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박영선목사 / 다시 보는 열왕기(10) / 열왕기상 18:30-40 / 2021.11.28]

nazunzaro 2021. 12. 8. 04:59
-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은 늘 가장 큰 오해의 문제가 되곤 했다.

- 예수님 그가 오시자 모든 현실적인 문제들이 해결된 것으로 당신을 증거하거나 당신의 일을 목적하시지 않고,
《그를 못 알아보고 심지어 그의 말을 책잡고 오히려 그를 조롱하고 수치를 주고 죽이는 자리로 몰아가는 속에서》 이 구원의 약속의 주인공이 하나님이 약속을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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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목사 / 다시 보는 열왕기(10) / 열왕기상 18:30-40 / 2021.11.28]

갈멜산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 선지자들 456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대적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온 세상의 주인이심을 그 제사로 확인하며 도전하며 밝히는 장면이 이 유명한 `갈멜산 전투`이다.

아합 왕은 당시에 열왕기에 등장하는 남북 왕조의 여러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이고, 그런 차원에서 이 갈멜산 전투`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에 탐닉하며 정치적 군사적 야망과 권력이 전부인 이 악한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도전이었고, 그 도전은 진리를 밝히는 일에 승리한다.

이 일들은 굉장히 놀랍고 어떤 의미에서 당연하지만, 이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사건이 굉장히 애매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열왕기의 역사는 바벨론에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를 되짚어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유구한 역사와 하나님의 크신 약속 속에 존재하는 선민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이반 민족에게 포로가 되어 현실적인 굴욕과 비참한 생애를 살아야 되는가`하는 반성이면서, 반성보다 크게 분노와 원망으로 그 역사를 기록하는 중인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돌이킬 수 없는 권력, 정부, 나라였던 시대와 역사를 되짚어보는 과정에, 엘리야라는 선지자가 그 어떤 선지자보다 뛰어나게 하나님 편에 서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도전했던 그 사실이 그들로서는 어떤 의미와 어떤 의도로 기록이 되었을까, 이렇게 돌아보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현실에서의 그 숙제이다.

지금이 잘 되었더라면 이런 과거의 역사들은 매우 자랑스러운 민족적 긍지가 될 것이지마는 실패하여 답이 없는 자리에서 이러한 승리는 굉장히 공허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면 성경이 이런 기록을 남겨서 그 역사가 주는 교훈을, 오고 오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중요한 사건으로 증언하는 의도를 우리가 찾아봐야만 할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분노하신 심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배신감에 가득차서 아주 심한 심판을 선포하는 배경 속에 있다.
예레미야 15장에 가면, 이때에 하나님의 마음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
2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
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4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들을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에 흩으리라"

여기에 이 하나님의 분노는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분노의 크기를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은 이 백성을 애굽에서 구하신 분이요 광야에서 먹이신 분이요 약속된 젖과 꿀의 땅에서 살게 하신 분이요 그리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서 왕을 허락하신 분이다. 때마다 그의 선지자들을 보내며 왕을 세워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하기를 원하셨으나, 그 제사장 국가 되는 책임을 이스라엘은 실패한다. 실패하는 정도를 넘어서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는 이방 신과 헛된 것들에 온통 마음이 뻬앗겨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과 울분을 폭발시키게 만들었다.

