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려고 하는데 안되는 것은, 우리가 잘하는 것이 소원을 하면 간절하면 되는게 아니라 실력으로 돼야 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게 어렵다.
하나님 형상, 예수 닮는 일, 일상의 소소한 삶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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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목사 / 다시 보는 열왕기(12) / 2021.12.26]
( 열왕기상 21:17-29)
열왕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갈린 여러 왕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다.
이 모든 왕들은 그 결말이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 행했다', 혹은 '여호와를 불순종하고 악하게 살았다' 라는 간단한 평결로 나뉜다. '다윗의 뒤를 따른 자'와 '여로보암의 뒤를 따른 자' 이렇게 둘이 나뉘는데, '여로보암의 뒤를 따른 자'라는 표현 중에 이제 아합이 더 들어가게 된다.
즉, '여로보암과 아합의 길을 걸은 자'라고 해서 극히 악한 왕의 대표격이 된다.
엘리야가 등장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열왕기에 가장 악한 왕, 아합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가 자기 자리를 가지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대비되는 아합의 악함과 못난 것이 우리에게 교훈으로 역사 기록이 된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이 아합은 여러 가지 악을 행했지만 조금 더 이상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 이스라엘에서 여호와를 믿는 선지자들을 다 죽였고, 엘리아마저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고,
그 이웃에 있는 포도원이 좋아서 그걸 뺏기 위하여, 정당한 거래를 요구했지만 그 주인이 하나님의 법도에 자기 땅을 팔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것으로 거절을 하자, 전전긍긍하고 어린아이 같이 식음을 전폐하고 이불 쓰고 드러누운 것을 그 부인된 이세벨이 에 이를 해결했다.
나봇을 거짓 증인을 세워 죽이고 그 땅을 차지하게 해서
아합이 이제 기분 좋게 뛰어가다가 엘리야가 아합을 딱 마주치는 장면이 된 것이다. 그래서 대뜸 나온 말이, '나를 대적하는 자, 엘리야 너냐?' 이런 '또 너구나?' 하는 식으로. 엘리야가, '그렇다. 너는 네 죄로 죽고 네 아내도 죽고 개들이 너희 흘린 피를 할거다'라는 아주 무시무시한 저주를 예언한다.
그러자 아합이 또 마음이 움찔해가지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베옷을 입고 겸비해서 '하나님이 용서하는, '이 벌을 네 당대에 내리지 않고 네 자식 대에 내리겠다' 하는 일들로 기록이 돼 있어서, 쉽게 누구는 착했고 누구는 악했다, 이런 면이 열왕기가 하고 싶은 얘기가 아니라, 저들의 실제 인간된 모습들을 보임으로써 우리에게 엘리야가 대표하는 것과 아합이 대표하는 것으로 큰 교훈을 삼고 있다, 이렇게 봐야 된다.
그러니까 아합은 이 본문에 의하면 그 25절 보면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으면 그럴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이렇게 나온다.
그는 자기 자신의 마음 의지 같은 것이 없고, 우리 세상에서 하는 말대로 하면, 이제 방랑자를 얘기할 때, 바람 부는 대로라는 말 같이, 그때마다 헛된 일에 부추겨지는 대로 끌려다닌 사람, 소심하고 마음이 여리고 연약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
그러니까 우리가 악한 자라고 하면 악한 일에 에 지독할 만큼의 어떤 그 마음 깊은 그 악한 힘이 용암처럼 큰 우회처럼 태산이 무너지는 것처럼 이렇게 큰 힘으로 나올 것 같은데, 최고로 악한 왕이 이렇게 소심한, 연약한, 어쩔 줄을 모르는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하는 것은 우리에게 사실은 새삼스러운 도전이 된다.
우리 인생은 대부분의 인생이,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거의 대부분의 인생은 다 소심하게 살고, 자기 하고 싶은 거 제대로 피력해 보지 못하고, 시간에 끌려 살듯이 사는데,
이 아합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 같이 무슨 그 마음에 큰 악한 마음을 품고, 뭐 여러 사람을 죽일 마음을 가진, 그런 무정하고 비정하고 악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면, 우리 마음이 약간 섬뜩하다. '이런 사람이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악한 왕이었다는 게 무슨 뜻인가?' 그런 생각이 든다.
