어야 최대한 빨리 오셨어야 하는 거 아니냐?' 하고 얘기하는데, 예수님이 계속 딴 소리를 하는 거다. '나를 믿으면 죽지 아니 한다. 나를 믿으면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얘기를 하니까 답답한 거다.
'일찍 오셨어야죠. 빨리 오셨어야죠. 죽은 다음에는 무슨 소용입니까?' 라고 얘기하면서 같이 문상 온 유대인들까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지금 비통, 슬퍼하며 우는 거다. 제자들도 마르다도 마리아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거다.

죽음 앞에는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한가, 하나님이 창조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본래 하나님과 같이 세상을 경영하도록 지음 받은 인간이 그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죄의 권세 앞에 사망의 그 능력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무기력하게 종 노릇하며 슬퍼하고 있는 모습을 예수께서 직접 보시는 거다. 그리고 예수님이 눈물을 보이신다.​

신학교 과목 중에 조직신학이라고 있다. '조직'이라는 말은 영어의 'organized'라는 말을 한국말로 직접 번역해 놓은 거다. 여기서는 '조직적'이란 뜻도 되지만 '정리정돈이 된' 그런 뜻으로 이해하는 게 더 바른 이해이다.
기독교는 기독교 역사를 통해 많은 이단들과 다른 종교의 도전과 함께 그 안에서도 여러 가지 뭐랄까, 감언 이설들이 난무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바른 교리를 정립하기 위해 신학에서 성경이 다루는 크고 작은 주제별로 교리 내용을 정리정돈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조직신학이라는 과목이 생긴 거다.
그런데 그렇게 분석하여 정리정돈하여 쫙 이렇게 조직화 시켜놨더니 어떤 부작용이 생겼냐면, 은혜가 있는 자리가 정점 줄어들었다. 나쁘게 얘기하면 조금 정내미가 없는 너무 차갑고 냉철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게 불만스럽다. 왜냐면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적으로 봤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참 난해한 부분이 많다. 예수님은 참 인간이시며 동시에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에서는 예수님을 우리가 이해하기 굉장히 어려운 단어들로 설명을 해놓았다. 인성이 어떻고 신성이 어떻고 위격이 어떻고 페르소나가 어떻고..

이런 단어들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조직신학 체계가 난무한다. 그러다 보니 그런 것을 바탕으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런 오해를 하게 된다. 지금 죽음 앞에서 종 노릇하고 슬퍼하고 어쩌할 줄 모르는 사람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눈물을 흘리시니, 이것을 어떻게 분석하냐 하면, 아,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드러났구나...

왜 그렇게 설명을 하냐면, 하나님은 완벽하고 조그마한 결점도 없으신 분인데, 인간에게 있어서 눈물이란 감정의 격변이오 안정적이지 못한 모습이요, 눈물의 본질적 의미는 후회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모든 걸 아는 지존하신 분, 절대자는 실수와 후회가 없으시기 때문에 그분의 의도대로 모든 게 완벽하게 진행되었다면 눈물을 흘릴 자리가 없을 거 아닌가, 그렇게 이해를 하는 거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께서 눈물을 보이시는 것은 그가 하나님으로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보이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거다.

과연 그럴까?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은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이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아무도 그게 빛인지 못 알아보는 거다. 아무도, 제자들도, 그의 사랑하는 자매들도, 온 유대사람들도 그가 하나님이시고 빛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거다.
죽음 앞에서, 이 모든 것을 다루시는 하나님이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우리 스스로가 드러내는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빛을 알아보지 못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얘기, 말씀이 그렇게 육신을 입었다는 얘기는, 쉽게 설명하자면 이런 거다. 우리는 그동안 성경에 적혀진 글자만을 보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이해하려 하여 왔는데, 계속 오해한 거다.
내 친아버지를 글자로만 보고 있으면서 우리 친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거다.
우리 아버지는 피도 눈물도 없고 냉정하고 조그만 잘못해도 용서하지 않으시는 그리고 지금도 24시간 불철주야 내가 어떤 잘못을 하나 째려 보시고, 잘못하면 잘못한대로 바로 벌을 주시고, 조금이라도 잘하면 잘한 거에 맞는 상을 주시는 분이다,라고 이해해 왔던 거다.

●그렇게 속칭 피도 눈물도 없는 완전한, 정말 바늘 하나 찌를 틈도 없는 그런 분이라고 우리가 생각해 왔는데, 우리는 여전히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 분이 육신을 잊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는 것은 우리 앞에 직접적으로 보여주신 거다. "나는 이런 너의 아버지다. 나는 이런 성품을 가진 사람이다." 어떤 모습인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다.

우리가 죽음 앞에 굴복할 때, '거봐, 내가 에덴 동산에서 그러지 아니했냐?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네가 죽는다 그랬지? 오늘날 네 꼬라지를 봐라. 쌤통이다' 이게 아니라,
●슬퍼하시고 비통하셔서 눈물을 보이신다.

거기다 대놓고 인성이니 신성이니 페르소나니 하는 것은 너무 정말로 정내미가 떨어지도록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발언이다.
●지금 육신을 입으신 말씀인 예수는 우리의 하나님이다. 우리의 아버지라는 거다.

이렇게 수많은 조건을 두고 조건을 따져가며 네가 옳고 그르고, 지금 네가 침 삼키는 게 옳고, 니가 지금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때 팔짱을 끼는 게 옳고, 찬송을 부를 때 음이 틀리게 나면 그런 네가 벌을 받아야 하고 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의 가장 근본은 우리에 대한 사랑이라는 거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셔서 빛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하나님인 줄 모르고 영접하지 못하는 우리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
'너희는 나를 돌아보지 못하고 너희는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지만 나는 너희를 내 자녀라 부르고 너희를 내 백성이라 부르리라. 나는 하나님이니 죽음 앞에 무기력하게 멸망해가는 너희를 절대 그냥 보지 못하겠다. 내가 가서 죽는 한이 있어도 너희를 구원하고 살리리라 그리고 너를 사랑하는 나에게 있어서는 내가 사랑하는 너희를 위해 죽게 되는 것이 영광이다.'
정말 훌륭하신 하나님이시고 정말 감동적이다.

그런데 그래서 현실을 사는 우리는 어쩌라는 건가? 우리는 어쩌라고?
예수님이 그러셨는데 그래서 그게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되는가,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 어떤 유익인가 한번 우리 생각해 보자.

이 세상에 절대적인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 그리고 그 아버지를 믿지 않는 우리가 이제 세상에 내려오신 빛, 그 십자가로 인해 믿는 신자가 됐다는 것, 그가 하나님이시고 그가 빛이시고, 나아가 그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 위로가 되고 어떤 도움이 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기도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안 들어주시던데?
아무리 기도하고 아무리 그래도 나의 고통이 나의 고난이 나의 인생이 쉬워지지 않던데?
우리의 믿음을 가지고 정말 우리가 간절히 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안 들어 주시겠는가?
그렇게나 간절하고 정말 절실하게 기도했는데 안 들어주시면, 내가 좀 나에게 굉장히 해가 되고 궁극적으로는 나에게 좋지 못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 것인가? 마치 불을 낼 수 있는 성냥을 달라고 조르는 아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한 번 되돌아보자.

​우리는 우리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점점 더 배워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고난과 후회와 눈물이 함께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가 굳게 잡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믿음 뿐일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아버지`로서 지금 우리 각자가 있는 이 자리에 함께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