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신년설교 / 박영선목사 / 고전 4:1-5 / 2011.01.09 / ]
nazunzaro
2022. 1. 30. 23:55
●하나님 믿으면 어떤 보이는 보상이 있다고 생각치 마라. 가질수록 목마른게 세상의 것들이다. 그것으론 진정한 만족과 평화는 없다. 예수 믿는 건 인격, 영혼, 진리, 영생에 관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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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신년 / 박영선목사 / 고전 4:1-5 / 2011.01.09. / ]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전 4:1-5)
이 성경 말씀의 배경은 사도 바울이 세운 고린도 교회에서 사도 바울이 신앙의 본질적인 도전을 받고 거기에 대하여 답하는 내용이다.
그 본질적인 도전이란 무엇이냐 하면 사도 바울이 와서 유일하신 하나님이신 우리 하나님과 그가 보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이제 전하여 이 교회와 신앙인들을 만들어 냈는데, 저들이 볼 때 온 천하만물을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유일한 하나님의 사자로써 사도 바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도전이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 하면 신의 사자이면 인간보다는 나은, 신과 인간 사이 쯤에 어떤 천사쯤 되어 보여야 되는데
전혀 외모로나 또는 그의 사역의 과정 속에 그런 신적인 특혜를 받는 모습이, 보상을 받는 모습이 없더라 하는 것이다.
'당신이 신의 사자가 정말 맞냐?' '당신이 전하는 하나님이 정말 천지에 유일한 주인이 맞냐?' 하는 질문이 된 것이 여기 나오는 도전과 질문이고, 거기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인 것이다.
그의 답은 하나님의 종된 자, 또는 일반적으로 얘기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신앙인들에 있어서 그 신앙의 증거와 보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며 세상의 가치와 다른 것이다.
쉽게 얘기하면 그건 충성의 문제이다.
충성의 문제란 뭐냐? 감동과 납득의 문제와 다르다 그것이다.
감동과 납득의 문제와 다르다는 것은 세상적인 기준으로의 감동과 납득을 넘어서는 것이다,라는 이야기인 것이고,
충성의 문제라는 것은 그것이 신념이나 개념의 싸움이 아니고 지휘관, 인격자 지휘관에 대한 무한 신뢰요 순종이다, 이렇게 답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아차 잘못하면 맹신을 강요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생각도 하지 않고 의심도 하지 않고 무조건 충성하라는 것은 맹종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이 문제의 아주 중요한 부분은 그것이 우리가 논리적으로 이해되거나 현실적으로 이해되는 것으로 기독교가 전락할 수 있다는 것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이 가지는 그 신앙의 중요한 특성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우리 성경으로, 기독교 신앙으로 제대로 정리하는데 있어서 오늘의 이 본문이 매우 중요하다.
그는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 점수를 매길 수가 없다는 뜻이다. 지금 내가 몇 점짜리 인지, 지금은 채점할 때가 아니다, 그거다. 지금은 충성할 때다 이거다. 그것은 나중에 답안지를 보고 채점을 해봐야 된다라는 뜻이 아니라,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때가 아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신비는 너무 깊어서 지금은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충성이 요구된다, 그렇게 얘기한다.
고린도 후서 1장에 가면 이런 말을 하는 배경에 이런 사도 바울의 경험과 이해가 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 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이 기록을 지금 왜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종이 되면, 또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되면 어떤 보이는 보상이 있다고 쉽게 생각하지 마라' 라는 설명을 위하여 이 경험을 기록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중요한 하나님의 일꾼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와 예수를 보내신 것이 무엇이며, 예수가 누구인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목적이 무엇인가를 전하러 다니는 중요한 하나님의 일꾼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 자신이 그일에 항복하여 믿음을 가지고 헌신하여 그의 생애를 바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쉽게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더 주시고 그를 통하여 이루실 일들의 중요성을 위해서라도 형통케 하셔야 맞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종인 사도 바울의 생애는 그의 막중한 임무에도 불구하고, 그 임무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달팠다고 하는 것이다.
