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역자설교메모
[박병석목사 / 창세기 1:26-31 / 2021.10.31]
nazunzaro
2021. 11. 1. 18:19
●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즉 우리는 다른 무엇과도 비교될수 없을 만큼 하나님과 긴밀히 깊이 직접 연관되어 있다. 우리 믿음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
[박병석목사 / 창세기 1:26-31 / 2021.10.31.]
창세기 1장 26장입니다. 창세기 1:26-31까지의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에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또 땅에 묻은 짐승과 하늘에 묻은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드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
(봉헌기도)
하나님, 저희가 하나님께 예물 드림은 하나님께서 부족한 것을 저희가 채우는 것이 아니요,
우리가 하나님과 깊게 연결되어 있고 관계를 맺고 있으며,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실력과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어떠한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짐을 믿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으니 우리의 믿음을 더 강건하고 굳건하게 지켜주시옵소서. 아멘
-----------------
설교에 앞서 오늘 예배에 참여하신 이 자리에 오신 모든 분들께 아, 깊은 감사의 인사를 먼저 전하고자 합니다. 지금 제 뒤에 계신, 오늘 대표 기도하신 이영환 집사님은 제가대학교 1학년 남포교회 청년1부 1학년 때 5학년 형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많은 분들이 제가 코를 제대로 닦고 다니지 않던 시절부터 저를 예뻐하셨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저의 주일학교 선생님 저의 교회 선배님들 이십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서서 여러분께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요 저에게 큰 복인지를 이 순간 전까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만 오늘 남권사님 찬양을 듣고 다시 깊이 깨달았습니다.
제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저는 알지 못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알려주시고 또 직접 저에게 내려주시는구나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가장 큰 복인 줄로 압니다.
---------------------
오늘 보신 창세기 1장 26절부터의 얘기는 가장 단순하게 얘기하면, 창조론을 믿는 기독교 신자들이 그러니까 과학자들이 얘기하는 진화론과 반대편에 서서 주장하는 내용으로 많이들 소개됩니다.
우리는 어떤 우연의, 일종의 진화의 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목적 없이 자연스럽게 생겨난, 그래서 혹독한 자연의 약육강식과 경쟁에서 살아남아서 오늘을 살고 있는 그런 존재로서 살아있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의 시작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고 사실 이 천하 이 천지만물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라는 얘기로 갑니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라는 얘기는 그런데 기독교만 갖고 있는 어떤 그런 독특함, 특별함은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신화나 많은 종교들이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얘기합니다.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모습이, 어떤 것이 기독교에서의 창조론이 다른 종교의 창조론과 구별되느냐 하면, 바로 오늘 보신 것처럼 26절, '우리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라는 부분입니다.
여러분께서 익숙하게 아시는 부분이니까 읽지 않고 제가 설명으로 대신하자면, 하나님은 다른 모든 것은 말씀으로 말로 창조를 하시고 인간은 손수 손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셨다고 적혀 있죠.
그러니까 형상대로 만드신 것만도 아니고, 손수 직접 만드셨다, 생기를 직접 불어넣으신 것까지 합쳐져서 인간의 창조가 완성이 됩니다.
다른 피조물과 그러니까 인간은 다르고 특별한데 그 특별함의 원인은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창조의 방법이 달랐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들어가는 의미가 특별하다는 얘기로부터 이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은 원래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과 이런 관계였다로 시작되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즉 우리는 그 다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하나님과 긴밀히 깊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제 창세기 1:26 이하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육하여 번창하고 이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고 모든 것을 다스려라" 하는 얘기가 나오죠.
여기서 이제 이 세 주체의 관계에 대한 설명, 그 관계가 원래는 창조 때는 어떻게 정립이 되었었나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들이 있는데 우리는 형상대로 지음 받아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하나님이 지으신 이 천하 만물을 다스리는 역할이었다, 우리 셋은그런 관계였다가 그러니까 창세기 1장 26절 이하부터의 내용입니다.
창세기는 그러니까 창세기의 기록, 창세기가 작성되었을 때 상황을 돌이켜보면 천하만물이 창조되는 순간에 실시간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죠.
