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고난이 하는 일_박영선 著_2021.11. 刊] - 4장. 절정과 긴장]
nazunzaro
2021. 12. 29. 21:54
● 어떤 사건이나 도전으로 우리는 절망에 빠지거나 자책을 한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그동안 안심하고 지내던 울타리에서 벗어나게 된다. 오늘 죽을 것 같은 이 고난이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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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이 하는 일 - 4장. 절정과 긴장]
★어떤 사건이나 도전으로 우리는 절망에 빠지거나 자책을 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우리는 그동안 안심하고 지내던 울타리에서 벗어나게 된다.
우리에게 절망의 사건이 없었으면 안주하고 말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목사들도 목회가 잘 되면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설교도 밤낮 똑같은 내용으로 본문만 바꿔서 고함을 지르다 강대상에서 내려올 뿐이다.
신앙의 현실로 들어와야 한다. 고민으로, 불평으로, 절망으로까지 들어와야 안심의 영역을 벗어난다.
이것이 월터 브루그만이 『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까지』에서 하는 이야기이다.
우리에게 고마운 일상이 별것이 아니라고, 과연 인생이 무엇인가라고 생각하는 게 굉장히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앞서 구약에서 '고난의 가치'를 이해했다면 이제 신약에서 '고난의 가치'를 어떻게 소개하는지 살펴보자.
먼저 요한복음 12장 20절~27절이다. 요한복음은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사건별로 재편집한 형식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죽기 위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때 하신 말씀이다.
요한복음 12장 앞부분에서는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갔다. 베다니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린 곳으로 유명하다.
그때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는 장면이 나온다.
그 이튿날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들( 20절), 곧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정말 메시아가 오셨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증언하는 예수님의 기적은 정말 놀랍다. 문둥병자가 낮고 중풍병자가 낫고, 귀신이 쫓겨나고, 바다가 잠잠해지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셨을 뿐 아니라, 죽은 사람까지 살렸다.
이제 이방인들이 메시아를 확인하러 왔다. 그렇다면 여태껏 공생애 동안에 예수님이 행한 기적들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앞서 행한 기적보다 더 큰 일이 일어나야 할 자리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희한하게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절) 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영광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 영광은 십자가였다. 십자가는 그냥 죽는 자리가 아니다.
죽음에 대한 어떤 치열함이나 장렬함은 없다. 아주 수치스럽고 말이 안 되는 오해 왜곡 배신만이 있다.
우리는 십자가를 떠올릴 때 십자가와 부활을 묶어서 생각한다. 그래서 부활로 가기 위한 디딤돌로 십자가를 이해한다. 하지만 원래 이 디딤돌은 이곳이나 저곳으로 갈 수 없는 모든 것을 막아버린 사건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를 '영광'이라고 말했다.
이런 면에서 창조와 부활의 하나님을 증언하는 신자로서 '하나님 저에게 왜 이런 고난을 주셨어요?' 라고 묻는 것은 '제 인생을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시나요?'라는 의미로 너무 믿음이 없는 질문인 것이다.
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루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런 하나님을 믿었다'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로 되어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브라함이 믿음 하나님은 '창조와 부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창조는 우리가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활'은 무엇일까?
'죽어도 산다. 죽음이 더 큰 일을 한다. 혹은 죽음이 더 큰 일을 하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반전을 만들어내는 것이 '부활'이다.
우리는 이러한 말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좀 소홀히 하는 것 같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시비를 걸었다. '당신이 정말 유일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자(使者)라면 최소한의 영광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니오? 그런데 우리 눈에는 당신에게 허무할 만한 것도 볼 만한 것도 없는 것 같소. 허구헌 날 굶고 온갖 박해에 쫓겨다니는 사람이 무슨 하나님의 사자라는 말이오?' 라고 말이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는지를 이야기함으로써 그들에게 역습을 가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당신들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난 더 어렵게 지냈소.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하오' 라고 전한 것이다.