왜 고달팠느냐?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자신을 의뢰하지 말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려 하여 하나님이 사도 바울의 사역과 인생이 고달프게 했다고 이해한다 그렇게 증언한다.
이 증언의 중요성은 이것이다. 우리는 물론 기독교 신앙을 시작할 때 현실적 고달픔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아 나온다. 그것은 분명한 하나의 계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현실적인 고달픔 속에서 영혼의 갈증을 확인하게 되고, 현실과 현실을 붙잡고 있는 영구한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이 현실적인 답을 하심으로써 다만 현실의 해결이 아니라 현실을 붙들고 있는 진정한 힘, 근원, 주인을 만나게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현실적인 해결들은 종종 우리를 하나님이 마치 물질계를 주관하게 하는 신에 불과한 것같은 생각이 들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물질계를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소유자인 당신의 형상으로 우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놓칠까 봐,
하나님께서 물질로써, 다만 현실로써의 보상이 아닌,
더 깊은 답을 찾고 더 깊은 내용을 담게 하기 위한 좌절과 고난을 준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확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확인시키는 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증명하고 당신의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 다만 현실, 다만 물질적 조건과 환경 속에서의 능력자로 소개되는 것을 거부하고 계시다는 거다.
그것보다 더 깊고 깊은 내용으로, 인격과 영혼에 관한 문제로, 진리와 영생에 관한 문제로,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그렇게 대접하고 다룬다고 바울의 생애와 사역 속에 간섭하고 계시는 거다.
‘너는 돌아다니면서 나를 마치 무슨 복권이나 무슨 마력을 가진 존재로 소개하지 말아라, 그렇게 이해하지 말아라, 너 자신부터 똑바로 나를 알고 나를 증언해라’ 이렇게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이 부분은 싫다. 고단하니까. 그러나 이 부분은 보다 깊은 문제를 품고 있다.
같은 고린도후서 12장에 가면;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지금 헌신하고 있다. 열심이 있고 간절함이 있다. 그런데 그 사도바울에게 외적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몸에 가시가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심한 것이었는지 사단의 가시라고 여기 명명하고 있다. 우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어떤 치명적인 질병이었고 보는 사람들에게 시험을 줄만한 병이었다,라고 알고 있다.
이 큰 질병과 이 장애가 복음의 방해가 되기 때문에 이 사단의 가시를 빼달라고 기도했다.
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였다. 이는 네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일반적인 기독교 신앙 자체를 이 문제에 연결시켜 보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세상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주인이시라는 걸 알고 있다. 그 하나님께서 당신을 믿기를 원하고 계시며 당신께 기도하며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복을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할 마음까지 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 일에 하나님이 응답을 해 주시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보답을 받으면, 이 보상과 응답을 받으면 쉽다. 하나님이 과연 살아 계시구나, 하나님이 내 믿음을 받아주시는구나, 나를 통하여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구나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오히려 더 많은 숫자에게 하나님은 이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다.
나 자신을 위하여 하는 기도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고픈 간절한 기도에서도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가 사리사욕을 쫓거나 세상의 쾌락에 빠지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기심과 자만심을 위해서 구하지않는, 가장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기도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곤 한다.
■우리 다 놀랍다. 그 일이 우리 자신을 고민케 하며, 하나님이 과연 계시는가? 내가 하나님을 이래도 믿어도 맞나? 라는 의심이 될 만큼 큰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쉽게 답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지금 사도 바울의 기도가 그것이다. ‘이 사단의 가시를 빼 주십시요. 이것은 백해무익합니다.’ 그래서 여기 답이 나온 것같이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다.
왜? 이는 네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진다고 한다.
조금 이 문제를 풀고 다시 현실로 돌아가자.
하나님이 하시는 답은 이거다. ‘나는 네 헌신, 진심, 능력, 소원보다 크다.’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나의 헌신을 먹고 살고 내 능력에 의존하여 사는 분인 것같이 오해하곤 한다.
