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성령충만`은 깨닫는 것이고, 연습하는 것이고, 훈련하는 것이고, 그래서 시간과 과정이 있는 것이다.

nazunzaro 2021. 9. 4. 16:27

[성화의 신비(2006)_14. 성령충만 ②]

I.
성경이 말하는 바 `성령충만`은 깨닫는 것이고, 연습하는 것이고, 훈련하는 것이고, 그래서 시간과 과정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령충만》을 향한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며 외면하시지도 않고 답하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가 기대하는 성령충만과 성경이 약속하는 성령충만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 에베소서 5:18에 등장하는 "성령충만을 받으라" 는 깨어 있을 것과 근신할 것과 분별할 것과 지혜로울 것과 세월을 아낄 것 등 이러한 요구들과 묶여 있는 것을 분명히 하여, 《이것을 연습하고 훈련할 때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고 성경식으로 성경의 증거들을 종합하여 이렇게 이해해야 할것이다.

이 본문에서 "성령충만을 받으라" 해놓고 뒤이어서
부부관계와,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상전과 종의 관계에 대하여, 에베소서 6:9까지 이어진다.
말하자면 이 성령충만을 위한 연습과 훈련이, 《우리 일상의 부부관계에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 그리고 상전과 종의 관계에서 그 훈련이 일어난다》고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일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령충만을 위하여 준비하시고 우리를 키우시는 방법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부부관계에서의 훈련:
부부란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관계이다. 그러나 우리가 결혼해 살면서 경험하다시피 부부 생활은 사랑과 신뢰보다는 훨씬 더 많이 불신과 불평으로 많은 세월을 보낸다.
이것을 '사랑과 신뢰로 가야 되고 그것이 신앙이다'라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되지도 않고, 기도한다고 해서 되지도 않는다.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서로가 《사랑과 신뢰에 대해서 실력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불평은 사실은 상대방에게 할 불평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해서 원해서 한 결혼이기 때문이다. 혹 돈에 팔려서 할 수 없이 한 결혼이라면 그 불평은 용서를 받을 수 있지만, 자기가 좋아서 해놓고 이제 와서 오리발을 내미는 것은 안 된다.
■우리는 다 서로 사랑했고 원했고 소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상대방 하나를 포용할 실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이것이 성령충만을 연습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내가 가진 진심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하나님께서 열납하여 보상으로 상주시기를 바라지 말고, 《우리가 가진 진심이 실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갈라디아서 2:20말씀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된다.
우리는 결혼할 때 진심을 가지고 하고 열정을 가지고 하지만, 《사랑이란 그것보다 더 많은 실력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일관되게 확인하는 것은 《진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마음을 가졌고 나의 의도가 이랬다 그것만으로는 되는 것이 아니다.
진심이란 자신의 의도의 순수성을 설명하는 것을 진심이라고 하지 않고, 《쌍방 간의 합의를 위한 정직하고 성의 있는 자세》를 진심이라고 한다. 《상대방과 합의를 보는 자세》이다.
나는 순수한 마음을 가졌으나 상대방이 배신을 때렸다 이렇게는 안 된다.
■우리가 가진 어떤 진심도 《상대방을 붙잡고 합의를 보아 함께 묶은 것, 즉 하나된 것을 성의를 다하여 동원할 때》 그것을 진심이라고 하고, 신앙이라고 한다.

※부모자식관계에서의 훈련
부부는 사랑과 신뢰에 관한 관계로서, 서로를 책임지고 확인하고, 그래서 《우리의 실력 없음을 확인》하듯이,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는 권위와 질서라는 개념 위에 서 있는 관계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힘으로 무슨 일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자식을 기르면서 배우게 된다》.
우리의 권위는 힘이 아니라 실력이 있어야 된다. 한 영혼과 인격을 항복시키는 데는 부모라는 힘이 있고 계급이 높다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고,
자녀의 입장에서는 사랑과 희생을 가지고 찾아온다고 해도 우리는 항복하지 않는 나쁜 놈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을 자식들은 다 안다. 그러나 자식들이 그것만으로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런데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부모가 말린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해서 말리는 것을 아는데도 자식은 그것을 지킬 실력이 없다. 나중에 부모가 되어서야 알게 된다.