창세기의 저자는모세입니다. 창세기부터 여호수아 이전까지 신명기까지 이 5권을 가리켜 모세오경이라고 하는데 이 5권의 성경의 저자는 모세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이 창세기의 1장 내용을 적을 당시에는 이미 창조 후부터 많은 시간이 지나고 많은 일이 있었던, 아주 시간적으로는 큰 차이를 보이는 그런 시점이었죠.
그러니까 창세기의 내용은 시간 순서상으로도 가장 먼저 있었다, 우리가 보았을 때 가장 먼저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근원, 우리의 믿음, 우리가 신자라는 이름으로, 구약으로 따지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모든 이유와 목적과 의도의 시작점, 더 나아가 믿음으로 이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그 믿음의 시작점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으셨다가 이 모든 것의 출발이라는 얘기죠.
성경은, 성경 전체의 내용은 우리 그 개혁주의, 개신교쪽 교리에 따르면 성경 전체가 가르키는 것은 하나라고 합니다. 성경 전체가 가르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많이 들으셨다시피 우리의 어떤 구원과 구속사와 모든 성경에 적혀 있는 율법과 그 한 자도 빠지지 않고 완성된 것, 한 글자도 빠지지 않고 완성시킨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들으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완성, 그 결론 부분에 있는 것이겠죠.
이제 우리의 믿음의 내용을 쫙 이렇게 펼쳐보면 시작에 인간, 그 하나님의 창조, 특히 창조의 클라이막스인 인간의 창조가 있고 그 모든 것의 완성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둘은 처음에 의도하여 지은 것과 그 의도가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지금 여러분께서 보신 인간이 이 땅에 생육하여 번성하고 이 땅을 다스린다는 것은, 우리는 그동안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우리가 세상 것들을 마음대로 우리 마음대로 죽이고 살리고 마음대로 사용하고 버리고 불태워 버려도 무방하다, 우리는 그런 특권이 있다,라고도 오해해 왔는데, ■과연 그런 해석이 맞는 것인지를 살펴볼 수가 있는 중요한 단서를 우리가 알게 된 겁니다.
뭐냐하면 하나님은 불변하신 분이니 처음과 끝이 같다면 창조 때의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일맥상통하여야 됩니다. 그렇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하신, 알려주신 우리에 관련된 내용이, 창조 때 하나님께서 지금 창세기적인 그 내용과 같아야지 말이 되는 거죠. 그래야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거고 우리가 그거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는 거죠.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와서 십자가 사역을 통하여, 창조 때 우리가 지음받은 어떤 그 이유, 목적, 원리는 어떤 것이었나를 어떻게 설명하셨을까요? 그 설명을 살펴보면 《창조 때의 우리를 창조한 의도, 그 목적》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으로 가봅시다. 마태복음 6:25;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그 길을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길에 백합화가 어떻게 잘했는가
생각하여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에 묻은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플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내일 염려할 것이오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처음 예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어떻게 기도를 해야 되느냐라고 알려주실 때, '먹을 것을 위하여 입을 것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런 것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주신다.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도 기르시고 들판에 핀 꽃도 내일 불에 던져질 수 있는 꽃들도 오늘 기르시는데 하물며 너희를 그냥두시고 너희를 돌보지 않으시게 하겠느냐. 이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책망을 하시죠.
이 구절을 읽으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너무 자연과학이나 생물학을 모르시는 게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새들이 가만히 앉아 있으면 모이를 먹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먹이를 먹나요? 우리가 다 아는 유명한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일찍 일어난 새가...' 예, 다 아시죠? 새가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위협 속에서 사투를 벌이는지는 조금만 tv를 통하거나 다른 어떤 매체를 통해 다큐멘터리를 보신 분이라면 아실 겁니다. 전문가가 아니라도 아실 겁니다.
꽃들은 그냥 저절로 자라나요? 꽃들이 수정을 하기 위해 그러니까 암술과 수술이 만나기 위해 얼마나 화려한 색채로 자신을 치장해야 되는지 아십니까? 그래야 나비가 날아들고 벌이 날아들어서 이들로 인해 종족이 보존이 되고 자기의 자녀들이 번식이 되니까, 꽃들 사이에서도 그 경쟁이 치열합니다.
