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고난이 하는 일 (2021.11.刊) 저자 박영선목사 인터뷰]

nazunzaro 2021. 12. 31. 23:31

●일상 정황에서 우리는 달라야 한다. '나는 죽어도 된다. 우리도 우리는 져도 된다'라는 낙관이다. 이는 세상하고는 굉장히 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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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이 하는 일 / 저자 박영선목사 인터뷰]

- 고난이 하는 일에 대하여 -

Q. 위드 코로나와 관련된 강연 자리를 마련하고, 이번 책 『고난이 하는 일』까지 집필하게 된 계기는?

A. 코로나19가 발생하자 교회에서 제일 먼저 나타난 반응은 금방 지나가겠지라는 순진한 낙관론이었다.
점점 상황이 악화되자 그다음 반응은 우리가 잘못해서 벌을 받는 거다라는 묵직한 심판론이 나왔다.
악화된 상황이 멈출 기미가 안 보이자 이젠 어쩔 줄 몰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어쩔 줄을 몰라 한다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낙관론도 이해하고 심판론도 이해하는데 교회가 그 이상은 생각해 볼 차원과 영역이 없더라는 거다.
그래서 이제 이와 비슷한 상황을 구약에서 찾아보고자 생각했다.
바로 '바빌론 포로' 라는 사건과 예레미야 선지자라는 인물이다. '바빌론 포로'는 큰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사 내내 설교에서 별로 자주 다루지 않았다. 비극적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기분 나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의 사역을 보면 정말 굉장하다. 그는 성공적인 사역을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서 도망도 가지 못한다.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불평도 해보았지만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사건들은 이스라엘 곧 유다 왕국과 예레미야 선지자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지만 이것들이 오늘날 팬데믹 상황과 고스란히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톰 라이트 『하나님과 팬데믹』 와 월터 브루그만 『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까지』의 책이 출간되어 읽어 보았다. 내가 그들의 책을 읽으며 공감한 것은 '모른다. 지나보자. 쉽고 섣부르게 해결하려고 하지 말자'는 부분이다. 이 부분이 제일 와 닿았다. 그래서 나도 현재 이 팬데믹 상황을 기다리며 지켜보는 중이다.
또한 「바빌론 포로」라는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그 어떤 비극이나 절망도 유익한 쪽으로 쓰신다」는 것만은 알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팬데믹 관련 강연을 하다 보니까 이 이야기를 두고두고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목회자들에게 더 해야 하겠다라고 생각이 들었다. 목회자들이 각 교회에서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성도들에게 직접적 영향을 끼칠 텐데 그들이 좀 더 성경적 이해와 낙관적 생각을 갖게 하고 싶었다.
한국교회는 심판론이 강한 유산 속에 있다. 심판론을 이야기할 때 가장 쉬운 것은 잘하고 잘못한 것을 판정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너무 순진하다. 회개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한국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나는 지금의 사태와 관련하여 우리 개인이나 한국 교회만 생각하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 바르트의 성화론에 대해 정리한 이정석 교수가 쓴 『하나님의 흔드심』이라는 제목처럼 전달하고 싶었다. '하나님이 역사에 대고 이야기하신다. 인류 전체에 대하여 진지하고 궁극적인 도전을 하고 계신다. 그 답은 세상이 알 길이 없다. 신자인 우리만 알 수 있다.'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라고 여겨진다.
​★'바빌론 포로'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일치된 운명과 승리를 위해서 만들어진 일이라는 낙관적 마음을 가져야 할 때라고 생각했고, 그 낙관이 아무래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절망과 시험을 이기고 쉬운 해결책으로 도망가지 말자는 취지에서 강연 시간을 갖게 되었고 이렇게 책을 내게 되었다.

​Q. 이 책의 주요 인물인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유배지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지만 저주 아래 있는 듯 고통스러운 상황에 말이다. 독자들이 책에서 어떤 메시지에 주목하면 좋을까?

