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장에서 성령이 온다는 예수의 약속이 나온다. 예수의 오심, 성령 하나님의 오심, 이런 일들은 다 성부 하나님이 작정하고 목적하는 일을 위하여 일어난 일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 예수를 보낸 아버지, 기독교의 주인인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건가? 우리에게 무엇을 채우려는 건가? 어떻게 그 일을 하려는 건가?
■이것이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어야 되고 기본이어야 맞다.
성령이 우리에게 온다는 것은 지금 예수 성자가 온 일, 그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일을 이어서 등장을 한다. 그리고 이 일들은 전부 어떤 일들이 계획과 차질을 빚어서 갑자기 변경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작정된 일이라고 성경은 주장하고 있다
■바로 이 문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 건가에 대한 성경의 증언이 에베소서 1장에 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기를 목적했다'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권력이거나 강요가 아니라 우리의 기쁜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 어떤 권력을 위하여 묶여 있어서 굴복해야 되는 일이 아니라, 그의 영광이 우리의 기쁨이기 때문에 마음 깊은 충만한 찬송을 그 앞에 바치게 될 것이라는 약속 속에 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미리 준비한 것이라서 성경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표현같이, 《예수 안에서 예정하사, 창세 전에 예정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라고 누누히 반복이 된다.
그래서 예수가 오심의 이 일은 가장 중요한 전환점을 가지고 그 반전된 《하나님의 어떤 목적을 향한 이 새로운 국면의 보증과 그 약속의 절대적인 증거가 성령이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런 단어들은 한국 교회에서도 다들 쓰고 있는 단어지만, 성경을 조금 더 깊이 봐서, 이 예수의 오심과 성령의 오심이 갖는 하나님의 뜻에 있어서의 이해를 우리 각 개인들이 이해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예수의 오심은 판을 바꾸는 것이다.
예수가 오기 전에는 죽음, 사망이 왕이었는데, 우리 인류가 하나님을 배신함으로서 자초한 죽음의 세계였는데, 《예수가 오셔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가치에, 의미에 있어서 그렇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가장 중요한 그 반전을 만드는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 말이다. 그래서 모든 구원에 관한 기독교의 약속에 관한 표현들은 《예수 안에서》그렇게 이제는 판이 바뀐 것이다.
(예수의 가치관, 인생관, 우주관으로 판이 바뀐 것이다)
■이 판이 바뀌었다는 걸 꼭 기억해야 되는 것이,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에 대한 비유를 이렇게 복잡하게 해야 됐던 이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너희가 나에게 붙어있으면 열매를 많이 맺고 내게 분리되면 버려서 썩고 불태워지느니라"라는 이 비유를 우리는 '붙으면 복 받고 떨어지면 벌 받는다, 붙으면 천국 가고 떨어지면 지옥 간다'로 이해하고 있는데,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는, '이제 내가 열매를 맺는, 열매가 승리를 하는 포도나무가 되었으니, 너희는 나의 가지로서 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느니라'를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미 예수 안에서 그의 나무가지가 된 거다. 기독교 가치체계로 바뀐 판에, 그 안에 들어 온 것이다.)
그래서 이 설명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13장에 씨 뿌리는 비유를 보자. 씨뿌리는 비유에서 길 가에 속하는 밭도 아닌 땅과 그 다음에 돌짝 밭, 가시떨기 밭은 아무리 좋은 씨를 뿌려도 그 밭이 모든 걸 삼켜서 무효화시키지 결실할 땅이 아니었다. 마지막 땅은 많은 결실을 하는데, 그 이유가 옥토이기 때문이다. 그걸 우리가 쉽게 `좋은 밭이 되자. 옥토가 되자` 이게 성경이 뜻하는 얘기가 아니라,
■'이제 비로소 내가 옥토를 만들었으니 너희는 마음껏 열매를 맺어라` 이렇게 대비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이미 옥토가 된거다)
우리가 가시떨기나 돌짝밭을 갈아엎어서 옥토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오셔서 죽음이 운명이었던 세상을 뒤집어 생명과 영광인 세상을 만들었으니,
■'내 안에서 마음껏 자라라'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며, 16장에서는 성령이 오시는 이유인 것이다.
