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예수 믿는 게 뭔지 알아야 된다. 아무도 이해를 못한다. 본인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예수 믿는 것이다. 기꺼이 몰이해 적개심 분노를 감수하게 되고 오해 수모 받는걸 당연시 하게 된다

nazunzaro 2020. 10. 25. 00:05
1. 바울이 붙잡혀서 기꺼이 몰이해 적개심 분노 오해 수모를 감수하는 걸 본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바울은 어떻게 돌아왔는가? 이해를 했나? 납득을 했나?
아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직접 죽였고 잡으려고 그 공문을 받으러 다메섹으로 가다가 그의 길에 뛰어드신 예수님의 개입으로 그 길이 꺽였던 것이다. 주께서 나타나사 그를 그가 고집하고 가는 길에서 돌려세우고 주를 만나게 하고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이방으로 보내노라' 해서 돌아서는 거다. 회심이 아니고 붙잡혀, 부러져, ●새 길로 붙들리는 것이다.

이해가 가는가? 가장 큰 이해는 이거다. '거기에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어떤 조건과 자격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예수를 보내신 그 하나님 아버지가 그를 보내신 열심과 성의로 각각의 영혼을 붙잡아 그의 자녀로 붙들어 매지 않는 한 이 일은 불가능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런 얘기다.

이 말을 유대인들이 못 알아듣고 바울도 물론 몰랐었고 이제 돌아와 알게 되어
●기꺼이 이 몰이해, 적개심, 분노를 감수하게 되는 거다.
이건 아무도 알 수 없는 길을 가는 거다. 설명해서 되는 길이 아닌 길을 가기에 ●붙잡힌 것과 오해받는 것과 수모를 받는 길을 당연시 하게 된다 그 말이다.
보상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보내서 나를 만나서 꺾으셨듯이 ●한 영혼을 꺾지 않는 한 이 길로는 열매가 맺힐 수 없다'를 알아서 이 길을 지금 걷는 거다.
그것이 21장부터 끝장까지의 사도행전의 말미인 것이다.

●예수 믿는 게 뭔지 알아야 된다. 아무도 이해를 못한다. 본인도 이해가 가지않는 게 예수 믿는 것이다.

2.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우리를 부르심이다. 이걸 지켜서 구원 얻을 자는 없느데, 우리는 이걸 오용한다

율법은 왜 준 건가? 하나님이 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는 뜻이다.
이걸 지키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해내고 만들고 친히 부르고 축복하는 그의 자녀들에게는 ●이 자리,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우리를 불렀다는 것이다.
이걸 지켜서 구원을 얻을 자는 없는 거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진 것으로 자기네들이 자격이 있고, 자기네들은 다르다고 생각을 했고, 그 다르다는 우월감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막아버렸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하심으로 우리를 부르고 만들고 완성하신다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놓고, 하나의 규칙에 묶여 그 규칙을 지키는 스스들의 자부심과 열심과 희생의 모든 가치를 두어 차별화한 우월감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종교를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가장 중요하게 하나님이 지금 일하시는, 그 아들을 보내시고 모두를 부르시고, 모두의 죄를 사하시고, ●사랑으로 묶는 그의 품에 들어오기를 거부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동일한 실수를 하는데, 우리의 본성이 본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사람을 예수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밖에는 구별할 줄 모른다. 나는 믿었고 너는 믿지 않았다 이것이 눈에 불이 나게 한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안된다를,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자신의 존재와 고백과 삶 속에서 보여 하나님이 일하시게 하는데 자신을 맡기는 게 아니라, 감동시키고 설득하고 위협해서 하나님의 일을 막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비교밖에 만들어낼 줄 모르는 것, 그것이 언제나 신앙에 있어서는 커다란 적이다.

3. 무엇을 위한 구원인가? 하나님의 거룩에의 초청이며 거룩은 우리의 영광이다

출애굽기 20장에 주어지는 십계명의 시작이 뭐였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것으로 부터 그 다음이 요구된다.
'그 어떤 속박과 고난과 억울함에서 꺼내준 것이 다가 아니라,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훨씬 크게, 무엇을 위한 구원,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으로의 구원이다, 그러니 너희는 이 거룩으로 부름받은 줄 알라. 그 일을 위하여 내가 너희를 애굽의 종 되었던 데에서 꺼내었느니라. 그 꺼낸 힘보다 더 크게, ●너의 거룩을 위하여 나에게 순종하라. 나에게 은혜를 구하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율법을 요구함은 하나님의 거룩에의 초청이요, 거룩함은 우리들의 영광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잘못 이해했다. 저들의 어떤 어떤 신분증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그것 자체로만 만족했고, 차별하여 사람들 앞에 우월감을 가지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줄 몰랐다.
하나님이 계시는 것과 하나님이 일하심을 몰랐고, 그들이 자랑하는 그들의 조상이 누구인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누구인지, 즉 하나님이 그들의 이름으로 자신의 뜻과 선하심과 약속을 상기시키며 기념하며 자랑하며 그것을 완성하는 분인 줄 몰랐다.

