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우리의 불만에 찬 현실이 하나님의 지혜이고 권능이라고 얘기하는게 십자가이고 오늘 우리의 삶

nazunzaro 2020. 2. 15. 21:58

세상이 우리를 잡아죽이고 우리가 볼 때 하나님이 없는 것같은 사건들이 하나님이 은혜를 기적을 담아서 기가막힌 걸 만든다. 이게 성경이 하고싶은 얘기이다.

 

성경의 인물들을 막막하게 그냥 존경하고 좋아하는 걸로 자기의 책임을 때우지 말고, 우리의 인생을 책임있게 살아내야 된다.

바울을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는가를 봐야한다.

 

인간이 뭔지 하나님이 누군지 구원이 뭔지 모르는 게 최고의 죄이다. 하나님 없이 사는 데 아무렇지도 않은 것, 그게 죄이다.

 

우리 한국교회가 가지는 최고의 신앙생활은 회개 많이 하는 건데, 회개 안해도 되니 앞으로 나아가라. 과거를 자꾸 들먹여서 들추어서 씻지 말고, 잘못한 거 놔두고 이번에는 잘 하라. 자꾸 잘 하라.

 

출애굽에는 하나님이 혼자 다하신다. 열가지 재앙, 홍해를 가르는 것, 다 하나님이 하신다. 광야에서도 모든 불평 다 들어주시고, 구름기둥, 불기둥, 만나, 매추라기, 반석에서 물까지 다 주시면서.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는 그것만은 백성들이 책임있게 결정해야 됐다.

`못들어 가겠습니다` 그랬더니, `너희들 다 죽어라` 이렇게 됐다. 거기엔 왜 하나님이 간섭 안하실까? 자유와 책임의 문제다.

 

기독교 신앙은 죄를 안짓는 문제가 아니다. 죄를 짓지 말라는 건 그 길로 가지말고, 우리 보고 약속된 영광과 책임의 자리로 가라는 거다. 그게 신앙생활이다.

그러니까 잘못한 것을 지우는 걸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면, 언제나 지난 한 주간동안 지은 죄를 낱낱이 까발리게 된다. 그것 하지말고, 오늘을 살라. 오늘을.

 

자꾸 회개하지만 말고, 잘 하는 것이 몇 번 있나 세어보라는 말이다. 죄를 안 짓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잘 하라는 것, 용서하는 것, 사랑하는 것, 기다려주는 것, 축복하는 것, 반가워하는 것, 사랑하는 것.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바울이 이제부터 어떻게 사느냐 하면, 그의 모든 서신서들에 의하면,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산다.

그런데 그 순종하는 삶이 뭐로 나오느냐 하면 고난으로 나온다.

잘 하면 고난을 안 받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고난의 길로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을 기쁨과 영광으로 안다.

이게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거다.

'내가 받는 고난을 걱정하지 말아라. 이것은 너희의 영광이니라' 이렇게까지 나온다.

 

여기에는 중요한 고백이 있다: `나는 내 집을 벽돌로 쌓지 않았기 때문에 벽돌을 뺏어가서는 내 집이 허물어지지 않는다. 내집이 만약에 벽돌로 지은 집이라면 그래서 벽돌을 빼가면 이 집은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내 집은 그렇지 않다.

내 길과 내가 전하는 복음들과 내 인생의 기쁨은 세상의 것으로부터 또는 세상이라는 방법으로 만든 게 아니라서 나를 방해할 수도 뺏을 수도 없다'.

 

그러니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사도바울의 말은 우리가 보통 얘기하는 식으로 우리가 필요한 어떤 그런 믿음이 우리 마음을 평화롭게 하고 권능을 나타내는 이런 조건으로 사용되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딴 세상에 다른 조건 다른 원천을 가지고 있는가를 표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왜 예수 믿는 게 고단하냐?

우린 다른 건 모른다. 하나님이 이 바울을, 그가 아는 모든 것을 꺾어 하나님의 종으로 불러서 보낸 길이 고단한 길이었다. 그가 얼마나 많은 해를 받고 고난을 받아야할 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게 정상적인 신자의 길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르는 게 있다.