■성령이 와서서 이 옥토에 열매를 맺을 것이다.
(예수 안에서 바뀐 가치체계로, 바뀐 세계관으로, 바뀐 인생관으로 마음껏 자라고 풍성한 그 열매를 누리라는 거다. 성령의 열매를 말이다)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바와 같이
●육체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 소개되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온유와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만들어질 것이다.
이걸 선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은 우리가 사망 아래 있었을 때는 무엇을 하든지 다 끝이 망하는 것, 끝이 다 허무한 것이었다면, 지금 우리가 속한 나라 새로운 세상에서는 무엇이든지 승리하는 무엇이든지 이기는 데라고 얘기를 한다.
로마서 5장을 보면;
죽음이 왕노릇 할 때는 그걸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건 우리 역사 인생에서 보는 거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아담 하나의 불순종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면,
이제 하나님이신 성자 하나님이 이 죽음의 세계를 뒤집어 영생의 세계, 부활의 세계를 만들었다면, 그때 죽음이 왕 노릇 한 것보다 이 은혜와 승리의 왕노릇은 더 크고 더 확실할 것 아니냐?` 이렇게 대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다른 세계에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영생과 영광과 기쁨으로 승리로 데려가기 위하여 ■《새로 만든 세상에 속했다》는 걸 아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일이 죄악 된 세상에서 율법을 받았을 때, 잘잘못에 관한 기준 때문에 율법이 `이걸 하지 마라, 저걸 하지 마라`를 극복하지 못했던 인류의 역사와 우리 인생에서의 현실들 때문에 《지금 이 새로운 영생의 약속들은 잘잘못을 심판하기 위하여 꾸중하기 위하여가 아니라》,
■더 나은데로, 더 좋은 데로 하나님이 뜻하는 영광으로 이끌기 위하여 우리를 흔들고 있다는 것으로 대체하는 일을 놓치고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결국은 유익과 승리로 가도록 되어 있다. 어떻게? 잘못한 것이 우리늘 고쳐놓을 거다. 후회하게 할 거다. 더 나은 사람을 만들 거다.
옛날 사망이 왕노릇할 때는 아무리 잘해도 그 잘한 것이 아무 본인의 운명과 승리와 어떤 만족에 아무 기여가 안됐던 것같이, 이제는 우리를 죽이려 하고 우리가 절망하고 우리가 자책하는 모든 것들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더 생각하게 하고 더 낫게 만들 것이라고 얘기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것이 생명의 세계가 된 것이다. 《율법의 세계, 사망의 세계가 아니라, 이쪽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약속의 세계 속에 있게 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가 받으신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 만든 세상이다. 그게 예수를 믿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금 전에 얘기한 것같이, 우리는 옛날 사망 아래 있었던 때, 율법 아래 묶였던 때와 지금이 어떻게 다른지 모른다.
율법과 은혜의 시대를 대비하는 고린도후서 3장의 말씀에서는 율법은 돌에 새긴 법이라 그런다. 은혜의 법은 심비, 마음에 새긴 법이라고 한다.
`법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 이렇게 또한 대비한다.
법이 죽이는 것이라는 것은, 법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령이다. 그 금령조차 지키지 못했다. 아담도 못 지켰고 그 이후에 모든 인류가 금령을 지킬 수가 없었다. 거짓말하지 마라, 교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밉게 굴지 마라를 다 지킬 수가 없었다. 여기는 그래서 죽이는 법이다.
■'영은 살리는 법이라'는 것은 뭘 하지 마라가 아니라, '사랑해라, 용서해라, 기뻐해라'가 등장하는 것이다. 세상이 다르다. 여기는 그걸 못한 게 심판을 초래하는 게 아니라, 그걸 못한 건 다만 부족한 것이다.
