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박영선목사 다시보는 열왕기 (15) / 2022.02.06 / 열왕기하 4:1-7]

nazunzaro 2022. 2. 6. 23:47
[다시보는 열왕기(15) / 2022.02.06 / 열왕기하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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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믿음의 결실은 그것이 보상을 받는 업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존재론적 결실이다. 내가 크고 내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현실이 기적이란걸 알게 된다

- 하나님이 그 전에 부를 때 이미 한 약속이라면, 그 다음에 우리가 한 어떤 각오, 어떤 결심, 어떤 옳음에 의한 보상으로 약속이 되는 게 아니고, 그런 행위가 일어나기 전에 준비된 것인데, 그러면 이것은 도대체 무슨 차원이고 어떤 이야기일까?

- 우리의 결실은 그것이 보상을 받는 업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존재론적 결실이다.

- 믿음이 좋으면 우리는 무슨 보상을 바라느냐 하면 형통을 보상으로 바란다.
우리가 컸다고는 생각을 안 한다. 우리가 크면 어지간한 문제도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고난도 당할 수 있고, 억울함도 당할 수 있고, 기쁜 것도 절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게 말하자면 성숙이 말하는 성장이요, 믿음의 결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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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믿음의 결실이 보상을 받는 어떤 표가 되고 어떤 조건이 되는 것으로 이해가 되어서, 자꾸만 불평이 생긴다. 도대체 어디까지 더해야 하나님이 내 편을 드실 것인가 하는 불평이..
​내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 우리는 구원이라는 것이 천국 가는 문제보다 더 큰 영광의 문제라는 것을 거듭 확인받았다​

- 구원을 베푸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부른다는 거다. 놀랍지 않은가!

-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나타난 그것이 어떤 위대한 사건, 환상, 어떤 미래적 기대보다,
훨씬 깊고 섬세하고 치밀하게 우리 모든 각각의 생애, 성품, 성격에 개입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 '믿음이 좋아야 돼'라는 말은 뭔가?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도전으로 알고 살라는 게 믿음이 좋은 거다.
거기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이차적인 문제이다. 잘못해도 커야 된다. 후회가 따라야 한다.
반성이 따라야 한다. 그래서 내일은 오늘보다 낮게 되는 것이 오늘 내가 믿음이 좋은 것이다.
'오늘 승리했으니 내일은 가만히 있어도 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돼버리는 바람에 우리는 신앙생활이 아무리 살아도 행복하지 않다라는 넋두리가 되고 마는 거다.
​그 하루하루가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지금 나의 어떤 속깊음, 어떤 성실함, 어떤 성품에서의 위대함들은, 지난 날의 실패 후회 그 모든 것들이 쌓여서, 후회와 절망을 넘어서 만들어진 자리다. 그 상처가 없어지지 않아야 된다고 그랬다. 예수님 못 자국이 부활 후에 그대로 있었듯이. 그 모든 것이 나를 만든 것이란 말이다. 이게 믿음이 좋은 거다.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잘못했냐, 내가 잘못했냐?' 하는 싸움이 벌어지는 이런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엘리사에 대해서 도통 이해를 못하는 거다.​

- 무너지지 않는다는 거는 현실을 바꾼다는 뜻이 아니다. 감수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감수하듯이.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고 권능이다'를 감수하는, 이것이 일을 한다.

- 우리가 아는 보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상은 부활입니다, 이걸 아는 생애를 살겠습니다' 이게
​정말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 자녀의 특권이다. 이래서 찬송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를 넘어와야 된다. 그래야 현실이, [현실이 기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나는 내가 아는 공부 정도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한 그 도전], [하나님의 신비한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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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엘리사의 사역이다. 엘리사는 북왕조 아합의 아들인 여호람왕 때에 선지자 노릇을 한 분이고
많은 기적이 여기 소개되어 있다. 그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엘리야를 이어서 엘리사가 선지사역을 했다는
사실을 연결해서 생각을 해야 된다.

