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박영선목사 / 2021 여름온라인수련회 특강 / 고난의 얼굴에 비친 하나님의 영광]
nazunzaro
2021. 12. 30. 04:58
● 코로나19는 신자가 '생명'을 증언하기위해 '죽음'으로 보냄을 받은 거다. 바빌론 포로는 하나의 훈련의 장이었다. 예수님처럼 신자는 사람들과 같은 문맥 정황 속에 놓인 메시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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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목사 / 2021 여름온라인수련회 특강 / 고난의 얼굴에 비친 하나님의 영광]
(성경본문: 고후 4:4-15)
- 사망과 생명에 대한 고민 -
대부분의 성경 말씀은 그냥 읽어서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살아봐야 실감이 난다.
이 본문(고후 4:4-15) 가운데,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10-12절)
라는 이 말씀은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팬데믹 상황이 되자 너무나 분명해졌다.
사람들은 보통 '코로나 19는 왜 왔는가? 어떻게 해야 되는가?'밖에 생각을 못한다.
그러나 코로나19가 무엇을 하는지를 보라.
코로나19가 우리 모두를 죽음에 직면하게 하고 있다.
사실 성도인 우리는 코로나19를 겁낼 필요가 없다.
우리는 결국 죽을 것이고, 신자된 우리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 신앙을 가진 우리에게 코로나19는 문제가 아니다.
- 위기와 도전 -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상황에서 위기를 겪어야 할까?
우리는 사망밖에 답이 없는 자들 가운데 생명을 증언하는 자로 서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증언하는 자로 서 있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 밖에 있는 자들을 우리와 함께 사망에서 생명의 부활을 믿게 한다는 단순한 논리보다 더 큰 의미를 담고 있다.
지금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내세와 궁극적 승리를 믿는 자들이 자기들과 함께 죽음에 붙잡혀서 어떤 우월한 보장이나 특별한 대접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너희는 왜 사망에 붙잡혀 있냐?'라고 묻고,
우리는 그들에게 '너희는 생명에 대해 잘 몰라서 그래' 라고 답하는 자리에 있다.
기가 막히지 않는가?
★어찌 보면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상황은,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생명을 전하고 증언하기 위해' 죽음으로 보냄을 받았고,
세상 사람들은 죽음 속에서 '우리를 통해 생명을 부여받는 자리를 확인'시켜 주는 셈이다.
이는 코로나19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유럽 여성은 코로나19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더 무서웠다고 증언했다.
코로나19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더 참혹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참혹하다, 절망적이다, 고통스럽다'는 말은 전부 다 '죽음'과 연결된다.
신자들은 '왜 우리는 죽음과 연결되어 있는 자들과 차별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가?'에 대해 의아해 할 수 있다.
더불어 비신자들은 '우리는 죽음으로 가는 이 일에 아무 답도 없고, 그냥 살아있는 동안 마지막 발광이라도 하겠다. 그런데 신자 너희는 뭐냐?'라고 도전한다. 이렇게 의문과 도전을 가지는 시간이 된 것이다.
★말하자면 코로나19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러한 의문과 도전 속에서, 가치와 의미를 생산하는 콘텍스트(문맥, 정황)가 된다.
콘텍스트를 '문맥'이라고 하면 뜻이 잘 안 통하는 것 같고, 콘텍스트라고 하면 뜻이 통하는 것 같은 것은 사기이다.
사실은 우리가 문맥이라는 말을 자주 안 써서 그렇다. 문맥(정황)이 없으면 구호와 명분이 된다.
그러한 용어가 많다. 승리, 소망, 영광, 명예 등이 그렇다. 이런 용어가 문맥 없이 등장하면 다 고급한 단어이면서 실제로는 이해가 안 된다.
이 용어들이 실체가 되려면 콘텍스트(문맥, 정황)가 있어야 한다.
콘텍스트 곧 문맥(정황)이 본문(텍스트)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콘텍스트가 있어야 본문(텍스트)이 살아난다.
그래야 본문(텍스트)이 담긴다. 그런 가운데 '생명과 사망'이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다.
- 역사라는 큰 문맥, 바빌론 포로 -
세상 사람들은 신자인 우리가 생명을 가졌다면, 이 병마에 대해서 걱정을 안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한다.
반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이 병마로 인해 죽는 것은 그 병마로 인한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 생각을 해야 된다고 말하는 셈이다.
지금은 이것들이 부딪히는 시간이다.
그래서 이러한 일들은 성경과 이스라엘 역사에서 커다란 문맥(정황)으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커다란 문맥이란 무엇일까? 작은 문맥(정황)은 인생이다. 큰 문맥(정황)은 역사이다.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는 큰 문맥(정황)은 바빌론 포로이다.
