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박영선목사 / 다시보는 열왕기 (13) /2022.01.09]

nazunzaro 2022. 1. 14. 05:15

●세상이 위협 도전하는 이 현실은 하나님의 일하시고 나를 깨우치시고 기르시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임을 보듯이 성경약속들을 기억하는 내 인생 현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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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목사 / 다시보는 열왕기 (13) /2022.01.09]

(*열왕기상 22:13-28)

아합이 '너 진심을 얘기해라. 똑바로 얘기해라. 너 나한테 좋은 말 한 적이 없는데 이번엔 미쳤냐?' 이렇게 물어보니까 진실을 털어놓기를 "내가 환상을 보니 하늘에 만군이 여호와를 모시고 섰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가서 아합을 꿰어서 이 전쟁터에 나와서 죽게 하겠느냐?'
그러자 모여 섰던 많은 영(營)들 중에, 만군 중에 몇이 '이렇게 하겠습니다. 저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하나가 말하기를 '제가 가서 꾀어오겠습니다.' "어떻게 꾀어 올래?" '제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서 그를 꾀어 오겠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래 네 계책이 좋다. 너는 가서 그를 속여서 어 죽음의 자리에 끌어내라. 네가 성공할 것이다." 이렇게 되는 장면이다. 그래서 이 길라아 라모시라는 장소의 전투에서 결국 아합이 죽게 된다.

이글을 읽으면서 우리가 놀라는 것은 ★하나님이 거짓말을 시킬 수 있냐 하는 것이다.
이건 상당히 놀라운 문제다. '하나님의 정의 그리고 하나님의 도덕성에 어긋나는 일을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우리 마음에 들어야 마땅하다.
'하나님께서 정의롭지도 않고 도덕적이지도 않은, 말하자면 누구를 속이고 그를 죽음의 자리로 이끌어내는 이런 비겁한 방법을 명하시고 허락하시고 보내실 수 있단 말이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이런 질문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그럼 하나님이 거짓말을 한다면 타당한 근거는 뭐냐 하는 대로 또 와야 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모든 것의 근거는 하나님인데, 모든 것의 주인도 하나님이고, 모든 기준도 하나님이고, 내용도 하나님이고, 방법도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일에서 허락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길을 갔다 그러면 하나님이 잘못한 거냐, 내 기준이 잘못된 거냐?' 라는 질문에 와야 되는 것이다.
그 말하자면 우리는 ★예수를 믿지만 예수를 믿는 것보다 더 밑바닥에 깔린 신앙의 근거는 도덕성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으면 내 안에 먼지 털기를 먼저 해서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을 도덕적 현실을 만들어 놔야 기도가 나오고, 기도가 응답을 받고, 또 꾸중을 듣거나 어려운 일이 당하면 돌아서서 도덕적 과오를 먼저 밝히고, 지우고, 돌이키고 하는 것으로 ★우리의 신앙이 결국은 하나님이 아니라 도덕에 기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된다.