엘리야의 선지사역과 엘리사의 선지사역은 대단히 그 모양이 다르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으로 넘어간 이스라엘 왕들과 그 백성 앞에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 한 분이시다'라고 소리 높이 하나님의 그 존귀와 또 그를 향한 충성과 고백을 백성들 앞에 크게 선언하는 엘리야라면,
엘리사는 일상 속에 들어와서 하잘 것 없는 일들에 그 기적을 베푼 선지자로 이렇게 대조되고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성경을 예전에 배울 때는 이런 구약의 사건들을 문맥 없이 많이 배웠다. 엘리야는 갈멜산 전투의 승자로, 엘리사는 그 뒤를 잇는 많은 기적들의 승자로 기억되는 그런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조금만 더 문맥을 이어서, 말하자면 [문학적 해석력]을 가지고 보면, 엘리야 때에는 하나님이 엘리야 선지자가 나타나는 때까지 하나님이 이렇게 약간 방관하시는 것 같고 심사만 하시는 것 같은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다윗의 길을 걸었느냐,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느냐 하는 식의 이분법으로 그의 백성들의 충성도를 혹은 잘못을 심사하고 계시는 분으로 보였는데, 엘리사로부터는 그 양상이 바뀌어서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 속에 인생 속에 뛰어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로 인하여 감동을 받으사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증명하기로 하신 것으로 보이는데,
엘리야로 인하여 감동을 받으셨으면 그 후에 보다 큰 기적으로 또는 모양으로 등장하시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굉장히 사소한 일들, 말하자면 어느 가난한 여인의 처지 또는 굶게 된 자기 선지자들을 먹이는 일,
이런 사소한 일들로 그의 사역이 소개되어 있다. 물론 사소하지만 엘리야 때와 달리 일상 속에 현실 속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으로 분명히 더 깊은 의미가 있지만, 그래도 우리의 기대와는 약간 다른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깊이 우리 생에 찾아오시고 관여하시는 것은 이제 엘리야의 선포를 구경만 하지 않고, 이제 그 심사위원의 자리를 떠나서 우리를 편들고 함께 하고 승리케 하시겠다는 성육신의 모습, 또 우리를 승리케 하기 위하여 일일이 간섭하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보여진다.

이 엘리야가 엘리사로 이어 오면서 그 사역의 이 차이는 이름에서도 나온다. 엘리야는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 한 분이시다' 하는 이름이었다면, 엘리사는 '나의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다' 그런 뜻이다.
그래서 우리를 다만 기다리고 있다가 심판을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승자가 되게, 성공한 사람이 되게
우리의 생애에 찾아오시겠다' 그런 뜻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문학적 읽기'에서, 우리가 보는 문학적 읽기라는 것은 성경을 읽을 때 대단히 중요한데,
'신학적 읽기'까지 가야 되지만, 문학적 읽기가 지금 시급하다. 왜냐하면 성경을 읽을 때 문맥을 놓치고
그 어떤 사건과 어떤 구절들에 하나씩 파편적인 가치로 외우는 것을 넘어서서 문맥을 이으면 그 내용이, 담긴 그 본문이 굉장히 풍성하고 더 놀라운 차원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엘리야로 인하여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셨다' 그러는 건 굉장히 놀라운 문학적 이해인데, 말라기에 소개되는 엘리야는 그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고, 부모의 마음을 자식에게 돌이키게 하는 사역의 주인공으로 엘리야가 소개됐기 때문에, 여기에 하나님은 분명히 엘리야로 인하여 이 백성에게 마음을 돌리신 분으로 보인다.

