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박영선목사 / 예레미야(30) / 2021.10.27]
nazunzaro
2021. 10. 30. 09:40
● 성경이 말하는 악한 존재 세력의 심판과 멸망은 그것이 극복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거듭나야 되는데 그것은 우리 인생 전체에 시간에 걸쳐서 우리를 만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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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_30 / 2021.10.27]
예레미아 51:33~40 말씀까지 보겠다;
"3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딸 바벨론은 때가 이른 타작 마당과 같은지라 멀지 않아 추수 때가 이르리라 하시도다
34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35 내가 받은 폭행과 내 육체에 대한 학대가 바벨론에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시온 주민이 말할 것이요 내 피 흘린 죄가 갈대아 주민에게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예루살렘이 말하리라
3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네 송사를 듣고 너를 위하여 보복하여 그의 바다를 말리며 그의 샘을 말리리니
37 바벨론이 돌무더기가 되어서 승냥이의 거처와 혐오의 대상과 탄식거리가 되고 주민이 없으리라
38 그들이 다 젊은 사자 같이 소리지르며 새끼 사자 같이 으르렁거리며
39 열정이 일어날 때에 내가 연회를 베풀고 그들이 취하여 기뻐하다가 영원히 잠들어 깨지 못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0 내가 그들을 끌어내려서 어린 양과 숫양과 숫염소가 도살장으로 가는 것 같게 하리라" (예레미야 51:33-40)
예레미아 선지서도 이제 끝을 따라왔다. 바벨론의 멸망이 예언되고 있다.
예레미아가 선지자 노릇할 때는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아 시대가 예언활동의 절정기였으니까, 사실은 바벨론의 멸망을 얘기하는 거는 그 시대에 매우 앞선 얘기이다.
더더욱 예레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남 유다에 대해서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권한 선지자이다.
너희 범죄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너희를 바벨론에 포로로 놓아주는 것이니까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순종하여 항복하고 가서 피난살이를 해라 했던 그 선지자가 마지막에 와서는 이 예언을 또 선포하게 된다.
바벨론은 결국 심판을 받고 멸망당하고 모든 사람들 앞에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을 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현실적 차원에서 보자면 예레미아의 선지자 활동은 그 당시 시간상 멸망과 애통과 경악 속에 있는 유다 사람들이 잡혀가라고 하면서, '그 너희를 잡아간 나라도 심판할 것이다' 하는 것이 시간적으로 긴 시간 후에 일어날 일이 지금 예언되고 있으니까, 이 말을 믿기도 힘들고 안 따를 수도 없고 매우 어려움 속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종말론은 기독교 신앙에서는 굉장히 익숙한 내용이라서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거기 바벨론의 멸망이 특별히 계시록 18장에 아주 적나라하게 '바벨론은 화가 있으리라. 바벨론은 멸망을 당할 것이라. 바벨론은 큰 산이 넘어짐 같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궁극적 최종적 심판을 예고하는 데에서도 바벨론이라는 이름이 쓰인다.
그러니까 바벨론의 멸망은 이 유다 백성들이 겪었던 기원전 580년대 이야기를 넘어서
인류 전체에 하나님이 작정하고 계시는 역사의 결론에서 다시 한 번 그 이름이 상징하는,
대적들의 멸망을 예언하고 약속하는 것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종말론은 우리가 성경의 종말론이 가지는 뜻을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매우 피상적으로 자기 좋게 해석하는 일이 많은데,
그것은 하나님을 반대하고 우리를 괴롭히던 악이 보복을 받는다, 악한 세력이 꺾이고 우리가 승리를 얻는다 하는 그런 간단한 내용이 말하자면,
■우리의 승리가 악을 꺾고 적을 무질러서 승리가 되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의도하는 승리가 아니다.