그래서 이 도덕이 기준이 되어 있는 사람들의 문제가 뭐가 되느냐 하면, 그 규칙을 벗어나는 일이 생기면 이제 화를 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욥이다.
그러니까 욥기 7장에 가보면,
아주 묘한 고백이 나오는데, 고백이기보다 원망이다. 친구들이 찾아와서 욥에게 하는 말이 '니가 고난을 받는 거 보니까 너한테 죄가 있다.' 그 욥의 대답이 '난 죄 없다. 난 잘못한 것이 없다.' '그러면 하나님이 잘못했단 말이냐?' 이렇게 되는 거다.
그러니 욥의 생각에도 하나님이 잘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까, 이제 마지막으로 나온 게 '내까짓게 죄를 지었던 들 하나님 뭐 그렇게 심각하십니까? 하나님은 하나님 아닙니까? 나 때문에 이렇게 나를 볶아야 되고 나하고 씨름을 하셔야 되겠습니까? 난 이제 못해 먹겠습니다. 난 죽어버릴 테니까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 말에는 그가 당하는 시련을 사실 자기가 이해할 수 없고, 그러는 하나님에 대하여 죽음으로 항변하는 것은 자기를 변론하는 게 아니라 '답이 없구나! 내가 아는 하나님의 기준과 요구에는 내가 틀린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려움이 생긴 걸 보면 도대체 난 모르겠다. 난 이건 견딜 수가 없다.'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런 문제들, 우리가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갔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아 이거 뭐 기억나는 것 모두를 들춰내서 씻어내고 이제 고백하고 그리고 생각나지 않은 것까지 이제 다 고백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 다음엔 어떡할 건가?
그게 이제 욥의 질문인 셈이다. 그러면 보통 체념해 버린다. 죽어버릴 수 있으면 좋은데,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죽지도 못한다.
뭐 그런 간증은 늘 있다. 뭐 목을 맸는데 밧줄이 끊어졌다. 뭐 이런. 강물에 뛰어들었더니 물고기가 자기를 위로 밀어 올려서 할 수 없이 살았다. 이게 한없이 있다. 죽을 수도 없는 이것.

이 '거짓말'에 대해서 좀 더 직접적인 연결이 있는 성경 구절을 찾으면, 예레미야 20장. 아주 놀랍다. 예레미야 20장에는 예레미야가 선지자 사역을 하면서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하나님께 항변하는 것이다. 뭘 항변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서 사역을 했는데 돌아온 건 비난과 핍박뿐이다. 이에 대한 이제 원망이다. 20장 7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심으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불러서 그 선지직을 받았으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이 일에 강권하셨기 때문에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내가 이거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시켰는데 이렇게 조롱받고 핍박밖에 돌아오는 보상이 없단 말입니까?' 이런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 말이 좀 의역이 됐다. 직역하면 이렇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속았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이 우겨서 할 수 없이 맡았는데, 그 보상이 이거 밖에 없단 말입니까?' 이런 뜻이다.
여기 '속였다'가 나온다. 예레미아는 뭘 속았을까? 하나님께서 그를 세워서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그들을 권고하기 위해서 세웠으면, 그들 앞에 갔을 때 어떤 권위적인 보상, 어떤 하나님의 큰 뜻에 대한 저들의 항복 같은 것들을 보상받을 줄 알았더니, 거꾸로 이 직분을 맡는 바람에 어느 누구보다도 형편없는, 아니 처절한 인생을 살게 됐다.