이런 식의 이해는, 엘리야와 엘리사를 잇는 이 차원에서의 문맥적 이해는 좀 더 신학적인 이해로 창세기에서는 이렇게 나타난다. 창세기 22장에 가면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얻은 아들을 제물로 바쳐라'가 나오고, 아브라함은 어떻게 된 셈인지 일언반구도 없이, 어떤 갈등도 고민도 없는 것 같이 이삭을 갖다 바친다.
그를 잡으려고 할 때 칼로 찌를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막으신다. 그리고 이렇게 놀라운 말씀을 한다.
'니가 이제 네 아들도 아끼지 아니하고 나에게 바쳤으니 내가 맹세코 나를 두고 맹세하여 너로 모든 민족의 구원이 되게 하고 네 씨로 네 대적의 성문을 얻게 할 것이라'라는 어마어마한 약속을 한다.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한다. 네 이 믿음의 행위로 인하여 내가 너를 열광의 구원자로, 복의 근거로, 그리고 대적을 멸하는 하나님의 전사로 내가 네 생애를, 네 지위를 맹세하마'라고 한다.

★그런데 이 문제는 따지고 보면 아브라함을 불러낼 때부터 했던 약속인 것이다.
이삭을 잡아서 받은 약속이 아니라, 이삭을 낳기도 전에 그가 처음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은, 창세기 12장 1절에서 3절에 나오는 이 놀라운 약속의 반복일 뿐이다.
"내가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의 재판이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엘리야와 엘리사를 이어가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 엘리야의 돌연한 고백, 돌연한 선포, 그의 어떤 놀라운 신앙고백들이 가지는 하나님의 반응으로 엘리사가 등장하여. '좋다, 내가 이제 다만 방관자로서 심사위원으로서 이렇게 물러나 있지 않고 너희를 승리케 하고 성공케 하기 위하여 내가 너희의 각각의 생애 각각의 정황에 뛰어들어 편을 들겠다' 하는 문맥적 이해가 신학적으로는 어디까지 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그 전에 이미 부를 때 한 약속이라면, 그 다음에 우리가 한 어떤 각오 어떤 결심 어떤 옳음에 의한 보상으로
약속이 되는 게 아니고,
​★그런 행위가 일어나기 전에 준비된 것이라면, 이것은 도대체 무슨 차원, 어떤 이야기일까 하는 것이 이제 더 중요한 본문이 된다.

아브라함은 부름에서 이 약속을 받았는데, 그 부름을 받았을 때는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모를 때이다.
아브라함의 등장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을 하지 말고 그 앞에 1장에서 11장까지의 창세기의 기록을 문맥으로 가져야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고 세상을 다스리기로 약속하셨는데, 타락하여 죽음이 오고 저주가 오고, 인류는 대대로 하나님 모르고 반대하고 못나게 굴어서 홍수 심판을 당하고, 새로운 민족을 셋으로 말미암아 허락했지만, 바벨탑을 쌓는, 하나님 보시기에 그 벌받아 마땅한 짓만 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아브라함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믿음이라고 얘기하는, 성경의 믿음이라는 개념은 굉장히 깊은 거다.
★믿음은 우리 생각에는 우리의 반응, 우리의 책임인데, 성경은 믿음이 도대체 어디서 시작하고,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에 대해서 다른 데 너무나 많이 감춰놔서, 우리는 우리의 책임으로, 우리의 선택으로 밖에는, 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다. 그런데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하여 헌신했거나 선택을 했거나 책임을 진 것이 아니라 밑도 끝도 없이 부름을 받는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붙들려 나온다. 자기 인생을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데 끌려 나온다. 그의 생애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하나씩 알아간다.
그리고 드디어 백세의 아들을 낳는다. 굉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자 그는 바친다. 그러자 하나님이 너무나 기뻐해서 무슨 약속을 했다고? 그거 이전에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을 때 했던 약속이 여기서 다시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로 다시 재연된다. 이게 무슨 뜻일까?