무슨 말도 안 되게 다 이렇게 손 놓고 있으면 하나님이 꽃들도 다 알아서 물 주시고 새들도 알아서 다 모이를 주시는 것처럼 설명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죠? 아닙니까?
제가 본 다큐멘터리 내용을 바탕으로 이것을 이해하자면, 어찌 보면 우리는 더 고민하고 더 걱정하고 하나님께 더 구해야죠.
동물들도 새들도 꽃들도 그렇게 치열하게 사는데, 우리는 지능을 가지고 만물의 영장이라는 가장 똑똑한 종족끼리 경쟁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속칭 얼마나 더 빡세고 치열하게 살아야 됩니까? 예수님께서 현대사회를 살아보지 못하셔서 과거에는 그냥 농사만 지어도 먹고 살 수 있는 시대에 살아가셔서 이런 속편한 소리를 하신 거 아닐까요?
우리를 창조하신, 창세기 1장이었던 창조 때의 얘기를 되돌아봅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왜? 왜, 어쩌시려고? 무엇 때문에? 여기서부터 모든 얘기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왜 만드셨을까요? 심판하시려고? 죽이시려고? 앞에서 '나는 하나님이고 너는 하차는 피조물이야' 하고 잘난 척하시려고?
창세기 1장 내용을 그냥 곧이 곧대로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존재는, 즉 우리가 생명을 갖고 있음은 그냥 그게 시작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가지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는 그 어떤 조건도 그 어떤 우리의 능력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사는 건 기본이고 입고 먹고 사는 건 기본이고, 우리에게 주어졌던 말투가 약간 그래서 무슨 강요나 명령이나 우리에게 임무 같지만, ■사실은 우리에게 굉장히 영화롭고 명예로운 우리의 가치, 우리의 지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그 표현들,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땅을 가득 채워라'
■무슨 말입니까?
'너희는 죽지 않는다. 너희는 너희가 수고로이 일하고 애써 먹고 살고 걱정 안 해도 된다. 그거는 그냥 너희가 창조되었을 때 내가 너희를 지었을 때의 기본이고 너희는 다스려야 된다.'
■어떻게 다스려야 된다?
그 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하시는 거죠. "먼저 너희는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너희가 믿음 없는 눈으로 보았을 때 곤충이 아둥바둥 살아가고 새들이 열심히 일해서 자기들이 모이를 얻고 자기를 위협하는 동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 같지만,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이듯이 그들을 살게 하는 것, 그들이 지금 날개짓을 하고 꽃을 피우고 살아가는 것은 ■자연의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오늘도 이 모든 것을 열심히 경영하시고 다스리는 하나님의 섭리다.
■그의 나라와 의,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통치 방식이 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힘인 걸 모르겠느냐?
■그 섭리의 기본 중의 기본은 너희다. 너희가 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것이고 너희가 나의 보호와 축복 아래 먹고 사는 것, 기본 중의 기본, 좋은 옷을 입고 나의 따뜻한 사랑 안에 보호받는 것, 그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죠.
■그래서 무엇을 우리는 구해야 된다고요? 그의 나라와 그 섭리 그의 통치 방식을 원해야 된다고요.
그게 무슨 얘기냐? 하나님은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걸 알려주십니다. 어떤 왕의 통치 방식, 그의 섭리를 알려면 그의 성품을 알아야죠.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 것이 그의 통치 방식의 그대로 녹아져 들어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성경 전체가 말하는 하나님은, 성경 전체가 말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하나로 요약하자면,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사랑이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애가 풍부하시고 뜻을 돌이키고 재난을 내리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우리는 그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의 본질 안에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요, 우리가 다스리는 세상의 그 통치의 원칙, 그 통치의 방법은 당연히 너무나도 본능적으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거겠죠.
■우리가 생육하여 번성해서 세상을 가득 채운다는 것은 따라서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이, 사랑이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세상을 채우는 것이 되겠죠.