우리의 간구는 종종 내가 진심이고 사욕을 갖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내가 흔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유익이라고 우긴다는 것이다. 설마?
그러나 우린 이 답을 받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우리가 거부할 분노를 가진다는 점에서 이 진단은 정확하다. ‘이 진심에 답하지 않는다면 그게 하나님이 맞습니까?’라는 이 분노와 거부가 일어나지 않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동의를 요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존재와 일하심은 하나님의 자유이다.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신비이다. 우리는 종종 이 문제를 내 신앙에 사심 없음, 내 신앙의 정당함으로 제한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뭐라고 답하시느냐 하면,
‘네가 나를 편들고 네가 모든 조건과 능력을 가지고 있을 때보다, 네가 무능하고 너 하나를 인하여 쩔쩔맬 때 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라고 답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 현실로 돌아오자.
어느 시대나 그랬듯이 현실은 고달프다. 왜냐하면 세상이 우리를 세상에 묶어두기 위하여 늘 위협하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에게 더 지독해지라고, 더 매정해지라고, 더 철저해지라고, 더 냉정해지라고 요구하는 거다. 그건 우리 다 아는 거다. 가질수록 목마른 것이 세상의 것들이다. 세상의 것으로 진정한 만족과 평화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이런 너무 거창하고 너무 남다른 만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기 위하여 최소한의 존재와 연명을 위하여 요구하는데도 답을 안 하시기냐?, 라는 것이다.
빌립보서 1장으로 가 보자;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 무슨 말일까?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란 존재의 근본이며 본질이며 원칙이며 의미이며 목표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어떤 과정 어떤 이해로 왔는지 몰라도, 우리 모두가 공통되게 고백하는 것은,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약속한 어떤 것보다 우선한다. 예수라는 한 인격과 한 존재 안에서 우리를 붙드신 하나님의 섭리와 작정이라는 데 붙들려 있는 것이다.
예수를 우리의 존재와 삶과 목표와 내용으로 갖고 있는 사람으로써 삶이 주어지면 그 삶을 예수로 채울 것이요, 죽음을 명하면 죽음에다가 그 예수를 채울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얘기하는 기독교 신앙의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내가 살아야할 이유가 예수라면, 죽지 못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이런 뜻이다.
삶이 우리를 세상이 요구하는 살아 있음, 자기 확인, 경쟁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예수로 되어 있다면 세상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위협과 공갈, 죽음, 또 우리를 흔들거나 다른 길로 떠밀어 낼 수 없다.
이것은 우리 결단코 어떤 각오와 넘치는 진심의 싸움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세상이 가질 수 있는 유혹과 위협은 언제나 이거다; ‘살아 있어야만 된다. 존재해야만 된다. 그리고 남보다 나아야 된다.’ 이것 외엔 세상이 우리를 유혹할 것도 시험할 것도 위협할 것도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힘든 중에 있다면 공감하기 어렵겠지만 가져 봐야, 오래 살아 봐야, 아니 영원히 살아 봐야 예수 없는 삶은 벌이다.
나도 이 나이가 되니까 '건강하고 오래 사십시오'같이 무서운 저주는 없다. 사람은 죽을 때 죽어야 된다. 오래 살면 오래 사는 책임이 물론 있다. 사는 건 무시무시하다.
신앙으로 살 수 있으니까 다행이지만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이 고통을 면제시켜 주지 않고 예수로 살라고 하는 이상, 삶은 늘 충성을 해야 되는 삶이기 때문이다.
내가 각오하고 진심을 가지고 노력해서 넉넉하지 않다. 세상의 위협이, 저게 나를 헛된 자로 만들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쪽 편을 들 수가 없다. 예수 안에 있는 삶만이 진정한 삶이요, 죽어도 유익하다.