그러니까 엘리야로 인하여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셔서 엘리사로 활동하시는 것이 엘리야의 어떤 충성과
하나님 보시기에 기쁘심이 하나님을 감동시킨 것이라는 우리 문맥적 이해가, 아브라함 사건에서 이삭을 바치고서 받은 하나님 앞에 약속들과 마찬가지로 문맥으로 보자면 아브라함의 결과에 대한 보상으로 나오지만,
엘리사가 엘리야를 뒤이어 나오듯이 아브라함에 관한 것이 창세기 12장 1절에서 출발해서 2장에 와서야
그 보상에 해당하는 행위가 나온 것 같이,
거기에 선과 후에서는 이 결과가 나오는 것 전에 약속이 있었고, 그 약속은 뜻밖에도 본인의 항복으로 결실되는 것으로 완성이 되더라 하는 것이다.

★약속이 먼저 있다. 그 약속이 이 결과를 만들겠다는 약속이다.
이 결과를 만들면 약속이 유효하다가 아니라, '내 약속은 너한테 약속했으니 네가 그 약속을 얻기에 합당한 행위를 해라'라는 명령이 아니라,
'그 약속을 내가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선포이더라. 그러니까 '이 약속을 받았으면 알아서 살아라' 그런 뜻이다.
여기서 '알아라'는 물론 당연히 '마음대로'가 아니다.
'너는 다른 존재다. 내가 너한테는 내 모든 것을 건 존재다. 내가 그것을 이루기까지는 내가 너를 떠나지 않는다' 이게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다 이거다.
그러니까 이 믿음이 우리가 보통 말하는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서 우리가 결실해야 되는 것인데,
★우리의 결실은 그것이 보상을 받는 업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존재론적 결실이더라 이거다.

내가 이거 못 알아들을 줄 알았어..ㅎㅎ
★믿음이 좋으면 우리는 무슨 보상을 바라느냐 하면 형통을 보상으로 바란다. 우리가 컸다고는 생각을 안 한다.
우리가 크면 어지간한 문제도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고난도 당할 수 있고, 억울함도 당할 수 있고,
기쁜 것도 절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게 말하자면 성숙이 말하는 성장이요 믿음의 결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결실이 보상을 받는 어떤 표가 되고 어떤 조건이 되는 것으로 이해가 되어서 자꾸만 불평이 생긴다.
도대체 어디까지 더해야 하나님이 내 편을 드실 것인가 하는..
내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그래서 믿음에 관한 히브리서 11장의 선언을 보면,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 보듯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나니
그를 믿는 자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가까이 하는 하나님이 상주시는 하나님임을 믿어야 한다는 거다.
하나님이 계시는 것과 하나님이 상 주시는 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게 믿음이다.
여기서도 우리로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이 계시고 그래서 그 앞에서 내가 선을 행하여 하나님한테
보상을 받을 수 있다로 금방, 이 그러니까 기껏 [문학적 해석]을 한다고 해봤자, 그렇게 밖에는 그 문맥이 내용을 담아내지 못하는데,
[신학적 해석]이라는 건 즉,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과 하나님이 상을 주신다는 것은 차원이 훨씬 다른 것이다.

그가 계시다는 거는 우리 모세에게서 봤다. 모세가 자기 백성을 위하여 궐기할 마음이 있었고,
히브리 백성이라는 것이 하나님과 어떻게 특별한 관계에 있는가도 알아서 그가 40세에 궐기했을 때는
하나님이 당연히 편들어 주실 걸로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꾸하지 않으셨고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다 타버린 재같이, 정말 아무 낙이 없는 사람으로 살다가 80세에 돌연히 부름을 받는다.
그의 반응은 당연히 '왜 40년 전에는 가만히 있으셨어요? 이 40년은 뭐예요?' 당연히 그 반문이 나온다.
이거 꼭 기억해 둬야 한다. '지난 40년은 뭐였어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잖아요? 그때 했으면 좀 더 쉬웠을 거 아니에요? 당신은 누구세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하나님이기를 중단하지 않는단다. 나는 언제나 하나님이란다. 어느 경우에도 하나님이란다."
기억할 만한 답이다. .
[하나님이 계시다]라는 건 이런 뜻이다. 하나님이 있다, 없다가 아니다. 하나님은 늘 하나님이시다.
온 천하와 역사와 우주와 경우와 사고와 생각과 모든 일에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그분이 상을 주신다. 어떤 상을 준다고?
★우리는 구원이라는 것이 천국 가는 문제보다 더 큰 영광의 문제라는 것을 거듭 확인받았다.
로마서 3장 23절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것이 이유이다.
구원을 베푸시는 이유, 하나님의 영광으로 부른다. 놀랍지 않은가!