바빌론 포로는 묘하다 이스라엘 민족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언약 백성, 곧 하나님의 성전과 율법을 가진 백성이 다른 신을 섬기는 이방인들에게
포로로 잡혀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제이기보다 하나님의 명령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이 파괴되도록 허락하셨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방 민족의 포로와 종으로 살도록 하셨다.
바빌론 포로 직전에 이러한 반발이 있었다. 예레미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잘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므로 이를 순순히 받으라'고 경고한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예레미아에게 1차적으로 '우리가 이런 이방 민족에게 질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다. 그러한 거짓말을 하지 마라'라고 했다.
이스라엘은 히스기아 왕 때에 야웨께서 한 천사를 보내서 적군 앗시리아의 용사와 지휘관과 장군을 하루아침에 전부 시체로 만드신 기적의 승리를 경험했기 때문에(대하 32:1-23), 그러한 상상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에 의해 성전은 파괴되고 그들은 바빌론 포로가 되고 만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 중에 바빌론 포로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이집트로 피난을 가는 무리가 나타난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방인의 포로가 되고 자신들의 성전이 무너지는 꼴은 못 보겠다는 무리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주장한 말에 자존심을 더해 이집트로 피난을 가면서 '벌을 순순히 받으라'는 메시지를 전한 예레미야를 붙잡아 갔다.
결국 자신들의 말이 틀리고 예레미아의 말이 맞았으니까 예레미아를 가만둘 수 없었다. 이집트로 끌고 가서 거기서 예레미아를 죽인다.
예레미아는 이집트로 끌려가면서도 '이집트로 도망간 자들은 망한다. 하나님이 끝까지 심판하겠다'고 하셨다.
바빌론 포로가 된 자들만이 살아남는다. '그들이 곧 남은 자다' 라고 전한다.
'남은 자'란 '큰 나무를 베도 그루터기가 남듯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한 '남은 자'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여기서 '남은 자'는 '이 징계를 받은 자, 이 특별 훈련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바빌론 포로가 하나의 훈련의 장이었던 것이다.
-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것일까?
★하나님은 잘잘못을 지우는 문제보다 잘 잘못의 결과를 겪어보는 시간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보편적 역사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바빌론 포로에서만 나타났던 것은 아니다.
출애굽의 기적으로 이집트를 남았던 이스라엘 세대가 광야에서 다 죽는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열두 정탐꾼을 보내어 다수의 부정적 정탐 보고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입국을 거절하자, 하나님이 그들에게 '너희는 다 죽어라'고 하셨다.
더러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듣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국에 갔는가, 가지 못했는가?' 라고질문을 한다.
그들은 천국에 갔다. 왜냐하면 모세가 같이 죽었기 때문이다. 모세는 원래 그곳에서 그들과 같이 죽을 입장은 아니었다.
그는 가나안 입국에 대해서 믿음을 가졌으니까. 그런데 므리바 사건, 별거 아닌 데에서 하나님이 느닷없이 '죽어라' 하고 명하신다.
모세는 이 부분에 대해서 알아들었고, 모세가 백성들과 함께 죽음으로써, 백성들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모세와 백성들이 죽은 것이 일을 한다.
앞서 우리는 '신자인 우리가 왜 차별적 혜택을 받지 못하는가'를 시작으로,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너희는 영생과 내세가 있어 특별 보호와 약속이 있다면서 왜 정작 생명을 찾을 때는 우리와 비슷한가?'라고 한다고 했다.
반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있는 죽음의 자리에 들어가, '너희는 죽음을 외면하고 있다가 눈앞에 닥친 위기에 아우성을 치면서 결국 물어야 할 것 아닌가? 코로나 19 하나만 면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 치명적 사고는 늘 일어나는 것이다.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 그런데 너희는 너희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과 준비를 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했다.
★서로 같은 문맥 속에, 정황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육신이다. 성육신이란 예수님이 갈 때까지 간 인간의 모든 자리에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가 선택하고 우리가 걷고 있고 우리가 누워 있는 그 자리에 들어오는 것이 성육신이다.
와서 '너 왜 이러느냐?'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냥 우리와 같이 사신다.
죽음은 모든 잘못의 최종 집합지이다. 죽음은 죗값이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사건만을 행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생애 자체를, 그 인생을 사셨다.
죽음으로 가는 그 중간 즉 모든 인생이 겪는 헛됨과 어리석음과 비겁함과 실패 가운데 함께 계신 것이다.
그분이 함께 계시면 그것이 곧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예수를 죽음에서 건지신 이가 예수와 함께 모두를 건지실 것이다.
★이는 세례와 부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연합이다. 하나님이 인간과 그 인생, 그 운명을 자신과 묶는 것이 성육신이다.
우리 역시 그렇게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고 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 것도 당연한 사명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과 같은 고난 같은 현장 같은 현실에 있으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한 답이 그들도 함께 갖는 답이 되게 하는 것이 성육신이다.