죽으라면 죽을 수 있다. 순교라고 하며 무슨 그런 미학적으로 다룰 마음은 전혀 없다. 전혀 그런 뜻하고 상관이 없다. 기꺼이 죽을 수 있다. 그러면 우리 삶에서 세상이 죽음이라는 걸 들이밀어서 통하지 않으면 세상은 더이상 힘을 못쓴다. 죽음이 최고의 위협이고, 그 바로 전에 있는게 비참함이다. 죽는 것은 끝이고 죽기 전에 당하는 최고의 비극이 있다면 비참함이다. 그 뭐 여러가지 이유로 비참할 수 있다. 그거 당할 수 있는 거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죽음이며 비참한 죽음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통치 안에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십자가만큼 분명하게 보여주는 건 없다. 세상이 가할 수 있는 모든 공갈, 모든 보복, 비참함과 죽음을 건너가시는 거다.
우리 사는 것은 만만치 않다. 신자로 사는 것은 그 모든 것보다 큰 것이다. 누가 쉽게 위로하고 도움을 줄 수 없다. 각각 당하는 어려움은 각자의 몫이다.
우리는 끝없이 그 기도를 할 수 있다; ‘하나님, 견딜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이 형편을 낫게 해 주시면 제 평생을 주께 바치겠습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나는 이미 너를 통하여 일하고 있다.'
'아이고 하나님, 그런 식으로 하지 말아주십시오, 새해 소원입니다.'
'안 된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방법, 우리가 약할 때, 우리가 남을 위해서 전혀 여력이 없고 자기 한 인생 때문에 쩔쩔매고, 가족을 돌아볼 힘마저도 없는 그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일하신다고 한다.
믿어지는가? 우리의 눈물과 비명이, 우리의 간증과 열정 이상의 일을 한다는 것은 십자가로 확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매번 하나님의 일하심과 다른 길을, 내가 원하는 길, 내가 편한 길, 내 식으로 하는 길 때문에 하나님과 맞서야 된다. 늘 불평불만을, 의심을, 비겁함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
빌립보서 4장에 가면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다.;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자, 이제 싸움은 분명해졌다;
‘세상이 말하는, 세상이 약속하는 것으로 살 것인가,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약속한 것으로 살 것인가?’라는 선택만 남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을 약속하고, 세상을 편들지 않으면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을 뻬앗아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그것은 물질이다. 그리고 자존심을 세우는 것 정도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영생과 진리와 자유를 약속하신다. 그것을 그 아들을 보내어 그를 십자가에 우리 죄 대신 못박으심으로 증명하셨다.
세상은 이것을 주지 못한다. 우리를 괴롭힐 수는 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이 선언을 하는 것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는 신자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산다. 우리의 능력은 모두 예수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세상의 힘으로 살지 않고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 것이다. 현실 속에서 말이다. 세상의 위협과 유혹과 이 처절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것이다. 그래서 삶과 죽음을 극복할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어떤 모든 것?’ 그 앞에 12절에 있는 것, `비천에 처하는 것, 풍부에 처하는 것, 배 부른 것, 배 고픈 것, 풍부와 궁핍,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것이다.
그건 다만 기도하고 성경 보고 앉아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살되, 세상에 굴하지 않을 것이다. 실패하면 실패할 것이다. 그러면 울 것이다.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할 것이다. 괴로워할 것이다.
‘도망가지 않고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힘이 없어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겠습니다. 어떻게 단번에 이기겠습니까? 그러나 절대 세상에게 내 인생과 운명을 넘겨주지 않겠습니다.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이 요구하는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충성하겠습니다.’
서두에 뭐라 그랬나? 그것은 감동도 납득도 아니라고 했다. 우리가 기이한 인도함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통치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갖는 것이 어떤 내용이고 그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이해해서 올 한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승리하는, 이겨나가는, 현실을 대면하는, 도망가지 않는, 핑계 대지 않는, 책임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의와 신실하심과 능력과 영생과 진리와 복 주심을 확인시키셨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이 믿음으로 이겨내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우리 인생을 지키심을, 믿음으로 지켜내게 하옵소서.