●모든 가치있는 일들은 땀과 눈물없이 만들어지는 게 없다. 인생에서도 아는 거다. 우리에게 절실함이 없어지면 그때부터 망하는 거다. 사람의 사람된 진정한 가치와 내용이 다 부패한다. 도덕적인 일이 아니라 게으르고 무너지고 풀어진다.

 

우리가 동남아 같은데 갔다 오면 제일 좋은 게 뭐냐 하면 겨울에 공항에 내렸을 때 찬바람 부는 것이다. `서울에 왔어. 인천에 왔어. 정신 차려. 그 동안 생각없이 잘 지냈지?`이렇게 그냥 오자 마자 주께서 정신없이 얼굴을 싹 문질러 놓으신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 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는 길이다.

그게 사도바울의 생애이다.

 

예수를 믿고 그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것. 부활이라는 목적이 그냥 이렇게 하늘에서 둥실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로 가는 이 과정을 하나님이 요구한다,이다.

우리는 그것을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동역자 되는 것이라고 표현을 받는다. 고린도전서의 증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세상을 구하자 그러신다.

우리는 이 일에 어떤 배역, 어떤 자리, 어떤 신분이 된다.

우리의 조건과 지금의 현실이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의 자리이다. 안 믿어지지만.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다. 죽는 건데.

 

어떤 철학자가 이렇게 말을 했다. 자기가 예수를 믿은 이유는, 믿지 않았을 때 말이 안되서 안 믿었다고. 그런데 왜 믿냐도 똑같은 이유다. 즉 십자가에 죽는 신이 나를 믿으라 그러는 종교는 없다는거다. 신이면 권력을 갖고 있어야 될 것 아닌가. 모든 걸 물리치고 최고로 우뚝 선 권좌에 앉아있어야 신이 자신을 신이라고 우길 수 있을텐데, 이 신은 사람 손에 죽어가면서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너희를 만들었고 너희를 구원하노라' 그렇게 말을 해서 말이 안된다. 그러는 게 안믿는 조건이었는데, 왜 믿었다고? 그렇게 말하면 정신병자거나 진짜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거다

 

기독교의 다름을 알아야 한다. 다른 신들은 그럴 듯 하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안 그럴 듯 하다. 말이 안 된다. 뭐가 다른가? 다른 데서 약속하는 신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상을 얘기하고 있고, 기독교는 상상이 안가는 약속을 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해가 되느냐 안되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약속까지 이르지 않으면 만족이 안된다는 현실이다.

현실이 고단한 것도 현실이고, 내가 하나님 안에 완전히 들어가기 전에는 쉴 수가 없다는 것도 현실이다.

오죽하면 일요일 날에 교회 와서 앉았겠는가. 맨 정신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거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적당한 데서 타협하셨던 들 여기까지 안왔다. 하나님이 못 살게 구신다. 우리를 못 살게 구신다.

이게 바울의 증언이다. 모든 증언이 여기에 집중된다.

 

그러니 신앙생활은 쉽지 않다. 신앙생활은 대단히 어렵다.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그가 어떻게 부름을 받았고 무슨 일을 증언하고 있는 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들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우리가 아는대로 얘기하자면 '하나님, 그래도 이것은 좀 불공평하고 이것보다 쉬운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뭐 있습니까?' 이 불만은 꼭 나온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경악한 게 무엇이었느냐 하면, '유일하신 하나님이 온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택한 그리고 거쳐를 함께 한 성전이 있는 영원한 왕권을 약속한 유다 왕가가 있는 이 나라가 이방 신을 믿는 우상을 섬기는 이방 나라에게 어떻게 질 수가 있느냐? 잡혀갈 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 때문에 그 남왕국유다 말년에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지않고, '그럴리가 없다 우리가 망할리가 없다' 하고 자신만만해 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할 때도 그 산 제사는 죽은 제사가 아닌 산 제사의 개념이 아니고, 삶으로 드리는 제사이다. 이 질그릇 안에 담으셨다는 질그릇 같은 몸둥아리 이상으로 질그릇같은 삶에 담으신다.

●그런데 그 삶이 뭐냐 하면 여기 나온대로 `욱여쌈을 당하고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죽음에 넘겨지고 사망이 역사하는 그런 삶`으로 인도된다.