우리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6절을 자주 언급했다;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식이 얼마나 부자가 되냐, 얼마나 명예가 생기느냐, 얼마나 유명하냐 하는 것으로 자식을 평하지 않는다.
자식이 영광이 되는 것은 그 인성의 문제이다. 한 인간의 가장 큰 영광은 그 인성의 문제인데,
그 인성이라는 것이 세상에서는 기껏 해봤자, '도덕적이고 그리고 쓸모 있고..' 그렇다. 그거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신학적 세계에 들어오면, 신학적 세계 즉, 우리 기독교 신앙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의 영광이 되며, 하나님의 찬송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비교할 수 없이 다른 차원의 얘기를 성경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을 주신다 하는 것이 우리가 믿음을 바쳐 잘 함으로써 하나님이 무슨 보상을?
자존심 세울 보상, 뭐 병 안 걸릴 보상, 그 남들에게 그 부러움의 대상.. 이런 정도로 얘기하는 것은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모독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단계를 못 넘어선다.
우리가 이해하기 위하여 문학적 해석을 도입하는 이유는 뭔가? 신학적 해석으로 가려면 문학적 해석이 중요한 하나의 과정이 된다. 문맥을 알아야 되니까.
그러니까 성경이 엘리야와 엘리사에 걸쳐서, 그리고 저 아브라함의 생애에 걸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누구이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누구인가? 그래서 하나님이 뭘 하고 계시는가?
우리의 생애, 각각의 경우, 정황, 시대에 무슨 일을 하시는가?'가 엘리사에게서 이렇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엘리야는 굉장히 큰 사람이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도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다.
그 엘리야의 등장은, 모세의 등장이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으로 나타났고, 엘리야의 등장이,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나타난 그것이 이렇게 어떤 위대한 사건, 환상, 어떤 미래적 기대보다,
훨씬 깊고 섬세하고 치밀하게 우리 모든 각각의 생애, 성품, 성격에 개입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믿음이 좋아야 돼'라는 말은 뭔가?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도전으로 알고 살라'는 게 믿음이 좋은 거다.
거기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이차적인 문제이다. 잘못해도 커야 된다. 후회가 따라야 한다. 반성이 따라야 한다.
그래서 내일은 오늘보다 낮게 되는 것이 오늘 내가 믿음이 좋은 것이다.
'오늘 승리했으니 내일은 가만히 있어도 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돼버리는 바람에 우리는 신앙생활이 아무리 살아도
행복하지 않다라는 넋두리가 되고 마는 거다. 그 하루하루가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지난번에도 놀렸던 기억이 나는데,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가 멋지게 한 번..' 뭐? 멋지게 뭐?
그 후회가 지금을 살게 해야지. 지금! 지금 그래서 어떻게 된 건가? 지금?
★지금 나의 어떤 속깊음, 어떤 성실함, 어떤 성품에서의 위대함들은, 그 모든 것들이 쌓여서 후회와 절망을 넘어
만들어진 자리라는 말이다.
그 상처가 없어지지 않아야 된다고 그랬다. 예수님 못 자국이 부활 후에 그대로 있었듯이.
그 모든 것이 나를 만든 것이란 말이다. 이게 믿음이 좋은 거다.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잘못했냐, 내가 잘못했냐?' 하는 싸움이 벌어지는 이런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엘리사에 대해서 도통 이해를 못하는 거다.