12장에서는 바울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7절)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죽게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8-9절)라고 덧붙인다.
★이것이 부활이다. 그동안 우리는 .부활을 죽어도 산다,라고 너무 간단하게 정리함으로써 오늘 죽을 것 같은 이 고난이 하는 일에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우리는 매일 죽을 것 같아야 한다.
★사실 우리가 받기 원하는 위로는 세상적 위로이다. 하나님은 알아주실 거라는 말도 너무 소극적이다.
하나님이 친히 열심히 일하시는 거다.
출애굽기에서도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 놀라운 일이 나온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다. 이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출 3:6-10)
이에 모세가 화가 나서 하나님께 대꾸를 한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1절)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까?(13절)
이 말은 '하나님은 무슨 일을 이렇게 하십니까? 40년 전에 무엇을 하고 계시다가 이제 나타나셔서 이제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스라엘 자손에게 뭐라고 당신을 소개해야 하나요?'라는 의미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14절)고 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기를 중단하지 않으신다. 모세는 지난 40년이 허송 세월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동안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계시지 않았다.
그분은 열심히 일하셨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이고 모세와 함께 계획하신 그 일을 행하실 것이다.
결국 모세가 보낸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건이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항복하게 되는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구나.. 이렇게 굉장한 분이시구나..'를 확인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모세는 열 재앙 내내 좋은 소리를 하지 않다가 홍해 앞에 서서야 항복을 한다.
모세가 이렇게 배울 수 있도록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이다. 바로가 회개하면 모세는 이 엄청난 것들을 배울 수 없다. 바로가 계속 우겨야 한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번거롭게 일을 하실까?
바로를 그냥 죽이시고 이집트를 싹 쓸어버리신 후에 이스라엘을 그 땅에 세우시면 될 텐데 말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하지 않으셨을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과를 정하시지 않고 우리를 납득시키려고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 관계로 이어가기를 원하신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믿음과 사랑이다.
믿음도 동등한 인격이 아니면 나눌 수 없고 사랑도 동등한 인격이 아니면 나눌 수가 없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동정이다. 우리는 사랑받기는 원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딱하고 가볍게 여기는 것은 견디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동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등한 수준으로 대하실 뿐 아니라, 그 수준까지 크기를 요구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고단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일하심과 그분의 하나님 되심으로 초대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초대하시는 곳은 만사형통의 자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겪는 수많은 한계 속에서, 고뇌와 절망과 후회와 자책 속에서, 우리를 사랑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배우게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요구인지를 깨닫게 하신다. 그 자리가 바로 십자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라는 말씀이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결과를 모르면 얼마나 우스운 상황인가? 당장 먹을 수 있는 밀을 갖다 버려야 되니 말이다. 그런데 버린 씨가 싹이 나 열매를 맺으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씨를 심을 때 땅이 씨를 삼키는 것 같이, 죽음은 우리를 삼키고 끝내는 것 같다. 마치 땅이 삼킨 것 같으나 실은 하나님이 심으신 것이다.
이것이 죽음이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 입장에서는 기가 막힌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아담이 잘못했을 때 그를 없애고 새로 만드시면 된다. 혹은 대홍수 때 노아와 그의 가족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을 죽이시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새롭게 다시 시작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선택과 결정 가운데서 일을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배신과 외면을 그대로 놓고 그 위에서 일을 하신다.
★영화에서 절정이 일어나려면 긴장이 있어야 한다. 긴장이란 형통하지 않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데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데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 데서, 답이 없는 데서 답이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갑자기 크게 비약되는 일들을 '드라마틱하다'거나 '반전이 있다'고 한다.
성경에서는 부활이 그렇다. 부활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나온다. ★십자가가 일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을 때 그분의 목적과 뜻을 결코 취소하거나 약화하거나 타협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창조 목적을 아는 신자는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더욱더 매진해야 한다.