울고 일어나고, 기도하고 견디고 인내하고, 서로 위로하고, 하루 하루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말고, 내 인생 남에게 떠넘기게 하지 말게 하시옵소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 중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거기 기적과 거기 승리가 있는 줄 아는 올바른 신앙인으로 책임 있게 살게 하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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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신년 / 박영선목사 / 고전 4:1-5 / 2011.01.09. / ]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전 4:1-5)
이 성경 말씀의 배경은 사도 바울이 세운 고린도 교회에서 사도 바울이 신앙의 본질적인 도전을 받고 거기에 대하여 답하는 내용이다.
그 본질적인 도전이란 무엇이냐 하면 사도 바울이 와서 유일하신 하나님이신 우리 하나님과 그가 보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이제 전하여 이 교회와 신앙인들을 만들어 냈는데, 저들이 볼 때 온 천하만물을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유일한 하나님의 사자로써 사도 바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도전이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 하면 신의 사자이면 인간보다는 나은, 신과 인간 사이 쯤에 어떤 천사쯤 되어 보여야 되는데
전혀 외모로나 또는 그의 사역의 과정 속에 그런 신적인 특혜를 받는 모습이, 보상을 받는 모습이 없더라 하는 것이다.
'당신이 신의 사자가 정말 맞냐?' '당신이 전하는 하나님이 정말 천지에 유일한 주인이 맞냐?' 하는 질문이 된 것이 여기 나오는 도전과 질문이고, 거기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인 것이다.
그의 답은 하나님의 종된 자, 또는 일반적으로 얘기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신앙인들에 있어서 그 신앙의 증거와 보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며 세상의 가치와 다른 것이다.
쉽게 얘기하면 그건 충성의 문제이다.
충성의 문제란 뭐냐? 감동과 납득의 문제와 다르다 그것이다.
감동과 납득의 문제와 다르다는 것은 세상적인 기준으로의 감동과 납득을 넘어서는 것이다,라는 이야기인 것이고,
충성의 문제라는 것은 그것이 신념이나 개념의 싸움이 아니고 지휘관, 인격자 지휘관에 대한 무한 신뢰요 순종이다, 이렇게 답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아차 잘못하면 맹신을 강요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생각도 하지 않고 의심도 하지 않고 무조건 충성하라는 것은 맹종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이 문제의 아주 중요한 부분은 그것이 우리가 논리적으로 이해되거나 현실적으로 이해되는 것으로 기독교가 전락할 수 있다는 것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이 가지는 그 신앙의 중요한 특성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우리 성경으로, 기독교 신앙으로 제대로 정리하는데 있어서 오늘의 이 본문이 매우 중요하다.
그는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 점수를 매길 수가 없다는 뜻이다. 지금 내가 몇 점짜리 인지, 지금은 채점할 때가 아니다, 그거다. 지금은 충성할 때다 이거다. 그것은 나중에 답안지를 보고 채점을 해봐야 된다라는 뜻이 아니라,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때가 아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신비는 너무 깊어서 지금은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충성이 요구된다, 그렇게 얘기한다.
고린도 후서 1장에 가면 이런 말을 하는 배경에 이런 사도 바울의 경험과 이해가 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 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이 기록을 지금 왜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종이 되면, 또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되면 어떤 보이는 보상이 있다고 쉽게 생각하지 마라' 라는 설명을 위하여 이 경험을 기록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중요한 하나님의 일꾼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와 예수를 보내신 것이 무엇이며, 예수가 누구인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목적이 무엇인가를 전하러 다니는 중요한 하나님의 일꾼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 자신이 그일에 항복하여 믿음을 가지고 헌신하여 그의 생애를 바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쉽게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더 주시고 그를 통하여 이루실 일들의 중요성을 위해서라도 형통케 하셔야 맞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종인 사도 바울의 생애는 그의 막중한 임무에도 불구하고, 그 임무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달팠다고 하는 것이다.
왜 고달팠느냐?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자신을 의뢰하지 말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려 하여 하나님이 사도 바울의 사역과 인생이 고달프게 했다고 이해한다 그렇게 증언한다.