우리가 세상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그들을 도륙하고 어 불태우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애로 그들을 죽음 가운데서 구원하고 하나님의 의로움에 어떻게든 어떻게든 연결지어서 그들이 망하지 않게, 죽임을 당하지 않게오늘 하루 들에 핀 꽃처럼 공중에 나는 새들이 그러한 것처럼살아가게 하는 것, ■그 역할을 우리가 하도록 지음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니느웨가 구원을 받는 것을 보고 분노하는 요나에게 그렇게 얘기하셨죠. '야, 저기는 사람이 몇 명이고 가축이 몇 마리냐? 네가 그 담쟁이 잎을 아꼈는 것만큼 나는 저들을 얼마나 아끼겠느냐?'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설명을 듣고 이제 다시 창세기 1장을 보니, ■우리의 믿음의 시작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새들처럼 꽃들처럼 나는 지금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이 순간을 살아가기 위해 나를 위협하는 원수들을 무찌르고 파괴하고 그들을 멸망시키며 이 세상에서 나의 목숨을 연명할 것들 양식들 재물들 이런 거를 갖다가 내 창고에 쌓아놔야 내가 오늘 살아있고 내가 내일 죽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긴다고 그렇게 생각해 왔는데,
■그게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죠. 단순히 그럴 필요가 없고 그걸로 그러면 나는 일 안 해도 되고 아무것도 안 해도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구원하시니, 저는 손 놓고 가만히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앉아만 있으면 됩니까?'가 아니라 세상을 가득 채우는 그러한 존재가 되어야 된다는 말이죠.
여러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여러분이 점점 자라나시고 성장하시고 믿음을 키워가시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도 가르치시고 여러분의 제자 후학들도 가르치시고 아, 세상 사람들도 전도로서 구원하셔서 이제 하나님의 형상을 밝게 비치는 빛과 소금이 세상에 충만해지도록,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 곳곳까지 가득하도록, 그리하여 모든 것이 사망의 노예에서 자유를 받아 원래 창조 때에 하나님께서 창조되신 그 의도대로돌아오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신자들의 신자된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우리의 가치이며 또한 우리의 목표입니다.
세상은 아까 제가 설명드린 것처럼 들에 핀 꽃이나 공중에 나는 새가 하나님의 섭리로 살아간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하나님과 인간을 갈라 놓습니다. 신본주의냐, 인본주의냐로 나누죠. 그러나 오늘 우리가 성경을 통해 봤듯이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신본주의와 인본주의가 나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그 어떤 뭐라 할까, 양 대치점에 서서 하나님이 높아지시기 위해는 우리가 낮아져야 되고, 우리가 대접받고 우리의 가치가 인정받으면 하나님의 권위가 손상되고 하나님의 필요성이 없어지는 그런 말도 안되는 유치한 관계가 아니라는 거죠.
■하나님의 성품이 사랑이시고 인자하시고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기 좋아하는 성품인 것이 강조되고 드러나는 자리에 신자들이 꼭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이 혼자 이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려고 인간을 창조하신 게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자리에 우리도 같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신자로서 여러분의 본분과 여러분의 창조의 의도를 드러내는 여러분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그 자리에 여러분이 혼자 도박하는 것처럼 영광을 독식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언제나 이 메시지가 같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그분의 형상이며 그분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어디나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자리에도 우리는 동행하며, 예수 그리스도에서께서 그랬듯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난받는 자리에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열심으로, 일하심으로 하나님이 일을 하는 자들이 고통받는 자리에도 우리는 함께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시작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뗄려야 뗄 수 없는 하나된 관계로 시작된 것, 그것이 우리의 신자된 신자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설교 시간을 통하여 그 신자 된 우리의 믿음의 시작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완성해 가셨고 또 어떻게 키워가셨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복과 영광과 명예를 늘 걷어차 왔으나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역사라는 그 시간을 통하여 우리를 설득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그 영광된 자리에 우리를 다시 앉히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가장 큰 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내 안에서 주께서 살고 계시며 그로 인해 나에게 창조 때 허락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고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셨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며, 세상의 신자로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비록 세상은 우리를 무시하고 무지한 자로 여기며 우리를 망해가는 자라고 비난하지만,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믿음 없는 그런 모습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존재로 주께서 만드셨습니다.
