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다시 보는 열왕기 21 / 열왕기하 10:30-36 / 2022.05.01 2부
nazunzaro
2022. 5. 3. 07:02
- 정의는 폭력이나 악함을 제거하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길을 가야 되는 것이다. 즉 정의를 실현해야 되는 것이다
- 우리가 기껏 잘하는 것이 '난 그러지 말아야지'가 다이지, 거기서 더 나아갈 엄두는 내지도 못한다. 거기서 더 나가야 된다. '못 볼 거를 봤을 때 그걸 감수해 주는 거다.'
※ 사랑은 성경에서 뭐라고 하나?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오래 참는거다.
그꼴 보는거다. 그꼴을 참고 봐주는거다.
비난하는 눈빛도 한심한 눈빛도 거두고
뭐라고 한마디 해 주려고 하는거 거두고,
같이 이웃의 자리를 친구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거다. 이거 굉장한 것이다.
- 이 세상을 고난에 찬 세상을 위해 살아야 되느냐? 왜 우리는 성령을 따라 가야 되는 길을 카페트 깔린 길을 갈 수 없이 벌벌 기어서 산골짜기를 헤매야 하나?
거기서, 바로 거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영광과 승리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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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열왕기 21 / 열왕기하 10:30-36 / 2022.05.01 2부
열왕기를 읽는 것은 쉽지 않다. 여러 왕이 등장하지만 훌륭한 왕은 거의 없고, 이게 이스라엘 역사가 맞나? 하나님을 섬긴다는 백성의 지도자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드는 폭행과 어리석음의 반복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 등장하는 예후만 해도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 아합의 아들인 요람왕 시대의 군대장관이었는데 처음부터 흑심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엘리사가 그의 제자를 보내어 '하나님이 너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는다'라는 말을 듣고 구테타를 일으킨다. 그는 요람왕과 그 왕자들을 모두 죽이고 요람왕과 합세했던 남왕국 아하시아 왕도 죽이고 그 형제들도 죽이고 그리고 사마리아 궁에 쳐들어가서 요람의 어머니인 아합의 부인이었던 이세벨도 죽이고 어마어마한 살륙을 일으켰다.
성경에는 기록이 묘하게 나와 있어서 3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 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이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으므로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4대를 지내리라' 라고 한다.
그런데 이 예후가 하나님 마음에 들게 행했다 하는 칭찬도 우리가 다 해석하기 힘들고, 그리고 그가 31절에 보는 바와 같이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에서 결국 판정은 잘못된 왕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합 집안을 치는 문제를 천사들을 보내어 의롭게 심판을 내리지 않고, 또 다른 악당을 세워, 즉 그의 군대 장관이었던 예후가 하나님의 분노를 복수를 행하게 해서 그를 범죄케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나온다.
앞에 있는 죄를 지우려고 더 악한 왕이 뒤를 잇고, 그리고 악을 제거해서 하나님이 '잘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너는 잘한 것 없다'라는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적인 평가가 열왕기에는 반복적으로 나온다.
그러니 우리가 아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일하심, 우리 좋게 얘기하면 정의의 실천, 그리고 그 반대적으로 얘기하면 죄악에 대한 심판, 이 둘이 어떻게 연결되는 건지, 우리의 이해는 묘하게도 부정적인 그래서 소극적인 개념으로 둘을 나눈다. 정직한 것이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정의의 실현은 복수를 하는 것 그러면 조금 전에 한 것과는 다르다.
거짓말하지 않는 게 정직인데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서는 복수를 해야 되는 것 그렇게 되니까, 이제 앞에 있었던 논법과 뒤의 논법이 성경에는 모순 없이 등장하고 표현되고 있는 셈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정직이 되는 게 아니라, 정직은 정직해야 되는 길이 있다, 폭력을 제거하는 것이 곧 정의가 살아나는 게 아니라, 폭력이 없어지는 것 말고 정의라는 것이 긍정적으로 가야 할, 만들어야 할 내용이 있어야 된다, 이런 얘기를 갈라디아서 5장에서 하고 있다.
한번 성경을 찾아 보자. 갈라디아서 5장 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의성령이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기 보면 두 개의 길이 있다. 그러면 이쪽은 육체를 따라가는 길이고 이쪽은 성령을 따라가는 길인데, 우리는 성령을 따라가는 길은 육체를 따라가지 않는 거다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여기 더러운 것 싸우는 것을 안 하면 곧 성령을 따르는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지,
★성령의 길은 성령의 길을 가야 된다는, 서두에 얘기한 것 같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건 본전으로 돌아오는 것이고, 거기서부터 정직한 길을 가야 되는 것이다, 거기가 애매하다.