여기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요, 지금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우리가 왜 이렇게 불안한 현장에 있어야 하며 날마다 공포에 떨어야 하는 가운데 있어야 하는지를,
그 결과에 상관없이, 함께 묶이는 일로 우리의 인생을 걷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메시아인 것이다.
'우리가 메시아다'라고 이야기하면 괜히 분에 넘치는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예수를 이 땅에 육신으로, 그것도 마구간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게 하셨다는 것을 잊거나 부인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특별하기를 원한다. 기적들 곧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거나 문둥병자를 고치거나 귀신을 내쫓는 데에만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시키므로 그분의 생애의 모든 장면과 모든 경우가 전부 결론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성육신이다.
우리의 부활은 나중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부활할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지금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 내 인생과 겹치는 사회 이웃을 우리가 구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힘들어 하는 것마저도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살게 한다. 어느 날 보란듯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신앙의 특별한 사건은 보편적 사건으로 연결되는 것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그 감동, '나는 오늘 죽어도 천국에서 깰 것을 믿어요'가 보편적 일상에 들어가는 것이다.
매일 감동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감동과 특별함이 우리 인생 전체를 끌어안고 돕고 채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예수의 생애가 역사 속에 일어남으로써 모든 인류의 평범한 인생, 곧 불안과 원망 가운데 예수와 연합되게 하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우리의 감정은 다 특별한 사건이다. 특별한 기도 응답, 그리고 어떤 계기, 사건이나 이러한 특별한 사건이 우리를 골탕 먹일 때가 있다.
그렇지 않은 것들을 시시하게 만들어 버린다.
요즘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다 먹방 이야기다. 예전에는 최불암 씨가 건강하게 먹을 수 있는 유명한 음식을 소개했고
그다음에 나오는 허영만 씨는 일반 가정식을 소개했다. 요즘은 최백호 씨가 나와 혼밥에 대해 소개한다.
이 방송은 혼밥을 먹을 수밖에 없는 개인 사정을 소개해 준다.
그러면서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이해도 할 수 있고 친밀감마저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우리가 그들을 도와줄 방법이 없다.
그 모든 사람이 나와 함께 대한민국에 산다는 것만이 유일한 끈이다. 그것이 우리의 생애이다.
그들의 고통, 그들의 막막함이 우리의 마음에 동정심을 갖게 하고 더 잘 해야 한다는 어떤 생각들, 우리의 무력함 같은 것을 느낀다.
이 모든 막막함이 일을 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 더 깊어질 기회 -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헤롯은 그분의 탄생을 축하하지 않고 두 살 이하의 사내 아이를 모두 죽였다.
결국 예수님의 가족은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 했다. 그뿐 아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고자 할 때 예수님은 피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분의 생애 동안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셨다.
예수님은 그러한 일들을 겪으실 때 그 일 자체를 무마하고자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신의 자리에 들어가심으로 모두를 놀라게 하셨다.
현재 신자들이 코로나 19로 인해 교회에 모이지도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원망과 불평을 하지만 사실은 그런 원망과 불평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 온라인으로 충분히 교제가 가능하다. 물론 직접 모이는 것만 못하다.
그러니까 더 깊어져야 한다. 서로 모여서 웃고 떠들면서 가졌던 것들을 떨어져서 보니까 아니다 싶은 것도 있다.
더 깊어져야 한다는 도전이 더 크게 생겼다.
우리는 메시아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메시아라는 것이 세상에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자로 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을 해결하셨는지 기억하라. 인간의 정체성과 운명, 지위, 신분에 관한 것 을 해결하셨다.
그 의미와 가치를 살려내는 일에는 문맥이 어떠하냐, 정황과 경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은 오히려 기회이다.
★모든 절정은 가장 어려운 일이나 절망의 반전에서 나온다.
그 반전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나오는 것은 삼류 소설이다.
일류는 고난과 절망을 당한 주인공이 이를 뛰어넘는 사람으로 재탄생하는 것으로 반전이 이루어지는 법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이를 적용하자면 신앙의 어떤 높은 차원으로의 분발과 은혜, 계기, 기쁨으로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우리 모두에게 열매 맺히기를 바란다.//
(기도)
위드 코로나 시대에 교회들은 무엇을 해야 되나?
당연히 기도해야 된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없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짊어지신 예수님의 일하심에 참여할 것을 기도할 때이다.
예수님은 조롱과 고통과 배신을 뒤엎으셨다. 보복하신 것이 아니라 뒤엎으셨다.
우리도 보복을 하거나 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찬란한 하나님의 하나님 자녀의 영광의 자리에 서는 기쁨을 누려야 한다.
아멘.
[박영선목사 / 2021 여름온라인수련회 특강 / 고난의 얼굴에 비친 하나님의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