이 때에 선지자는 예레미야이다. 북왕조 이스라엘은 이미 722년에 망하고 남왕국 유다는 586년에 망하는데, 북왕국이 망하고 남왕국이 약 150년을 더 지탱하는데, 그 최후의 이스라엘의 운명이 다하는 시대 시점의 선지자이다. 예레미야의 이름이 `하나님이 꺽어 부숴버리리라`는 뜻이다. 그 이름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니까 이런 분노의 역사의 종국을 본, 그리고 팔려가서 포로된 자리에서 이 승리와 하나님께서 엘리아 선지자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신 일은 도대체 무슨 효과가 있느냐 하는 데로 우리를 불러내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멸망기 보다 조금 앞선 시대의 웃시아와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의 선지자였는데, 그때도 이미 남왕국이 북왕국의 멸망기와 남왕국의 쇠퇴의 시대에 이사야가 선지자 일을 하는데, 엘리야는 멀리 회복까지 내다보는 선지자였다.
이스라엘의 멸망과 실패 뿐만 아니라 회복까지를 내다보는 선지자가 이사야 61장에서 이렇게 그 회복을 놀랍게 노래했다;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4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5 외인은 서서 너희 양 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6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7 너희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몫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그들의 땅에서 갑절이나 얻고 영원한 기쁨이 있으리라
8 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
9 그들의 자손을 뭇 나라 가운데에, 그들의 후손을 만민 가운데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놀라운 구원의 약속이다. 포로된 자를 놓아주며, 갇힌 자를 풀어주며, 마음이 상한 자를 위로할 것이며, 황폐된 성읍을 재건할 것이며, 제사장 나라가 되며, 그들을 압제하던 자들의 재물을 보상으로 받으며, 모든 나라가 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하여 보고 찬송하며 무릎을 꿇을 구원을 얘기하고 있다.
이 약속은 이미 이사야가 아하스 시대에, 북왕국은 이미 멸망의 때였지만 남왕국은 아직 남아있는 때에, 그 다음에 그 후의 역사를 증언하는 것같이 `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복될 것이며, 그 회복은 그 전의 영광보다 더 할 것이라는 약속의 구원이 주어졌다면,
●지금 현실 속에서 이 약속이 무슨 효과가 있느냐 하는 질문은 당연히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언제 일어날 것이냐? 이스라엘의 현실이 이 멸망인데 이 멸망 전에 이미 `하나님이 이 백성의 운명과 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가 약속되어 있다면,
●이 형편에서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 당연히 나왔을 것이다.

이 질문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후손 된 기독교 성도들의 현실 속에서도 당연한 질문이다;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셨고, 사망의 권세를 깨셔서 부활의 승리를 주셨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하나님의 약속들을 도대체 어떻게 무슨 식으로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습니까?'라는 우리 각자의 당연한 질문이 이어져 나와야 된다.
우리는 그 질문이 현실 속에서 이해되지도 적용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전부 다 죽은 다음으로 미뤄져 있다. 천국에 간다는 믿음으로 마지못해서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 문제는 누가복음 4장에서 그 조화를 이 난제를 해결한다;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놀랍다. 이사야 61장의 "주의 영이 부어지고 주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자, 우리를 구원할 자가 나다. 이제 하나님의 약속이 여기 이루어졌다. 내가 그다 "라고 그리고 무슨 말씀을 하시냐 하면;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이사야 61장의 《구원의 약속이 여기 이 역사 속에 현실화된 그 주인공인 예수》로 말미암아 "이것이 내가 그 약속의 주인공이다"인데, 들은 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놀랍게 여기지만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네 까짓게 무슨 메시아란 말이냐? 뭐 권력도 없고 특별한 권위도 없어 보이고 평범한 사람 중의 하나인데 이렇게 큰소리를 치느냐?' 그러자 예수님이 엘리야 예를 드는 거다.

"너희가 최고의 선지자로 얘기하는 엘리야가 왔을 때 너희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고 아무도 환영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까마귀가 먹을 걸 물어다 줘야 됐었고 그 과부 집에서 얻어먹고 살아야 됐었다. 너희 중에 아무도 못 알아봤다"
그러자 이 사람들이 `우리가 메시아를 못 알아본단 말이냐?`하고 그를 내쫓아서 죽이려고 하자, 예수님이 그들을 사이로 벗어 나왔다`이다.

구원에 대한 약속에 대해서도 이스라엘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기독교 이천 년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은 늘 가장 큰 오해의 문제가 되곤 했다.