정의는 폭력을, 악함을 제거하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길을 가야 되는 것이다. 정의를 실현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에게 분명히 보이는 것은 무엇을 안 한다 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악행이나 잘못된 것을 안 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지만, 그것은 이리 가자고, 정직한 길을 가자고, 성령의 길을 가자고 그러는 것이다.
악한 것들은 그 현상이 이렇게 분명한 거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냄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이다.
성령의 열매는? 이것도 분명하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다.
그럼 생각해 보자.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시험하는 것은 '저거 참 멋있다'가 아니라 '저거 왜 저래?' 이게 훨씬 우리한테는 먼저 오는 우리 광경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이웃 앞에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이런 폭력, 잘못된 것, 눈꼴 사나운 것이 먼저 보인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껏 잘하는 것이 '난 그러지 말아야지'가 다이지, 거기서 더 나아갈 엄두는 내지도 못한다.
★거기서 더 나가야 되는 것은, 여기 나오는 대로 그 못 볼 거를 봤을 때, 그걸 감수해 주는 거다.
'너 잘했다' 그러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널 용서한다'그런 주제넘은 얘기도 할 거 없이, 성경 로마서에서 봤듯이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가 뭐였나?
악한 것이 악하게 노는 걸 보고 도망가지 말고 너는 그때 선한 일, 악한 것이 못되게 굴 때 '용서한다' 이런 말 말고, 이런 말까지는 못하고, 그냥 가만히 네 자리를 비우지 말고 서 있으라는 거다. 난처한 표정으로.
'넌 왜 나한테 동조 안 해?' 그러면 '아 글쎄 말이야..'
'그래 너 인마,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러면 '너 이 새끼야 너 지금 금방 네가 한 거 네가 뒤집어 생각해 봐' 이러지 말고.
우리는 그걸 안 하는 것뿐만 아니라, '안 하고 안 봐, 난 그 자리에 없어'가 최선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거기서 해야 할 게 있다는 거다. 그게 뭔가?
★웃어야 된다. 씨익 웃어야 한다.
그 웃음은 많은 것이다. 많은 것을 뜻한다. '그만해라'도 웃는 것이다. '너 나한테 그럴 수 있니?'도 웃는 것이고..
화를 내지 말고 싸움박질 하지 말고. 그건 아무 열매도 없다.
물론 이건 단숨에 되지 않는다. 기도해서 되지 않는다. 직접 해야 된다.
저게 악을 쓰면 그를 꺾으려면 틀림없이 더 크게 해야 된다. 우리 다 겪은 거다. 이게 예후에게도 나온다. 아합을 꺾으려면 아합보다 더 지독해야 된다. 끝없이 악이 눈덩이같이 불어난다.
그건 아니다. 어떻게 아닌 걸 아느냐? 인간이 자기라는 존재를 점검할 때 이 악한 것이 있는 것으로는 절대 점수를 줄 수가 없다. 그건 모두의 양심이며 인간된 본성이다. 그건 멋있지 않다. 스스로가 안다. 변명을 할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야? 그 꼴을 내가 보란 말이야?
아니다. 괜찮다. 잘 하셨다. 다음엔 그러지 말라. 이 멋있는 길을 가라.
사랑은 뭐였나? 우리 이게 성령의 열매가 첫 번째가 사랑인데 사랑이 뭐였나?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오래 참는 거였다.
★그꼴 보는 거다. 비난하는 눈빛도 거두고, 한심한 눈빛도 거두고, 뭐라고 한마디 해 주려고 하는 거 거두고, 같이 이웃의 자리를 친구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굉장한 것이다.
우리 신약시대 성도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시고 그 아들은 십자가에 매달리고 우리 뭐 기도할 때마다, 무슨 신앙적인 말을 시작할 때마다 하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부활하사 예수 믿는 모든 자에게 사망과 죄의 권세에서 끌어내 자유를 주신다. 기회를 주신다.
★그리고는 떠나신다. 같이 있지 않고, 우리 보고 살아보라고 한다. 힘을 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를 땅끝까지 보냈다. 땅끝이 우리가 와 있는 자리이다. 우리가 만나기 싫은 사람,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 앞에 우리 다 보내졌다.
따지고 보면 가족도 그렇고, 이웃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시대도 그렇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마치 흑암의 빛으로 오신 예수같이, 사망 권세 아래에 있는 곳에 우리가 생명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예수께서 있는 것이 예수로 인하여 임마누엘이 된 것 같이, ★우리가 있는 것이 우리가 예수의 자녀로서 임마누엘이 되는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여기는 누구나 다 본성적으로 죄악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곳에, 우리만이 성령을 따를 수 있는 사람으로 서 있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겠다, 내 아들로 세상을 구한 것 같이,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온 세상에 보내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이 싸움에서 싸움은 이거다; 세상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이다.