이 증언의 중요성은 이것이다. 우리는 물론 기독교 신앙을 시작할 때 현실적 고달픔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아 나온다. 그것은 분명한 하나의 계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현실적인 고달픔 속에서 영혼의 갈증을 확인하게 되고, 현실과 현실을 붙잡고 있는 영구한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이 현실적인 답을 하심으로써 다만 현실의 해결이 아니라 현실을 붙들고 있는 진정한 힘, 근원, 주인을 만나게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현실적인 해결들은 종종 우리를 하나님이 마치 물질계를 주관하게 하는 신에 불과한 것같은 생각이 들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물질계를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소유자인 당신의 형상으로 우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놓칠까 봐,
하나님께서 물질로써, 다만 현실로써의 보상이 아닌,
더 깊은 답을 찾고 더 깊은 내용을 담게 하기 위한 좌절과 고난을 준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확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확인시키는 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증명하고 당신의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 다만 현실, 다만 물질적 조건과 환경 속에서의 능력자로 소개되는 것을 거부하고 계시다는 거다.
그것보다 더 깊고 깊은 내용으로, 인격과 영혼에 관한 문제로, 진리와 영생에 관한 문제로,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그렇게 대접하고 다룬다고 바울의 생애와 사역 속에 간섭하고 계시는 거다.
‘너는 돌아다니면서 나를 마치 무슨 복권이나 무슨 마력을 가진 존재로 소개하지 말아라, 그렇게 이해하지 말아라, 너 자신부터 똑바로 나를 알고 나를 증언해라’ 이렇게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이 부분은 싫다. 고단하니까. 그러나 이 부분은 보다 깊은 문제를 품고 있다.
같은 고린도후서 12장에 가면;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지금 헌신하고 있다. 열심이 있고 간절함이 있다. 그런데 그 사도바울에게 외적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몸에 가시가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심한 것이었는지 사단의 가시라고 여기 명명하고 있다. 우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어떤 치명적인 질병이었고 보는 사람들에게 시험을 줄만한 병이었다,라고 알고 있다.
이 큰 질병과 이 장애가 복음의 방해가 되기 때문에 이 사단의 가시를 빼달라고 기도했다.
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였다. 이는 네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일반적인 기독교 신앙 자체를 이 문제에 연결시켜 보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세상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주인이시라는 걸 알고 있다. 그 하나님께서 당신을 믿기를 원하고 계시며 당신께 기도하며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복을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할 마음까지 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 일에 하나님이 응답을 해 주시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보답을 받으면, 이 보상과 응답을 받으면 쉽다. 하나님이 과연 살아 계시구나, 하나님이 내 믿음을 받아주시는구나, 나를 통하여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구나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오히려 더 많은 숫자에게 하나님은 이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다.
나 자신을 위하여 하는 기도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고픈 간절한 기도에서도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가 사리사욕을 쫓거나 세상의 쾌락에 빠지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기심과 자만심을 위해서 구하지않는, 가장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기도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곤 한다.
■우리 다 놀랍다. 그 일이 우리 자신을 고민케 하며, 하나님이 과연 계시는가? 내가 하나님을 이래도 믿어도 맞나? 라는 의심이 될 만큼 큰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쉽게 답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지금 사도 바울의 기도가 그것이다. ‘이 사단의 가시를 빼 주십시요. 이것은 백해무익합니다.’ 그래서 여기 답이 나온 것같이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다.
왜? 이는 네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진다고 한다.
조금 이 문제를 풀고 다시 현실로 돌아가자.
하나님이 하시는 답은 이거다. ‘나는 네 헌신, 진심, 능력, 소원보다 크다.’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나의 헌신을 먹고 살고 내 능력에 의존하여 사는 분인 것같이 오해하곤 한다.
우리의 간구는 종종 내가 진심이고 사욕을 갖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내가 흔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유익이라고 우긴다는 것이다. 설마?