■성경의 심판은, 악을 꺾고 악을 파멸하고 악을 심판의 자리에 형벌의 자리에 보내고 하는 것들은 수사학적 표현이고, 《성경이 말하는 악한 존재와 세력의 심판과 멸망이라는 것은, 그것이 극복되는 것이다.》
《그것이 극복된다》는 것은 우리 예레미아 31장에 가면, 우리 유명했던 새 언약에 관한 약속이 예레미아 선지자의 예언 활동 속에 주어지는 데, 중요한 약속이니까 제가 읽어보겠다. 예레미아 31: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새 언약은 시내산 언약과 다르다는 거다. 출애굽 때의 약속과 다르다는 거다. 시내산 언약, 출애굽 때 약속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인데, 조건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새 언약은 율법을 지키는 그런 조건적인 것이 아니고, 마음에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담아서 그때에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그 모든 사람들이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백성 된 것을 감사할 것이라,라고 말한다.
여기에 순서상 말하자면 출애굽 때에 구원이 가졌던 내용과 바벨론 포로로 인하여 생겨난 어떤 더 깊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비가 나오는데,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것으로 이스라엘이나 유다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을 지나서야 예수가 오신다
예수가 오셔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우리 영혼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이제 만드시는, 그러니까 우리가 조건적으로 가지는 약속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다 이루어진 약속들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첫 약속하고 다르다는 거다.
첫 번째 약속은 하나님의 귀한 율법을 조건으로 줬지만 백성들이 따르지 못했다. 그것은 다만 잘못하면 벌을 받는 식의 조건이 아니었고,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어야 되는 복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하자면 선과 자비와 긍휼의 길을 걸어야 한다,라는 것이 율법이었는데, 그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성경의 역사이고 인류의 역사이다.
그러니까 《예수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은혜 안에 그의 보혈 안에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내시는 것》 같이, 이 창조세계의 역사가 인간들의 욕심과 갈등과 폭력 속에서 혼란과 실패를 거듭하고 상처뿐인 역사가 끝에 가서 심판을 받을 때는 그것, 폭력, 거짓, 사망을 넘어선 자리, 그것이 극복된 최종적인 종말이 주어진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종말이 공포스럽지 않은가? 그것은 마치 대항하는 적을 물리쳐야 되는 큰 힘으로 큰 싸움에 걸쳐서 얻어지는 것 같이 생각이 드는데 《그런 폭력적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폭력으로 밖에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세상의 원리들, 거짓말밖에 할 수 없고 보복밖에 할 수 없는,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누구를 죽여야 하는, 권력이 폭력일 수밖에 없는 세상에,
■하나님께서 종국적으로 《이 폭력의 세상에 은혜와 사랑의 승리를 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예레미아나 에스겔이나 다니엘이나 계시록이나 그 종말론의 핵심 되는 것이다.
이 예레미아 31장 31절 이하의 새 언약의 백미는 34절 보면;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이것은 말하자면 바벨론 포로를 겪음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다.
바벨론 포로가 될 때는, 생각해 보라, 이 순서를. 출애굽은 굉장한 사건이었다. 열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바위에서 솟는 샘을 마시며 걸어 나온 자유를 얻은 하나님의 구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실패한다. 잘 알지 않는가? 그 후에 사사기를 걷는다. 사사기의 핵심은 그들에게 자유가 주어졌으나 혼란, 방탕밖에는 무슨 재주가 없었다, 더 이상의 어떤 실력이 없었다,가 사사기라면,
그후 열왕기에 오면 이제 백성들보다 왕을 중심으로, 왕이란 권력과 책임이 막중한 자리에서는 어떻게 하는가를 본 거다. 권력은 책임을 지키라고 주는 것인데 그렇게 한 왕은 거의 없었다. 그것이 열왕기이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그래서 바벨론 포로로 끝난다. 바벨론은 이스라엘 민족 정신에서 보자면 하나님과 약속을 맺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 유일한 택한 백성인 자기네가 하나님은 모르는 이방신을 믿는 나라에게 진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잡혀간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신 성전이 헐린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 그를 믿고 그에게 구하면 복을 받는다, 내 안녕이 지켜진다 하는 것이 산산조각이 나는 경험을 하는 것이 바벨론 포로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해서 바벨론 포로로 가서, 바벨론 포로는 다만 피난생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에 가서 뭘 배우느냐 하면, 전 세계의 최고의 권력 과 권세를 가진 나라, 그래서 열방이 모여 온 국제 도시화된 바벨론의 문화, 정신이 형편없다는 걸 배운다. 폭력밖에 없다는 것을 배운다.