★죄밖에 지을 수 없는, 최선이 죄를 안 짓는 게 전부인 여기에서, 죄가 아니라 거룩한 생명과 진리로, 영광으로 가는 길을 가는 자로 우리가 서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열왕기 내내 이 이야기를 한다. 왕들에 대하여 너희는 폭력으로 권력을 뺏아갈 뿐이지 그 권력이 발휘하는 책임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만드는 일에는 늘 실패한다.
어떻게? 여로보암의 길을 감으로써, 여로보암의 길을 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여로보암이 세운 우상을 섬기는 일을 말하는데,
우상이란 자기 권력을 지지해주는 신적 존재, 자기가 만든, 자기가 조작하는 권력, 명분인 것이다. 하나님이 이걸 제일 싫어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아닌 것을 싫어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우리의 존재와 운명에 대하여 계획과 뜻과 정성을 갖고 있는데 우상으로 가면 뭐가 되냐 하면 타협이 된다.
내가 가지는 뜻과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내가 주무를 수 있는 신을 만들어 놓은 것, 이게 우상이다.
그러니까 현실에 오면, 현대에 오면 '돈이 우상이야'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돈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을 왜 그렇게 탐하는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려면 하나님과 말씀으로 충분하다, 이 사이에 놓여 있는 거다.
돈은 없어도 된다 그런 말이 아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야 하고 사회생활을 해야 되고 경제생활을 해야 된다. 건강이 필요하고 이웃 관계라는 게 필요하고 돈이 필요하다. 경제생활을 해야 된다.
그러나 그게 어떻게 우리에게 쓰이고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이렇게 갈리는 거다. 우상이 된다는 말을 알아들어야 된다.
그러니 생각해 보자. ★우리 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약점은 이 성령의 길을 따라가는 적극적인 일은 갈 엄두를 내지 않는다. 아무도 그건 안 한다.
제일 제가 잘하면서 많이 들었던 말이 뭐였냐면 교회에 오는 장로인데, 멋있는 장로님이 우리 대학부 고문으로 계셨다. 그 장로님이 틈만 나면 이렇게 '나는 꼴 보기 싫어서 난 당회에 안 들어가' 그러지 마시라고 들어가서 싸우야지. 의논을 하셔야지. 어른이잖어? 책임에서 빠지는 것, 그래서 죄를 질 이유가 없는 것, 숨어버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알고 있고 그걸 또 말을 한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장로씩이나 돼서 '난 당외에 안 들어가' 그게 자랑인가? 그러면 사표를 내던가. 예수를 믿잖아? 예수를. 왕 같은 제사장이잖아? 우리 외에는 불을 밝힐 데도, 생수를 뿜어낼 데도 없다고. 저기는 모르니까.
그런데 우리는 다 주일날 왜 오는지 모르겠다. 눈을 그렇게 똑바로 뜨고 듣는다. 그리고 아무것도 안 하고 다음 주일에 또 온다. 그러면 처음에는 나도 좋게 생각을 한다. '지난 주에 다 못 알아들어서 또 왔다'고. 그러나 이렇게 35년쯤 하면 나도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생각을 해 보라. 예수를 믿는 게 뭔가를. 자기의 존재와 자기 자리에서 《그 임무》를 갖고 있지 않으면, 제일 큰 사기이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참으로 놀랍게도 달란트 비유에 나온다. 먼 여행을 떠나게 된 주인이 종 셋을 불러서 하나에겐 다섯 달란트, 다른 하나에게 두 달란트 또다른 하나에겐 한 달란트 줬는데 여행에서 돌아온 주인이 종들을 불러서 '어떻게 되었느냐?' 다섯 받은 사람이 다섯을 이익을 내고 둘 받은 사람이 둘 이익을 봤다. 하나 받은 사람이 한 거 기억날거다. '주인은 엄한 사람이라 내가 두려워하여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이것을 땅에 파 묻어두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왜 그걸 은행에 맡겨서 이자라도 벌게 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된다. 그래서 이 말이 아주 어려운 비유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유는 이것이다;
《너라는 존재는 꽃을 피워야 하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 존재다. 땅에 파묻어 놔야 되는 존재가 아니라, 무슨 손해를 보거나 잘못을 하는 데서부터 자기를 보호하여 온전히 가만히 어린아이같이 순백으로 천국에 오는 거 아니다. 커서 와야 된다. 커야 된다. 내가 너희를 어린아이로 출생시키지만 사춘기를 거치고, 고민과 갈등과 생활고에 찌들리고, 속에서 너를 만들어 마침내 이마에 주름살이 생길 때쯤이면 안목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하나님이 내 인생에 뭘 하셨는가를 아는 일이, 네 영혼에 꽃으로 열매로 일어나야 된다. 너를 파묻어놓고, 너 난 죄 안 졌어요, 그 따위로 얘기하지 마라》 그게 달란트 비유이다.
