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사사기 01 / 사사기 1:1-7 / 2014.08.17]
- 회개하면 되는 게 아니라, 그걸 살아 내야 된다. 그걸 말로 하지 말고, 그걸 기도로 낱낱이 회개하는 건 거의 사기라고 본다. 그렇게 넘어갈 수 없다.
- 하나님이 그렇게 대강 넘어가지 않는다. 속일려고 하지 마라. 자기 인생을 최면 속에서 걸을 생각마라. 거기서 넘어선 경지까지 하나님이 가겠다고 하신다. 거길 좇아 와야 한다. 세상이 주는 것 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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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사사기 01 / 사사기 1:1-7 / 2014.08.17]
사사기는 역사서이다. 그 앞에 있는 출애굽기나 여호수아와 같이 그 뒤를 잇는 역사서이다. 역사서라는 건 교훈과 무슨 감상, 설명이라기 보다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사기를 읽으면 대부분 다 당혹스러워 한다. 이런 내용이 성경에 있다는 것이 다들 불편하다. 성경에 있으면 보다 분명한 어떤 신앙적인 결단, 충성, 업적 같은 것이 있어야 되는데, 사사기에는 단 한줄도 그런 것들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사사기를 읽으면 보통 분노한다.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사기가 하고 싶은 말은, 네 맘에 드느냐 안드느냐와 상관없이 이런 일이 있었다 그러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은 성질을 부리지 않는데, 우리는 읽으면서 성질을 부린다. 이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다. 사사기를 읽는 법, 이제 그걸 배우는 거다.
여호수아 24장, 사사기 바로 앞장을 보면 여호수아의 임종의 모습이 나온다. 역사이다. 400년의 옥살이를 깨고,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광야길을 걸으며 맛나와 메추라기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40년을 보호하시고, 약속의 땅에 들이셨습니다. 적들을 내어쫓으시고, 이스라엘의 승리를 그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 그러니 여호수아의 이 유언은 '하나님이' 무얼 하셨는가를 확인한다. 되새겨 본다.
그 확인의 가장 중요한 단어는 모두 `내가` 이다. '나,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내었고,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주었고 야곱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거기에는 야곱의 선택이 유일하게 나온다. '내가' 그들을 모세를 보내 꺼냈고, 어떻게 광야길을 걷고, 어떻게 적들을 몰아내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짓지않는 집에 살고 심지않은 것을 먹게 하셨는가. '하나님이' 누구신지 분명하게 알라. 그리고 이어진다. 사사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왔으되 이 백성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내가' 사방의 적들을 일으켰다. 그들로 '하나님과의' 약속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케 하며 너희의 인생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게 얼마나 얼마나 잘못된 길인지, 계속 보어주는 씨름을 했다, 그게 사사기이다.
사사기에 대한 분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일반적인 종교성에 근거한 비난이다. 그걸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춘기적 특성이라고 얘기해야 맞다. 사춘기적 특성이란 한 사람이 태어나서 드디어 '인간의 가치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가?' 하는 자기 의식, 자기의 가치에 대해서 눈을 뜨는 시기를 말한다. 그 때 맨처음 들어오
이 사사기를 읽으면 분노하는 것이다. 뭐가 불안해서? `니들은 선민이잖아? 니들은 열가지 재앙을 받잖아? 홍해가 갈라졌잖아? 반석에서 물을 마시잖아? 그런데 네들이 못하면 나는 어떡하란 말이냐? 이게 숨어있는 거다. 겁이 나는 거다.
그 많은 축복과 약속 속에서도 실패한다면 내가 어떻게 승리를 할 수 있는가? 아니, 그 기적으로 불러낸 백성들이 실패하게 놔둔다면, 그래서 벌을 주는 하나님이라면, 나는 어떻게 이길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실까봐 겁이 난다.
사사기 같이는 되지 말아야지.. 그렇게 살 실력은 없고, 이걸 보고 사람이란, 죄란 참 무섭구나라고 느끼면, 하나님이 이 자리에 보내심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은혜를 주시옵소서'를 시도 때도 없이 모든 정황에서 도전 받아야 된다.
'잘 되면 헌신하고 내어놓겠습니다'가 그것 깨어지지 않을려고 보험들 듯이 내놓는 수준을 넘어와야 되고, 안되면 `하나님 이러시기입니까?`라는 불만을 떠나서 '죽음의 자리, 실패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유익을 담으실 수도 있다, 내가 넘어졌으나 내가 주의 목전에서 좇겨났으나 다시 주의 전을 바라보겠나이다'라는 고백이 튀어나오는 그것이 그게 신앙이다.