좋은 대학교에 합격하면 얼마나 기쁜가? 일가 친척이 다 모여서 축하해 준다. 그렇다고 흥분하여 이마에 합격증 붙이고 돌아다니지 말고, 합격한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 대학생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실제로 훌륭한 사람으로 다듬어져야 한다. 어디나 상급 교육기관에 들어가면 다 힘에 부치는 요구를 한다. 그래서 괜히 입학했나 싶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강할 걸 싶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이 만들어져야 한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말의 의미는, 이처럼 하나님의 학교에 들어가서 고난을 통해 증언하라는 것이다.
고난이 영광이라고 증언하는 모든 사건을 합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들은 필설로 다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적이 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후 12:2-4)
★이와 같이 우리도 그런 설명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자리로 부름을 받고 있다.
지금은 코로나 19로 전 세계가 팬데믹 상황이다. 강대국도 소용없고 부자도 소용없다. 모두 소용없다.
모두 살기에 급급하다. 그래서 이제 무슨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그때가 좋았지'라고 생각한다. 어느 때를 말할까? 교회 성도들이 바글바글 모였을 때가 좋았고, 국수 한 그릇 나눠 먹을 때가 좋았다고 한다.
세상이 다시 우리를 속이고 대강 넘어가도록 이렇게 마취시켜서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를 깨우셨다. 이제 어떻게 하려는가?
이제는 대형교회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 대형 교회는 성도가 많은 것으로 존재를 확인했다. 하지만 이제는 교회에 성도가 많이 들어올 수 없는데 무슨 수로 확인하겠는가?
★지금은 누구를 비난해서 자기를 확인해야 할 때가 아니다. 서로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집중해야 할 때이다.
그래서 십자가가 등장한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막 14:34)라고 하셨을까?
십자가는 예수님도 괴로워하신 고통이다. 그러나 이 '고통'과 '맞고 틀리다'는 다른 문제이다.
내가 올바르면 고통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이 말이 안 되는 것은 없다.
땀은 속이지 않는다. 땀 없이, 노력 없이, 훈련 없이 되는 일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을 어떤 명분을 되뇌는 것으로 때운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
내가 우리 교인들에게 요구하는 실천 방안이 있다.
'웃어라 인사해라'였다. 왜? 기도원만 갔다오면 얼굴이 시퍼렇게 되어 오냐?'며 외쳤던 방안이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가 첫걸음이다.
그런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더니 '당신 지금 한가하게 인사할 여유가 있소? 지금은 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요.'라고 해서 배렸다.
누군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를 했을 때에는 잘 들어주라. 그리고 '맞습니다'라고 하지 말고, 그냥 '그렇군요'라고 하면 된다.
거기에 대고 '넌 말이야, 넌 학교 다닐 때도 그랬어' 라고 하지 마라.
우리는 적극적으로 삶에 대한 훈련을 못 보고 못 배웠다. 그때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 웃으면서 '야, 넌 예나 지금이나 정열이 있다. 그치?' 라고 하면 된다.
'맞다, 틀리다'를 얘기할 필요가 없다.
말은 보고 배우는 것이다.
컵을 직접 보여 주며 '이게 컵이야'라고 하면 된다. '컵이 뭐야?'라고 하는데 '컵은 말이야, 물이나 음료 따위를 따라 마시려고 만든 그릇이야'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안 된다.
대표적인 예가 '시각장애인이 코끼리 만지기'이다. 이 우화가 성립하려면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코끼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모르면 이야기가 안 된다. 시각장애인 넷이 자기네끼리 회의를 하면 코끼리를 그려낼 수 있겠는가? 못 그린다. 어디다 어떤 걸 붙여야 되는지 모른다.
직접 보면 모든 것을 한 번에 보고 안다.
우리나라 시험은 코끼리가 다리가 몇 개냐, 발톱이 몇 개냐'라고 분석하라고 해서 복잡해졌을 뿐이다.