모든 이방신들은 무력하다. 그 신을 수단과 근거로 내세워서 권력을 유지하는데 바쁠 뿐이다. 그 권력을 유지하는 건 언제나 폭력이다. 세상 역사는 그 이상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 신들이 폭력적이기보다, 모든 통치자들이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개인들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폭력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생생하게 보고 온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제사 제도는 무너지고 율법이 더 중요한 신앙의 중심적인 내용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 올 때쯤 돼서 보면 율법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경직된 것인가가 복음서에서 예수님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무엇 때문에 충돌하냐 하면, 율법이 긍정적인 데로 사람을 인도하지 못하고 정죄만 하고 있더라는 거다. 그렇지 않은가?
누가 뭘 잘못했다는 것으로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을 하지, 본인들이 뭘 더 해야 되는지, 어떻게 종자가 달라야 되는지는 율법으로는 모르더라는 거다.
그러니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제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았다라는 게 큰 게 아니라, 그의 가르침이 생생히 제자들에게 다시 조명이 되는 것이다. 그의 가르침들이. "내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가 (부활로 말미암아 다시 조명되는 것이 크다.)
우리는 세상에 무슨 많은 기술들을 가지고 있다. 세상 살아나가는 데는 처세술이라는 것도 있고, 또 자기 직장과 생업을 위해서 경영술이라는 것도 필요하고, 또 지식도 필요하고 하지마는,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보면 그 모든 것이 집합적으로 한 인격, 한 존재,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찾아오신 그 분 자체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 이건 우리로서는 상상이 잘 안 가고, 어떻게 적용해야 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보면 우리가 우리 생애 속에서 만나는 모든 일상 속에서 내가 아는 규칙, 내가 아는 규범을 내세워서 대화를 하면 싸움밖에 나는 게 없다.
누가 옳은가는 싸움이 나는데, 예수님이 하신 것 같이 도덕적으로 무슨 성품적으로 자비롭고 은혜롭고 멋있게 굴어라가 아니라, 실제로 보라. 예수님의 성육신은 우리의 처지, 우리의 자리, 우리의 무지에 와 계시는 거다. 그게 성육신이다. 우리를 거기다 보낸 거 아닌가?
■제일 많이 해야 되는 게 뭐냐 하면 상대방의 고집을 들어야 한다. 따라갈 필요는 없어도 들어야 한다. 그런데 논박하고 싸우느라고 아주 난리다.
■우리는 이 속에서 하나님이 일한다는 걸 믿고, 그래서 이 속에서 우리의 지위와 신분과 운명과 책임을 기억하고 감수하고 노력하는 자들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지금 어디로 가려고 그러나 보라.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이스라엘은 어디까지 갔다고? 바벨론 포로까지 갔다.
그 와중에 이 약속이 떨어지고 있다. 그런데 그 바벨론이 망한다. 망한다고 그러면 '거봐라. 내 너 그럴 때 벌 받을 줄 알았다.' 이런 얘기가 아니라,
■이런 폭력과 비극 절망이 전부인 아니, 사망이 끝인 이 세상에 하나님이 영생을 놓고 하나님이 여기에 의미와 보람과 영광과 명예를 담고 있다, 이게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다.
고린도전서 15:20 이하;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반드시 왕노릇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사망이란 뭐냐 하면 여기서 이런 거다. 사망은 뭐냐 하면 생명의 반대 말이다. 생명의 반대말이라는 건 모든 것이 헛될 수밖에 없는, 종국적으로 헛되고 거짓되고 부패되고 왜곡된 수밖에 없는, 사망이 왕 노릇을 하면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승리도 진정한 승리가 없고 어떤 가치도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이 세상에 없다.