●예수님 그가 오시자, 모든 현실적인 문제들이 해결된 것으로 당신을 증거하거나 당신의 일을 목적하시지 않고, 그를 못 알아보고 심지어 그의 말을 책잡고 오히려 그를 조롱하고 수치를 주고 죽이는 자리로 몰아가는 속에서, 이 구원의 약속의 주인공이 하나님이 약속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엘리아의 갈멜산 전투를 보면 무엇이 우리를 놀라게 하느냐 하면, '엘리야'라는 이름은 '여호와가 내 하나님이다.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다' 그런 뜻이다. 그러니까 그가 처음 등장을 할 때 보통 선지자들의 등장과 어떻게 다르냐 하면, 모든 선지자들은 `어디에 사는 누구의 손자, 누구의 아들 아무개가 여호와의 말씀을 받으니라, 혹은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 그래서 이제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나가는데,
엘리야는 거꾸로 자발적으로 아합에게 나타나서 " 내가 믿는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이 땅에 우로가 그치리라 가뭄이 계속되리라. 내가 말해야 우로가 다시 회복될 것이고 그것은 내가, 내가 하는 말이다" 이렇게 얘기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그걸 증거 하는 게 아니라, 엘리야가 자기주장을 펴고 자기 약속을 하고, 갈멜산 전투에서도 엘리야가 하는 기도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요..`이다.

역사를 들추고 `이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 만이 주인이신 줄 알게 하시고 그리고 내가 여호와의 종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소서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기도하고 바로 그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굉장한 도박이다. 하나님이 답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일을 엘리야는 저지른 사람이다. 그리고 그 가뭄이 그치고 비가 내리는 것도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무릎을 꿇고 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기도하여 구름이 오고 비가 오게 된다.
이런 일들은 엘리야가 감히 하나님의 뜻을 앞질러서 어떤 의미에서 중재자로 나서는 일을 놀랍게 보여주고 있는데, 이 일은 아합이 힘을 다하여 자기의 악한 일을 마음껏 하는 것과 극명한 대조를 가지게 된다.

우리가 쉽게 `아합은 악한 왕이었고 엘리야는 가장 선한 종이었다` 이렇게 하는 대조 정도가 아니라, 아합이 믿는 우상들은 아합이 조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하나님이 다 하는 것이다에서,
●이쪽에도 하나님 앞에 아뢰고 앞서서 요구하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일이 있다. 아합이 주장하는 신들은 꼭두각시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에 응답하시고 우리와 뜻을 합치시고 우리의 소원에 응답하시는 분이다` 하는 것이 엘리야 선자자에게서는 굉장히 강하게 부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여호와 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를 일에 아합을 해치지 않는다. 그 가짜 선지자들을 다 시냇가에 데려가서 쳐 죽이고 아합에게 엘리야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올라가서 식사를 하십시오. 내가 가서 기도를 하고 비가 오게 되면 모시러 내려오겠습니다`이다. 그래서 아합이 졌는데도 불구하고 엘리야의 대접을 받고 식사를 하고 쉬고 있고,
엘리야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여 시종이 `바다 쪽에서 구름이 옵니다` 하고, 그래서 뛰어내려와서 `큰 비가 올 것이니 어서 마차를 타고 환궁하십시오` 그리고 자기가 마치 아합의 시종인 것같이 마차 앞에서 그 시종들과 함께 뛰어 사마리아 궁까지 가게 된다.

●악당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며 악한 것을 벌하는 것은 악한 것에 대하여 보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다, 그러지 마라. 거기가 아니고 이쪽으로 가라, 이쪽으로 가라"라고 얘기하는 하나님의 진심이 표출되는 것이다.
●틀린 사람을 고발하고 악당을 죽여서 기독교가 유지되고 그 목적이 완성되는 게 아니라, 우리 보고 자꾸 `그리 가지 말고 이리로 가라`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가르치시고 권면하시고 울분하시고 꾸중하시고 다루시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마음에 엘리야가 동참한다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볼 때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약속 사이에 있는 이 모순 그 타협 혹은 조화의 어려움에서, 신자란 모름지기 그 꾸중을 달게 받아야 하며 또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 인생과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인생이 중요하게 임마누엘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렇게 기도하게 된다. 이사야 64장이다;
"1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2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3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4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5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7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8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9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10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11 우리 조상들이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가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폐하였나이다
12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아직도 가만히 계시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아직도 잠잠하시고 우리에게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려나이까"