그래서 본 걸 어디다 써먹지 못하고 말았다. ★직접 보고 몸소 해보면 된다. 신앙 훈련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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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이 하는 일 - 4장. 절정과 긴장]
★어떤 사건이나 도전으로 우리는 절망에 빠지거나 자책을 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우리는 그동안 안심하고 지내던 울타리에서 벗어나게 된다.
우리에게 절망의 사건이 없었으면 안주하고 말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목사들도 목회가 잘 되면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설교도 밤낮 똑같은 내용으로 본문만 바꿔서 고함을 지르다 강대상에서 내려올 뿐이다.
신앙의 현실로 들어와야 한다. 고민으로, 불평으로, 절망으로까지 들어와야 안심의 영역을 벗어난다.
이것이 월터 브루그만이 『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까지』에서 하는 이야기이다.
우리에게 고마운 일상이 별것이 아니라고, 과연 인생이 무엇인가라고 생각하는 게 굉장히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앞서 구약에서 '고난의 가치'를 이해했다면 이제 신약에서 '고난의 가치'를 어떻게 소개하는지 살펴보자.
먼저 요한복음 12장 20절~27절이다. 요한복음은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사건별로 재편집한 형식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죽기 위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때 하신 말씀이다.
요한복음 12장 앞부분에서는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갔다. 베다니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린 곳으로 유명하다.
그때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는 장면이 나온다.
그 이튿날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들( 20절), 곧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정말 메시아가 오셨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증언하는 예수님의 기적은 정말 놀랍다. 문둥병자가 낮고 중풍병자가 낫고, 귀신이 쫓겨나고, 바다가 잠잠해지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셨을 뿐 아니라, 죽은 사람까지 살렸다.
이제 이방인들이 메시아를 확인하러 왔다. 그렇다면 여태껏 공생애 동안에 예수님이 행한 기적들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앞서 행한 기적보다 더 큰 일이 일어나야 할 자리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희한하게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절) 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영광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 영광은 십자가였다. 십자가는 그냥 죽는 자리가 아니다.
죽음에 대한 어떤 치열함이나 장렬함은 없다. 아주 수치스럽고 말이 안 되는 오해 왜곡 배신만이 있다.
우리는 십자가를 떠올릴 때 십자가와 부활을 묶어서 생각한다. 그래서 부활로 가기 위한 디딤돌로 십자가를 이해한다. 하지만 원래 이 디딤돌은 이곳이나 저곳으로 갈 수 없는 모든 것을 막아버린 사건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를 '영광'이라고 말했다.
이런 면에서 창조와 부활의 하나님을 증언하는 신자로서 '하나님 저에게 왜 이런 고난을 주셨어요?' 라고 묻는 것은 '제 인생을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시나요?'라는 의미로 너무 믿음이 없는 질문인 것이다.
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루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런 하나님을 믿었다'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로 되어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브라함이 믿음 하나님은 '창조와 부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창조는 우리가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활'은 무엇일까?
'죽어도 산다. 죽음이 더 큰 일을 한다. 혹은 죽음이 더 큰 일을 하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반전을 만들어내는 것이 '부활'이다.
우리는 이러한 말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좀 소홀히 하는 것 같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시비를 걸었다. '당신이 정말 유일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자(使者)라면 최소한의 영광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니오? 그런데 우리 눈에는 당신에게 허무할 만한 것도 볼 만한 것도 없는 것 같소. 허구헌 날 굶고 온갖 박해에 쫓겨다니는 사람이 무슨 하나님의 사자라는 말이오?' 라고 말이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는지를 이야기함으로써 그들에게 역습을 가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당신들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난 더 어렵게 지냈소.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하오' 라고 전한 것이다.
12장에서는 바울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7절)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죽게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8-9절)라고 덧붙인다.