그러나 그 사망이 주님 다시 오시기까지 왕노릇하는 그 컨텍스트 속에서 하나님이 생명이 원칙인 생명이 운명인 생명이 왕노릇하는 은혜가 왕노릇하는 나라를 만들고 계신다.
■왜 그런 시간을 가지느냐? 그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가 겪는 거다.
■생명과 사망 속에서 하나를 선택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이 사망과 어떻게 다르며 그 생명이 어떻게 사망이 가진 한계와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길인가를 알게 하는데 역사가 있고 각 개인의 인생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끝은 깨달음과 항복의 자리로 가는 것이지, 우리가 일찍 깨닫고 순종해서 복 받아서 평안히 살고 잘난 척하고 살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늘 고단하다. 아직 끝까지 안 갔으니까.
■그래서 왜 난 잘하는데도 보상이 없느냐 그렇게 말하는 건 어리석은 얘기이다.
계속 누구와 견주고 있냐 하면, 이 거짓된 것, 이 겁 주는 것, 가짜 앞에 우리가 서 있다. 바벨론 포로 같이. ■우리는 그 속에서, 이 고난을 이기면 결국 우리가 승리한다, 이딴 말로 그냥 넘어가지 말고,
■그 고난 그 위협이 나를, 나로 하여금 진리와 생명과, 저 거짓되고 저 수치스러운 것과 대비되는 어떤 분별, 어떤 결과로 나를 만들고 있다고 스스로를 이해해야 된다. 그것이 믿음이다.
■온 세상이 어떻게 되느냐에 관심 갖지 말고, 하나님이 내 안에 나 하나를 뭘 만들고 싶으냐? 내 인생과 나라는 존재가. 그리고 내가 왜 이 나라에 태어났고 왜 이 시대에 태어났고 왜 이 꼴이냐 하는 그 모든 것들이 들러리다, 그렇게 성경은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니 생각해 보라 로마서 12장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그때 제가 이렇게 해석했던 거 기억하는가? '선하게 굴어서 악을 감동시키려 하지 마라. 저것들이 악한 길을 갈 때 넌 선한 길을 가라.'
그게 뭔가? 그게 벤허 아닌가? 벤허에서 벤허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모두가 그 악당 메살라가 죽으면 결과가 나올 줄 알았다. 근데 그가 죽었는데 영화가 안 끝났잖은가? 뭐라 그랬나, 벤허가? 죽였는데 가슴에 칼이 없어지질 않았다. 부인이 뭐라고 벤허한테 항변했나? '당신이 메살라 같아요.' 어디서 답을 얻나? 예수님 십자가 보고. '그 말이 내 가슴에 있던 칼을 놓게 했어.' 뭐였다고?
■'아버지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이게 생명이다. 이게 영광이다. 이게 명예이다.
그러나 세상은 아니라고 그러는 거다. 그러니까 우린 어떻게 척 이기게 되겠는가?
타협하고 외면하고 변명하고 그 시간들을 갖는 거다.
■우리가 죽을 것 같고 우리가 버려진 것 같고 하나님이 나에게 관심을 안 두는 것 같은 시간들이 나로 하여금 '그럼 너는 이 세상이 하는 이걸로 내 답을 삼을 수 있어?'라고 계속 묻는 것이다.
하나님은 잠시도 하나님인 걸 중단하지 않는다. 모세가 하나님께 물어본 게 뭐였나? "네가 백성들에게 내려가면 누가 널 보냈냐고 물을 거다."
'하나님의 이름이 뭐예요?' 왜 물어봤다고? '하나님 도대체 일을 왜 이렇게 하세요?
내가 그때 하자고 40년 전에 외칠 땐 가만 계시다가 이제 80세나 돼 갖고 다 늙어 빠졌는데 뭘 하자는 거예요?'.