그래서 이것이 얼마나 이중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보상하시느냐? 하박국 선지자는 이제 남왕국 유다가 망할 때쯤에
이제 선지자가 됐다. 그가 하나님께 이렇게 대든다; '이렇게 불의가 판을 치고 악인들이 의인들을 못살게 굴고 하는 거
하나님 보고만 계실 겁니까? 이게 뭡니까?' 그런다.
하나님이 '그 네 말이 맞다. 내가 곧 심판할 거다. 내가 바빌론을 일으켜서 이 나라를 심판할 거다' 그러신다.
하박국이 놀란다. '아니, 악인들만 딱 벌하셔야지, 악인들을 벌하시기 위해서 나라를 전체를 다 멸망시키면
의인들은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런다. 하나님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 그러신다.

그러면 우리 생각해 보자. 의인이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 그러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지켜내야 된다,
당연히 그렇게 이해가 된다. 내가 [문학적 이해]라고 하는 것이다.
보통 기독교 신앙인들은 보면 이런 문학적 이해도 없다. 그냥 몇 가지 단어들로 자기 마음대로 짜 맞춰갖고
'기도해야 돼. 인내해야 돼. 겸손해야 돼' 이렇게, 그 문맥에 맞는 말은 하나도 안 한다.
사람이 울고 있는데, '너, 왜 울어? 응? 믿음 있는 사람이 뭐 울 게 뭐 있어?' 이딴 소리나 하듯이,
이렇게 문학적 이해도 없단 말이다. 그러니까 신학적 이해까지 못 쫓아온다.

그러니까 하박국이 이 얘기를 듣고 어떻게 반응하냐 하면, 우리 잘 아는 이 반응을 한다; '외양간에 소가 없고
포도밭에 소출이 없어도 나는 하나님을 인하여 찬양하리라' 한다.
그럼 생각해 보라. 이것이 우리에게 각오를 요구하는 거라면 뭐라 그래야 되나? '하나님 전 목숨이 끊어질지라도
하나님 편을 들겠습니다' 이런 각오가 나와야 되잖은가? 근데 뭐가 나왔나? 각오가 나오지 않고 찬송이 나왔잖은가?
★​이게 무슨 말이라는 건가? '믿음으로 살아라'가 뭐래는 건가? "내가 있다. 걱정하지 말아라" 그런 뜻이잖은가?
생각해 보라. 내가 넘어지면 하나님이 넘어지는 거 아니고, 내가 외면하면 하나님이 외면하는 거 아니다, 그거다. "내가 있다"이다.
그게 뭘 만들어야 되나?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가 돼야 한다.
★무너지지 않는다는 거는 현실을 바꾼다는 뜻이 아니다. [감수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감수하듯이.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고 권능이다'를 감수하는, 이것이 일을 한다.]
우리가 아는 보상, 우리가 아는 보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상은 부활이다. 이걸 아는 생애를
살겠습니다' 이게 정말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 자녀의 특권이다.
이래서 찬송이 나오는 것이다. 이해한다? 이해하는 척이라도 한다? ^^
여기를 넘어와야 된다. 그래야 현실이, 현실이 기적이라는 걸 알게 된다.
나는 내가 아는 공부 정도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한 그 도전, 하나님의 신비한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3장에 오면 신약에서는 이렇게 다 묶어서 이런 결론들을 이렇게 소개한다.
에베소서 3장 14절, 사도바울의 에베소 교인들을 향한 기도이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에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충만으로 가는 길, 영광으로 가는 길, 현실, 현재, 나, 지금, 지금의 형편 이런 것들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우리의 삶을 승리와 영광으로 가지시는 믿음의 승리가 있기를 바란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었으니 무엇을 더 구하겠습니까?
사랑하며 충성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이 더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지기 위하여 책임지는 인생이 되게 하시고,
감사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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