이 기도는 누구에게서 터져 나오는 건까? 엘리야에게서 터져 나왔다. 하나님이 부르시기 전에 그가 먼저 뛰어나와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셔야 됩니다"라는 일을 오고 오는 시대에 우리에게 맡겨 놓은 거다.
엘리야,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 이시다'리는 그 이름이 예수에게서 어떻게 반복이 되는가? 그의 오심은 임마누엘 아닌가? 그의 이름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도다' 우리는 그의 보내심을 받는 자이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선언된 바와 같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내게 준 영광을 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아버지의 영광인 것같이 너희는 다 나의 영광이니라 네가 선 자리는 엘리야의 `내가 여기 있다' 이니라"
오바댜가 엘리야를 찾아 나오고 엘리야가 그를 만나서 아합에게 `내가 여기 있다` 하라.
오바댜는 궁중 대신이었고, 아합은 엘리야를 만나려고 혈안이 되어서 그를 찾았으나 엘리야가 숨어서 찾지 못하였을 때, 이 마지막 더 기다릴 수 없는 가뭄 끝에 엘리야를 찾으러 모든 신하들을 보냈을 때, 엘리야가 궁내 대신 오바댜를 만나 준다. 아합에게 가서 `내가 여기 있다 하라. 여호와가 여기 있다 하라` 그 이름이 그것이다.

●우리 모든 신자는 모든 사람 앞에 `내가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나와 함께 하신다`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아무개야, 엘리야야, 너 왜 거기 있느냐? 여호와가 왜 굴에 숨어 있느냐?" 그렇게 도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오늘 우리를 깨워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에 참여하는 그 기쁨, 창조와 재창조와 은혜와 영광과 생명과 진리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다'라고 흔들고 계심을 우리의 인생을 이해해야 된다.
권력을 잡고 마이크를 잡고 여론의 지지를 받아야 되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역사의 주인이신 것이 드러나는 우리들 하나하나 우리 각자가 그의 영광의 복사판들이다.

코로나 시대에 무엇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모든 선진국과 부와 무력을 무효화시킨 하나님의 흔드심이며 도전이다.
●우리야말로 지금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에 대답해야 하는 유일한 소망이고 증인이고 기적이다.

그 인생이 이렇게 감춰져 있는 것을 놀라지 말아야 된다.
아합이 쥐고 있는 권력 속에서, 엘리야는 그 시대의 살아있는 하나님의 간섭이었으며 면면이 이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실함이었음의 산 역사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이 위대한 영광과 책임을 감사하고 찬송하는 우리의 현실적인 인생이어야 한다.///

(기도)
우리의 귀한 이름과 우리의 현존과 현실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는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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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의 구원은 나쁜 놈들이 멸망 당하는데, 구원도 받는다. 성경이 얘기하는 구원은 그 조건 부분이 없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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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석목사 / 이사야 26:1-14 / 2021.11.10.]

(이사야 26:1-14절)
"그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
의인의 길은 정직하며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익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나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며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들을 사르리다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리오리니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 하셨음이니이다"

이사야서 26장 1절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단어는 '그날'이다. '그날'은 아주 이해하기 쉽게 바로 심판의 날, 최후의 날, 모든 신자들이 의로운 자들이 구원을 받고 악을 행했던 악인들이 이제 심판을 받아 멸함을 당하는 바로 그날, 모든 약속과 보은과 은혜와 어떻게 보면 권선징악적인 결과가 현실이 되는 날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날에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의를 행한 의인들은 구원을 받고 높이 들림을 받고 영광 중에 서게 되고, 악을 행하던 악인들은 심판을 받게 될것이다.
그런데 이 이사야서에서 얘기하는 악인이란 지금 위치적으로 봤을 때는 선인의 반대편에 선 사람이다.
다시 설명을 하자면, 의인이란 의롭고 죄를 멀리하고 선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들을 의미하고, 악인들은 당연히 거기에 불응하고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렇게 이 둘은 개념상으로나 위치상으로 서로 완전히 반대편에 서서 완벽하게 구별이 돼야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기독교에서의 이 선인과 악인, 쉽게 얘기해 결과적으로 구원을 받는 자들과 멸망을 당하는 자들은 그렇게 완벽하게 나뉘는 것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사야서 1장을 가 보자.
이사야서 1장에는 이런 소개와 함께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유다왕 웃시아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의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과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폐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폐하였고 딸 시온은 포도의 망대 같이, 자매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 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기 나오는 설명만 가지고 이해를 해 보자.
이 26장에 그러니까 구원이 성벽이 되고 성읍 안에 들여 보내짐을 받아 이제 하나님 앞에서 높이 올려지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사실 이사야서는 시작부터 그 백성들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아주 적나라하고 상세하게, 쉽게 얘기하면 살벌하게 기록하고 있다. 성경을 통틀어 가장 악랄하고 악을 많이 한 악인들의 대명사로 등장하는 백성이 소돔과 고모라이다. 그렇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명이 없어 심판을 면하지 못하고 하룻밤 사이에 멸망을 당한 그런 자들이다. 이사야서 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 소돔과 고모라와 똑같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적 표현이니까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가장, 조금은 쌍스럽지만, 직설적인 표현으로 정말 나쁜, 세상에서 최고로 나쁜 새끼들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두 그룹이 있는데,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얘도 악인이고, 쟤도 악인이다. 구원을 받는 그룹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그룹보다 절대로 더 착하거나 의롭지 않다. 오히려, 비교를 확실하게 못하겠지만 하여튼, 이사야서 1장의 기록을 그대로 적용시켜 본다면,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들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구원은 이런 식으로 얘기가 정리가 된다; 나쁜 놈들이 멸망도 당하는데, 나쁜 놈들이 구원도 받는다.