​A.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하나님께 대제사장적 기도를 올린 내용이다. 여기에 이런 예수님의 기도가 나온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1)
예수님이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라고 하신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 같이 아들과 제자들이 하나이고,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신 것 같이 아들이 제자들을 보내고, 그 제자들의 뒤를 이어 모든 성도가 예수의 제자라는 이름을 가진다.
'예수님과 하나인 것 같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성육신을 가르친다. 성육신이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현실에 처지에 찾아오시는 것이다.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 1:23)이다.
​말하자면 구원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 아들로 인해 세상이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아들은 이 땅에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는 일을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의지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누구의 방해를 받으실 수 없었던 것처럼 구원에 있어서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으시고, 누구의 방해를 받을 수도 없으신 그 아들을 보내신다.
그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과 그분을 오해하는 자들 가운데서 그들 모두를 구원하신 것 같이, 이 땅의 신자인 우리도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내 이웃과 사회에 보내셔서 그들과 모든 조건을 함께 하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고, 이스라엘 백성은 왜곡된 신앙관으로 예수님을 핍박했다.
*이처럼 우리도 이 세상의 문화와 정신 가운데 왜곡된 신앙관과 적대감 속에서 살고 있다.
또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기뻤을 우리가 죄악된 세상 속에서 겪는 모든 고난은, 바빌론 포로에서 선지자 예레미아가 겪었던 고난과 같다.
겉보기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하도록 이끌지 못할 만큼 선지자로서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큰 구원을 만들어 내었다. 이를 통해 새 계명의 약속이 예레미아 31장에 나온다.
이처럼 우리의 생애가 그렇게 부름받았다는 낙관이 있었으면 한다. '낙관'이라고 하기보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낙관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겁내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겁을 먹으면 누구를 잡아서 그 겁을 해결하라고 한다. 겁을 내서 누구를 희생양으로 삼거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서 공격해서 일종의 답을 내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 이번 책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 위드 코로나와 한국 교회 -​

Q. 앞서 한 말씀이 손봉호 교수의 '예언자적 비관주의'와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하려는 것은 예언자적 비관주의 아니라 결국 '예언자적 낙관주의'라고 표현해야 되는 건가?
그런 면에서 최근에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복음의 공공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복음의 공공성은 변혁을 전제하고 이야기하는 건데, 복음의 공공성은 복음화와는 다른 차원이지 않은가? 박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예언자적 낙관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복음의 공공성'에서 전하는 메시지들과의 차이가 있는 건가? 아니면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

​A. 다르다. 복음의 공공성에서 공감하는 부분은 우리와 동일한 콘텍스트에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텍스트는 아주 다르다. 텍스트가 서로 다른 이유는 가치나 방법론, 판단 기준에 있어서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다른 점을 복음의 공공성으로 이야기할 때마다 윤리적 도덕적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좀 미흡하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윤리 도덕보다 큰 것이다.
제일 크게 우려되는 점은 윤리나 도덕이나 명분이 공포로 간다는 점이다. 기독교에서는 어느 것도 공포로 가면 안 된다
사랑 안에서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복음의 공공성이 다르다는 것을 윤리나 도덕으로 묶으면 대접받을 것 같지만,​ 그다음에는 윤리나 도덕이 공격용 무기가 된다.
기독교는 원래 용서하는 종교이고 회복하는 종교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공공성이 나올까? 하나님은 일상을 사는 콘텍스트에 있어서 동일한 조건 속에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 책임을 주시고 우리를 보내신다. ​
■우리는 거기서 달라야 한다. 종교성이나 도덕성으로도 달라야 한다. 그걸로 답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것보다 좀 더 분명히 달라야 한다. 인간미가 달라야 하고, 기본적 운명과 현실적 처세에 있어서 낙관적이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낙관'은 세상이 말하는 '낙관'과는 다른 것이다. '나는 죽어도 된다. 우리도 우리는 져도 된다'라는 낙관이다. 이는 세상하고는 굉장히 맞지 않다.
복음의 공공성은 세상이 이해할 만큼 '도덕성을 갖추라'고 하거나 '사회에 쓸모 있는 자가 되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는 빛이다. 빛은 '쓸모 있고 없고'라는 하나의 도구로 쓰이지 않는다. 빛이 비치면 모든 것이 보인다. 빛은 불과는 다르다. 불은 태우는 것이고 빛은 보게 하는 것이다.
신자나 교회가 공공성을 가지면 '인간이 무엇이고, 현실이 무엇이고, 운명이 무엇이고, 생명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어떤 도전들이 저절로 주어진다.
나는 그런 공공성이 자꾸 도덕이나 윤리 위주로 가기 때문에 살짝 비틀고 있다.
그런 면에서 나의 낙관주의적 관점은 복음의 공공성이 전하는 메시지와 다르다.