★이것이 부활이다. 그동안 우리는 .부활을 죽어도 산다,라고 너무 간단하게 정리함으로써 오늘 죽을 것 같은 이 고난이 하는 일에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우리는 매일 죽을 것 같아야 한다.
★사실 우리가 받기 원하는 위로는 세상적 위로이다. 하나님은 알아주실 거라는 말도 너무 소극적이다.
하나님이 친히 열심히 일하시는 거다.
출애굽기에서도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 놀라운 일이 나온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다. 이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출 3:6-10)
이에 모세가 화가 나서 하나님께 대꾸를 한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1절)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까?(13절)
이 말은 '하나님은 무슨 일을 이렇게 하십니까? 40년 전에 무엇을 하고 계시다가 이제 나타나셔서 이제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스라엘 자손에게 뭐라고 당신을 소개해야 하나요?'라는 의미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14절)고 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기를 중단하지 않으신다. 모세는 지난 40년이 허송 세월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동안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계시지 않았다.
그분은 열심히 일하셨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이고 모세와 함께 계획하신 그 일을 행하실 것이다.
결국 모세가 보낸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건이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항복하게 되는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구나.. 이렇게 굉장한 분이시구나..'를 확인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모세는 열 재앙 내내 좋은 소리를 하지 않다가 홍해 앞에 서서야 항복을 한다.
모세가 이렇게 배울 수 있도록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이다. 바로가 회개하면 모세는 이 엄청난 것들을 배울 수 없다. 바로가 계속 우겨야 한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번거롭게 일을 하실까?
바로를 그냥 죽이시고 이집트를 싹 쓸어버리신 후에 이스라엘을 그 땅에 세우시면 될 텐데 말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하지 않으셨을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과를 정하시지 않고 우리를 납득시키려고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 관계로 이어가기를 원하신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믿음과 사랑이다.
믿음도 동등한 인격이 아니면 나눌 수 없고 사랑도 동등한 인격이 아니면 나눌 수가 없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동정이다. 우리는 사랑받기는 원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딱하고 가볍게 여기는 것은 견디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동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등한 수준으로 대하실 뿐 아니라, 그 수준까지 크기를 요구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고단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일하심과 그분의 하나님 되심으로 초대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초대하시는 곳은 만사형통의 자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겪는 수많은 한계 속에서, 고뇌와 절망과 후회와 자책 속에서, 우리를 사랑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배우게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요구인지를 깨닫게 하신다. 그 자리가 바로 십자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라는 말씀이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결과를 모르면 얼마나 우스운 상황인가? 당장 먹을 수 있는 밀을 갖다 버려야 되니 말이다. 그런데 버린 씨가 싹이 나 열매를 맺으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씨를 심을 때 땅이 씨를 삼키는 것 같이, 죽음은 우리를 삼키고 끝내는 것 같다. 마치 땅이 삼킨 것 같으나 실은 하나님이 심으신 것이다.
이것이 죽음이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 입장에서는 기가 막힌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아담이 잘못했을 때 그를 없애고 새로 만드시면 된다. 혹은 대홍수 때 노아와 그의 가족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을 죽이시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새롭게 다시 시작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선택과 결정 가운데서 일을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배신과 외면을 그대로 놓고 그 위에서 일을 하신다.
★영화에서 절정이 일어나려면 긴장이 있어야 한다. 긴장이란 형통하지 않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데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데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 데서, 답이 없는 데서 답이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갑자기 크게 비약되는 일들을 '드라마틱하다'거나 '반전이 있다'고 한다.
성경에서는 부활이 그렇다. 부활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나온다. ★십자가가 일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을 때 그분의 목적과 뜻을 결코 취소하거나 약화하거나 타협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창조 목적을 아는 신자는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더욱더 매진해야 한다.