근데 여기 중요한 표현이 ' 자기를 팔아먹었다'는 거다. 이 모든 일이 본심이 아니었다는 거다. 그러면 더더욱 우리 마음에 더 의심이 든다. 그게 자기 본심이 아니었다면 어쩔 수 없어서 마음이 약해서 그런 것인데, 성경은 왜 그렇게 그를 지독하게 에 나쁜 자로 못을 박았는가?
이 악하다, 잘못했다, 하는 일에 성경적 그 정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이 폭력, 혹은 그 마음에 가진 어떤 악심, 의지적인 악함 같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고, 여기 '팔아 먹었다'에 해당하는 표현이 이렇게 나온다.
에베소서 4장 17절;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에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행하지 말라"
그러니까 여기에서는 이방인 모두가 여기에 해당한다는 것이고, 이방인이라는 것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다 허망하다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 아합에게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마음을 팔아먹은 자, 그러니까 속이 없는 사람이라는 거다.
★예수가 없으면 사람이 속이 없어진다. 마음이 없어진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생명에서 떠나 있으니까.
생명에 연결돼 있지 않으면, 자라나거나 번성하거나 열매를 맺는 일이 없이 그저 그 모든 건 소멸된다.
다 부패하고 썩어지고 낡아지고 없어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게 된다, 그런다.
★방탕은 성경에서는 도덕적 단어가 아니고, 줏대가 없이, 가치 기준이 없이, 자신을 경우와 사건에서 판단 없이 시간에 맡겨버린 것을 방탕이라 그런다. 시간에 맡긴다는 건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자신을 버려두었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우리가 아합에게서 보는 악왕의 극치, 악한 자의 극치, 그러니까 여기 설명된 바와 같이 그것은 악에의 의지, 악에 대한 폭력의 크기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된 본심, 자격, 어떤 생명과 선한 일에 관한 어떤 근거도 없는 자, 그래서 모든 경우에 그냥 휩쓸려 가고 마는 사람'이라고 묘사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 성경에서 시작이 어떻게 돼 있느냐 하면,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이제 에 선악과 따먹고 그리고 곧 이어서 이 증세가 나온다. 저들이 벗었음을 알고 두려워하여 동산 숲에 숨는다.
거기에 이 두 가지 중요한 표현이 나오는데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한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들이 가치에 대해서 아무런 근거도, 실력도, 목적도 가지지 못하면 사람은 두려울 수밖에 없다. 방향을 모르고 무엇을 해야 될지 모르고 어디로 가야 될지를 모르면, 사람은 두려울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아합이 저지른 모든 일들은 그가 방향도 잡을 수가 없고 목표도 잡을 수가 없는 상태에서 그 불안을 표현하는 데, 하필 왕이었으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된 것이다.
그 하나의 잘못이, 그 하나의 어떤 자폭이 자신에게 입힌 것보다 백성에게 더 많이 피해를 입히게 되는 것이다.
악한 뜻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가 허망하며, 당황하며, 마음이 약하며 그러며 실력 없는 것들이 빚어낸 현실들이 백성에게 다 고통을 안기게 된 것이다.
★부끄럽다는 것은 그가 한 존재로서 가치 있는 것을 가질 수 없었다는 말이다. 가치. 존재의 가치. 존재의 근거. 존재의 핵심. 존재의 운명 같은 것들이 만들어질 수가 없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과 어떻게 다르냐면 이런 면에서 다르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존재의 근거를 가진다. 우리의 존재의 근거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근거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다.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다. 그래서 그분이 나를 위해서라면 못 하실 것이 없다, 이것이 우리 삶에 큰 힘이다.
그리고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겠다. 여기에만 명예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것들이 없으면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오해하는 것이, 성경에는 당연히 착한 자와 악한 자로 나뉘고, 착한 일과 나쁜 일로 나뉘는 교훈이 성경책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하나님을 모르는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나누는 것보다 크다.
예를 들면, 우리 가장 기본적인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가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 라는 것은 가장 간단한 설명이다. '예수 믿고 천당 가자'에서 이제 하나 더 설명이 들어가면 '예수 믿고 지옥 가지 말고 천당 갑시다.' 하나 더 들어간다. '지옥 가지 말고 천당 가는데 살아 생전에 주를 위하여 쓸모있는 인생이 됩시다' 이렇게 됐다.