Q. 팬데믹은 한국교회의 민낯을 드러내는 분기점이 되었다. 한국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기는 커녕 시민사회를 위협하는 공공의 적으로 그 존재론적 가치와 위치가 판명났다. 이 시대에 교회의 존재 이유에 대해 다시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그 정체성을 이렇게 드러내야 한다.
■교회에는 회복이 있고' 용서가 있고' 부활이 있으며' 진리가 있고, 성숙이 있고, 진정한 만족이 있다고 나타나야 한다. 밖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안에 불빛이 강해져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 위기론이 나온 것은 조금 애매하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상황이 점점 어려워지니까 사람들은 '교회가 뭔가 답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묻는 것이고, 교회는 '우리도 몰라'가 된 것이다.
교회도 모른다. 교회도 '이게 뭐야?'라고 하고 있으니까 세상이 '너희가 모르면 어떡해?'라고 한 것이다.
특별히 교회를 공격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사실 교회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한국교회는 부흥 시대를 겪으면서 다 배불러서 별 생각이 없다가 이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사회에서 열심히 살아봤자 낙이 없는 현실에 대해서 불만을 가졌다. 그런데 사람들이 교회에 답이 있어야 한다고 할 때 교회는 모른다고 한 거다 현실적 판세는 그렇게 되어 있다.
엄밀히 말하면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들의 요구에 아무 답도 해줄 수 없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르다' '교회는 다르다, 필요하다'라고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우리가 너무 순진했고 무식했다를 알아야 한다. 이때 교회는 어떤 자세와 근거와 결정을 해야 되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나눌 수 있는 지점에 일단 와야 한다
이사야 6장 8절 9절에 이렇게 나온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고 하시니 그때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오 보기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그래도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가라'고 하셨다. 세상은 이렇게 교회를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이 일하신다. 지금 우리가 공격받는 걸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방법론을 찾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을 해야 한다. 그 답은 세상에 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한국교회는 이제껏 자신의 정체성을 순교와 부흥에서만 찾았다. 그러다가 이렇게 위기에 봉착했는데 그 위기가 더 깊은 정체성을 찾을 계기가 된 것이다.
​기독교 정체성이 무엇일까? 예수를 믿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거기에 은혜가 있고 부활이 있고 생명이 있고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다는 점이다. 누구든지 올 수 있다. 우리의 행복과 승리는 현실 세계를 감당하고 남는다. 이러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냥 세상이 교회에 대해서 '뭐 하는 곳이냐?'고 물으면 다들 소스라쳐 놀라기만 했다. 대신 '원래 너희들은 교회가 뭔지 몰랐어. 지금도 모르고 있고 말해줘도 몰라.​ 이제 와서 우리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필요 없어. 우리는 너희가 원하는 답을 줄 수 없어' 라고 말은 할 수 있지만 답을 말할 수 없는 상황을 묵묵히 인내하며 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재정비를 해야 한다. 아직까지 못했던 도전이고 정체성 찾기이다.
내가 신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한국 교회에 원서가 제대로 없었다. 유일한 신앙 서적은 안희숙 씨가 쓴 죽으면 죽으리라 하였다. 그리고 곧이어 워치마니의 설교집이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왔다. 당시 우리는 그의 책을 보고 은혜를 받고 놀랐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렇게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억에 남는 예화 하나가 있다.
어떤 농부가 산비탈 제일 꼭대기에 논 농사를 지었다. 어느 해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논 농사는 물이 중요하니까 어쩌다 비가 오면 논밭의 물꼬를 막았다. 그런데 막아놓은 물꼬를 아래쪽 농사하는 사람이 터 놓더라는 거다. 물꼬를 텄으니 물이 다 빠지겠지. 위쪽 논농사하는 사람이 자기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서 싸우지 않고 참고 다시 물골을 막았단다. 그다음 날 자고 일어나 가보면 또 물꼬가 열려 있더라는 거다. 그래서 기도를 했단다. 하나님이 '네가 먼저 그 논에 물을 채워놓고 네 논에 물을 채워라'고 대답하셨단다.
​이 예화처럼 살 수 없다. 워치만 니의 책을 읽을 당시에는 이를 분별할 실력이 우리에게 없었다. 부흥 시기 전이니까 순교밖에 생각할 틈이 없었다. 모두가 나도 순교한다고 했을 때이다. 『죽으면 죽으리』는 '나는 순교도 허락받지 못했다'고 쓴 책이다. 죽음은 쉽다. 죽으면 끝이니까.
우리는 순교를 너무나 크게 생각하고 말하지만, 순교 이야기는 절묘한 타이밍 외에는 얼마나 쓸모없는지 잘 모른다.
예전에 우리나라가 배구나 축구 국제 경기에 나가면, 삭발하고 혈세를 쓰고 출전했다. 실력은 없는데 이기기는 해야 하니 그랬다.
그렇게 출천해서는 왕창 깨지고 들어왔다. 밤낮 머리 깎고 혈서 쓰고만 있지 기술 개발이나 연구 등은 아예 없었다.​
방법도 없고 이해도 없었다. 한국교회도 밤낮 모여서 그것만 했다. 그러다가 부흥이 터졌다.
부흥이 터지자 아무것도 심지 않았는데 거두었거든. 故 조용기 목사님은 '난 기도원에서 내 폐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굶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이렇게 부흥이 됐다'고 그랬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이를 '아니, 굶지 않게 기도해서 1백만 명이 모였는데, 부흥을 달라고 기도하면 1천만 명을 주실 것 아니냐'라며 갖다 인용했다. 그 부흥은 심지도 않은 것을 거둔 곳이었다. 거기에서 딱 끝났다. 그리고 부흥이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부터 헤어나와야 한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수가 모이는 것에 열광하는 게 아니라 더 깊어져야 한다고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보냄으로써 왕족을 멸하시고 성전을 무너뜨리신다. 성전이 무너져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현 상황과 더 이상 방법이 남아 있지 않은 그 참담하고 혼란한 현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겪게 하셨다. 지금 우리도 겪어야 한다
​교회란 무엇일까​? 모두가 그 복음의 공공성을 알아볼 수 있게 했다면 벌써 천국이 왔을 거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시겠단다.
■우리에게 '고생하라'고 하시고, '지라'고 하시고, 망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견디라'고 하신다'
'회개하면 되는데 왜 회개를 하지 않느냐?'고 물을 만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회개를 하면 잘못을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새로운 곳이 한국 교회에 없는데 무엇을 회개하나?
잘못했다가 전부인데, 어디로 가야 하나? 이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
이는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 많이 녹아 있는 문제이다. 한국 교회는 그런 문제에 관심이 없고​ 관심도 없고 그런 실력도 없다.
그러나 그걸 겪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못난 왕들을 겪어야 했듯이 말이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우리는 뭡니까? 왜 우리까지 고생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하나님이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런 것을 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당연히 겪어야 한다.
여기서 답을 내놓을 수 있다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겪고 어떻게 되나 보자. 망하는지 안 망하는지,
살 길이 열리나 안 열리나 보자. 이걸 낙관론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되게 웃기지 않나? 그러나 이것이 낙관론이다.
세상이 아는 낙관론은 자기들이 아는 낙관론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낙관은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다 승리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어려움을 당하면 그만큼 이익을 보는 게 낙관론이다.
어떻게 보면 비관주의적 낙관론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은 비관적이고 결론은 낙관적이니까.