그러나 우린 이 답을 받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우리가 거부할 분노를 가진다는 점에서 이 진단은 정확하다. ‘이 진심에 답하지 않는다면 그게 하나님이 맞습니까?’라는 이 분노와 거부가 일어나지 않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동의를 요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존재와 일하심은 하나님의 자유이다.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신비이다. 우리는 종종 이 문제를 내 신앙에 사심 없음, 내 신앙의 정당함으로 제한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뭐라고 답하시느냐 하면,
‘네가 나를 편들고 네가 모든 조건과 능력을 가지고 있을 때보다, 네가 무능하고 너 하나를 인하여 쩔쩔맬 때 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라고 답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 현실로 돌아오자.
어느 시대나 그랬듯이 현실은 고달프다. 왜냐하면 세상이 우리를 세상에 묶어두기 위하여 늘 위협하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에게 더 지독해지라고, 더 매정해지라고, 더 철저해지라고, 더 냉정해지라고 요구하는 거다. 그건 우리 다 아는 거다. 가질수록 목마른 것이 세상의 것들이다. 세상의 것으로 진정한 만족과 평화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이런 너무 거창하고 너무 남다른 만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기 위하여 최소한의 존재와 연명을 위하여 요구하는데도 답을 안 하시기냐?, 라는 것이다.
빌립보서 1장으로 가 보자;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 무슨 말일까?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란 존재의 근본이며 본질이며 원칙이며 의미이며 목표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어떤 과정 어떤 이해로 왔는지 몰라도, 우리 모두가 공통되게 고백하는 것은,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약속한 어떤 것보다 우선한다. 예수라는 한 인격과 한 존재 안에서 우리를 붙드신 하나님의 섭리와 작정이라는 데 붙들려 있는 것이다.
예수를 우리의 존재와 삶과 목표와 내용으로 갖고 있는 사람으로써 삶이 주어지면 그 삶을 예수로 채울 것이요, 죽음을 명하면 죽음에다가 그 예수를 채울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얘기하는 기독교 신앙의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내가 살아야할 이유가 예수라면, 죽지 못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이런 뜻이다.
삶이 우리를 세상이 요구하는 살아 있음, 자기 확인, 경쟁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예수로 되어 있다면 세상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위협과 공갈, 죽음, 또 우리를 흔들거나 다른 길로 떠밀어 낼 수 없다.
이것은 우리 결단코 어떤 각오와 넘치는 진심의 싸움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세상이 가질 수 있는 유혹과 위협은 언제나 이거다; ‘살아 있어야만 된다. 존재해야만 된다. 그리고 남보다 나아야 된다.’ 이것 외엔 세상이 우리를 유혹할 것도 시험할 것도 위협할 것도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힘든 중에 있다면 공감하기 어렵겠지만 가져 봐야, 오래 살아 봐야, 아니 영원히 살아 봐야 예수 없는 삶은 벌이다.
나도 이 나이가 되니까 '건강하고 오래 사십시오'같이 무서운 저주는 없다. 사람은 죽을 때 죽어야 된다. 오래 살면 오래 사는 책임이 물론 있다. 사는 건 무시무시하다.
신앙으로 살 수 있으니까 다행이지만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이 고통을 면제시켜 주지 않고 예수로 살라고 하는 이상, 삶은 늘 충성을 해야 되는 삶이기 때문이다.
내가 각오하고 진심을 가지고 노력해서 넉넉하지 않다. 세상의 위협이, 저게 나를 헛된 자로 만들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쪽 편을 들 수가 없다. 예수 안에 있는 삶만이 진정한 삶이요, 죽어도 유익하다.