이런 모든 일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성령충만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우리가 가진 것 속에, 우리의 실력 속에 쓸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상전과 종의 관계, 사회적 관계에서의 훈련
상전과 종의 관계는 환경과 조건의 문제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환경과 조건은 우리가 몸 담고 사는 환경을 말한다.
이 세상의 문화와 이 세상의 질서와 권세와 이 세상의 가치 이런 것들이 전부 다 우리에게 객관성은 갖지만, 힘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는 언제나 객관적이거나 진리를 원하지 않고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 다니면 아무 때나 건너는 사람이 꼴보기 싫고, 걸어가다 보면 아무 때나 달려드는 차가 꼴 보기 싫다. 우리가 해봐서 아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진보와 보수, 보수와 개혁 간의 갈등을 따져보면 개인적인 원한, 개인적인 이해관계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도 순수한 이념과 이상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진리를 원하지도 않고 공정함을 원하지도 않으며 정의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런 말들은 자기가 유리할 때만 쓰고, 불리할 때는 '다 그런거야' 라고 한다.

우리가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것은 거기에 이해관계가 없을 때 뿐이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공정하거나 관대한 것은 그것이 나와 상관없는 문제일 때 뿐이다. 그때는 우리가 공정하기 짝이 없고 정확하기 짝이 없는데, 그 이유는 역시 나에게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면서 이 세 가지 경우로 - 부부로, 부모와 자식으로, 사회의 질서와 계급 혹은 구조 속에 - 있다.
그 모든 것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는가 하면 《인간은 죄성에 의하여 반응한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고 있다.
감사해야 되고 모두의 유익을 위하여 있어야 할 어떤 관계, 어떤 조직, 어떤 질서, 어떤 개념도 ■우리가 죄성을 벗어나지 않는 한 아무것도 제대로 시행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우리는 당연히 절망을 느껴야 한다.
절망을 못 느끼면, '부부는 이렇게 하면 아무 문제없다' 라든지 '부모는 이렇게 하면 아무 문제 없어', '세상은 이렇게 하면 돼' 라는 답을 꺼내 놓는다. 서로 책임을 적당히 나누어서 아무 문제가 없다는 답을 제시하는데, 《문제는 정답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정답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II.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러 오셨다.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예수님은 정부(정권)를 뒤엎지 않고, 세상을 뒤엎지 않는다. 죄를 고치러 오셨다.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하신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환경과 조건을 개선하여 천국을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먼저 천국으로 만드신다.
그래서 뭐라고 하시는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가 되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그러면 너희 마음이 힘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9-30)

이 말씀은 짐을 지는 법을 가르치신다. 짐을 덜어주겠다가 아니라 《마음의 쉼》을 얻는다. 성령충만한 이 마음을 아는 것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한 성령충만에 대한 대답은 이것이다. 우리는 부부관계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상전과 종의 관계에서 사람이 사는 인생의 모든 정황 모든 사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셨던 것처럼 우리의 짐을 져야 한다.