Q. 일상은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하시는 곳이며, 오늘이라는 일상을 어떻게 살아내느냐 하는 싸움을 하는 게 신앙이라는 메시지를 오랫동안 전했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 우리는 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비상이 일상이 되어 버린 오늘이라는 현실, 일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A. 자기 자신에게 궁극적 질문을 하면 좋겠다. 결국 다 죽는 건데, '죽기 전까지 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 좋겠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죽는다는 걸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살아도 좋다고 여긴다. 돌연히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얼마 동안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위기가 닥친 비상상황이 되었다. 코로나19에 걸리면 치명적 고통을 겪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위기가 왔을 때 어차피 죽을 인생이라며 항상 저 멀리 밀어놓거나 감춰놓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평상시에 생각하지 않았던 질문을 해야 한다.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사는 게 좋은지, 기회가 있으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건지?' 등등 이러한 질문은 신자든 비신자든 누구나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신자는 마땅히 더 나아갈 때가 얼마든지 있는데, 못 나가고 있었다. 한국 교회는 여태껏 쉽게 살았다. 부흥 시기에는 돈으로 다 메꾸었다. 심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선교, 전도, 봉사도 다 돈으로 하고 싶은 만큼 했다. 이젠 다 막혔고 끝났다. 그때 한 것이 아무 소용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에는 신자의 삶이 무엇이고, 존속되는 하루라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물어야 한다.
●인생을 살면서 통쾌하게 웃을 수 있는 기회야 드물지만 사실 우리만이 웃을 수 있다. 우리가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져도 되고 망해도 되나, 실패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것이고 이 현실적 답을 새삼스럽게 확인해야 한다.
저 멀리 플레카드처럼 걸려있지 실제로는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 그래서 물어야 한다. 공포와 불안 속에 있는 것은 우리의 신앙들과 강조점들이 너무 현실과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곧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을 주로 공갈하는 데 써 먹었다.
'사람들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를 자신의 말을 듣게 하기 위해 어떤 강요를 하거나 붙잡아 두려는 의도로 사용했다.
자신이 직접 확인하고 이해하지 않은 것은 다 필요 없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야 하듯이,​ 스스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누구 누구를 붙잡고 가는 것은 안 된다.