★☆그러니까 성경은 뜻밖에 우리로 하여금 '너희가 하나님을 도덕적 기준으로 이해하고 기대하고 그렇게 현실을 적용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얼 하려고 그러는지 도무지 모르고 있다' 이렇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런 도덕적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이 뭔지 모르겠지만, 구약에서 우리가 보는 이 두 가지 예에서는, 하나님도 거짓말도 하신다, 속이기도 하신다'를 긍정적으로 어떻게 쓰시는가를 보려면 이제 로마서 5장으로 가야 된다. 로마서 5장에 오면
구원에 관한,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에 관한 표현이 이렇게 돼 있다. 로마서 5장 9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되게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를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이거 우리가 잘 읽어내지 못하는 거다. 왜 잘 못 읽어내냐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너무 이렇게 그 큰 내용을 하나로 묶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어! 그래서 우리는 이제 구원을 받았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안에서 우리의 구원이 영원한 우리의 운명이 됐어!' 이렇게만 묶는데, 잘 생각해 보라. 피로써, 피 흘려 죽으심으로 아버지와 우리를 화목되게 했다면, 그가 살아나셔서는 얼마나 더 그 화목해 한 일에 얼마나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역할을 하겠느냐?
'죽음이 우리를 죄에서 사망에서 우리를 불러일으켰다면, 생명이신 영생이신 예수께서 그 다음에 주실 것은 얼마나 크겠느냐?' 이렇게 반전을, 그 둘의 그 비유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거짓말이 일을 한다면 하나님의 긍정적인 약속들은 얼마나 더 크겠느냐?" 이렇게 말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우리에게 어려운 것은, 이게 어려운 것은, 무엇 때문에 어려우냐 하면,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도덕적 기준이 신앙의 기준이 되자 아버지와 우리 사이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 인격과 인격의 관계, 사랑과 약속의 관계가 아니라, 비정한 무정한, 인격이 없는 이 비정한 규칙이 기준이 되는 바람에, 이게 비정하고 무정하면 용서가 없다.
그러니까 부모가 자식을 기르면 이게 딱 규칙대로 하는 게 아니라, 어지간한 잘못에 대해서 다른 아이들에게는 화를 낼 필요 없는데, 자기 자식에게는 너무도 험하게 뭐라 그럴 수 있다. '너 그러면 안 돼. 너 누가 그러라 그랬어? 왜 그따위로 행동해?' '쟤한테는 왜 안 그러세요?'
'쟤는 내 자식이 아니잖아? 넌 임마, 내 자식이잖아?'
그게 말하자면 여기 나오는 거짓말로 표현된 것 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기 때문에 더 엄하시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유익과 우리의 복을 위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왜 하나님이 화를 내시고 우리를 그 궁지에 몰아 넣으시느냐'는 전부 다 거기가 끝이 아니라, 주시려는 영광, 주시려는 운명, 주시려는 지위를 인해서 있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회개를 한다면 '아, 이리로 안 가고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더 잘하겠습니다'가 있어야 되는데 '잘 하겠습니다'가 없어진다. 죄를 안 짓는 게 다란 말이다. 여기가 답답해지는 거다.

로마서 9장에 가면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우리 이방인들에 대하여, '예수와 복음을 믿지 않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너희가 보고 손가락질하지 마라. 너희는 이스라엘의 실패로 인하여 복을 받았느니라. 그러니 저들의 실패가, 넘어짐이 너희에게 구원이 되었다면, 저들이 회복될 때에는 너희에게 어떤 큰 얼마나 더 큰 영광이 있겠느냐!' 이렇게 얘기한다.
그러니까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그토록 많이 유대인들을 비난하고 그들을 저주한 거는 얼마나 못난 짓인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해서 분내시고 아직까지도 그들의 회개가 어떤 의미에서 허락되지 않은 것은 그들로 분명한 어떤 놓칠 수 없는 증거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선민이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주어졌던 백성이다,라는 그 약속이 취소될 수 없다면, 저들이 그 불순종과 무지로 인하여 받는 모든 벌들이 약속을 넘어선 게 아니라,
■약속 안에서 허용되고 있다. 약속은 그것보다 크다,라고 말하는 증거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 생애에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 우리를 괴롭히는 것, 내 마음에 찾아오는 어떤 절망이나 체념 같은 것들을 '그래, 우리는 약속 밖으로 나갈 리가 없어. 이 약속이 더 커!' 라는 대로 우리를 끌고 온다고 성경이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 지금 돌아보라. 코로나 시대이다. 모두가 이제 좋은 의미로 이 말을 한다. '그때가 좋았던 것을 몰랐어. 우리 다시 모여서 함께 찬송하고, 성가대도 가득차고, 이 자리에도 모두가 모여서 함께 찬송을 부를 때 그때 좀 더 감사했을 걸. 좀 더 기뻐했을 걸. 좀 더 열심을 냈을 걸.. 그때가 그립다.'
그러면 내가 이렇게 반문하는 거다. '그때가 그럼 천국이었다고? 그때는 코로나가 없는 자리에 불과했지, 그때 우리가 영광의 수준에서 어느 괜찮은 수준에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한국 교회에서 지금 그런, 정말 교회답다 하는 데는 별로 없다. 물론 우리 교회를 포함해서 그렇다.
그건 한국 교회사의 문제이지,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교회사의 문제라는 건, 우린 아직 기독교 역사가 짧다. 우리가 가진 유산은 순교와 부흥밖에 없다. 더 깊은 자리로 가는 것은 한국 교회가 교회사적 시간이 짧음으로 인해서, 아직 경험 부족으로 인해서 거기까지 못 나와 있다.
그러니까 기껏 한다는 소리가 '돌아가자'이다.