우리에게는 정말 꽃이 피고 있다. 그거를 구호로 주장으로 할 수는 없다. 믿음을 가지고 저 스피커 보고 '꽃을 피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는 이 꽃이 되라구!' 그렇게 말하는 바보는 없다. 그럼 하나님이 우리 보고 우리가 돌대가리이고 심성도 없고 예수도 모르고 아무것도 아닌데 '너 왜 그렇게 사니?' 그러는 건 말이 안 된다 이렇게 얘기할 수 없다. 누구 잘못이라고 생각하나?
우리 밤낮하는 눈물 흘리며 하는 고백이잖은가? '날 위하여 십자가에 몸 버려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고 뭔가?. 울고 돌아가고, 울고 돌아가고, 사는 거는 개X 아무렇게나 살고..
어디를 잘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무슨 '욕지거리 난 안해, 나는 미운 말 안 해. 나는 죄 안 져' 그럼 왜 살아? 도대체.
그냥 흙에 파묻어 놓고 뭘 하자는 거야? 은행에라도 갖다 주라는 거다. 은행에라도 못하겠으면 교회에다 위탁이라도 하랬다. 헌금하라는 소리같이 또 들리네. 그런 거 아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가장 쉬운 데서부터 하라. 표정을 펴라. 교회 왔잖은가? 교회. 여기는 같은 목적과 같은 내용을 알고 있는 자들이다. 모르는 사람이 아니잖아? 여기는 전철칸이 아니잖아? 근데 왜 표정이 나쁜가 이 이유를 한 번만 얘기해 줘 봐. 왜 그래? 졸려서? 생각을 좀 해봐. 생각을. 왜 못 웃어? 왜 안 반가워 해? 반가운 사람 없으면 다른 교회 가. 반가운 사람이 있는데 가! 재밌는 교회 많아. 장경동 목사 교회가 최고야. 졸 틈이 없어. 그리고 예배 마치면 다 웃고 나와. 우리 교회는 다 인상 쓰고 나와. 아, 난 내가 큰 죄를 짓고 있는 줄로 알아.
이사야 61장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꿈을 이렇게 이스라엘의 멸망 포로 가운데 이렇게 그의 비전을 기록하신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죄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심이라 그들은 올해 황폐되었던 것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것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외인은 서서 너희 양떼를 칠 것이오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제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너희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능력 대신에 몫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그들의 땅에서 갑절이나 얻고 영원한 기쁨이 있으리라 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며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 그들의 자손을 뭇 나라 가운데 그들의 후손을 만민 가운데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비전이다. ★언제 이 약속이 나가느냐? 바빌론 포로, 우리가 이 세상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자리, 우리가 당하는 괴로움과 우리를 폭압하던 모든 세상적인 못난 권력, 우리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했던.. 모든 것이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얘기는 우리가 그런 것들 속에서 클 것이다,이다.
이 세상을 고난에 찬 세상을 위해 살아야 되느냐? 왜 우리는 성령을 따라 가야 되는 길을, 카페트 깔린 길을 갈 수 없이 벌벌 기어서 산골짜기를 헤매야 하나?
★거기서, 바로 거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영광과 승리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겁내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봐라. 성령을 따라 살아라. 성령의 열매를 맺어라. 그런 힘 있는 믿음에 의한, ★이 도전하고,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현실을 하나님 앞에 약속하며 각오하며 매일을, 매일을 반복적으로, 하나님이 깨워내시는, 시작하시는 오늘, 오늘은 한 걸음 더, 오늘은 한 걸음 더 이렇게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어느 날 번쩍하고 모든 게 해결돼서 그 다음부터는 뭐 고생할 것도 없고 고민할 것도 없고, 뭐든지 쳐다만 보면 되고,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걸맞는 영광과 승리와 실력의 자리에 가며, 가는 동안 우리로 인하여 세상이 우리의 도전을 받으며, 우리는 저들의 도전에 의하여 언제나 클 것을 성경에 약속한다.
예후, 큰 힘을 가지고 정의를 실현한다는 이름으로 모두를 살륙하는 것밖에는 만들어낼 것이 없었던 권력과 다른, 《권위, 믿음》을 가진 신자의 존재와 삶과 현실을 이해하고 이겨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기도)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이요, 우리가 가진 권위는 부활이요 생명이오 기쁨이며 명예요 자랑이며 찬송이다.
세상의 도전 앞에 도망가지 말고, 부끄러워하지 말고 숨지 말아야 된다.