거기서 뭐가 나간다고? 질그릇 안에 보배가 있는 것 같이,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이 이 방법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아까 뭐라고 기도했나? '우리가 죄지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하셔야죠.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고 예전에도 우리 도우셨고 언제나 성실하시고 우리편이잖아요. 하나님은 하나님 하세요`

'좋다. 나는 하나님 한다. 너는 내 백성해라. 너 죽어라'.

여기서 걸린다. 우리의 지금의 삶의 형편, 그게 최선인 거다.

우리에게 준 오늘이다. 그냥 낙담하고 체념하고 살아라 그런 얘기가 아니라, 오늘 할 건 오늘 하라. 오늘의 자기 형편이 최선이다.

 

내일을 위해서 오늘 배로 노력해야 하는 건 맞다. 그 배로 고생한 것에서 신자가 [죽을 것같고, 손해보는 것같고, 낙심되는 그게,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살라고 준 하나님의 지혜이고 권능이고 책임이고 기회라고 알고 살라는거다.]

 

가만히 있지 마라. 더 잘되려고 애 쓰라. 그러나 잘 되야, 결과가 나와야 비로소 증명되는 게 아니라, 그 과정 하루하루가 다 모세가 하나님께 물었던 `하나님 뭐하고 계셨어요?` `얘야, 나는 하나님이기를 중단하지 않는 중단한 적이 없는 하나님이란다. 나 너랑 일했다. 네가 몰랐을 뿐이지`

 

●그렇게 오늘 우리가,

'왜 예수를 믿는데 이것 밖에 안되냐? 왜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시나?' 하는 우리의 불만에 찬 현실이 하나님의 지혜이고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얘기하는 게 십자가이고 오늘 우리의 삶이다.

하나님이 이것으로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가 안 믿는다.

그래서 늘 '조건이 나아지면 하겠습니다'이다.

 

그러니까 이게 예가 좀 애매하지만, 십일조를 내라는 것이다. 얼마가 아니라. 공평하게 십분의 일, 만원이든 십만원이든.

오늘 우리의 삶이, 더 지위가 높고 더 많은 권력을 갖고, 그러니까 더 많은 힘을 가져야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처럼 얘기하면 안되고. 우리가 어떻게 쓰임을 받는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과 같이, 우리가 해야.되는 우리의 책임이고 명예고 기회라고만 알고 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같이 이 부분이 납득이 안된다고?

빌립보서 2장;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게 하나님이 자기를 증명하는 좋아하시는 방법이라고 한다.

'내가 하나님이다' 뭘로 한다고? 아들을 십자가에 내 주는 것. 이거 환장하는거다. 하나님이 폼나게 구시고 우리한테 부스러기 남겨 줬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이 다 털리고 죽어버리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증명하시고, 그것을 자신의 영광으로 삼는다고 한다.

 

'십자가에 죽은 내 아들을,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려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옵소서`라는 항복은 어디에서 받아내느냐?

이걸로 받아내신대요. 우리가 좋아하는 형통 능력 아니고,

'신이 인간을 위하여 이렇게 자신을 다 내주실 수 있는가?' 라고 성경이 증언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하나님 하십시오`

'난 했다. 한다.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다'

예수가 죽었잖은가. 아버지께서 보내셨잖은가.예수님이 마지막에 물었다. '아버지여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비켜주시옵소서'. '얘야, 더 가자'. 그게 십자가이다. 하나님이 이것으로 받는 영광.

 

● '나는 내 할일 했고 내 영광을 이렇게 드러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요구하는 `너희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그 길로 나의 영광을 드러내길 바란다. 내가 하나님 노릇할테니까 너는 내 자식 노릇해라` 이렇게 말하는거다.

 

● 좋은 일하면 폼나고, 넉넉해야 나가는 게 아니라, 좋은 일을 어떻게 하라고? 좋은 일을 죄인같이 하라. 꿀려서 하는 것같은 위치에서 하라.

뭐 할때? 이것 뭐 굉장하지 않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을 때'. 우리 이런 말 할 때 얼마나 서슬이 시퍼래지나?