더 해야 된다. 더 잘하고 더 풍성하고 더 아름답고 더 깊고 더 놀랍게 되는 그런 세상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것을 누가 한다고? 성령이 하실 것이다.
성령은 앞에 있었던 돌에 새긴 법과 어떻게 비교가 됐나? 마음에 새긴 법.
새 언약은 다르다. 이 새 언약의 다른 것. 그것이 우리 마음 판에 박아새겨서, 우리라는 존재의 가장 중심 근거가 되는 심장에 하나님의 마음을 박겠다는 것이다.
'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는 눈물 어린 눈을 보면서 함께 운 적이 없었다
단순한 웃음에도 그토록 기뻐한 적이 없었다
잠든 아이를 보며 새벽까지 깨어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토록 작은 존재가 그토록 많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내가 누군가를 그토록 사랑하게 될 줄 결코 알지 못했었다
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는
내 자신이 엄마가 되는 것을 그토록 행복하게 여길 줄 미처 알지 못했었다
내 몸밖에 또 다른 나의 심장을 갖는것이 어떤 기분일지 몰랐었다'
이 시에서 자식이 어떻게 느껴진다고? 내 몸 밖에 또 다른 나의 심장을 보게 됐다고..
그 성령이 오는 거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심장을 박으시어 자신 밖에 자신의 또 다른 심장을 보는 것, 그게 성령이 오심이다. 놀랍지 않은가?
■기독교를 우리는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기독교가 우리의 잘잘못에 묶여서,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일을 하자, 잘못하면 벌 받을 거다'가 대표적으로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우리들의 공포에 있다. 어떤 공포? 회개를 끊임없이 하는 것, 잘못을 지우느라고 잘할 틈이 없는 것.
우리 과거를 지우지 말고 그게 후회스러우면 지금 잘하라. 지금!
■뭘 하라 그랬나? 제일 쉬운 것, 웃으라고 했다.
왜 못 웃는건가? 왜? 상대가 나를 얕볼까 봐? 알랑방구 뀌는 걸로 볼까봐? 뭘 오해할까 봐? 웃는다는 건 그런 게 아니다. 그냥 서비스가 아니다. 아첨이 아니다. 비로소 넘쳐나는 거다. 자신의 존재와 운명에 대한 자신이 있는 거다. 지금 완벽해서 웃는 게 아니다. 소망이 나를 붙잡고 안 놓아 주는 걸 아는 안심, 자신감에서 오는 거다.
■기독교를 이렇게 이런 적극적인 데로의 기회, 위대한 취급, 하나님께서 나를 위대하게 취급해 준다는 걸 알지 못하면 감사가 있을 수가 없다.
로마서 8장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아무래도 좋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한심한가?
■'어떤 기회가 주어졌는지 해 봐라. 해 봐라. 손해 볼 것 없다. 네가 해 봐라. 네가 그렇게 돼라' 그렇게 요구하는 것이 신자의 현실, 인생인 거다. '살아 보라.' 모든 위협과 시험 속에 있을지 모른다.' 거기서 우리가 실력이 없고, 못 이길 것 같은 절망이, 슬픔이, 비명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우릴 키울 걸 믿는다.
그것 모두가 절대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하고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없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성경이 우리에게 해 주는 얘기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22-24)
■《그 새 사람이 되라는 건 도덕적이거나 기능적이지 않다. 정체성이다. 운명에 있어서다.
하나님께서 그런 하루하루를 나로 현실을 살게 하사, 오늘 만나게 하는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이 나보고 자신있게 해 보라고 주는 기회요, 현실이요, 내가 주인공인 날들이다》.
그런 믿음과 그런 자랑이 우리의 삶을 힘이있고 빛이 나고 기적이 되게 하실 줄로 믿는다.
