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성경공부_히브리서2_07]
nazunzaro
2021. 11. 3. 14:24
● 우리의 신분과 지위가 거기인데 문제는 거기있는 자답게 살지 못하는 거다. 신앙생활은 뭘 해결하는 문제가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되는 일이 생기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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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_히브리서2_07]
18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19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20 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브리 수신자들이 승리하지 않았는데, 고통 속에 있고 스스로 낙심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른 곳은 '너희가 가진 지위는, 너희가 가진 신분은 이렇게 굉장한 것이란다.'라고 말하고 있다.
천만 천사들이 모여서 환호하는,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세계를 영광으로 회복하시고 그 주인공 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복된 자리로 불러 환호케 하며 기뻐하며 찬양하게 하는
■※그 자리가 지금 우리의 신분이고 지위라고 말한다.
■우리는 잘 안 믿어진다.
우리가 천사를 좋아하고 아브라함이나 바울을 좋아하는 이유는 뭔가? 더이상 고생이 없어서다. 그러니까 의외로 우리는 우리의 현실 즉 현실을 직시하는 게 겁이 난다.
현실을 살자니 고통 뿐이고 믿음을 지키자니 너무 길고, 좋을 때 딱 죽었으면 좋겠는데 좋을 때가 거의 없고, 그리고 편안할 때는 이 생각이 안 나고. 이게 문제이다.
■※그러니까 여기를 뚫어야 되는거다. 히브리서가 이걸 뚫고 있다.
(-> 이 문제를 히브리서를 통해 신앙적으로 제대로 이해하여 대응해야 한다)
'지금 너희가 있는 곳이 이렇게 천만천사들이 환호하는,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의 창조세계를 영광스럽게 회복하고 완성하신 일을 '장자'들과 함께..'
'장자'란 남녀를 불문하고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말하고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라는 이름으로 장자라 그러는거다.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적당한 성경의 비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어느 비유가 맞을 것 같은가?
'탕자의 비유'이다. 그게 왜 여기에 맞는가?
탕자의 비유는 아시다시피 작은 아들이 자기 재산 달라해가지고 집나가서 허랑방탕하고 굶게되어 돌아올 수 밖에 없게된 얘기다.
그는 돌아올 때 본인도 자기가 한 게 뭔지를 알아서 '아버지, 저는 아버지 자식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품꾼의 하나로 보십시요. 일꾼, 하인으로 보십시오'
아버지가 펄쩍 뛴다. '무슨 소리냐? 얘들아, 목욕시키고 옷 입혀라, 신발 신켜라, 가락지 끼워라, 소 잡아라, 잔치하자' 이렇게 됐다.
잘 생각해보자.
■그가 나가서 허랑방탕하고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해서 절망했을 때에도 그는 아들이라는 거다.
우리는 여기를 놓친다.
우리가 선 것은 시온성이며 하늘의 예루살렘이며 천만천사가 환호하는 자리다.
■※신분과 지위가 거기인데 문제는 거기있는 자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다.
그 싸움이 그 영광과 지위를 명예롭게 살아내느냐, 슬슬 도망가고 못나게 구느냐의 신앙의 길림길이 있어야 되는데,
우리는 줄 곳 잘못하면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고, 잘하면 다시 천국으로 가고, 그래서 매일 지옥갔다가 천국갔다가 되는 듯이 생각을 해서, 한번 결정하면 그게 끝장이 되게 좀 해주시지, 뭘로 확인을 해서?, 다시는 죄를 안짓는 것으로 확인을 해서. 죄라고 얘기할 것 없다. 여기서는 못난 짓이다.
잘 생각해보자.
■※신앙생활은 내가 절망을 할 문제가 아니라부끄러워해야 되는 일이 생기는 거다.
'그렇게 하는 건 부끄럽다. 내 다시는 안한다.' 이렇게 되어야지 절망으로 가면 안된다.(-> 다른 어떤 세상적 가치로 가면 안된다)
우리는 곧 돌이키게 마련이다. 왜? 부끄러운 일이니까. '그렇게는 안 하겠다' 이리로 오라고 하는 얘기이다.
큰아들이 밭에서 일하다 돌아온다. '이게 웬 풍악소리냐?' '동생이 돌아와서 아버지가 기뻐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안 들어가려고 한다. 아버지가 와서, '얘야, 들어가서 함께 즐기자'
'아니, 이 재산을 다 탕진해버린 자식한테 무슨 잔치입니까? 저와 제 친구들한테는 염소새끼 한마리도 안 잡았습니다'
큰아들에게 아버지지가 뭐라고 하나? '얘야, 넌 늘 나와 항상 함께 있지 않냐? 내것이 다 네것 아니냐?'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가 틀리는 게 뭐라 했나?
그가 돌아온 것을 기뻐하지만, 돌아온 게 끝이 아니다. 작은아들은 돌아와서 이 큰아들 같이 살아야 된다. 그가 불만인 인생, 매일 일만하고 염소새끼도 하나 안 잡아 주고..
(그러면 큰 아들은) 그동안 뭘 먹었을까? 굶었단 뜻일까?
'이렇게 만족스럽게 영광되어 보이지 않는 인생을 살았는데 이게 뭡니까? 내게는 염소새끼도 한 번 안 주지 않았습니까?'가 뭐라고?
■※하나님의 동역자로, 유업을 이을 자로 사는 하나님의 훈련, 여기를 우리가 버텨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시내산과 시온산의 대비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두려움으로 나타나는 것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의 기쁨과 환희여야 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믿은 건지 말은 것인지에서 길을 잃는다.
■문제는 내가 내 지위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 그런 축복 속에서 위대하게 명예롭게 사느냐, 못나게 부끄럽게 사느냐에 서있으면 우리는 생각이 달라진다.
'더러운 말은 하지 마라' '그것은 '더러운 말을 하면 죄다'가 아니라, '더러운 말을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이다.
예수믿는 사람답게 굴어야 한다. 그걸 놓치면 그냥 우리는 그냥 망하는 거다.
운명이 망하는 게 아니라, 이 꾸중을 받는거다.
■거기가 현실을 살아내는데 있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중요한 기준점이다.
그 무슨 큰 일을 해서 보상을 받을 생각을 해서 한방에 어떻게 더이상 고민이 없어지는 이런 것이 아니라, 연기를 하듯이, 어느 드라마에 출연을 한 것같이, 내가 가야 하는 모든 길에서 주인공 노릇을 해야 되는, 그 긴 위대한 기회가 각각의 인생에 주어졌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마음껏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잘난 척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안 하고가 아니라 그때마다 그때마다 잘할 수 있다.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가 뭐라는 건가?
'악당이 악역을 하듯, 신자는 선한 역을 해라. 멋있게 굴어라.'라는 거다
그 더러운 말과 욕지거리와 저주는 하나도 명예가 없다. 아무리 해도 시원하지도 않고 아무리 해도 영광이 되지않는다. 그건 하면 손해이다. 그렇지 않은가?
멋있게 말하는 건 어렵다. 실력없을 때는 가만있는 게 최고이다. 가만히 있고, 나중에 실력이 쌓이면 멋진 말을 하게 되고, 하면 실력이 는다.
우리가 그 경우, 어려운 경우, 우리도 확 폭발하고 싶은 경우를 하나님이 걷게하는 이유는 우리가 크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력있는 사람이 되라고 마음껏 길을 열어주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