내 자리를 지켜 하나님 일하시는 기적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눈들 속에 마음들 속에 창조되게 해야 된다. 아멘/
- 우리가 기껏 잘하는 것이 '난 그러지 말아야지'가 다이지, 거기서 더 나아갈 엄두는 내지도 못한다. 거기서 더 나가야 된다. '못 볼 거를 봤을 때 그걸 감수해 주는 거다.'
※ 사랑은 성경에서 뭐라고 하나?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오래 참는거다.
그꼴 보는거다. 그꼴을 참고 봐주는거다.
비난하는 눈빛도 한심한 눈빛도 거두고
뭐라고 한마디 해 주려고 하는거 거두고,
같이 이웃의 자리를 친구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거다. 이거 굉장한 것이다.
- 이 세상을 고난에 찬 세상을 위해 살아야 되느냐? 왜 우리는 성령을 따라 가야 되는 길을 카페트 깔린 길을 갈 수 없이 벌벌 기어서 산골짜기를 헤매야 하나?
거기서, 바로 거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영광과 승리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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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열왕기 21 / 열왕기하 10:30-36 / 2022.05.01 2부
열왕기를 읽는 것은 쉽지 않다. 여러 왕이 등장하지만 훌륭한 왕은 거의 없고, 이게 이스라엘 역사가 맞나? 하나님을 섬긴다는 백성의 지도자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드는 폭행과 어리석음의 반복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 등장하는 예후만 해도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 아합의 아들인 요람왕 시대의 군대장관이었는데 처음부터 흑심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엘리사가 그의 제자를 보내어 '하나님이 너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는다'라는 말을 듣고 구테타를 일으킨다. 그는 요람왕과 그 왕자들을 모두 죽이고 요람왕과 합세했던 남왕국 아하시아 왕도 죽이고 그 형제들도 죽이고 그리고 사마리아 궁에 쳐들어가서 요람의 어머니인 아합의 부인이었던 이세벨도 죽이고 어마어마한 살륙을 일으켰다.
성경에는 기록이 묘하게 나와 있어서 3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 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이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으므로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4대를 지내리라' 라고 한다.
그런데 이 예후가 하나님 마음에 들게 행했다 하는 칭찬도 우리가 다 해석하기 힘들고, 그리고 그가 31절에 보는 바와 같이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에서 결국 판정은 잘못된 왕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합 집안을 치는 문제를 천사들을 보내어 의롭게 심판을 내리지 않고, 또 다른 악당을 세워, 즉 그의 군대 장관이었던 예후가 하나님의 분노를 복수를 행하게 해서 그를 범죄케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나온다.
앞에 있는 죄를 지우려고 더 악한 왕이 뒤를 잇고, 그리고 악을 제거해서 하나님이 '잘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너는 잘한 것 없다'라는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적인 평가가 열왕기에는 반복적으로 나온다.
그러니 우리가 아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일하심, 우리 좋게 얘기하면 정의의 실천, 그리고 그 반대적으로 얘기하면 죄악에 대한 심판, 이 둘이 어떻게 연결되는 건지, 우리의 이해는 묘하게도 부정적인 그래서 소극적인 개념으로 둘을 나눈다. 정직한 것이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정의의 실현은 복수를 하는 것 그러면 조금 전에 한 것과는 다르다.
거짓말하지 않는 게 정직인데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서는 복수를 해야 되는 것 그렇게 되니까, 이제 앞에 있었던 논법과 뒤의 논법이 성경에는 모순 없이 등장하고 표현되고 있는 셈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정직이 되는 게 아니라, 정직은 정직해야 되는 길이 있다, 폭력을 제거하는 것이 곧 정의가 살아나는 게 아니라, 폭력이 없어지는 것 말고 정의라는 것이 긍정적으로 가야 할, 만들어야 할 내용이 있어야 된다, 이런 얘기를 갈라디아서 5장에서 하고 있다.
한번 성경을 찾아 보자. 갈라디아서 5장 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의성령이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기 보면 두 개의 길이 있다. 그러면 이쪽은 육체를 따라가는 길이고 이쪽은 성령을 따라가는 길인데, 우리는 성령을 따라가는 길은 육체를 따라가지 않는 거다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여기 더러운 것 싸우는 것을 안 하면 곧 성령을 따르는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지,
★성령의 길은 성령의 길을 가야 된다는, 서두에 얘기한 것 같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건 본전으로 돌아오는 것이고, 거기서부터 정직한 길을 가야 되는 것이다, 거기가 애매하다.
정의는 폭력을, 악함을 제거하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길을 가야 되는 것이다. 정의를 실현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에게 분명히 보이는 것은 무엇을 안 한다 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악행이나 잘못된 것을 안 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지만, 그것은 이리 가자고, 정직한 길을 가자고, 성령의 길을 가자고 그러는 것이다.
