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신앙을 승리하는 자보다 실패하는 자가 더 많다. 그 실패가 실패가 아니라는 거다. 우린 정말 죽어야 하고 누룩 같아야 하고 삼켜버린 바 된 것이 되어야 한다
nazunzaro
2021. 8. 16. 22:23
[시간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2011)_9. 삶의 현장을 담아내는 설교...]
- 우린 정말 죽어야 하고 누룩 같아야 하고 삼켜버린 바 된 것이 되어야 한다
-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의 현실은 늘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다.
- 우린 늘 걱정하고 고민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이런 것을 조심해야 한다, 준비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 현실을 보며 그런 현실 속에서 살아야 될 것이고, 밤낮 한숨 쉬고 걱정을 하는 게 우리의 주 임무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실패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이런 말이 안 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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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명분용이 아니라 삶과 실존의 문제이다.
신앙을 승리하는 자보다 실패하는 자가 더 많다.
■그 실패가 실패가 아니라는 거다. 우리가 볼 때 단순하고 피상적인 것도 꼭 실패가 아니고 잘못이 아니다. 이것이 성화의 신비이다.
우리가 다 사회적인 존재니까 사회의 도전 유혹 필요 이런 것 앞에서 사회의 질문에 답을 할 때 사회적인 답을 해야 한다.
신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답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사회나 문화라는 것을 외면할 수 없다.
거기서 비로소 심층의 자기 정체성을 추구하게 된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인간이란 존재란 뭐냐? 이런 질문이 사회와 문화 속에서 나오고, 그 답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찾으면 질문한 자에게 답을 해야 한다. 사회와 문화에 답을 해야 한다.
어디서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을 의존하는 태도에서 벗어나면, 우리가 말 가지고 아무리 덧칠을 해도 생명과 진리를 보장 못한다.
은혜는 진리를 추구한다. 은혜는 진리를 위해서 주어진다. ★진리는 언제나 은혜 위에 서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진리로 가면 은혜가 없어진다.
예수 안에만 구원이 있다. 예수님은 정죄하러 온 게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
그러니 진리를 갖고 있을 때 '저건 진리가 아니다'라는 것으로 진리를 지키는게 아니라, 은혜 위에서 진리를 가졌다는 걸 증언해야 된다.
예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오셔서 죽은 것 같이, ★진리를 가진 자가 은혜 위에 서 있는 것으로 존재해야 된다.
이 부분이 어렵다. 그걸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예수님같이 하자' 그렇게밖에 이야기를 못한다.
예수님이 어떻게 했느냐? 자신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했다.
그런데 다 도망간다. 예수님이 누군지 모르는 거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들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이 누구신지, 또 그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성령이 임하시면 그들이 증인이 될거 아닌가? ★그 결과를 위해서, 그 베푸실 은혜를 위해서 예수님이 오늘을 참으신 거다. ★그 참아야 된다는 건 타협이 아니다.
우리는 그 참는 부분을 못한다. 성육신의 기간이 없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사는 우리가 초대교회보다는 더 어렵지 않다는 어떤 사람의 글이 있다. 초대교회도 그랬다. 초대교회는 정치적으로도 핍박을 받았다. 국가 우상들이 있고 로마의 신들이 있고 또 가장 무섭게는 헬레니즘, 영지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웠나? 그 속에서 기독교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핍박을 어떻게 감수해야 되느냐, 거짓교사들을 경계해야 되느냐 하는 게 서신서에 내내 등장하지 않는가?
■그럼 어떻게 이겼는가? 은혜로 이겼다. 우리는 격려해야 하고 선포해야 하고 인내해야 하고 더 많이 은혜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신 은혜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는 이긴다고 믿는 거다.
★어린아이가 되고 소자가 되고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참 다르다. 높아지려고 하면 낮아지라고 하고 살려고 하면 죽으라고 한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해보면 그게 유일한 방법인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이 무슨 합리주의라든가 자연주의라는 것을 만든 것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공허함과 당황함이 빚어낸 허상이 그 근거일 것이다.
그러니 뭐, 자연주의나 합리주의를 공격할 게 아니라 하나님 없는 인간과 하나님 없는 세상에 대해서 빛이 어두움을 비추는 것 같이, 생수가 공급되어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 같이 유일한 답은 기독교에만 있다고 증언해야 할것이다.
언제나 싸움은 하나님을 모실 것이냐 말 것이냐의 싸움인 것 같다.
옛날에는 합리주의가 인간 이성을 앞세워서 하나님을 외면하게 만들었다면, 지금은 개인, 개인의 주권, 개인의 이기심으로 어쨌든 하나님을 부인하게 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누구신가, 얼마나 우리에게 필요한가를 성경대로 풀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책임일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선택할래, 하나님을 선택할래?' 그런 이야기가 늘 나온다.
그러나 기독교가 하나님을 선택해야 한다고 이야기할 때는, '자기를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다. 진정한 자신을 선택하고 싶거든 하나님을 선택해라' 그렇게 이야기 하는 거다.
세상 사람들과 우리하고는 동일한 환경 속에 있다. 그것을 신앙으로 담아내야 한다. 우리는 공적인 발언권을 갖게 된다.
그런데 그걸 못하고 있다. 우리가 개인적 차원에서는 신앙을 지키면서도 공적인 영역에서는 안 한다. 신우회는 만들어도 한 직장인으로서 정직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 위사람이 아랫사람들을 그리스도 사랑으로 돌보는 것, 이런 문제들은 아직 실천되지 않고 있다.
모든 영역과 시간을 하나님의 통치로 이해하고 그 속에서 우리의 신자된 책임을 다할 뿐 아니라, 아직 납득되지 않거나 아직 확실히 드러나지 않은 세상의 모습과 환경에 대해서 낙심하지 말고 신자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크고 신비함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것 중 하나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굉장히 간단하게 그리고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세상 전체를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이해하고 우리가 그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고 했을때 다가오는 오해 중 하나가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어 보인다는 거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신비하고 너무 커서 우리 눈으로 확인되지 아니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만 그 부분을 너무 급하게 요구하게 되면 구원의 감격이라든가 헌신이라든가 하다못해 세계관이라는 것까지도 너무 성급하게 확인하고 싶은 나머지 너무 간절해서 ■한 신자의 인생 내내 지속되는 인내로 연결되지 못하곤 한다.
■우린 정말 죽어야 하고 누룩 같아야 하고 삼켜버린 바 된 것이 되어야 한다
구원과 복음의 능력이라는 것도 천국 가는 정도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천국을 누리게 하는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게 한다.
현실은 늘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이 은혜로 승리케 하실것이다. 비관주의적 낙관론이다.
'우린 늘 걱정하고 고민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이런 것 조심해야 한다, 준비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현실을 보며 현실 속에서 살아야 될 것이고, 밤낮 한숨 쉬고 걱정을 하는 게 우리의 주 임무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실패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이런 말이 안 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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