사사기는 변명하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는다. 사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감상을 넘어온 기록이다. 왜 이랬을까? 우리는 뭘까? 하나님이 왜 이걸 하게 놔두셨을까? 원망과 비탄과 절망과 혼돈과 이럴 수는 없다는 경악을 넘어서 하나님의 일하심의 깊이와 엄위하신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항복을 말없이 감상없이 설명 해설 붙이지 않고 써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 하나님을 아시는가?
니콜라스 월트퍼스라는 철학자가 있다. 아주 유명한 현대 철학자인데, 다른 것은 잘 모르겠고, 성경에 대해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성경은 허위를 벗겨내는 폭로자다`
그렇다. 성경을 읽으면 죄가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 현실이 무엇인지, 세상이 무엇인지, 성경보다 더 분명히 말하는 데는 없다.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우리가 그냥 웃고 이쯤에서 타협합시다를 안한다. 벗겨 내신다. 까부수고 전부 해부하신다. 왜 그러시는가? 하나님은 차선책으로 타협하지는 않겠다고 한다. 하ㄷ나님이 가지신 목적과 내용을 채우는 일에 타헙은 없다고 한다. 옳고 그른 일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내용에 관한 문제다. 목적에 관한 문제다. 우리가 알고 우리가 항복하는 자리까지 밀어붙이실 것이다. 그러니 사사기는 어렵다.
우리가 아는, 우리 저 속에 있는 인간된 한계, 비겁함, 변덕, 배신, 음모, 더러움, 악의 거기에 역사적 사건으로 나열되기 때문이다. 반복적으로.
`하나님 이 부끄러운 일을 꺼내서 무얼 하실렵니까?` 우리의 당연한 질문이어야 된다.
비난을 함으로써 자기는 여기에 속하지 않은 것같이그러는 기만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통곡하고 회개해서 면제받을려고 하면 안된다.
회개하면 되는 게 아니라, 그걸 살아 내야 된다. 그걸 말로 하지 말고, 그걸 기도로 낱낱이 회개하는 건 거의 사기라고 본다. 그렇게 넘어갈 수 없다.
사사기 2장에서 운다, 그렇게. 그래서 그곳 지명이 `보김`, '우는 자'라는 이름을 가진다. 우리말로 하면 `곡성` 이다. 곡성.
하나님이 그렇게 대강 넘어가지 않는다. 속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인생을 최면 속에서 걸을 생각 하면 안된다. 거기서 넘어선 경지까지 하나님이 가겠다고 하신다. 거길 좇아 와야 한다.
세상이 주는 것 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다. 담뱃재 물탄 걸 커피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은가? 그건 알아 먹을 것이다다. 하나님은 그렇게 안가겠다고 하신다.
우리가 사사기를 비난함으로써, 우리 인생에 얼마든지 있는 거다. 잘못한 누구를, 욕해도 되는 누구를 욕함으로써, 자기의 인생을 스리슬쩍 밤낮 넘어가는거다.
9시 뉴스 보면서, 조간신문 보면서 넘어가는거다. 넘어가는 거. 그것 욕하지 말고, 너, 네 인생을 살아! 네 인생의 적극적인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이 가지는, 세상이 만들어내지 않는 무엇이 있다면 세상을 살아내 봐! 그거다.
저 사람이 잘못해서 내가 억울하고, 저 사람이 잘못해서 내가 불편한 거기를. 그 사람이 잘못한 건 세상이 가지는 방법과 조건과 내용에서 잘못한 것이고, 그것이 너에게 세상을 살기엔 불편할 지라도, 그것이 최종적인 목표거나 진정한 내용일 수는 없지 않느냐? 부딪칠 수 있어? 하루를 살 수 있어?라고 묻는 싸움이 현실이다. 만만치 않다.
한 인생에 신자가 되는 것은 사람따라 다르지만 태어나면서 부터 신자이고, 졸졸졸졸 외우고 성경퀴즈대회에 우승하고, 중고등부 회장하고, 그게 전부 아니다. 사춘기 때 교회 떠나서 담배피고 술먹고 나가놀고, 당구치고. 그러면 끝나지 않는다. 돌아언다. 돌아온다. 그 모든 날들이 헛되지 않고 거기에 하나님이 은혜를 담아 그 헛되고 잘못한 것들 속에 그냥 와서는 절대 만들 수없는 뭘 만드신다. 나이테 같이.