좋은 대학교에 합격하면 얼마나 기쁜가? 일가 친척이 다 모여서 축하해 준다. 그렇다고 흥분하여 이마에 합격증 붙이고 돌아다니지 말고, 합격한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 대학생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실제로 훌륭한 사람으로 다듬어져야 한다. 어디나 상급 교육기관에 들어가면 다 힘에 부치는 요구를 한다. 그래서 괜히 입학했나 싶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강할 걸 싶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이 만들어져야 한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말의 의미는, 이처럼 하나님의 학교에 들어가서 고난을 통해 증언하라는 것이다.
고난이 영광이라고 증언하는 모든 사건을 합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들은 필설로 다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적이 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후 12:2-4)
★이와 같이 우리도 그런 설명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자리로 부름을 받고 있다.
지금은 코로나 19로 전 세계가 팬데믹 상황이다. 강대국도 소용없고 부자도 소용없다. 모두 소용없다.
모두 살기에 급급하다. 그래서 이제 무슨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그때가 좋았지'라고 생각한다. 어느 때를 말할까? 교회 성도들이 바글바글 모였을 때가 좋았고, 국수 한 그릇 나눠 먹을 때가 좋았다고 한다.
세상이 다시 우리를 속이고 대강 넘어가도록 이렇게 마취시켜서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를 깨우셨다. 이제 어떻게 하려는가?
이제는 대형교회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 대형 교회는 성도가 많은 것으로 존재를 확인했다. 하지만 이제는 교회에 성도가 많이 들어올 수 없는데 무슨 수로 확인하겠는가?
★지금은 누구를 비난해서 자기를 확인해야 할 때가 아니다. 서로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집중해야 할 때이다.
그래서 십자가가 등장한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막 14:34)라고 하셨을까?
십자가는 예수님도 괴로워하신 고통이다. 그러나 이 '고통'과 '맞고 틀리다'는 다른 문제이다.
내가 올바르면 고통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이 말이 안 되는 것은 없다.
땀은 속이지 않는다. 땀 없이, 노력 없이, 훈련 없이 되는 일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을 어떤 명분을 되뇌는 것으로 때운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
내가 우리 교인들에게 요구하는 실천 방안이 있다.
'웃어라 인사해라'였다. 왜? 기도원만 갔다오면 얼굴이 시퍼렇게 되어 오냐?'며 외쳤던 방안이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가 첫걸음이다.
그런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더니 '당신 지금 한가하게 인사할 여유가 있소? 지금은 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요.'라고 해서 배렸다.
누군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를 했을 때에는 잘 들어주라. 그리고 '맞습니다'라고 하지 말고, 그냥 '그렇군요'라고 하면 된다.
거기에 대고 '넌 말이야, 넌 학교 다닐 때도 그랬어' 라고 하지 마라.
우리는 적극적으로 삶에 대한 훈련을 못 보고 못 배웠다. 그때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 웃으면서 '야, 넌 예나 지금이나 정열이 있다. 그치?' 라고 하면 된다.
'맞다, 틀리다'를 얘기할 필요가 없다.
말은 보고 배우는 것이다.
컵을 직접 보여 주며 '이게 컵이야'라고 하면 된다. '컵이 뭐야?'라고 하는데 '컵은 말이야, 물이나 음료 따위를 따라 마시려고 만든 그릇이야'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안 된다.
대표적인 예가 '시각장애인이 코끼리 만지기'이다. 이 우화가 성립하려면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코끼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모르면 이야기가 안 된다. 시각장애인 넷이 자기네끼리 회의를 하면 코끼리를 그려낼 수 있겠는가? 못 그린다. 어디다 어떤 걸 붙여야 되는지 모른다.
직접 보면 모든 것을 한 번에 보고 안다.
우리나라 시험은 코끼리가 다리가 몇 개냐, 발톱이 몇 개냐'라고 분석하라고 해서 복잡해졌을 뿐이다.
그래서 본 걸 어디다 써먹지 못하고 말았다. ★직접 보고 몸소 해보면 된다. 신앙 훈련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