Q. '침 삼킬 동안도 놓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욥의 고백을 좋아하시는 걸로 안다.
'고통을 주되 마취를 안 하고 복기(復棋)하게 만드는 하나님이라는 독특한 신관(神觀)은 개인의 신앙을 다시 보게 만드는, 어렵지만 중요한 개념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개인과 교회를 넘어 사회 전체가 겪고 있는 팬데믹 상황에 이를 적용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다. 이를 어떻게 적용하는 게 좋을까?

A. 적용점을 소개 못한다. 우리는 신앙과 이해 가운데 산다. 설명을 해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다. 그냥 사는 거다. 일상은 매일 그렇게 살기 때문에 중요하다.
우리와 부딪히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는 새, 우리를 보고 그들이 도전을 받고 그들의 마음 문이 열리기도 한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전도이다.
그동안 내가 많이 쓴 반문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목사님은 왜 저에게 교회 가라고 하지 않으세요?'
"너 같은 건 필요 없어서 그래.' 무슨 뜻인 줄 알 것이다. '믿어주겠다'는 태도는 꼴 보기 싫다. 하나님께, "믿어 드릴게요'라고 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굉장한 모독이다. 자신이 주님을 믿는 게 정말 감사해야지.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넌 안 믿었으니까 지옥에나 가'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더불어 '믿어주면 고맙겠어'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다