안희숙 씨의 '죽으면 죽으리라' 그 책에서 안희숙 씨가 그 글을 쓰면서 내내 하는 고백이 뭐였나? '나는 순교를 허락받지 못했어..' 그 자책 속에 그 책을 쓴다. 순교가 끝이면 안 된다. ●죽음이 명예라면, 살아있는 것은 더 큰 명예와 더 큰 기회가 돼야 맞다.
그게 없으니까 죽는 것을 바란다. 회개를 바란다고 말고, 회개하지 말고, 돌아서서 나가보란 말이다.
믿는 약속의 크기는 어마어마하단 말이다.
우리는 비로소 모든 것이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자식을 기름같이 온 정성을 다하여 꾸중도 하고 벌도 내리고 우리를 위해서라면, 자신을 죽음에도 내놓고 조롱도 받으시고 외면도 당하시고 우리가,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모든 희생을 했으나, 자식은 부모 보고 '누구세요?' 그러는 역사를 걸어왔다고 구약 내내, 신약 내내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넘어, 그 모든 것을 유익으로 삼는 자리로 은혜를 베푸신다.
그 은혜는 거짓말이다. 도덕으로 보면, 도덕적 규칙에 의하면, 은혜는 거짓말이다. 잘못했는데 잘했다 그러는 것 아닌가?
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묻는다. '창조를 믿어?' '그럼!' '야, 그 거짓말을 믿어?' 그런다. 그래서 자기네 이해에 벗어난 건 다 거짓말이다.
'야, 처녀가 애를 낳은 걸 믿어?' '아, 믿지!' '야, 그 거짓말을 믿어?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는 그런 속담도 몰라?'
거짓말이다. 우리가 아는 규칙을 벗어난다. 그 뭘 뜻한다고?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 가지는 끝이 없는, 품, 그 보호와 진정성의 깊이와 높이의 크기, 이를 우리에게 나타내는 것, 그것이 거짓말이다.

은혜를 베푸시며, 기적을 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며, 우리를 위하여 날마다 기도하시며, 우리에게 새삼스럽게 약속을 반복하시며, 우리로 세상 속에서 잘못 가진 목표와 생각들을 붙잡아 돌이키게 하시며,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마주쳐 그를 무릎 꿇게 하신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 지금도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이제 우리의 오늘의 기도들은 불편한 것이 없어지는 거다.
■내가 생각하는 것 정도에서 더 이상 고민할 필요 없는 것이라는 이런 체념과 타협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여기 신자의 자랑이 있다. ​

이사야 43장에 포로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이렇게 임한다.
"너희는 끝내 '나는 하나님의 자식이라' '나는 여호와의 자식이라' 하는 나를 내가 만들고야 말겠다."
그런 인생을 사는 줄 아는, ■세상의 위협과 도전이 현실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하심과 깨우치심과 우리를 기르시는 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세상의 위협이 현실인 것을 보는 것 만큼 성경의 약속들을 기억하는 우리의 현실이요 인생이 되어야 한다.//

(기도)
우리를 벌하시는 하나님, 책망하시는 하나님, 기억케 하시는 하나님, 돌이키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세상의 도전과 위협이 현실인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과 일하심이 현실보다 크다는 사실을 기억케 하셨으니​ 이제 우리로 승리케 하실 것이다. 일어서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 우리의 인생을 복되게 살게 하실 것을 믿는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