여기서부터가 신자로서 어떻게 보면 깊이 묻고 사고하는 그 사고적 능력이, 사고의 행위가 멈추는 순간이라고 느껴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았을 땐 조건과 결과가 부합이 되고 서로가 모순점이 없이 잘 매끄럽게 연결이 되어야 되는데, 악인도 벌을 받는데, 여기 나온 악인도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받는, 우리가 갖고 있는 권선징악이라는 절대적 진리 앞에 성경이 얘기하는 구원의 이야기는 그 조건 부분이 사라진다.

그래서 이해하고 이해할 수 없고, 깨닫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사실은 결론적으로 말해 굉장히 허탈해진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고,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라는 부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다시 이사야서 26장으로 돌아가서 앞에 나온 내용들을 천천히 보면 그러한 의문이 더 증폭된다.
우리가 성에 들어가 보호를 받는다는 개념은 우리 개념에는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즉 구원의 결과로서의 조건이 성벽이 되어야 된다.
그렇지 않은가? 성벽이 있어야 바깥으로부터 오게 되는 생명의 위협으로터 보호를 받기 때문에, 그 결과로 나는 죽게 되지 않는 것. 그래서 그 구원이 그러한 조건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 이치에 타당하다.

그러면 사실은 그러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성벽은 조건이어야 된다. 성벽이 나를 지킨다. 누가 성벽을 쌓았건, 어떻게 성벽이 쌓였건 하여튼 성벽이 조건이 되어 구원이 주어져야 되는데, 이사야서 26장에선 어떻게 얘기가 나오냐 하면,
★구원이 우리의 살고 있는 성읍의 성벽과 외벽이 된다고 한다. 결과가 되어야 할 게 조건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조건의 위치로 주어진다.

★다시 한 번 허탈하다. 이게 이렇게 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다. 우리의 이해 능력 안에서는 그렇다.
이 권선징악을 훌쩍 뛰어넘는 성경의 이야기 때문에 사실 나같은 설교자들은 더더욱 곤혹스럽다.