예수 믿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 놀라운 인생을 살아내고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인생에서 누리고 자랑하고 열매 맺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거다.
우리가 믿는 예수, 예수를 보낸 아버지, 기독교의 주인인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건가? 우리에게 무엇을 채우려는 건가? 어떻게 그 일을 하려는 건가?
■이것이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어야 되고 기본이어야 맞다.
성령이 우리에게 온다는 것은 지금 예수 성자가 온 일, 그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일을 이어서 등장을 한다. 그리고 이 일들은 전부 어떤 일들이 계획과 차질을 빚어서 갑자기 변경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작정된 일이라고 성경은 주장하고 있다
■바로 이 문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 건가에 대한 성경의 증언이 에베소서 1장에 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기를 목적했다'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권력이거나 강요가 아니라 우리의 기쁜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 어떤 권력을 위하여 묶여 있어서 굴복해야 되는 일이 아니라, 그의 영광이 우리의 기쁨이기 때문에 마음 깊은 충만한 찬송을 그 앞에 바치게 될 것이라는 약속 속에 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미리 준비한 것이라서 성경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표현같이, 《예수 안에서 예정하사, 창세 전에 예정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라고 누누히 반복이 된다.
그래서 예수가 오심의 이 일은 가장 중요한 전환점을 가지고 그 반전된 《하나님의 어떤 목적을 향한 이 새로운 국면의 보증과 그 약속의 절대적인 증거가 성령이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런 단어들은 한국 교회에서도 다들 쓰고 있는 단어지만, 성경을 조금 더 깊이 봐서, 이 예수의 오심과 성령의 오심이 갖는 하나님의 뜻에 있어서의 이해를 우리 각 개인들이 이해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예수의 오심은 판을 바꾸는 것이다.
예수가 오기 전에는 죽음, 사망이 왕이었는데, 우리 인류가 하나님을 배신함으로서 자초한 죽음의 세계였는데, 《예수가 오셔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가치에, 의미에 있어서 그렇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가장 중요한 그 반전을 만드는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 말이다. 그래서 모든 구원에 관한 기독교의 약속에 관한 표현들은 《예수 안에서》그렇게 이제는 판이 바뀐 것이다.
(예수의 가치관, 인생관, 우주관으로 판이 바뀐 것이다)
■이 판이 바뀌었다는 걸 꼭 기억해야 되는 것이,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에 대한 비유를 이렇게 복잡하게 해야 됐던 이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너희가 나에게 붙어있으면 열매를 많이 맺고 내게 분리되면 버려서 썩고 불태워지느니라"라는 이 비유를 우리는 '붙으면 복 받고 떨어지면 벌 받는다, 붙으면 천국 가고 떨어지면 지옥 간다'로 이해하고 있는데,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는, '이제 내가 열매를 맺는, 열매가 승리를 하는 포도나무가 되었으니, 너희는 나의 가지로서 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느니라'를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미 예수 안에서 그의 나무가지가 된 거다. 기독교 가치체계로 바뀐 판에, 그 안에 들어 온 것이다.)
그래서 이 설명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13장에 씨 뿌리는 비유를 보자. 씨뿌리는 비유에서 길 가에 속하는 밭도 아닌 땅과 그 다음에 돌짝 밭, 가시떨기 밭은 아무리 좋은 씨를 뿌려도 그 밭이 모든 걸 삼켜서 무효화시키지 결실할 땅이 아니었다. 마지막 땅은 많은 결실을 하는데, 그 이유가 옥토이기 때문이다. 그걸 우리가 쉽게 `좋은 밭이 되자. 옥토가 되자` 이게 성경이 뜻하는 얘기가 아니라,
■'이제 비로소 내가 옥토를 만들었으니 너희는 마음껏 열매를 맺어라` 이렇게 대비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이미 옥토가 된거다)
우리가 가시떨기나 돌짝밭을 갈아엎어서 옥토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오셔서 죽음이 운명이었던 세상을 뒤집어 생명과 영광인 세상을 만들었으니,
■'내 안에서 마음껏 자라라'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며, 16장에서는 성령이 오시는 이유인 것이다.