4. 인간으로 오시고 십자가에 죽을 수 있는 바로 그 능력과 개입과 신실하심으로(어떤 하나의 기적으로가 아니라), 바울을 꺽는다. 그는 기꺼이 무지와 몰이해와 거부와 분노와 적대 속을 걷는다 우리도 복음의 위대함 하나로 우리 존재와 인생을 기꺼이 각오하고 살아야 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나에게 일하셨고 나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이 바로 이 일을 하신다는 걸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보는 거다.
●하나님이 그냥 목청을 높이시고, 어떤 하나의 기적을 이루어 당신을 증명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 인생, 그 후손들, 그렇게 만들어진 나라,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가 약속한 복을 이루심을 보여주는 것, 이게 구약이다.

그리고 그 절정에서 예수님께서 오시는 거다. 그의 영광과 거룩과 그의 자비와 긍휼과 그의 성실과 의지를 예수에게서 보는 것이다.
그것이 바울을 회개시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그걸 보고 놀란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오시고 십자가에 죽을 수 있는 바로 그 능력과 개입과 신실하심으로 바울을 꺽어놓는 것.

그리하여 바울이 '여러분 부형들이여 내 말을 들어소서, 나도 여러분과 똑같이 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일하고 계십니다.
●나를 보십시요. ●마음껏 죽이십시요.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 조상의 하나님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입니다. 이삭의 하나님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신 거다. 알아 들으라고, 회개하라고, 결정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
더 크게 하나님이 책임지고 결과를 만들기 위하여 역사와 인생에 뛰어들어오신 것이 예수님이다. 복음이다.
바울이 ●기꺼이 무지와 몰이해와 거부와 분노와 적대 속을 걷는거다.
다메섹 노상의 살기등등하여 걸어가는 바울에게 주께서 개입하셨듯이,
●바울의 모든 적대행위 속을 하나님의 손길로 관통하여 그의 인생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누가 알아 먹을지, 누가 이해할 지는 전혀 그의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그를 보내는 길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5.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제 우리도 그렇게 세상의 몰이해와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설명해서 되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이다. 우리도 당하는 모든 세상의 무관심과 억울함들에 대하여 우리도는 아무런 불평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돌아와 예수 안에서 확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손길이 되어 가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나에게 일하셨고, 나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이 바로 이 일을 하신다는 걸 아는 것이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 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세상의 몰이해와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설명해서 되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이다.
바울이 이 모든 일의 아무런 전통도 유산도 이해도 없는 이방으로 가듯이,
우리가 누군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자들과 세상 속을 걸어나가는 그것이 사도행전이다.

기약대로, 우리가 회심을 해서가 아니라, 기약대로 하나님이 당신의 신실하심으로 기뻐하심으로 그의 능력과 의지로 이 일을 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었듯이,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이요 능력이었듯이, ●그렇게 우리가 있고, 우리가 살아나가는 인생 속에서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실 것이다.
예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이 자리에 왔으니, 그의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더 큰 일을 하시겠는가,라고 우리가 자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헌신과 무슨 능력과 이런 것들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는 거다.
그러니 위대한 일은 바울이 아니라, 바울이 들고가는 복음이 위대한 것이다.
우리는 바울을 부러워 하는 거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자랑한 것같이, 바울을 자랑하지 말고 바울이 들고가는 복음의 위대함을 알아야 된다.
우리의 못남과 우리가 더 소원하는 그 무엇들, '하나님, 주를 위하여 열심을 갖고 있으니 제게 이런 것들을 주십시오'라는 걸 다 내려놓고,
●복음의 위대함 하나로 우리 존재와 인생을 기꺼이 각오하고 살아야 된다.

바울이 앞으로 베스도 앞에서, 벨릭스 앞에서, 아그립바 앞에서 궁극적으로 가이사 앞에까지 가서 할 일은, 그들이 알아먹을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손길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당하는 모든 세상의 무관심과 억울함들에 대하여 그는 아무런 불평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돌아와 예수 안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예수를 몰랐던가, 예수 믿는 것을 어떻게 기를 쓰고 방해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일을 자기에게까지 결과시켰는가를 자기 인생에서 확인했으니 바울은 겁날 게 없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예수 믿고 사는 현실에 대해서 겁날 게 없어야 된다.
우리가 복음을 들고 사는 자의 영광과 자랑을 우리 스스로가 알아야 된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기적을 이루시는 줄 알아야 된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무슨 모세와 엘리야와 다니엘과 우리 누구든지 갖다 이름을 붙이라.
그 위대한 사람들 말고, 그들을 세워 일하신 하나님, 유명한 자와 무명한 자를 들어 일하신 하나님. 아무것도 아닌 자를 통하여 일하신는 하나님. 그가 친히 일하시는 하나님. 복음. 지금도 일하시고 계시는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기적을 이루시는 하나님. 찬송을 받으시는 하나님.
그 인생으로 부름받은 기쁨이 우리의 신앙고백에 커다란 자랑과 기쁨이 되어야 한다.

//////
우리가 하나님 모를 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 구원하셨다. 우리가 원하는 것 아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채우셨다.
우리의 위대함과 우리의 인생의 귀중함을 깨닫는다. 세상은 알 리가 없다. 우리도 옛날에는 몰랐다.
그러나 하나님 우리가 모를 때 우리를 찾아오셨고 구원하셨다.
●세상은 우리를 모르지만, 우리가 그 속에 뛰어들어 하나님의 손길되며, 하나님의 발걸음이 되며, 하나님의 초청이 되며, 하나님의 축복이 되는 것을 믿는다.
그 인생 기꺼이 사는 우리의 믿음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