악한 것들은 그 현상이 이렇게 분명한 거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냄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이다.
성령의 열매는? 이것도 분명하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다.
그럼 생각해 보자.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시험하는 것은 '저거 참 멋있다'가 아니라 '저거 왜 저래?' 이게 훨씬 우리한테는 먼저 오는 우리 광경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이웃 앞에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이런 폭력, 잘못된 것, 눈꼴 사나운 것이 먼저 보인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껏 잘하는 것이 '난 그러지 말아야지'가 다이지, 거기서 더 나아갈 엄두는 내지도 못한다.
★거기서 더 나가야 되는 것은, 여기 나오는 대로 그 못 볼 거를 봤을 때, 그걸 감수해 주는 거다.
'너 잘했다' 그러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널 용서한다'그런 주제넘은 얘기도 할 거 없이, 성경 로마서에서 봤듯이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가 뭐였나?
악한 것이 악하게 노는 걸 보고 도망가지 말고 너는 그때 선한 일, 악한 것이 못되게 굴 때 '용서한다' 이런 말 말고, 이런 말까지는 못하고, 그냥 가만히 네 자리를 비우지 말고 서 있으라는 거다. 난처한 표정으로.
'넌 왜 나한테 동조 안 해?' 그러면 '아 글쎄 말이야..'
'그래 너 인마,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러면 '너 이 새끼야 너 지금 금방 네가 한 거 네가 뒤집어 생각해 봐' 이러지 말고.
우리는 그걸 안 하는 것뿐만 아니라, '안 하고 안 봐, 난 그 자리에 없어'가 최선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거기서 해야 할 게 있다는 거다. 그게 뭔가?
★웃어야 된다. 씨익 웃어야 한다.
그 웃음은 많은 것이다. 많은 것을 뜻한다. '그만해라'도 웃는 것이다. '너 나한테 그럴 수 있니?'도 웃는 것이고..
화를 내지 말고 싸움박질 하지 말고. 그건 아무 열매도 없다.
물론 이건 단숨에 되지 않는다. 기도해서 되지 않는다. 직접 해야 된다.
저게 악을 쓰면 그를 꺾으려면 틀림없이 더 크게 해야 된다. 우리 다 겪은 거다. 이게 예후에게도 나온다. 아합을 꺾으려면 아합보다 더 지독해야 된다. 끝없이 악이 눈덩이같이 불어난다.
그건 아니다. 어떻게 아닌 걸 아느냐? 인간이 자기라는 존재를 점검할 때 이 악한 것이 있는 것으로는 절대 점수를 줄 수가 없다. 그건 모두의 양심이며 인간된 본성이다. 그건 멋있지 않다. 스스로가 안다. 변명을 할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야? 그 꼴을 내가 보란 말이야?
아니다. 괜찮다. 잘 하셨다. 다음엔 그러지 말라. 이 멋있는 길을 가라.
사랑은 뭐였나? 우리 이게 성령의 열매가 첫 번째가 사랑인데 사랑이 뭐였나?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오래 참는 거였다.
★그꼴 보는 거다. 비난하는 눈빛도 거두고, 한심한 눈빛도 거두고, 뭐라고 한마디 해 주려고 하는 거 거두고, 같이 이웃의 자리를 친구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굉장한 것이다.
우리 신약시대 성도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시고 그 아들은 십자가에 매달리고 우리 뭐 기도할 때마다, 무슨 신앙적인 말을 시작할 때마다 하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부활하사 예수 믿는 모든 자에게 사망과 죄의 권세에서 끌어내 자유를 주신다. 기회를 주신다.
★그리고는 떠나신다. 같이 있지 않고, 우리 보고 살아보라고 한다. 힘을 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를 땅끝까지 보냈다. 땅끝이 우리가 와 있는 자리이다. 우리가 만나기 싫은 사람,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 앞에 우리 다 보내졌다.
따지고 보면 가족도 그렇고, 이웃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시대도 그렇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마치 흑암의 빛으로 오신 예수같이, 사망 권세 아래에 있는 곳에 우리가 생명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예수께서 있는 것이 예수로 인하여 임마누엘이 된 것 같이, ★우리가 있는 것이 우리가 예수의 자녀로서 임마누엘이 되는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여기는 누구나 다 본성적으로 죄악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곳에, 우리만이 성령을 따를 수 있는 사람으로 서 있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겠다, 내 아들로 세상을 구한 것 같이,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온 세상에 보내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이 싸움에서 싸움은 이거다; 세상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이다.