우리를 살아가는 것이 오직 주를 향한 우리의 믿음이 될 수 있도록 주께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
===================
[박병석목사 / 창세기 1:26-31 / 2021.10.31.]
창세기 1장 26장입니다. 창세기 1:26-31까지의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에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또 땅에 묻은 짐승과 하늘에 묻은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드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
(봉헌기도)
하나님, 저희가 하나님께 예물 드림은 하나님께서 부족한 것을 저희가 채우는 것이 아니요,
우리가 하나님과 깊게 연결되어 있고 관계를 맺고 있으며,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실력과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어떠한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짐을 믿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으니 우리의 믿음을 더 강건하고 굳건하게 지켜주시옵소서. 아멘
-----------------
설교에 앞서 오늘 예배에 참여하신 이 자리에 오신 모든 분들께 아, 깊은 감사의 인사를 먼저 전하고자 합니다. 지금 제 뒤에 계신, 오늘 대표 기도하신 이영환 집사님은 제가대학교 1학년 남포교회 청년1부 1학년 때 5학년 형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많은 분들이 제가 코를 제대로 닦고 다니지 않던 시절부터 저를 예뻐하셨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저의 주일학교 선생님 저의 교회 선배님들 이십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서서 여러분께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요 저에게 큰 복인지를 이 순간 전까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만 오늘 남권사님 찬양을 듣고 다시 깊이 깨달았습니다.
제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저는 알지 못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알려주시고 또 직접 저에게 내려주시는구나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가장 큰 복인 줄로 압니다.
---------------------
오늘 보신 창세기 1장 26절부터의 얘기는 가장 단순하게 얘기하면, 창조론을 믿는 기독교 신자들이 그러니까 과학자들이 얘기하는 진화론과 반대편에 서서 주장하는 내용으로 많이들 소개됩니다.
우리는 어떤 우연의, 일종의 진화의 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목적 없이 자연스럽게 생겨난, 그래서 혹독한 자연의 약육강식과 경쟁에서 살아남아서 오늘을 살고 있는 그런 존재로서 살아있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의 시작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고 사실 이 천하 이 천지만물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라는 얘기로 갑니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라는 얘기는 그런데 기독교만 갖고 있는 어떤 그런 독특함, 특별함은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신화나 많은 종교들이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얘기합니다.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모습이, 어떤 것이 기독교에서의 창조론이 다른 종교의 창조론과 구별되느냐 하면, 바로 오늘 보신 것처럼 26절, '우리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라는 부분입니다.
여러분께서 익숙하게 아시는 부분이니까 읽지 않고 제가 설명으로 대신하자면, 하나님은 다른 모든 것은 말씀으로 말로 창조를 하시고 인간은 손수 손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셨다고 적혀 있죠.
그러니까 형상대로 만드신 것만도 아니고, 손수 직접 만드셨다, 생기를 직접 불어넣으신 것까지 합쳐져서 인간의 창조가 완성이 됩니다.
다른 피조물과 그러니까 인간은 다르고 특별한데 그 특별함의 원인은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창조의 방법이 달랐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들어가는 의미가 특별하다는 얘기로부터 이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은 원래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과 이런 관계였다로 시작되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즉 우리는 그 다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하나님과 긴밀히 깊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제 창세기 1:26 이하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육하여 번창하고 이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고 모든 것을 다스려라" 하는 얘기가 나오죠.
여기서 이제 이 세 주체의 관계에 대한 설명, 그 관계가 원래는 창조 때는 어떻게 정립이 되었었나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들이 있는데 우리는 형상대로 지음 받아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하나님이 지으신 이 천하 만물을 다스리는 역할이었다, 우리 셋은그런 관계였다가 그러니까 창세기 1장 26절 이하부터의 내용입니다.
창세기는 그러니까 창세기의 기록, 창세기가 작성되었을 때 상황을 돌이켜보면 천하만물이 창조되는 순간에 실시간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죠.
