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인간과 인생의 복은 그의 영혼과 영생에 관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 여호와의 율법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에게 내려진 복이다

nazunzaro 2021. 9. 8. 05:48

[소망회 / 시편 1:1-6 / 2021.09.01]

- '복 있다'는 말은 수동태이다. 복은 받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 복은 만들지 못한다
- 하나님을 이미 알고 그 뜻을 살려고 애쓰는 우리가 얼마나 복된가를 알아야 된다
- 인간과 인생의 복은 그의 영혼과 영생에 관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 여호와의 율법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에게 내려진 복이다
-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전력을 다하시고 변함이 없으시며 모든 기적을 동원하신다. 여기에 신자들의 배짱이 있다
- 우리는 그 복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되어 매진하게 된다. 여호와의 율법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렇게 명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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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려움을 겪은, 벌써 2년째 어려움을 겪는 우리 현실에 대한 성경의 위로들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시편 1편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괴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면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의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하며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편)

이 시는 읽으면 물론 가장 먼저 들어오는 생각이 복된 인생을 살아야겠다, 악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하는, 우리 마음에 분별이 있다.
그러나 이 1편은 조금 더 들어가서, 복 있는 사람과 악인들을 구별하는데, '복 있다'는 것은 능동태일 수가 없다. 그것은 수동태이다.
복은 받는 것이지 복은 만들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그렇게 우리는 의역해서 읽을 수 있다.
물론 우리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시는데, 왜 우리의 인생이 고달픈가 그러면 이제 우리가 더 많은 얘기를, 더 깊은 얘기를 나누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은 결국 도덕적인 기준으로 나뉘지 않고 겉으로 보기엔 그래 보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쫓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온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물론 능동적인 결정이어야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 여호와의 율법을 기뻐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에게 내려진 복이다.

우리가 우리 인생에 절망하고 답이 없을 때 어느 인생이나 답이 없다는 것을 인생에서 여러 번 마주치게 되는데,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보호와 약속 속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는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며 따르며 즐거워할 수 있다.

악인들은 그들이 행한 일들이 물론 악하다는 것이 첫 번째 그들을 정죄하지만, 그들은 그때 답이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 둘을, 그러면 누구는 복을 하나님의 율법을 허락받고, 누구는 받지 못하는가, 이렇게 나누라고 이 시편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을 이미 알고 그 뜻을 살려고 애쓰는 우리가 얼마나 복된가를 알라고 써놓은 줄 알아야 된다.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이런 표현들은 복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과 인생의 복은 그의 영혼과 영생에 관한 문제요, 그 영생이란 죽어 없어지는 사망과 대조되는 끝없는 영광에 관한 것이다.
'악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뿌리가 없고, 목적을 향한 일관된 누적도 없다. 이게 대조이다.

우리가 이 코로나 시대를 살면서 결국 조급함 또 어떤 행운 그리고 또 어떤 분노 어떤 막막함들을 다 지나와서 이제쯤 되니까 배짱이 생기는 게 맞다.
우리는 자주 구원시대 때, '나는 오늘 죽어도 천국 갈 것을 믿어.' 이런 고백들을 나누곤 했다. 멋진 고백이다.
그러니까 얼마를 더 사느냐 하는 문제는 신자들에게는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이해의 문제이다. 신자는 오래 살면 오래 살아서 할 일이 있고, 일찍 부름을 받으면 일찍 부름을 받아서 더 좋은 이런 운명관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나를 더 살게 하시는 것은 나와 함께 더 하실 일이 있다. 나를 일찍 데리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일찍 보고 싶어 하신다, 천국에 간다, 그런, 이래도 저래도 우리에게는 사실은 절망도 그리고 걱정도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살다 보면 때가 끼어서 '오래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이 여러 유혹으로 다가오는데, 오래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이 제일 명분을 가지는 게 '자식들을 위하여' 라는 생각이 제일 많이 들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는 부모에게 받은 것이 많다고 물론 더 얘기해야 되지만 결국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고 내 인생에 함께하셨다'가 맞다.
부모가 주지 못한 것, 부모가 하지 못한 것, 하나님이 다 하셨다.
물론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입을 거 입지 않고 먹을 거 먹지 않고 희생하며 우리를 길렀고, 우리도 그렇게 우리 자식들을 길렀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하며 우리 인생을 명예롭게 하는 것은,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능력 밖의 문제다.
그것은 창조와 부활에 속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고, 내게 준 자녀들도 내가 지키고 돕고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적은 것이고, 가장 중요한 문제들은 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신자들의 배짱이 있다!
그게 왜 배짱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은 이 일에 대하여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복 주며, 우리를 지키며, 우리를 승리케 하며, 우리 입술에 찬송을 담으시는 일에 하나님은 전력을 다하신다. 변함이 없으시며, 최선을 다하시며, 모든 기적을 동원하신다.
그것이 우리가 이 코로나로 인한 이 어려운 현실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 아닌가 !

그 확인이 우리로 하여금 '오늘 죽어도 좋다, 나는 오늘 죽어도 천국 간다면 내가 오늘 죽어도 내 책임은 거기까지다, 내가 더 할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영원 무궁토록 우리의 힘이고 우리의 보호자이시다'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은 오늘 하루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여기 있는,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은, 아까 서두에 말씀을 드린 거 같이 수동태라고 했다. 복은 받는 것이지 만들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복을 받고 나면 우리는 능동태로 변한다.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복의 진정한 의미, 가치를 알게 되어 매진하게 된다.
여호와의 율법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렇게 명하시기 때문이다

폭력과 비난과 경쟁과 얼마나 다른가 보라.
우리는 모두에게 덕을 세우는 사람들인데, 그 덕은 우리가 우리를 추스로코 우리를 안심시키고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되게 하는 것을 '덕을 세운다' 그런다.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이런 말들로 괜찮은 사람이라 이러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증언할 것이 있는, 나누어 줄 것이 있는, 반가움과 기쁨과 소망과 진리와 생명에 있어서 우리는 덕을 세우는 자들이다.

그런 인생과 신앙에 대한 새삼스러운 깊은 이해가, 우리 이 코로나로 인하여 우리를 재정립하고 다시 하나님과의 약속과 진리와 생명과 길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일하심 위에, 그 반석 위에 우리를 새롭게 올려놓고 있다.

우리 남은 인생이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그 인생을 우리 이 코로나를 만나기 이전보다 더 진지하고 더 풍성하고 더 아름답고 더 놀라올 줄로 믿는다.

이런 인생을 살아내는, 기대하는, 우리의 나이와 조건과 상관없이, 저 말구유에 나신 주님, 골고다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 그가 거기서 온 세계와 역사와 운명을 바꾸시는, 복을 만드셨다는 사실로 자신의 생애를 복되게 마무리하는 귀한 신앙의 격려가 되기를 바란다.//

나이 많이 살도록 세상에서는 상처만 받았지만 하나님에게서는 모든 위로와 회복과 무엇보다 기쁨과 자랑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비하신 것은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고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하셨다.
그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제 깊은 신앙의 자리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영광과 명예를 아는 자로 마무리하고 계신다.
우리의 외적 환경이 어떻게 되는지는 2차적인 문제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재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충성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감사하며, 용감히 증인으로, 소망으로 우리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이 우리 모두 신앙과 고백과 결단으로부터, 하나님이 충만하신 은혜와 복을 나누시며, 세상을 구하시며, 우리에게 담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심을 찬송드린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