★죄밖에 지을 수 없는, 최선이 죄를 안 짓는 게 전부인 여기에서, 죄가 아니라 거룩한 생명과 진리로, 영광으로 가는 길을 가는 자로 우리가 서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열왕기 내내 이 이야기를 한다. 왕들에 대하여 너희는 폭력으로 권력을 뺏아갈 뿐이지 그 권력이 발휘하는 책임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만드는 일에는 늘 실패한다.
어떻게? 여로보암의 길을 감으로써, 여로보암의 길을 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여로보암이 세운 우상을 섬기는 일을 말하는데,
우상이란 자기 권력을 지지해주는 신적 존재, 자기가 만든, 자기가 조작하는 권력, 명분인 것이다. 하나님이 이걸 제일 싫어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아닌 것을 싫어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우리의 존재와 운명에 대하여 계획과 뜻과 정성을 갖고 있는데 우상으로 가면 뭐가 되냐 하면 타협이 된다.
내가 가지는 뜻과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내가 주무를 수 있는 신을 만들어 놓은 것, 이게 우상이다.
그러니까 현실에 오면, 현대에 오면 '돈이 우상이야'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돈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을 왜 그렇게 탐하는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려면 하나님과 말씀으로 충분하다, 이 사이에 놓여 있는 거다.
돈은 없어도 된다 그런 말이 아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야 하고 사회생활을 해야 되고 경제생활을 해야 된다. 건강이 필요하고 이웃 관계라는 게 필요하고 돈이 필요하다. 경제생활을 해야 된다.
그러나 그게 어떻게 우리에게 쓰이고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이렇게 갈리는 거다. 우상이 된다는 말을 알아들어야 된다.
그러니 생각해 보자. ★우리 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약점은 이 성령의 길을 따라가는 적극적인 일은 갈 엄두를 내지 않는다. 아무도 그건 안 한다.
제일 제가 잘하면서 많이 들었던 말이 뭐였냐면 교회에 오는 장로인데, 멋있는 장로님이 우리 대학부 고문으로 계셨다. 그 장로님이 틈만 나면 이렇게 '나는 꼴 보기 싫어서 난 당회에 안 들어가' 그러지 마시라고 들어가서 싸우야지. 의논을 하셔야지. 어른이잖어? 책임에서 빠지는 것, 그래서 죄를 질 이유가 없는 것, 숨어버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알고 있고 그걸 또 말을 한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장로씩이나 돼서 '난 당외에 안 들어가' 그게 자랑인가? 그러면 사표를 내던가. 예수를 믿잖아? 예수를. 왕 같은 제사장이잖아? 우리 외에는 불을 밝힐 데도, 생수를 뿜어낼 데도 없다고. 저기는 모르니까.
그런데 우리는 다 주일날 왜 오는지 모르겠다. 눈을 그렇게 똑바로 뜨고 듣는다. 그리고 아무것도 안 하고 다음 주일에 또 온다. 그러면 처음에는 나도 좋게 생각을 한다. '지난 주에 다 못 알아들어서 또 왔다'고. 그러나 이렇게 35년쯤 하면 나도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생각을 해 보라. 예수를 믿는 게 뭔가를. 자기의 존재와 자기 자리에서 《그 임무》를 갖고 있지 않으면, 제일 큰 사기이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참으로 놀랍게도 달란트 비유에 나온다. 먼 여행을 떠나게 된 주인이 종 셋을 불러서 하나에겐 다섯 달란트, 다른 하나에게 두 달란트 또다른 하나에겐 한 달란트 줬는데 여행에서 돌아온 주인이 종들을 불러서 '어떻게 되었느냐?' 다섯 받은 사람이 다섯을 이익을 내고 둘 받은 사람이 둘 이익을 봤다. 하나 받은 사람이 한 거 기억날거다. '주인은 엄한 사람이라 내가 두려워하여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이것을 땅에 파 묻어두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왜 그걸 은행에 맡겨서 이자라도 벌게 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된다. 그래서 이 말이 아주 어려운 비유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유는 이것이다;
《너라는 존재는 꽃을 피워야 하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 존재다. 땅에 파묻어 놔야 되는 존재가 아니라, 무슨 손해를 보거나 잘못을 하는 데서부터 자기를 보호하여 온전히 가만히 어린아이같이 순백으로 천국에 오는 거 아니다. 커서 와야 된다. 커야 된다. 내가 너희를 어린아이로 출생시키지만 사춘기를 거치고, 고민과 갈등과 생활고에 찌들리고, 속에서 너를 만들어 마침내 이마에 주름살이 생길 때쯤이면 안목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하나님이 내 인생에 뭘 하셨는가를 아는 일이, 네 영혼에 꽃으로 열매로 일어나야 된다. 너를 파묻어놓고, 너 난 죄 안 졌어요, 그 따위로 얘기하지 마라》 그게 달란트 비유이다.