Q. 빛과 소금으로서의 존재론적 가치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 교회의 번혁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위드 코로나'를 전제해야 하는 시국에 신실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교회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며, 한국 교회가 처한 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A. 교회가 교회되는 데 커다란 걸림돌은 세상의 잣대가 교회에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가 맨 먼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차별 없이 취급해 주어야 한다. '차별 없이'라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배운 것, 가진 것, 높은 것이 언제나 교회에서 발언을 한다. 이를 넘어서야 한다.
교회는 분명히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예수 안에서 모두가 '평등하다' '복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잘 안 된다. 이상하게 교회는 신앙 좋은 사람보다 사회적 지위가 우선한다. 모든 사람을 동등한 가치로 대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위해서 왔다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 예수의 죽음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증언하는 첫 번째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잘 되지 않는다. 이를 넘어서야 하는데 불가능할 것 같다.
그래도 그렇다는 걸 알고 있어야 한다. 알고 있으면 소수라도 사회적 지위와 빈부를 떠난 교제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유유상종에 그친다. 결국 기득권에 불과하다. 거기가 제일 먼저 깨져야 한다.
재정이 투명하다거나 도덕성이 높다는 것은 교회에서 따지는 문제 가운데 가장 후순위이다. 그런데 재정의 투명성과 도덕성이 제일 높은 순위에 올라와 있다. 순교 시대를 산 우리 선조들은 순교도 도덕으로 했다. 더 치열하고 청렴하게 살아야 했다.
순교가 일종의 결단과 같았다. 그래야 인정을 받았고 스스로도 만족을 했다. 그러다가 부흥 시대가 되자 부가 능력이 되고 성공이 되고 승리가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뿌리지 않은 열매를 만든다는 것을 봤다.
그런데 거기까지만 봐야 했다. '더 심으면 더 난다'는 공식으로 가지 말아야 하는데, '더 하면 더 주실 수 있다'까지 갔다.
나도 기도할 게 많아서 여러 번 기도원에 다녔다. 어느 날 기도원에 갔는데, 누가 뒤에서 나를 와락 껴안으면서 '아니, 목사님이 기도원에는 웬일이세요?'라고 하는 거다. '넌 누구냐?'라고 물었더니 신학교 제자란다.
그래서' 왜 왔겠냐, 기도하러 왔지' 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제자가 '목사님 같이 유명하신 분이 뭐가 기도할 게 있으세요.'라고 했다.
유명하면 기도할 게 없나? 건강하면 기도할 게 없나? 우리는 영적 도전 속에 늘 살고 있는데 말이다.
예수님도 '머리 둘 곳이 없다' (마 8:20 참고. 눅 9:58) 라고 하셨잖은가. 고통과 괴로움을 미화하자는 게 아니다.
하루를 버티는데 얼마나 많은 신앙의 노력이 필요한가. 정말 전투다.그런 것들이 없어졌다.
작은 교회 목사들은 성도들이 '목사님은 왜 부흥을 못 시키세요?'라고 항의를 하면 심신이 힘들다고 한다.
목사가 부흥을 어떻게 시키는가?​ 부흥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다. 그런데 이런 이상한 방법론이 생겼다.
그런 식으로 사회적 문제를 교회에 떠미는 것은 번지수가 잘못된 것이다. 사회적 문제는 민도(民度)가 낮아서 생기는 문제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단 국회의원을 잘 뽑아야 한다. 정치를 잘해야 한다. 목회자는 그쪽을 잘 모른다.​
링컨을 부활시켜서 데려오든지 어떻게 해서든 정치를 잘하면 된다. 그리고 민도가 낮으면 소용이 없다.
교회도 민도가 낮다. 그런데 스스로 민도가 낮다고는 안 믿는다. 공부는 치열하게 했거든. 아무 쓸데 없는 공부를 말이다.
우리가 영어를 10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는데, 헬로우(Hello) 다음을 말할 수가 없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도 민도가 낮다.
더 나아가기 위해 고민해야 할 것과 무식한 것이 구별되지 않는다. 지금은 이를 분별하고 인내하고 순종하는 안목을 여는 훈련을 해야 할 때이다.///

*인터뷰; IVP 정지영 기획주간, 정리: 이성민 목사
[*저서: 고난이 하는 일 (2021.11.刊) 박영선 목사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