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우리는 억울할지 모른다. 우리는 당할지 모른다. 고통과 슬픔과 억울함과 어쩌면 모욕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자인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얘기할 수 있어야 된다. 그게 신자다

nazunzaro 2021. 1. 2. 12:28
(*빼앗길수없는기쁨 01)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 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13)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함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내용으로 삼아 그 속에 있는 우리를 향하신 약속들과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기쁨을 확인하고자 한다.
주님의 생애를 보면 그분의 생애 속에 웃으셨다는 기록이 없다. 민망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슬퍼하시고, 우시고 하는 모습들은 있어도 기뻐하신 것 같은 모습은 별로 안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주님께서는 언제나 그분의 평안과 그분의 기쁨을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또 거기서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신앙인들이 오늘날 가장 크게 관심을 갖는 갖고 있는 것 중 하나가 기쁨과 복과 승리이다.
그런데 신자들을 만나보면 기쁨 속에 있거나 승리하고 있거나 평화 속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렵다. 그것은 표정에서부터 그렇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기쁨이라든가 혹은 평안이라는 단어를 우리가 너무 세상적 차원에서 찾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정의를 내리기에 세상적인 언어를 도입했을 뿐이고 내용의 본질상으로는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키 위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권면 하시는 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이다. 내가 아버지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 희가 내 사랑 안에 거하라 그러면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충만 하리라 이것이다.

■이 사랑이라는 것은 거함에 관한 다른 표현으로, 《하나 된 것이야말로 기쁨의 유일한 조건》인 것을 알게 된다.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를 사랑하셨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같이 저희도 우리와 한 가지로 하나 되게 한 자리에 초대를 받고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필연적인 결과로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식으로 기쁨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된다.

■우리의 기쁨은 그런 의미에서 주님께서 가지셨던 기쁨이고, 그 기쁨은 아버지께서 주님을 보내신 그 일에 동참하고 《그 마음과 뜻과 계획과 성품에 동참한 자가 당연히 가지는 어떤 감정》인 것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 같은 우리의 기쁨들하고는 거리가 멀다.
우리의 기쁨이란 나의 욕심과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지만 지금 여기서 말씀하는 기쁨은 하나님의 소원과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또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만 다 해놓고 하나님 혼자 기쁨을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분께서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일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선한 것이기 때문에 기쁨이라는 것이 당연히 수반될 수밖에 없는 성질이라는 의미에서 기쁨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기쁨에 대해 성경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확인시켜주고 싶어 한다.

"나를 보내 신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요 8:29)

■기쁨은 언제나 《그 분과 함께하는 것》임을 알아야 된다. 신자란 이런 사람이어야 된다.
신자의 존재는 바로 이런 영역과 이런 본질과 이런 원리로 만들어지고 움직여지고 그것으로 힘을 얻는 자이어야 된다.

환경과 조건을 개선해 준다는 약속이 성경에 없다. 그것으로 인한 기쁨도 없다. 신앙의 기쁨을 환경과 조건을 개선해주는 것으로 약속된 적이 없다.

■신자의 존재와 삶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것이요, 그 신자를 보는 자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 같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얘기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것이 신자의 존재이다. 우린 세상의 환경을 바꾸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밖에 살 줄 모르는 자들이 나를 봄으로써 하나님을 보며, 빛을 보며, 생명을 보며, 그 향기를 맡도록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것을 다 가지고 오면 쉬게 하는 곳이라고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대신 져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짐지는 법을 가르쳐 주시겠다고 그랬을 뿐이다. 내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신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짐 자체가 어렵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을 지는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짐은짐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을 지는 자세에 있는 것이다

별 것 아닌데 억울하면 큰 싸움이 된다.
우리는 억울하기 때문에 짐이 언제나 무거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에 그 짐이 안 무겁다고 말씀하신다. 그 일이 억울하지 않은 일이라는 말이다.

주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을 우리가 생각하면 얼마나 억울한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억울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기뻐하시는 일을 하러 오셨으며 아버지와 하나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안에 거하신 분이며, 그분의 기뻐하심을 입은 분이며, 그것이 그분의 기쁨이기도 한 분이다.

거기에 우리를 초대한 것이다. 신자란 이것이다. 삶의 전 영역 아니, 존재 자체가 이것 하나 때문에 있어야 된다.

■우리는 억울할 지 모른다. 우리는 당할 지 모른다. 고통과 슬픔과 억울함과 어쩌면 모욕을 당할 지도 모른다. 사람이 침을 뱉으며, 뺨을 치며, 수염을 뽑는, 시편 53편에 그분의 모습이 그렇게 표현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모든 묘사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지금 말씀하신다. 내 기쁨과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그것이 신자이다.

■신자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 4:4-5)

기쁨과 관용이 같이 붙어 나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보통 우리의 기쁨이라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해 흔쾌한 맛이 나올 때 나오는 것 아닌가?
관용이란 말이 좋아서 관용이지 약자니까 참는 것 아닌가? 어떤 의미에서 굴복하고 굴욕을 감수하는 것 아닌가? 거기 왜 기쁨이 붙어 나오는가?

우리만이 가진 자이다. 우리만이 생명의 증인이다. 우리만이 하나님 안에 초대를 받은 자이다. 우만이 빛을, 생명을, 진리를 소유하고 또 증거하는 자이다.
우리는 빼앗아도 빼앗길 수 없는 것을 갖고 있으며, 방해받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시야를 가리는 것으로 그의 향기를 막을 수 없듯이 우리의 존재를, 우리의 가치를 어느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 그것이 기쁨이다. 세상이 우리를 협박하고 막고 방해하는 것으로 떨지 말라는 말이다.
■억울해 하지 말라. 관용이다. 그것이 관용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 뢰라" (빌 4:6)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 왜 붙는지 알 것이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7)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바로 이 하나님의 평강에 다 맡기라. 십자가가 실패의 길이 아니다. 돌에 맞아 죽어도 그것으로 망하지 않는 인생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는 세상적으로 싸우려고 하고 세상의 것을 목표로 해서 쓸데없는 싸움에 우리의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인가? 신자인가? 아닌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우리의 삶의 방법과 원리를 다시 한 번 말씀을 통해서 정리해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