교인들이 열심히 교회 생활을 안 하고 믿음 생활을 하지 못하면 구원이 취소되고 지옥에 갈 수 있다,라고 얘기하는 게 사실 속편하다.
왜냐하면 지금처럼 구원이 미리 조건처럼 주어졌다면 당연히 그에 따라 오게 되는 질문, '그러면 저는 지금부터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있어도 알아서 구원받는 거군요?'라는 말에 할 말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대놓고 '아니, 그러면 구원이 취소돼!' 라고 하면 우리 기독교 특히 개혁주의 교단에서 얘기하는
구원론의 교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차마 그렇게 얘기는 못하겠고, 누군가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해온다면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얘기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고 그래? 아 그, 못나게 굴어, 왜?'라는 일종의 협박밖에 없다. 참으로 곤란하다. 그래서 설교자만 곤란할 뿐만 아니라, 그런 질문을 하게 되는 성도들도 설교자를 배려하여 그런 질문을 안 하게 되는 거다. 사실은 마음 속으로는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고, 나아가 허탈한 마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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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성경은 그렇고, 기독교도 그렇다면, 어디 한번 이 세상에서는 어떤가를 살펴 보자.
세상에서는 조건이 없는 결과란 없다. 그러니까 어떤 타당한 원인을 만들어내는 컨디션이 있어야만
그것에 따른 합당한 결과가 주어진다. 그렇게 설명이 안 되면, 그러니까 그런 인과관계가 성립이 안 되면
세상은 자기들의 주장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최소한 우리가 잘 아는 '빅뱅'이라도 갖다 넣어야 한다.
'옛날 어디선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커다란 폭발이 있었고 그 폭발로 인해 우주가 만들어졌다.'
최소한 그러니까 폭발이 반드시 있었다,라는 조건이 있어야만 지금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한 설명이 완성된다.
그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그래서 세상은 모든 것에 있어서 조건을 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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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속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렇기 때문에, 신자인 우리에게도 조건을 요구한다.
'네가 복을 받고 싶으면 복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라' '네가 남들보다 더 잘 나고 인정받고
더 높은 가치의 사람으로 여김을 받고 더 나아가 죽지 않고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려면
우리가 제시하는 조건을 네가 충족시켜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죽게 된다'가 세상의 법칙이다.

이 기독교의 이야기가 세상에서는 이렇게 만난다. 그래서 사실 신자의 삶은 어찌 보면 이상하게 이중적으로 꼬여 있다.
내가 내일 당장 세상에 나가 살아가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조건을, 세상이 나에게 요구하는 조건을
완성해야 되는데, 기독교는, 성경을 읽다 보면 성경은 그 조건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이 말하는 조건을 완성하는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성경은 도움을 주지 않는다. 오늘 본 성경과 같이 조건이 아예 없어져 버린다.
그러니까 우리가 열심히 성경을 읽고 교회생활을 하고 생활을 하고 나아가 설교를 듣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우리의 삶을 유지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데 하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입장에서,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설교는 그냥 설교가 된다. 나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 어떤 설교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런 신자들의 삶에 있어서 설교는 복을 받는다는 내용이면 충분하다. 짧게 끝내 주는 설교가 최고이다. 어차피 설교는 설교이고 나는 내일 이 세상에 들어가 세상이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 되니까..

여기서 조금 자유롭게, 생각의 어떤 시선을 막고 이렇게 한번 접근을 해 보자.
과연 이 세상과 이 기독교가 얘기하는 것과 서로 이렇게 괴리를 보이는 것이 원래 맞는 것인가?
이쪽은 조건이 전부인 것처럼 얘기를 하고, 이쪽은 조건이 없는 것처럼 얘기를 하는데, 그럼 과연 누가 더 맞는 것이며 누가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어디 한번 그것을 따져 보아야겠다. 어디서부터 따져보느냐? 가장 처음부터 따져보아야 한다. 창세기 1장 1절이다.
1장에서 딱 한 절만 볼 거다.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 그 어떤 것, 모든 것의 가장 큰 시작의 이야기는 이 이야기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을 조건과 결과로 설명해 보자. 천지 만물이 존재하는 것, 이 세상에 나타난 것, 지금도 그들이 존재하고 있고 살아가고 있고 멸망하지 않는 것의 ★모든 조건은 하나만 제시된다. 그것은 하나님이다.
공기가 존재하는 것에 있어서 공기의 역할이 없고 동물이 수명을 연장하고 유지하는 것에 있어서 동물의 역할, 그들의 조건이 등장하지 않는다. 첫 시작은, 모든 것의 조건은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바뀐다. 창세기 3장이다. 창세기 3장 17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덩굴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선악과로 인해, 범죄함으로 인해 이제 인간에게 처음으로 생명을 유지하는데 조건이 들어간다. 그 조건이란 종일토록 하는 수고이다. 그가 흘린 땀이다. 수고와 땀이 들어가야 이제 그가 죽지 않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굉장히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으면 쉽게 이해하지 못할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다. 처음에 천지를 창조할 때의 조건은 하나님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생명에 연결된 조건도 하나님이었다.
선악과 사건은 단순히 먹지 말라는 열매를 인간이 먹은 것이 아니라, 이 생명이 유지되는 조건, 유일하면서 절대적인 조건인 하나님을 인간이 거부한 것이다 . 하나님의 자리를 없앤 것이다. 그래서 생명이 날아가 버렸다.
지금 하나님께서 "네가 종일토록 일해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시지만 마지막 19절에 가면, "너는 흙으로부터 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 라고 하신 것은, 다시 말해 '그 너의 노력으로 네가 땅의 소산을 먹고 잠시 잠깐 너의 생명이 연장이 될지언정 너는 사실은 생명과 연결되지 못하고 죽게 된다'라는 말이다.
내가 없는 곳에서 너는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노력을 하겠지만 사실은 그건 다 무용지물이고 소용없는 짓이며 너는 결국 죽게 된다,라는 뜻이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를 절대적 진리로, 원칙으로 (조건으로) 세워진 곳이다. 이 세상은 생명과 연관되어 있지 않은 곳이 되어버렸다. 삶의 가장 절대적이고 유일한 조건인 하나님이 없는 (하나님을 거부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에게 '네가 살기 위해서는 이런 조건 이런 조건 이런 조건을 채워야 된다.' 고 말한다.
쉽게 얘기하면, '너의 훌륭한 학벌, 훌륭한 능력, 사회적 지위, 지능, 재력, 재산을 쌓아야 너는 너의 존재적 가치를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죽지 않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뒤집어 얘기하면 사기이다.