창세기의 저자는모세입니다. 창세기부터 여호수아 이전까지 신명기까지 이 5권을 가리켜 모세오경이라고 하는데 이 5권의 성경의 저자는 모세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이 창세기의 1장 내용을 적을 당시에는 이미 창조 후부터 많은 시간이 지나고 많은 일이 있었던, 아주 시간적으로는 큰 차이를 보이는 그런 시점이었죠.
그러니까 창세기의 내용은 시간 순서상으로도 가장 먼저 있었다, 우리가 보았을 때 가장 먼저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근원, 우리의 믿음, 우리가 신자라는 이름으로, 구약으로 따지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모든 이유와 목적과 의도의 시작점, 더 나아가 믿음으로 이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그 믿음의 시작점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으셨다가 이 모든 것의 출발이라는 얘기죠.
성경은, 성경 전체의 내용은 우리 그 개혁주의, 개신교쪽 교리에 따르면 성경 전체가 가르키는 것은 하나라고 합니다. 성경 전체가 가르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많이 들으셨다시피 우리의 어떤 구원과 구속사와 모든 성경에 적혀 있는 율법과 그 한 자도 빠지지 않고 완성된 것, 한 글자도 빠지지 않고 완성시킨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들으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완성, 그 결론 부분에 있는 것이겠죠.
이제 우리의 믿음의 내용을 쫙 이렇게 펼쳐보면 시작에 인간, 그 하나님의 창조, 특히 창조의 클라이막스인 인간의 창조가 있고 그 모든 것의 완성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둘은 처음에 의도하여 지은 것과 그 의도가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지금 여러분께서 보신 인간이 이 땅에 생육하여 번성하고 이 땅을 다스린다는 것은, 우리는 그동안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우리가 세상 것들을 마음대로 우리 마음대로 죽이고 살리고 마음대로 사용하고 버리고 불태워 버려도 무방하다, 우리는 그런 특권이 있다,라고도 오해해 왔는데, ■과연 그런 해석이 맞는 것인지를 살펴볼 수가 있는 중요한 단서를 우리가 알게 된 겁니다.
뭐냐하면 하나님은 불변하신 분이니 처음과 끝이 같다면 창조 때의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일맥상통하여야 됩니다. 그렇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하신, 알려주신 우리에 관련된 내용이, 창조 때 하나님께서 지금 창세기적인 그 내용과 같아야지 말이 되는 거죠. 그래야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거고 우리가 그거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는 거죠.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와서 십자가 사역을 통하여, 창조 때 우리가 지음받은 어떤 그 이유, 목적, 원리는 어떤 것이었나를 어떻게 설명하셨을까요? 그 설명을 살펴보면 《창조 때의 우리를 창조한 의도, 그 목적》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으로 가봅시다. 마태복음 6:25;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그 길을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길에 백합화가 어떻게 잘했는가
생각하여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에 묻은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플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내일 염려할 것이오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처음 예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어떻게 기도를 해야 되느냐라고 알려주실 때, '먹을 것을 위하여 입을 것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런 것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주신다.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도 기르시고 들판에 핀 꽃도 내일 불에 던져질 수 있는 꽃들도 오늘 기르시는데 하물며 너희를 그냥두시고 너희를 돌보지 않으시게 하겠느냐. 이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책망을 하시죠.
이 구절을 읽으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너무 자연과학이나 생물학을 모르시는 게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새들이 가만히 앉아 있으면 모이를 먹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먹이를 먹나요? 우리가 다 아는 유명한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일찍 일어난 새가...' 예, 다 아시죠? 새가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위협 속에서 사투를 벌이는지는 조금만 tv를 통하거나 다른 어떤 매체를 통해 다큐멘터리를 보신 분이라면 아실 겁니다. 전문가가 아니라도 아실 겁니다.
꽃들은 그냥 저절로 자라나요? 꽃들이 수정을 하기 위해 그러니까 암술과 수술이 만나기 위해 얼마나 화려한 색채로 자신을 치장해야 되는지 아십니까? 그래야 나비가 날아들고 벌이 날아들어서 이들로 인해 종족이 보존이 되고 자기의 자녀들이 번식이 되니까, 꽃들 사이에서도 그 경쟁이 치열합니다.