■성령이 와서서 이 옥토에 열매를 맺을 것이다.
(예수 안에서 바뀐 가치체계로, 바뀐 세계관으로, 바뀐 인생관으로 마음껏 자라고 풍성한 그 열매를 누리라는 거다. 성령의 열매를 말이다)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바와 같이
●육체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 소개되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온유와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만들어질 것이다.
이걸 선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은 우리가 사망 아래 있었을 때는 무엇을 하든지 다 끝이 망하는 것, 끝이 다 허무한 것이었다면, 지금 우리가 속한 나라 새로운 세상에서는 무엇이든지 승리하는 무엇이든지 이기는 데라고 얘기를 한다.
로마서 5장을 보면;
죽음이 왕노릇 할 때는 그걸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건 우리 역사 인생에서 보는 거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아담 하나의 불순종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면,
이제 하나님이신 성자 하나님이 이 죽음의 세계를 뒤집어 영생의 세계, 부활의 세계를 만들었다면, 그때 죽음이 왕 노릇 한 것보다 이 은혜와 승리의 왕노릇은 더 크고 더 확실할 것 아니냐?` 이렇게 대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다른 세계에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영생과 영광과 기쁨으로 승리로 데려가기 위하여 ■《새로 만든 세상에 속했다》는 걸 아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일이 죄악 된 세상에서 율법을 받았을 때, 잘잘못에 관한 기준 때문에 율법이 `이걸 하지 마라, 저걸 하지 마라`를 극복하지 못했던 인류의 역사와 우리 인생에서의 현실들 때문에 《지금 이 새로운 영생의 약속들은 잘잘못을 심판하기 위하여 꾸중하기 위하여가 아니라》,
■더 나은데로, 더 좋은 데로 하나님이 뜻하는 영광으로 이끌기 위하여 우리를 흔들고 있다는 것으로 대체하는 일을 놓치고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결국은 유익과 승리로 가도록 되어 있다. 어떻게? 잘못한 것이 우리늘 고쳐놓을 거다. 후회하게 할 거다. 더 나은 사람을 만들 거다.
옛날 사망이 왕노릇할 때는 아무리 잘해도 그 잘한 것이 아무 본인의 운명과 승리와 어떤 만족에 아무 기여가 안됐던 것같이, 이제는 우리를 죽이려 하고 우리가 절망하고 우리가 자책하는 모든 것들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더 생각하게 하고 더 낫게 만들 것이라고 얘기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것이 생명의 세계가 된 것이다. 《율법의 세계, 사망의 세계가 아니라, 이쪽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약속의 세계 속에 있게 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가 받으신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 만든 세상이다. 그게 예수를 믿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금 전에 얘기한 것같이, 우리는 옛날 사망 아래 있었던 때, 율법 아래 묶였던 때와 지금이 어떻게 다른지 모른다.
율법과 은혜의 시대를 대비하는 고린도후서 3장의 말씀에서는 율법은 돌에 새긴 법이라 그런다. 은혜의 법은 심비, 마음에 새긴 법이라고 한다.
`법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 이렇게 또한 대비한다.
법이 죽이는 것이라는 것은, 법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령이다. 그 금령조차 지키지 못했다. 아담도 못 지켰고 그 이후에 모든 인류가 금령을 지킬 수가 없었다. 거짓말하지 마라, 교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밉게 굴지 마라를 다 지킬 수가 없었다. 여기는 그래서 죽이는 법이다.
■'영은 살리는 법이라'는 것은 뭘 하지 마라가 아니라, '사랑해라, 용서해라, 기뻐해라'가 등장하는 것이다. 세상이 다르다. 여기는 그걸 못한 게 심판을 초래하는 게 아니라, 그걸 못한 건 다만 부족한 것이다.