왜 사기인가?
그것이 (세상이 말하는 그런 조건, 그건 결국 헛됨, 무가치, 허망함, 곧 사망이다) 우리를 살게 하지 않으며 그것이 생명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
원래 생명의 시작인 하나님 만이 유일한 조건(조건이 아닌 조건?)이었는데, 세상은 그 (하나님이라는) 조건을 얘기하지 않고, 사망을 (헛됨 무가치함 허망함을 조건으로 내세우며) 우리에게 전가의 보도 같이 협박의 용도로 쓰면서 우리를 기만해 온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세상에 사실은 우리는, 우리의 범죄함으로 인해 아담 하와가 에덴 동산을 쫓겨난 후부터 그렇게 속아서, 세상에서 생명이 없는 세상임을 깨닫지 못하고 신음하고 사망해 죄의 노예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뀌게 되고 이제 드디어 뒤집어진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요한복음 1장에 1장 1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셔서,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오셔서 세상을 비추신 예수 그리스도, 그가 비추신 내용은;
'세상에 생명이 있지 않고 생명은 내 안에 있으며 모든 것의 존재적인, 그들이 살아가고 생명과 연관되는, 그들이 살 수 있는 조건은, 그들의 수고와 노력과 어떤 행위와 다른 조건의 충족이 있는 게 아니라 다 나에게 있다.' 하는 그 긴 시간 동안 왜곡되어 있던 사실을 다시 바로잡아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셔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이다.
'너의 법률을 지키는, 네가 어떤 율법이 요구하는 조건의 충족에 너의 구원이 달린 게 아니라 생명과 길과 진리는 나에게 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여기까지 기독교가 얘기하는 진리가 확장되어 왔다.