무슨 말도 안 되게 다 이렇게 손 놓고 있으면 하나님이 꽃들도 다 알아서 물 주시고 새들도 알아서 다 모이를 주시는 것처럼 설명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죠? 아닙니까?
제가 본 다큐멘터리 내용을 바탕으로 이것을 이해하자면, 어찌 보면 우리는 더 고민하고 더 걱정하고 하나님께 더 구해야죠.
동물들도 새들도 꽃들도 그렇게 치열하게 사는데, 우리는 지능을 가지고 만물의 영장이라는 가장 똑똑한 종족끼리 경쟁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속칭 얼마나 더 빡세고 치열하게 살아야 됩니까? 예수님께서 현대사회를 살아보지 못하셔서 과거에는 그냥 농사만 지어도 먹고 살 수 있는 시대에 살아가셔서 이런 속편한 소리를 하신 거 아닐까요?
우리를 창조하신, 창세기 1장이었던 창조 때의 얘기를 되돌아봅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왜? 왜, 어쩌시려고? 무엇 때문에? 여기서부터 모든 얘기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왜 만드셨을까요? 심판하시려고? 죽이시려고? 앞에서 '나는 하나님이고 너는 하차는 피조물이야' 하고 잘난 척하시려고?
창세기 1장 내용을 그냥 곧이 곧대로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존재는, 즉 우리가 생명을 갖고 있음은 그냥 그게 시작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가지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는 그 어떤 조건도 그 어떤 우리의 능력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사는 건 기본이고 입고 먹고 사는 건 기본이고, 우리에게 주어졌던 말투가 약간 그래서 무슨 강요나 명령이나 우리에게 임무 같지만, ■사실은 우리에게 굉장히 영화롭고 명예로운 우리의 가치, 우리의 지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그 표현들,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땅을 가득 채워라'
■무슨 말입니까?
'너희는 죽지 않는다. 너희는 너희가 수고로이 일하고 애써 먹고 살고 걱정 안 해도 된다. 그거는 그냥 너희가 창조되었을 때 내가 너희를 지었을 때의 기본이고 너희는 다스려야 된다.'
■어떻게 다스려야 된다?
그 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하시는 거죠. "먼저 너희는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너희가 믿음 없는 눈으로 보았을 때 곤충이 아둥바둥 살아가고 새들이 열심히 일해서 자기들이 모이를 얻고 자기를 위협하는 동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 같지만,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이듯이 그들을 살게 하는 것, 그들이 지금 날개짓을 하고 꽃을 피우고 살아가는 것은 ■자연의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오늘도 이 모든 것을 열심히 경영하시고 다스리는 하나님의 섭리다.
■그의 나라와 의,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통치 방식이 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힘인 걸 모르겠느냐?
■그 섭리의 기본 중의 기본은 너희다. 너희가 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것이고 너희가 나의 보호와 축복 아래 먹고 사는 것, 기본 중의 기본, 좋은 옷을 입고 나의 따뜻한 사랑 안에 보호받는 것, 그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죠.
■그래서 무엇을 우리는 구해야 된다고요? 그의 나라와 그 섭리 그의 통치 방식을 원해야 된다고요.
그게 무슨 얘기냐? 하나님은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걸 알려주십니다. 어떤 왕의 통치 방식, 그의 섭리를 알려면 그의 성품을 알아야죠.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 것이 그의 통치 방식의 그대로 녹아져 들어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성경 전체가 말하는 하나님은, 성경 전체가 말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하나로 요약하자면,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사랑이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애가 풍부하시고 뜻을 돌이키고 재난을 내리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우리는 그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의 본질 안에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요, 우리가 다스리는 세상의 그 통치의 원칙, 그 통치의 방법은 당연히 너무나도 본능적으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거겠죠.
■우리가 생육하여 번성해서 세상을 가득 채운다는 것은 따라서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이, 사랑이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세상을 채우는 것이 되겠죠.