더 해야 된다. 더 잘하고 더 풍성하고 더 아름답고 더 깊고 더 놀랍게 되는 그런 세상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것을 누가 한다고? 성령이 하실 것이다.
성령은 앞에 있었던 돌에 새긴 법과 어떻게 비교가 됐나? 마음에 새긴 법.
새 언약은 다르다. 이 새 언약의 다른 것. 그것이 우리 마음 판에 박아새겨서, 우리라는 존재의 가장 중심 근거가 되는 심장에 하나님의 마음을 박겠다는 것이다.
'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는 눈물 어린 눈을 보면서 함께 운 적이 없었다
단순한 웃음에도 그토록 기뻐한 적이 없었다
잠든 아이를 보며 새벽까지 깨어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토록 작은 존재가 그토록 많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내가 누군가를 그토록 사랑하게 될 줄 결코 알지 못했었다
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는
내 자신이 엄마가 되는 것을 그토록 행복하게 여길 줄 미처 알지 못했었다
내 몸밖에 또 다른 나의 심장을 갖는것이 어떤 기분일지 몰랐었다'
이 시에서 자식이 어떻게 느껴진다고? 내 몸 밖에 또 다른 나의 심장을 보게 됐다고..
그 성령이 오는 거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심장을 박으시어 자신 밖에 자신의 또 다른 심장을 보는 것, 그게 성령이 오심이다. 놀랍지 않은가?
■기독교를 우리는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기독교가 우리의 잘잘못에 묶여서,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일을 하자, 잘못하면 벌 받을 거다'가 대표적으로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우리들의 공포에 있다. 어떤 공포? 회개를 끊임없이 하는 것, 잘못을 지우느라고 잘할 틈이 없는 것.
우리 과거를 지우지 말고 그게 후회스러우면 지금 잘하라. 지금!
■뭘 하라 그랬나? 제일 쉬운 것, 웃으라고 했다.
왜 못 웃는건가? 왜? 상대가 나를 얕볼까 봐? 알랑방구 뀌는 걸로 볼까봐? 뭘 오해할까 봐? 웃는다는 건 그런 게 아니다. 그냥 서비스가 아니다. 아첨이 아니다. 비로소 넘쳐나는 거다. 자신의 존재와 운명에 대한 자신이 있는 거다. 지금 완벽해서 웃는 게 아니다. 소망이 나를 붙잡고 안 놓아 주는 걸 아는 안심, 자신감에서 오는 거다.
■기독교를 이렇게 이런 적극적인 데로의 기회, 위대한 취급, 하나님께서 나를 위대하게 취급해 준다는 걸 알지 못하면 감사가 있을 수가 없다.
로마서 8장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아무래도 좋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한심한가?
■'어떤 기회가 주어졌는지 해 봐라. 해 봐라. 손해 볼 것 없다. 네가 해 봐라. 네가 그렇게 돼라' 그렇게 요구하는 것이 신자의 현실, 인생인 거다. '살아 보라.' 모든 위협과 시험 속에 있을지 모른다.' 거기서 우리가 실력이 없고, 못 이길 것 같은 절망이, 슬픔이, 비명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우릴 키울 걸 믿는다.
그것 모두가 절대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하고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없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성경이 우리에게 해 주는 얘기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22-24)
■《그 새 사람이 되라는 건 도덕적이거나 기능적이지 않다. 정체성이다. 운명에 있어서다.
하나님께서 그런 하루하루를 나로 현실을 살게 하사, 오늘 만나게 하는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이 나보고 자신있게 해 보라고 주는 기회요, 현실이요, 내가 주인공인 날들이다》.
그런 믿음과 그런 자랑이 우리의 삶을 힘이있고 빛이 나고 기적이 되게 하실 줄로 믿는다.
예수 믿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 놀라운 인생을 살아내고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인생에서 누리고 자랑하고 열매 맺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