그러자 하나님이 뭐라고 그랬다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그랬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중단할 수 없는 하나님이다. 나는 내 열심을 양보하지 않는 하나님이니라." 그게 답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한탄과 우리의 처지를 몰라주는 게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최선이라고, 그 길을 걸어서 통과하라고 그렇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고린도전서 15:50 이하를 보면;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느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이게 무슨 말인지 이제 좀 이해가 가실 거다. 우리는 이 세상이 갖고 있는 최고의 명분이나 무슨 실력 같은 것으로는 여기 못 들어간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거듭나야 되는데, 그 거듭나는 것은 우리 인생 전체에 걸쳐서 생생하게 우리를 시간에 걸쳐서 만들어 갈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라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한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을 삼키고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니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율법이 우리를 잡는다. 율법은 우리를 잡아 먹는다. 우리를 죄인으로 우리를 사망으로 몬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이 율법이 우리에게 가하는 이 처절한 절망은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구하게 한다. 은혜로 은혜로 쫓아가게 한다, 목마른 사슴이 샘을 찾듯이 우리 모두가 우리 영혼의 갈증을 율법으로 인하여 내가 누구인지, 인생이 이럴 수는 없다,라는 그것이 주를 찾게 하고 생명으로 나가게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이렇게 나온다. 5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하노니"
예수로 인하여 이 생명이 이길 것이다. 이 절망과 자책 같은 것을 넘어서는, 사망과 율법이 만들어냈던 모든 것들을 넘어서는 일들이 우리의 생애에 걸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로라"
■어떻게 해야 된다고?
자신의 명예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선을 행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메살라에게 지지 말고. 그를 죽이는 것이 승리가 아니고 자기의 길을 가야 된다.
그래서 벤허는 할 일이 없었다. 벤허를 보면 벤허는 하는 일이 없고 메살라가 다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하고 죽는다. 그래서 그 드라마를 만들고 벤허를 만든다. 보복으로는 마음에 항복이 일어나지 않는다. 만족이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생애를 돌아보고 지금 하나님이 일하는 것에 우리가 마땅한 반응과 이해가 있는가? 우리의 신앙이 다만 아주 쉬운 것, 출석하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그렇게 어물어물 넘어가는 것 정도로는 안 된다. ■더 가야 된다.
■우리 생전에, 우리 생에, 우리가 알고 지내는 이웃들 앞에서 우리는 달라야 된다. 그것은 조건도 아니고 그것은 강요도 아니다. 우리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 속에.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 정도는 아니야.'를 우리는 자꾸 권세, 부, 어떤 실력, 재주 같은 것으로 때우면 되는 줄 알고 있어서 기껏 하는 게 불평밖에 없다.
'우리 목사님은 은혜가 없어' 뭐 이런 거다.'한국 교회는 사람들한테 욕 먹고 있는데 뭐 하고 있어?' 그딴 말 할 자격이 없다. 그런 말을 왜 하는가?
■우리 하나하나가 자기 인생을 책임져 한다.
한국 교회가 뭐 어쨌다고? 맘에 안 든다고? 놔두라. 우리가 심판할 필요 없잖은가?
그렇게 말하면 우리 인생에 답이 얻어지는가? 뭐가 얻어지는가?
■누구를 비난하고 누구를 정죄하는 것은 사망의 길에 들어가 있는 거다. 우리는 아무도 저주하거나 응징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문제이다.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런 말 하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시간과 인생을, 명예와 책임을》 생각지 않고, 그저 다만 시간을 흘려보내는 그런 인생으로 살지 않기를 바라서 오늘 말씀 잊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 일하고 계신다. 그 아들을 보내신 것 같이 그의 생애를 지키신 것 같이
《오늘 우리의 생애가 하나님의 크신 이름으로 그의 자녀로 부름 받고 있다.》
■그 명예로운 인생을 사는 그래서 기쁨과 기적을 나 자신의 생애와 존재 안에서 누리는 그 인생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