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존재는 육신이라는 수단을 빌려 영혼을 발전시키려고 살아가는 존재이다_베르나르 베르베르
우리가 왜 태어났을까, 죽으면 어떤 일이 펼쳐질까, 스스로 질문하지 않으면 우리 삶은 무의미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돈 벌고 늙고 퇴직해 어느 날 죽어버리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됐기에 운이 좋은 세대이다. 왜 태어났을까, 보이지 않는 세계에 무엇이 있을까, 죽으면 어떻게 될까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아에 대한 내적 질문을 던질수록 우리는 지적으로 (발전)될 수 있다. 스스로 던지는 질문에는 한계가 없어야 한다
현대 문명 폐해 중 하나가 사람들이 '나는 누구인가' 질문하지 않는 것이다. 단순히 소비만 하는 주체가 돼선 안 된다. 우리는 세금을 내려고 살아가는 존재도 아니고, 단순히 가족 구성원이나, 회사 구성원으로 살아가려고 존재하는 게 아니다.
소설에서 '영혼'이 인간세계를 관찰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 데 대하여는; 인간과는 다른 존재인 동물, 신, 영혼 같은 존재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인간 아닌 주체들을 통해 인간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소재에 대하여는; 죽음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미신과 같은 주제로 간주된다. 그러나 나는 죽음을 우리 삶의 마지막 챕터 정도로 차분하게 풀어나가려 노력했다.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이런 주제를 책에서 다소 가볍고 유머러스한 방법으로 다루려 노력한다.
이번 작품 집필을 위해 많은 영매를 만났다. 특히 소설 속 여주인공이자 영매인 '뤼시'를 창조하는 데 영감을 준 영매가 있었고, 소설 속 많은 에피소드 역시 그 영매의 말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방한 기간 가장 하고 싶은 일은 한국 무당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샤머니즘이란 것은 내가 큰 관심을 가진 소재이다. 진실하고 정직한 영매나 무당을 만나길 원한다.
현재 집필 중인 다음 작품의 제목은 '판도라의 상자'이며 주제는 '환생'이다.
우리 존재는 육신이라는 수단을 빌려 영혼을 발전시키려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육신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교훈을 얻고 환생해서 또 다른 육신을 통해 교훈을 얻어가는 과정이다.
작고한 선친에게 글을 잘 쓰고 있으니 여기에 머물러 계시지 말고 환생해도 좋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모두 살아 있다는 이점을 십분 활용해 뭔가 해야 한다.
여러분도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기 바란다. 우리가 죽고 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책 속 여주인공 대사를 인용하면; '영혼이 머물고 싶게 하려면 육신을 잘 보존하라.' 대사이긴 하나 우리 모두 삶의 기조가 될 수 있는 말이다. 영혼이 오래 머물게 하려면 몸을 잘 가꿔야 하므로 운동도 해야 하고 좋은 곳에 여행도 가고 좋은 음식도 먹어줘야 한다.
인공지능(AI) 작가에 대해서는; 언젠가는 구현될 수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이 한국에서 인기가 높은 이유는 한국 독자들이 지적 능력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한국이 다른 국가들을 선도할 수 있는 미래 국가라고 생각한다 지난번 방한 때 만난, 극단적인 충동을 느낀다던 여고생이 현재 잘 지내는지도 궁금하다.
★ 프랑스 베스트셀러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2019.6.5. 소설 '죽음' 출간기념 기자간담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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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간다. 이 세상에는 영속하는 가치가 없다. 인생의 의미, 가치를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닌, 죽은 후까지도 영속하는 가치를 추구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게 뭔가? 뭐겠는가?
이에 대하여 베르베르는 영혼의 발전이라고 한다. 영혼의 발전이란 구체적으로 뭔가는 위 기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영혼의 발전이라..
기독교 신앙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박영선 목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라고 한다. 성품면에서. 인격면에서.
그런데 성품이나 인격도 육신이 끝나면 없어지는 게 아닌가? 영혼이란게 없다면, 일생이 끝나면 그냥 다 끝나는 거 아닌가?
그건 아니라는 거다. 우리의 영혼은 이 육신을 떠나도 영속한다고 여겨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인격, 성품을 닮은 존재로 성숙되어 이 육신을 떠나게 되면 어디론가 갈 것이다? 그 성품, 인격을 가지고 다른 육신에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가 봐야 아는 거다.
그걸 모르는 우리로서는 지금 이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과제인것이다. 기독교신앙이 얘기하는 길이 지혜로운 길이라는 데에 반론의 여지는 없다고 여겨진다. 그 길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길이냐?
예수의 길을 가는 거다. 자기를 부인하고 온유하고 겸손하고 친절하고 예의로 대하며 관용하고 용서하는 삶의 길이다.
이 길 말고는 더 지혜롭고 의미있고 가치있고 멋지고 위대한 길이 또 있으랴.. 그 가치가 영원히 지속되는 길이다..
그러니.. 이 생에서의 모든 환경, 여건, 일들.. 만남, 인연들.. 그 모든 것들은 모두가 다 이 텍스트, 즉, 예수와 같은 성품, 인격이라는 텍스트를 담고 키우고 성육신화 하고 성숙시키는 수단이고 그릇이고 무대이고 컨텍스트인 것이다.
특히 고난, 한계, 피곤함, 병약한 상황과 조건들이 더욱 그러하다. 그런 속에서도, 그러한 컨텍스트에서도 이 텍스트를 담으라는 거다. 그럴수록 더 크게 자라고 성숙된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