우리가 세상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그들을 도륙하고 어 불태우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애로 그들을 죽음 가운데서 구원하고 하나님의 의로움에 어떻게든 어떻게든 연결지어서 그들이 망하지 않게, 죽임을 당하지 않게오늘 하루 들에 핀 꽃처럼 공중에 나는 새들이 그러한 것처럼살아가게 하는 것, ■그 역할을 우리가 하도록 지음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니느웨가 구원을 받는 것을 보고 분노하는 요나에게 그렇게 얘기하셨죠. '야, 저기는 사람이 몇 명이고 가축이 몇 마리냐? 네가 그 담쟁이 잎을 아꼈는 것만큼 나는 저들을 얼마나 아끼겠느냐?'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설명을 듣고 이제 다시 창세기 1장을 보니, ■우리의 믿음의 시작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새들처럼 꽃들처럼 나는 지금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이 순간을 살아가기 위해 나를 위협하는 원수들을 무찌르고 파괴하고 그들을 멸망시키며 이 세상에서 나의 목숨을 연명할 것들 양식들 재물들 이런 거를 갖다가 내 창고에 쌓아놔야 내가 오늘 살아있고 내가 내일 죽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긴다고 그렇게 생각해 왔는데,
■그게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죠. 단순히 그럴 필요가 없고 그걸로 그러면 나는 일 안 해도 되고 아무것도 안 해도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구원하시니, 저는 손 놓고 가만히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앉아만 있으면 됩니까?'가 아니라 세상을 가득 채우는 그러한 존재가 되어야 된다는 말이죠.
여러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여러분이 점점 자라나시고 성장하시고 믿음을 키워가시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도 가르치시고 여러분의 제자 후학들도 가르치시고 아, 세상 사람들도 전도로서 구원하셔서 이제 하나님의 형상을 밝게 비치는 빛과 소금이 세상에 충만해지도록,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 곳곳까지 가득하도록, 그리하여 모든 것이 사망의 노예에서 자유를 받아 원래 창조 때에 하나님께서 창조되신 그 의도대로돌아오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신자들의 신자된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우리의 가치이며 또한 우리의 목표입니다.
세상은 아까 제가 설명드린 것처럼 들에 핀 꽃이나 공중에 나는 새가 하나님의 섭리로 살아간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하나님과 인간을 갈라 놓습니다. 신본주의냐, 인본주의냐로 나누죠. 그러나 오늘 우리가 성경을 통해 봤듯이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신본주의와 인본주의가 나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그 어떤 뭐라 할까, 양 대치점에 서서 하나님이 높아지시기 위해는 우리가 낮아져야 되고, 우리가 대접받고 우리의 가치가 인정받으면 하나님의 권위가 손상되고 하나님의 필요성이 없어지는 그런 말도 안되는 유치한 관계가 아니라는 거죠.
■하나님의 성품이 사랑이시고 인자하시고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기 좋아하는 성품인 것이 강조되고 드러나는 자리에 신자들이 꼭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이 혼자 이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려고 인간을 창조하신 게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자리에 우리도 같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신자로서 여러분의 본분과 여러분의 창조의 의도를 드러내는 여러분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그 자리에 여러분이 혼자 도박하는 것처럼 영광을 독식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언제나 이 메시지가 같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그분의 형상이며 그분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어디나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자리에도 우리는 동행하며, 예수 그리스도에서께서 그랬듯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난받는 자리에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열심으로, 일하심으로 하나님이 일을 하는 자들이 고통받는 자리에도 우리는 함께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시작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뗄려야 뗄 수 없는 하나된 관계로 시작된 것, 그것이 우리의 신자된 신자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설교 시간을 통하여 그 신자 된 우리의 믿음의 시작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완성해 가셨고 또 어떻게 키워가셨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복과 영광과 명예를 늘 걷어차 왔으나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역사라는 그 시간을 통하여 우리를 설득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그 영광된 자리에 우리를 다시 앉히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가장 큰 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내 안에서 주께서 살고 계시며 그로 인해 나에게 창조 때 허락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고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셨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며, 세상의 신자로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비록 세상은 우리를 무시하고 무지한 자로 여기며 우리를 망해가는 자라고 비난하지만,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믿음 없는 그런 모습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존재로 주께서 만드셨습니다.
우리를 살아가는 것이 오직 주를 향한 우리의 믿음이 될 수 있도록 주께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