`너 요새 무슨 일 있지?``아니 어떻게 아셨어요?' '너 요새 새벽기도 안나오더라. 나 너희 집에 큰 일난 거 다 안다`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닌가?

`아퍼? 근심있어? 내가 기도해 줄께. 얼마나 힘들어` 그래야 한다. 우리 그렇게 말할 줄 모른다.

 

그러니까 전체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러는가? 한번 생각을 해보라. 뭘 하자는 거인가? 하나님이 우리 보고 `너, 네 조건이 최선이다. 하나님의 지혜이고 권능이다. 거기서 하나님이 일하신다 걱정마라. 너, 좋은 소리 해라. 네가 선택해라` 그게 자유이다.

'그런데 울부짖어도 된다. 그러나 울부짖는 것은 명예롭지 않다. 너, 감사할 줄 알고 좋은 말 해라. 네 불편을 다른 사람한테 떠넘기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말 있다. 나도 당해봐서 알아. 얼마나 어려워?`그말 해야 한다.

 

편을 들라. `힘들지? 내가 도와줄 것 없어? 세탁은 내가 해 줄께. 청소는 내가 해 줄께` 그런 말을 할 줄 알아야, 아무 때나 할 수 있어야 이게 비로소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다.

 

모세와 바울에게서 배우는 것은 그들이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위대하게 쓰셨다. 누구를 위해서라고? 우리를 위해서 쓴 거다. 우리 보고 우리의 조건과 형편이 하나님의 지혜이고 능력이니까, 마음놓고 사랑하라고 마음놓고 섬기라고.

 

'내가 섬겼더니 저게 날 깔봐요`. `괜찮아` 그러시는 거다.

그 `괜찮아`가 싫은거다.

'하나님은 이 방법으로 복음을 전했다. 복음은 공포로 권력으로 다가가지 않는다. 우리의 섬김과 우리의 피와 눈물로 담으신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가장 자랑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다.

 

심지어 내가 받은 계시가 너무 크기 때문에 내가 너무 자고할까봐 하나님이 나에게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주를 주셨다. 제가 주께 세 번이나 간구했다. 이것을 제거해 달라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네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그런데 이게 뭔지 아무도 모른다.. 바울 밖에 모르는 거다.

 

예수님이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시험을 받아요.

마태복음에 의하면 마지막 시험이 높은 산에 올라가서 내게 절하면 다 주겠다였어요. 예수께서 뭐랬어요? '사탄아 물러가라`예요. `너 이 새끼 죽을래?` 그러지 않고, `물러가라`예요

사단이 권력과 유혹과 모든 것을 행사하는 속에서 그의 공생애를 살아내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 믿고 얻은 구원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담아내신 것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가 사는 이웃과 우리시대와 사회 앞에서

증언해야 된다. 큰소리 치라는 것 아니다. 존재하라는 거다.

매일 매일 살아야 되는, 죽을 것같은, 숨찬 거기에, 우리가 이 인생의 가치가 있다고, 하나님이 이걸로 일하신다고 믿는 거다

 

믿음이란 결과를 얻는 게 아니라, 말이 안되는 모든 경우를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믿는 거다. 그래서 감수하는 거다. 평안하지 않다. 괴롭다. 원망스럽다.

그러나 이게 우리가 원하는 어떤 권력이나 지식이나 지위로도 할 수 없는 것을 담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방법이라는 걸 믿는다.

그게 바울이고 우리의 현실이다. 반복되는 하나님의 현존이다. 임재이고 기적이고 증언이다.

 

우리의 인생,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찾아오시고, 현존하시고, 그가 일하시는 손길이 된다.

 

● 우리는 늘 불만이다. 더 큰 힘과 권력이 있으면 더 많은 일을 행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안하신다.

우리 보고 `네 인생 살아라. 그 작은 인생 살아라, 괜찮다. 내가 그렇게 했다. 너와 일한다. 내가 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이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를 아멘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일에는 누가 더 나은 조건도 못한 조건도 없다.

하나님 일하심을 믿고 순종하여 그 기적의 인생을 살아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박영선목사, 하나님의 사람 바울, 2020합신인천노회제직세미나 02, 2020.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