그러면 아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렇게 다 이루어 주시고 그냥 조건처럼 구원을 주시는데, 그럼 우리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내 마음대로 뭐 죄 지을 거 다 마음대로 죄 짓고 바보짓 할 수 있는거 바보짓 다하고,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건가?' 에 대한 질문에 그 성육신이, 원래 모든 것의 조건이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이 어떻게 답을 해야 하는지를 봐야 한다;
신자다운 삶이란, 믿음 생활을 잘하는 것이란, 우리에게 설명을, 이렇게 설명으로써 주어질 때는,
★마치 권면이나 명령이나 어떠한 우리가 해야 할 책임 임무와 같은 표현 방식으로 주어진다.
그래서 자칫 오해하면, 그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을 한다 .
어떤 의무냐 하면 구원을 선물로 받은 자들의 마땅한 보은으로서의 의무, 죄를 짓지 않고 신자로서 영광된 삶을 살고자 하는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그게 의무나 어떤 임무나 책임이기 전에 다시 한 번 우리가 여기서 바라봐야 할 것은, ★구원은 `하나님이란 조건(조건아닌 조건)`에 의해 우리에게 `그냥 먼저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 하나님이 유일한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 생명에 연결된 신자가 신자다운 삶을 산다는 것은 다르게 얘기하면 ■신자로서 그냥 사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갈 것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아들다운 아들이 되는 것은 많은 주위 어른들로부터 조언, 교훈, 훈육의 형태로 주어지지만, 내가 정말 친아들이라면 나는 내 삶에서 내 아버지의 모습, 성품, 됨됨이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어 있다. 내가 내 아버지의 내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내가 노력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숨을 쉬고 살아가면서 나에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거다. 내가 노력하고 힘들게 사는 부분에서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씩 하나씩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악인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자가 아니다.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자가 아니다. 그는 그가 아무리 노력을 한들 하나님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가 없다. 그가 베푸는, 그가 하는 선한 행위는 모든 선의 근원과 시작이 하나님이라고 가정 하에 생각해보면 사실은 얕은 모방에 불과하다. 어찌 보면 짝퉁에 가까울 것이다.
신자인 우리가 하는 선행은 하나님의 모습에 그대로 닮아 있는 거다.
그게 우리와 오늘 이사야 26장에 보는 구원받은 자들과 악인들의 차이이다. 우리가 봤을 때 똑같은 나쁜 놈인데,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베푸는 선행은, 원래 절대적으로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과의 닮은 그 모습을 그들이 발현하는 것이오, 그들이 못난 짓을 하고 악한 짓을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편들어 주시고 그들을 끝까지 구원하시고 그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그 아버지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다.
악인은 둘 다 망하는거다. 그들은 아버지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선을 행할 수도 없고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저지른 악화 범죄로 인해 멸망을 당할 운명밖에 없는 거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선인과 악인의 차이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내가 비록 아직 나에게 부족한 점이 많고 하나님의 모습 닮은 모습을 드러내는 데 많이 불충분하며 내가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 맞는지 우리 아버지의 딸이 맞는지 의심하고 걱정되는 순간이 당연히 많을 거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성경이 권면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면서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는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런 얘기이다;
★'네가 누구인지, 너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믿고 네 자신의 본 모습을 찾아 그 모습대로 행하며 살아라'이다. '하나님의 자녀의 본 모습으로, 하나님에 의해 생명에 연결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라'

★내가 그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임무나 의무나 책임의 관념이 아니오, 우리의 지극한 자연스러움이다.
그것이 기독교가 믿음을 요구하며 동시에 우리에게 하라고 권면하는 내용이다.

성육신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거셨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 모든 것을 거시므로 이제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는 하나님과 뗄려야 뗄 수 없는 하나가 되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성품을 가지시고 어떤 것을 좋아하시느냐는 얘기는 나와 동떨어진 어떤 절대적인 존재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란 거다.
■우리의 이야기이다. 우리의 본질이요 우리의 존재적 근원이요 우리도 모르게 오래전부터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우리의 가장 진실된 모습이다.

(따라서 우리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나의 어울리지 않는 억지스러운 모습이 되고, 내가 나와 전혀 다른 다른 사람이 되라는 게 아니다. ★그게 바로 나요,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하나님에게 묶으셨다. 거기서부터 우리의 모든 믿음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기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 혼자의 힘으로 고군분투하며 내 스스로가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의 방법을 만들려고 오늘도 그렇게 수고하고 고생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 구원에 결과로 인해 우리를 하나님과 닮은 자들로 다시 세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 어둠인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비추게 하신다.
나는 나의 생명을 근심하며 사는 오늘, 나도 모르게 주께서는 세상에 어렵고 불쌍하며 버려졌던 사람들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이어붙이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일에 우리를 동참시키고 계신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인해 우리는 이제 세상에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닮은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들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셔서 우리에게 힘 주심을 믿는다.
세상에서 말하는 조건은 나에게 아무것도 없지만 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을 믿는다.
그것이 나에게는 전부요, 그것으로 인해 나는 세상에 그 누구보다 귀한 존재임을 믿는다.
나의 믿음 없음을 주께서 늘 도와주시를 기도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