그렇다고 잘못해도 된다 그렇게 말하면 못쓴다. 그러나 잘못한 게 끝이지 않게 하는 것, 그게 성경의 모든 증언이다. 대표적인 게 사사기이다.
그러니 자책, 연민, 설명, 이런 것에 붙잡혀서 실제로 사는 일을 실패하지 말아야 된다. 잘하고 있나 못하고 있나는 그 다음 얘기이다. 잘했는지 못했는지는 더 지나봐야 안다.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결정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그게 사사기이다. 그러나 밑에 깔아있는, 근저에 있는 더 더 분명한 전제는, 하나님이 우리의 결정을 존중히 여기시되 망가지도록 놓아주는 그런 허락은 아니다, 그 속에서도 일하신다, 이게 사사기이고 성경이다.
그것을 우리는 요셉에게서 본다. 기가막힌 증언이다. 그의 인생에 자기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중에 자기의 형들을 만나보고 깨닫는다. 자기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길에 붙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선택? 자유? 그 얘기가 사사기에는 중요한 주제다. 그러나 이 전제를 모르고 읽으면, 우리가 보는바와 같이,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못난 결정을 했을까?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굴었을까?'라는 정죄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 잘잘못이 저들의 운명을 궁극적으로 정하지 않는다. 이 붙드신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정할 것이다. 저들에게 준 자유가 잘못 사용되었으나, 그것으로도 손해보지 않게, 아니 순종한 자 못지 않은 가가막히는 결과를 만들 것이다. 그것이 긴 이스라엘의 역사고 아직까지도 이어지는, 신약시대까지 이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그의 기다리심과 크기를 모르므로 우리는 늘 조바심을 내고 쉽게 판단을 한다. 우리가 왜 정죄를 그토록 쉽게 하는지 아시는가? 불안해서 그렇다. 안심하고 싶어다. 잘못을 지적하면 나는 옳은 것인 것 같은.
상대방을 지적하는 것에 매달리지 말고 자신의 인생에 무엇이 옳은가, 지금은 내가 어디에 있는가, 성경말씀이 가르치는 어느 부분에 어떤 내용에 인도되고 있는가를, 각각의 생애가 그러하듯이,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인생을 사는 긴장과 깨어있음과 지혜와 기도와 무릎꿇음이 필요한 거다. 그리하여 하루하루를 쌓아가야 한다.
우리는 뭐가 두려운가? 하나님이 버려주실까봐 겁이 난다. 내가 잘못하면, 끝장일까봐 겁이 난다. 사사기는 역사서라고 그랬다. 일어난 일이다. 뭐와 같이? 아브라함을 부른 것같이, 출애굽 사건같이, 광야의 방랑같이, 가나안 입국 승리같이. 그 안에서의 실패도 하나님의 역사이다.
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무엇을 담았을까? 출애굽 사건은무엇을 담고 있을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의 완성을 향한 의지, 은혜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 그걸 보는거다.
그럼 왜 사사기같이 실패와 비극으로 눈물로 담아내셨을까? 모른다. 우리를 어디까지 부르시는걸까?
그 속에서 얻어지는 것은 우리가 잘했을때 얻는 것과 어떻게 다르고, 왜 필요할까?
그 사실을 이제 확인시키려 하고 계신다. 구원해 놓았으니 이제 네 책임이다, 십자가로 너를 구원했으니 이제부터는 네 책임이다,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 구원받은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
예수와의 연합,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고 일어난 성취이고 지금 누리고 완성될 현실이다.
우리가 어느 형편, 어떤 수준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혼자인 적은 없는 것, 그게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과, 그 구원으로 증명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다.
그러니 자기 인생을 살으라. 해설하지 말고. 그 해설하는 놈들 다 나와서 직접해 보라고 하라.
우리의 인생과 우리라는 구체적인 한 인생이 가지는 기적을, 경이를, 스스로의 인생과 인격과 생애와 현실 속에 경험해야 한다. 우리가 세상 속에 들어가 존재하면, 그들이 볼 때, 우리가 경이로운 하나님의 손길과 인간다움의 영광이 되게 해야 한다.
(기도)
하나님의 크심과 일하심의 지극하심을 확인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쉽게 피상적으로 대강하려는 우리의 죄를 놓아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진실하심으로 대하신다.
우리는 미쁨이 없으나, 하나님은 항상 미쁘시며 우리의 승리와 자랑을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기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신다.
그 사실을 아는 신자된 인생을 살아, 우리 모두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기적을 누리는 복을 허락받아야 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