그 짐은 우리가 상대방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자폭하고 싶고, 쉽게 어떤 결론을 요구하고 싶은 죄의 발작과 자폭을 집어던지고, 이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해답이 있다는 것을 《믿고 기다려 순종하는 마음으로 져야 할 짐을 지고 가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못난 것을 지고 가는 것이오, 상대방의 못난 것을 지고 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부부가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서로가 자기의 부족을 인정해야 한다.
인정하면 다시는 싸움이 없다고 그렇게는 생각하지 말라. 인정을 해도 못 참는 날이 있다. 그 인정하고 짐을 지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생기면, 그건 넘어가는 거다.
우리 많이 싸워봐서 아는데, 부부는 한쪽이 '으악!' 하거든 다른 한쪽이 맞대꾸를 안 해 주어야 되는 거다. 이것이 성령충만이다.
같이 부닥치면 그건 대책이 없다. 알겠는가? 한쪽이 '으악!' 하면 다른 한쪽은 잘못했다고, 졌다고 한 후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거다.
그때 '여보, 어젯밤 얘긴데~' 이러고 나오면 '으악!' 하고 항복을 하는 거다. 밤을 지나서 다시 싸우자고 하는 건 나쁜 버릇이다. 그러나 '으악!'의 시간을 넘어지나가는 건 대단히 지혜로운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자란 점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부부의 관계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사회에서,
이 세상에서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짐을 지고, 우리의 죄성을 상대방을 핑계하여 폭발시키는 것만 금하고 있으면 된다. 이것이 성령충만이다.
왜 그런가? 언제 행복한 부부가 되며, 언제 행복한 부모와 자식이 되며, 언제 행복한 세상이 되는가? 그걸 우리는 모르고 있다.
성경이 말하듯이 그런 모든 요구는 이런 중요한 약속이 위에 있다: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여 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죽게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럴 수 있도록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에베소서 5: 18-21)
이러한 중요한 약속 위에 이러한 모든 요구가 있는 것이다. 이러할 때 행복한 부모가 되며, 행복한 부모와 자식이 되며, 행복한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복종의 원리를 앞세워 성령충만의 훈련과 연습은 그뒤에 나오는데, 부부의 관계나, 부모와 자식의 관계나, 성전과 종의 관계이든 간에 《순종의 책임》이 먼저인 자를 앞세운다. 아내들이 남편보다 먼저 등장한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
'종들아, 상전에게 복종하라'
는 것이다.
이것은 더 먼저 해야 된다든가, 그들이 약자라든가, 더 큰 짐을 졌다든가 하는 개념이 아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복종》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안배(安配)》라는 것이다.
부부가 만나는 것, 부모와 자녀가 만나는 것, 우리가 어느 시대 어느 환경 속에 태어나느냐를 하나님께서 안배를 하셔서, 우리 모두의 유익과 성령의 충만을 위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지혜로우신 인도와 간섭의 현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피차 복종하라》는 것이다.
■너를 위하여 너의 완성을 위하여 이 사람을 너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너에게 허락한 구원의 가장 영광된 충만을 위하여 이 시대, 이 조건, 이 자리에 "내가 너를 세웠다"고 성경이 말씀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라를 불평하고 가문을 불평하고 누구를 불평하는 것이 제일 많다.
'누구라면 이가 갈린다..' 뭐, 이런 것은 할 수 있다. 그 말을 할 수는 있지만 제정신에 돌아왔을 때는 하면 안 된다. 그것은 신앙이 없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 손해 보도록 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전력을 기울이고 계시는 분이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을 안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성령충만에 대하여 전혀 잘못된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단 번에 하루아침에 모든 환경과 조건이 개선되고, 우리 마음에 오직 선한 생각만 나오고, 말도 안 되는 것은 나오지도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신앙의 발전은 《자신의 정체, 자신의 실체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아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으로서 죄가 얼마나 무섭게 자신 안에 자리 잡고 있느냐를 아는 것》으로부터만 출발한다.
그래서 더 많이 믿음을 동원하고,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만 있게 해달라고 비로소 기도하게 되고, 우리가 불평을 했을 때는 그것이 '자기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이것이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일상》이라는 사실이다.
부부 관계와, 부모와 자식 관계와, 세상 속에서 만나는 모든 일은, 우리 모든 사람의 《일상생활》이다. 누구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산 속에서 세상과 인연을 끊은 고립된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자꾸 기대를 한다.
아니다. 《죄는 우리 속에 있지》, 어느 도시와 어느 다른 개념 속에 들어 있지 않다. 《우리 속에 있다》.
그래서 우리가 도망을 감으로써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죄를 극복해야 된다》.

그 싸움을 우리는 매일 만나는 것이다. 매일 눈만 뜨면 만나는 것이 부부요, 자식이요, 부모요, 세상이다.
거기를 떠나서 어디를 갈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허락하신 모든 삶을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유익과 완성을 위하여 배려해 놓으시고 그 속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인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매일 응답하신다는 것을 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속에서, 깨우치고, 발전하고, 노력하고, 우리가 한 실수들로 인하여 성장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 사실들을 확인한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그 아들을 보내셔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그분의 부활과 함께 나를 새 생명으로 일으키시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한 순간, 어느 형편, 어느 장소, 어느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놓고 계시지 않으며, 내 기도에 응답하시며, 내가 구하지 않은 것까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열심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허락하신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에게 구하는 것보다 더 후히 주시고, 더 놀랍게 우리의 운명을 쥐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성경이 약속하는 성령충만이오, 우리 모두에게 허락된 구원이며 성도들의 완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분의 모든 자녀를 위하여 일하시는 열심과 성실하심에 대하여 분명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아울러 우리의 영안(영적 안목)이 뜨여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영원하심과 무한하신 사랑의 믿음 위에 굳게 서고 자랑하고 담대함을 얻어야 된다.
그리하여 자신에 대한 실패와 절망으로 무너지지 않는 믿음의 고귀하고 참다운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