거기까지가 아마 대부분의 이제 성도들에게는 기독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그래서 신자로서 가지고 있는 자기 이해, 자기 인생의 이해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성경은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가는 문제보다 하나 더 가서, 지옥으로 가게 책임을 졌던 우리가 구원을 얻어서 '하나님이 원래 창조할 때 목적했던 인간을 완성하려 하신다'를 현실로 줬다고 이제 또 한 칸 더 가야 된다.
그래서 우리가 '그게 뭔가?' 할 때, 우리 방금 인용한 창세기와 같이 '그가 부끄러워했다'라는 것은 벌을 받아 지옥 가서 부끄러워한 것이 아니라, 죄인 된 현실에서의 부끄러움이다.
●그 부끄러움을 지우면 명예가 되는 게 아니다. 거짓말을 지우면 정직이 되는 게 아니다. 명예라는 것은 부끄러운 것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뭔가 실력과 내용이 나아가야 되는 것이고, 정직이라는 것도 거짓말에서 돌이켜 정직에 해당하는 어떤 더 책임 있는, 더 분별 있는, 더 고급한 길로 가는 것이 정직이듯이,
●기독교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가치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서 빗나가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 아들로 우리를 다시 빚어 원래 창조의 목적을 이루게 하셨다, 그 일에 예수가 근거가 되고, 내용이 되고, 현실이 되고, 완성이 된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굵은 이해여야 한다.
그러니까 이 순종이라는 것은 이제 불순종을 지워버리면 순종이 나오는 건 아닌거다, 당연히.
순종은 어디에 자기를 가서 붙들어매고 선택하여 무언가를 해야 되는 일이지, 안 하는 걸 중단하는 것이 순종일 수는 없다.
그러니까 불순종을 안 하는 것, 내가 자주 하는 표현 같이, 잘못을 회개하는 게 회개가 아니라, '잘해야 되는 것'을 하겠다고 나서야 되는데, '잘해야겠다'를 하려고 나서면 그게 간단하게 잘하게 되지 않더라, 이것이 신앙 현실이다.
●잘하려고 하는데 안 되는 것은, ' 우리가 잘하는 것'이 소원을 하면, 간절하면 되는 게 아니라, 실력으로 돼야 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게 어렵다.
그러니까 순종을 하지 않으면, 그는 헛되었던 데서부터 하나도 진전이, 진보가, 나아감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아합왕에서 보는 이 열왕기 사건의 중요한 대비, 극적인 이 장면은 엘리야는 그 시작에서 다른 모든 선지자들과 달리 자발성이 굉장히 강조된다. 그는 처음 등장부터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게 아니라, 자기가 뛰어나온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자기가 뛰어나오고, 갈멜산 전투에서도 그것은 하나님이 명한 것이기보다 엘리야가 그렇게 하자고 아홉에게 도전장을 내고 하나님께 구한다.
하나님만이 이 백성들의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하나님의 종인 것과 하나님의 뜻을 지금 행하고 있다는 것을 증언, 증거해 주십시오, 이렇게 엘리야는 ' 자발적으로', 말하자면 불순종을 넘어 '순종'의 자리로 와 있는 것이다.
아합은 순종을 할 데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자기를 팔아먹었으니까, 헛된 데다가. 그는 무력감과 불안과 공포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는 왕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이 계속 하는 얘기가 뭐냐 하면, 우리 보고 '너희는 예수를 믿어서 새 사람이 됐으니, 너희를 다른 데 팔아먹은 것을 예수께서 오셔서 너희 마음을 새로 사 왔으니, 새로 예수가 너희를 사서 자기의 백성으로 삼았으니, 그 길을 갈 수 있다, 순종해라.' '이 명예로운 길을 가라.'
여기는 안 가면 지옥 가는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고 태어났으면 그의 자녀답게 그의 구원을 그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어라.'
★●■뭘 이루게 하시는가? 업적을 남기거나 무슨 큰 사건으로 여러분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인간성을 만드는 거다.
★●■'인간성'이란, 우리 세상에서는 인문학적으로 '인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형상', '예수를 그리스도를 담는 것.'
그래서 이 에베소 4장 17절 이하의 말씀은, 그 예수 없는 자들의 선택의 여지 없는, 파괴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부끄러움 그리고 두려움, 무지, 방황하는 사람들과 이제 이렇게 대비한다. 20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진데,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라.'
이렇게 되는 거다.
★이건 대단히 명예로운 초대이다.