죽으라면 죽을 수 있다. 순교라고 하며 무슨 그런 미학적으로 다룰 마음은 전혀 없다. 전혀 그런 뜻하고 상관이 없다. 기꺼이 죽을 수 있다. 그러면 우리 삶에서 세상이 죽음이라는 걸 들이밀어서 통하지 않으면 세상은 더이상 힘을 못쓴다. 죽음이 최고의 위협이고, 그 바로 전에 있는게 비참함이다. 죽는 것은 끝이고 죽기 전에 당하는 최고의 비극이 있다면 비참함이다. 그 뭐 여러가지 이유로 비참할 수 있다. 그거 당할 수 있는 거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죽음이며 비참한 죽음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통치 안에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십자가만큼 분명하게 보여주는 건 없다. 세상이 가할 수 있는 모든 공갈, 모든 보복, 비참함과 죽음을 건너가시는 거다.
우리 사는 것은 만만치 않다. 신자로 사는 것은 그 모든 것보다 큰 것이다. 누가 쉽게 위로하고 도움을 줄 수 없다. 각각 당하는 어려움은 각자의 몫이다.
우리는 끝없이 그 기도를 할 수 있다; ‘하나님, 견딜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이 형편을 낫게 해 주시면 제 평생을 주께 바치겠습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나는 이미 너를 통하여 일하고 있다.'
'아이고 하나님, 그런 식으로 하지 말아주십시오, 새해 소원입니다.'
'안 된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방법, 우리가 약할 때, 우리가 남을 위해서 전혀 여력이 없고 자기 한 인생 때문에 쩔쩔매고, 가족을 돌아볼 힘마저도 없는 그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일하신다고 한다.
믿어지는가? 우리의 눈물과 비명이, 우리의 간증과 열정 이상의 일을 한다는 것은 십자가로 확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매번 하나님의 일하심과 다른 길을, 내가 원하는 길, 내가 편한 길, 내 식으로 하는 길 때문에 하나님과 맞서야 된다. 늘 불평불만을, 의심을, 비겁함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
빌립보서 4장에 가면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다.;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자, 이제 싸움은 분명해졌다;
‘세상이 말하는, 세상이 약속하는 것으로 살 것인가,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약속한 것으로 살 것인가?’라는 선택만 남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을 약속하고, 세상을 편들지 않으면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을 뻬앗아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그것은 물질이다. 그리고 자존심을 세우는 것 정도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영생과 진리와 자유를 약속하신다. 그것을 그 아들을 보내어 그를 십자가에 우리 죄 대신 못박으심으로 증명하셨다.
세상은 이것을 주지 못한다. 우리를 괴롭힐 수는 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이 선언을 하는 것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는 신자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산다. 우리의 능력은 모두 예수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세상의 힘으로 살지 않고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 것이다. 현실 속에서 말이다. 세상의 위협과 유혹과 이 처절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것이다. 그래서 삶과 죽음을 극복할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어떤 모든 것?’ 그 앞에 12절에 있는 것, `비천에 처하는 것, 풍부에 처하는 것, 배 부른 것, 배 고픈 것, 풍부와 궁핍,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것이다.
그건 다만 기도하고 성경 보고 앉아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살되, 세상에 굴하지 않을 것이다. 실패하면 실패할 것이다. 그러면 울 것이다.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할 것이다. 괴로워할 것이다.
‘도망가지 않고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힘이 없어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겠습니다. 어떻게 단번에 이기겠습니까? 그러나 절대 세상에게 내 인생과 운명을 넘겨주지 않겠습니다.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이 요구하는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충성하겠습니다.’
서두에 뭐라 그랬나? 그것은 감동도 납득도 아니라고 했다. 우리가 기이한 인도함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통치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갖는 것이 어떤 내용이고 그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이해해서 올 한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승리하는, 이겨나가는, 현실을 대면하는, 도망가지 않는, 핑계 대지 않는, 책임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의와 신실하심과 능력과 영생과 진리와 복 주심을 확인시키셨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이 믿음으로 이겨내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우리 인생을 지키심을, 믿음으로 지켜내게 하옵소서.
울고 일어나고, 기도하고 견디고 인내하고, 서로 위로하고, 하루 하루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말고, 내 인생 남에게 떠넘기게 하지 말게 하시옵소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 중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거기 기적과 거기 승리가 있는 줄 아는 올바른 신앙인으로 책임 있게 살게 하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