우리에게는 정말 꽃이 피고 있다. 그거를 구호로 주장으로 할 수는 없다. 믿음을 가지고 저 스피커 보고 '꽃을 피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는 이 꽃이 되라구!' 그렇게 말하는 바보는 없다. 그럼 하나님이 우리 보고 우리가 돌대가리이고 심성도 없고 예수도 모르고 아무것도 아닌데 '너 왜 그렇게 사니?' 그러는 건 말이 안 된다 이렇게 얘기할 수 없다. 누구 잘못이라고 생각하나?
우리 밤낮하는 눈물 흘리며 하는 고백이잖은가? '날 위하여 십자가에 몸 버려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고 뭔가?. 울고 돌아가고, 울고 돌아가고, 사는 거는 개X 아무렇게나 살고..
어디를 잘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무슨 '욕지거리 난 안해, 나는 미운 말 안 해. 나는 죄 안 져' 그럼 왜 살아? 도대체.
그냥 흙에 파묻어 놓고 뭘 하자는 거야? 은행에라도 갖다 주라는 거다. 은행에라도 못하겠으면 교회에다 위탁이라도 하랬다. 헌금하라는 소리같이 또 들리네. 그런 거 아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가장 쉬운 데서부터 하라. 표정을 펴라. 교회 왔잖은가? 교회. 여기는 같은 목적과 같은 내용을 알고 있는 자들이다. 모르는 사람이 아니잖아? 여기는 전철칸이 아니잖아? 근데 왜 표정이 나쁜가 이 이유를 한 번만 얘기해 줘 봐. 왜 그래? 졸려서? 생각을 좀 해봐. 생각을. 왜 못 웃어? 왜 안 반가워 해? 반가운 사람 없으면 다른 교회 가. 반가운 사람이 있는데 가! 재밌는 교회 많아. 장경동 목사 교회가 최고야. 졸 틈이 없어. 그리고 예배 마치면 다 웃고 나와. 우리 교회는 다 인상 쓰고 나와. 아, 난 내가 큰 죄를 짓고 있는 줄로 알아.
이사야 61장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꿈을 이렇게 이스라엘의 멸망 포로 가운데 이렇게 그의 비전을 기록하신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죄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심이라 그들은 올해 황폐되었던 것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것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외인은 서서 너희 양떼를 칠 것이오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제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너희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능력 대신에 몫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그들의 땅에서 갑절이나 얻고 영원한 기쁨이 있으리라 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며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 그들의 자손을 뭇 나라 가운데 그들의 후손을 만민 가운데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비전이다. ★언제 이 약속이 나가느냐? 바빌론 포로, 우리가 이 세상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자리, 우리가 당하는 괴로움과 우리를 폭압하던 모든 세상적인 못난 권력, 우리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했던.. 모든 것이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얘기는 우리가 그런 것들 속에서 클 것이다,이다.
이 세상을 고난에 찬 세상을 위해 살아야 되느냐? 왜 우리는 성령을 따라 가야 되는 길을, 카페트 깔린 길을 갈 수 없이 벌벌 기어서 산골짜기를 헤매야 하나?
★거기서, 바로 거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영광과 승리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겁내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봐라. 성령을 따라 살아라. 성령의 열매를 맺어라. 그런 힘 있는 믿음에 의한, ★이 도전하고,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현실을 하나님 앞에 약속하며 각오하며 매일을, 매일을 반복적으로, 하나님이 깨워내시는, 시작하시는 오늘, 오늘은 한 걸음 더, 오늘은 한 걸음 더 이렇게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어느 날 번쩍하고 모든 게 해결돼서 그 다음부터는 뭐 고생할 것도 없고 고민할 것도 없고, 뭐든지 쳐다만 보면 되고,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걸맞는 영광과 승리와 실력의 자리에 가며, 가는 동안 우리로 인하여 세상이 우리의 도전을 받으며, 우리는 저들의 도전에 의하여 언제나 클 것을 성경에 약속한다.
예후, 큰 힘을 가지고 정의를 실현한다는 이름으로 모두를 살륙하는 것밖에는 만들어낼 것이 없었던 권력과 다른, 《권위, 믿음》을 가진 신자의 존재와 삶과 현실을 이해하고 이겨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기도)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이요, 우리가 가진 권위는 부활이요 생명이오 기쁨이며 명예요 자랑이며 찬송이다.
세상의 도전 앞에 도망가지 말고, 부끄러워하지 말고 숨지 말아야 된다.
내 자리를 지켜 하나님 일하시는 기적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눈들 속에 마음들 속에 창조되게 해야 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