이렇게 빈 캔버스를 하나 주고 '그림을 한번 그려봐' 하는 것 같고, 여기 피아노를 주고 '한번 쳐봐' 그러는 것 같다.
그게 어떤 음악을 만들고 어떤 미술을 만드는 예술의 경지가 되는 것은, 많은 시간에 걸친 훈련이 있어야 되지만 ●그런 것이 주어진 것으로 놀라야 된다.
어느 바이올리니스트가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싶어 하는 학부형들에게 이런 놀라운, 뭐라 그럴까, 지혜를 준다.
애한테 음악 하나는, 악기 하나는 다루게 해주고 싶은데, 안 한다는 거다. 이제 시키면 그러니까 이렇게 하란다. 바이올린을 하나 모퉁이에 집 모퉁에 갖다 놓고, '저게 뭐야?' 그러면, '앗, 아냐. 만지지 마, 만지지 마. 만지면 안 돼.' 또 만지려고 하면, '어, 안 돼. 이거 만지는 거 아니야. 이건 굉장히 귀한 거야. 넌 만지면 못 써.' 그래서 못 만지게 하고, 애가 자꾸만 보채게 만들어야 된다고 한다.
그래 갖고, '뭐야?' '아니야. 넌 하면 안 돼.' '이게 뭔데?' '이렇게 하는 거야~' '나도 한 번 해봐~' '안 되는데.. 너 그거 그렇게 아무나 하는 거 아닌데..'
그렇게 호기심을 갖고 한 번 하면, '허, 신기하게 소리가 나는구나.. 이게 도, 이게 레, 이게 미야..'
이렇게 그리고 자꾸 끊으라고 한다. '오늘은 그만이야. 이제 더 하면 못써.' '아, 조금만 더 할게요.'
그 재미를 알아가게 한다.
우리 기독교는 너무 왕창 처음부터 '이거 해주면 뭐든지 다 해줄게.' 이러니까 그냥 시들해져 버린 것 같이,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는데요 뭐..' 이렇게 아주 배짱 좋은 그런, 믿음이 좋은 게 아니라 배짱이 좋은 신자들이 된 것 같다.
여기에 예수의 부름을 받은, 고급한 기회를 선물로 받은,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자랑과 명예'를 알게 하는,
'우리 인생의 가치'가 이 무슨 큰 영웅들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의 ●'일상과 반복되는 소소함 속에 하나님이 기적을 담는다'는 것을, 우리로 '배우게 하는 인생이라는 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거다.
이 아합에게도 사실은 따지고 보면, 아합이 특별난 유별난 마귀가 아니라, 그런 악당이 아니라,
예수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닐 수 밖에 없는 것 같이,
예수가 있다면 아무것도 아닐 수가 없고, '언제나 위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데로 우리를 불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얼마나 열려 있는지..
엘리야같이 뛰어가는 것까지 할 필요 없다. 영웅주의가 되는 영웅주의적 역사관을 가지게 되면, 그 영웅보다 못난 사람을 비난하는 것으로 자기 책임을 속이게 된다는거다. 누구를 위인으로 존경하는 것이 전부가 되고 만다는 거다.
그런 사람들이 구한 나라, 이순신이 구한 나라의 백성들은 그럼 이순신만 생각하고 울면서 지내야 되는가? 그럴 리는 없다. 군인들이 나가 피 흘려 나라를 지키고 나면, 뭘 지켰다는 건가? 백성을 지키고 가정을 지킨 거다.
그 속에 하나님이 담는 무한한 약속들이 꽃 피는 것이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 교회사에 나오지 않지만,
모든 그를 믿는 자들의 ●'삶 속에' 감사와 찬송으로 녹아나듯이, 우리의 '현실'에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고, 자라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꼭 기억해야 되는 거다.
시편 1편에 의하면;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 같으니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음 같도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참 다르다.
그래서 하나씩 더 알아가는, 잘못을 지우고 만족하지 말고 하나씩 더 해나가는 일이 우리들 생애에, 오늘마다 주어졌다는 것을 기억하는, 발전하고, 크는, 자랑하고 감사할 것이 많은 새해가 되기를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각을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부르셨다. 나 하나를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님이다.
그 인생을 사는 자가 가지는 기적과 찬송과 자랑을 우리 모두 누려야 한다. 그걸 자랑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로 인하여 이 세상이 구원 받고 소망을 보아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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